All Chapters of 바람도 너, 눈물도 너: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시력을 회복한 다음 날, 윤채아는 남편에게 가장 먼저 이 희소식을 알리고 싶었다.남편 성우현을 구하려다 시력을 잃었던 3년이란 시간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웠다.성우현은 그녀를 극진히 대하고 사랑하지만, 그와 동시에 늘 깊은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거실로 내려가려던 찰나, 아래층에서 성우현의 동생 성우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채아는 반가운 마음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곧이어 이어진 대화에 웃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형, 진짜 제정신이야? 지은수가 귀국했다고 이렇게까지 이성을 놓아버릴 일이냐고? 형수님이 그렇게 오랫동안 옆에 있어 주셨는데 아무리 눈이 멀었다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지은수한테 너무 마음이 기울었잖아.”윤채아의 발걸음이 얼어붙었다.지은수 이름 석 자가 낯설지만은 않았다.성우현과 함께하기 전부터 그에게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의붓여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고 성우현은 이 여동생을 끔찍이 아낀다고 했다.심지어 한때 이들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성씨 가문에서 재빨리 여론을 종식하고 지은수를 치료 목적으로 해외에 보내버렸다.동생 성우빈의 말을 들은 성우현은 안색이 확 가라앉고 냉랭한 어투로 쏘아붙였다.“은수 심장이 약해서 자극받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내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돼.”“그렇다고 아예 집에 들어와 살게 하는 건 아니지! 형수님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야?”윤채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며칠 전부터 3층 방을 분주하게 청소하던 가정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대체 누구를 위한 거냐 물어도 다들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했었는데...윤채아는 가슴이 조여왔다.다음 순간, 그녀는 가장 듣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장 진실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형수님을 대체품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형 때문에 눈까지 멀게 해놓고 이게 형이 할 짓이야? 아무리 지은수를 사랑한다 해도 이건 선을 넘었어.”성우현이 미간을 구기며 대꾸하려던 찰나, 위층에서 촤르륵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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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성우현은 여전히 지은수의 손을 꼭 잡고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질책은커녕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대했다.이어서 윤채아를 향해 무심코 한 마디 내던졌다.“인사해, 이쪽은 지은수야. 외국에서 몇 년 지내다 와서 말이 좀 거칠 수 있으니 네가 이해해.”윤채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나직이 물었다.“아, 너랑 부적절한 관계라던 그 소문의 의붓여동생 말하는 거야?”“채아야!”성우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어졌다.하지만 그는 끝내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내뱉었다.“딴 사람들 말은 믿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은수 심장이 안 좋아서 수술하려고 돌아온 거야. 새언니로서 좀 더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런 근거 없는 소문이나 믿지 말고! 아줌마!”그는 곧장 가정부 변미진을 쏘아보며 냉혹하게 명령했다.“일 똑바로 하세요! 채아 눈이 안 보여서 딴사람 만날 일도 없겠지만 또다시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듣게 한다면 그땐 각오해요!”변미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말을 마친 성우현은 더는 눈길조차 안 주고 지은수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식탁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별안간 변미진이 비명을 질렀다.“사모님, 왜 울고 계세요? 의사 선생님이 눈 회복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절대 울지 말라고 하셨잖아요...”윤채아는 휴지를 집어 들고 눈물을 닦아냈지만, 어느덧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아줌마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변미진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번졌다. 그녀는 이 별장에서 오래 일해온지라 성우현과 지은수의 관계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안주인인 윤채아에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성우현이 3층에 지은수만을 위한 방을 따로 꾸며놓았다는 사실도 윤채아에겐 철저히 함구했다.그녀의 처지가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어쩌겠는가? 재벌가 남자들이 밖에서 딴살림을 차리는 건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인 것을.“사모님, 사실 도련님은 그래도 사모님을...”변미진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윤채아가 쏘아오는 시선을 느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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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성우현의 의붓여동생 지은수가 귀국했어.”...이나연은 지난 이틀간 벌어진 일을 모두 전해 듣고는 치를 떨었다.“X발! 네가 목숨 걸고 그 인간 구하다 눈까지 멀었을 때, 평생 잘해주겠다고 맹세한 게 누군데! 이거 완전 쓰레기 아니야? 이래서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돼. 당장 짐 싸.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일단 우리 집에서 지내.”윤채아와 이나연은 보육원 시절부터 친자매보다 더 각별하게 자라온 사이였다.이나연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왔다.황급히 달려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 이나연을 마주한 순간, 윤채아의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서러움이 둑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이나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우선 윤채아의 눈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모아 가슴을 쓸어내렸다.이나연이 곁에서 함께 짐을 싸주니 윤채아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망설임마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사실 이나연은 사랑에 눈이 멀어 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제일 혐오했다. 윤채아는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서주는 친구의 진심을 이제 더 이상 저버릴 수 없었다.성우현이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이 결혼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짐을 가득 들고 내려오는 윤채아를 보자 가정부 변미진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이게 대체 다 뭐예요?”서재에서 인기척을 느낀 성우현도 문밖을 나섰다.“왜 그래, 채아야?”윤채아는 고개를 살짝 들고 몇 미터나 떨어진 거리임에도 정확히 이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이건 절대 눈먼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제스처였다.성우현은 미간을 구기고 의아함을 품었지만, 곧장 그녀의 손에 쥔 캐리어에 시선을 빼앗겼다.남자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한편 윤채아는 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혼 합의서는 안방 탁자 위에 두었어. 재산 분할에 대해 이의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성우현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너 예전에 안 이랬잖아. 왜 이렇게 막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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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복도에 놓여 있던 조화 장식이 툭 하고 쓰러졌다. 그 소리에 윤채아는 멍하니 넋을 잃었다가 문득 성우현과 막 결혼했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그가 출장을 떠난 사이, 윤채아는 실수로 별장에 있던 수억 원대의 골동품 화병을 깨뜨렸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성우현의 아버지는 아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그 벌로 그녀를 방에 가두어 버렸다.사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히는 건 그다지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눈이 멀어버린 이후로 윤채아의 세상은 어차피 늘 캄캄한 암흑뿐이었으니까.하지만 소식을 들은 성우현은 그 길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밤새 날아와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부서질 듯 꽉 끌어안았다.“앞으로는 아버지가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해!”윤채아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익숙한 체취를 맡으니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비록 앞이 안 보여도 이 남자가 자신을 짐스러워할 거란 의심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그의 사랑과 아낌을 온몸으로 느낀 첫 순간이었다.“물건 따위 깨지면 어때? 네가 안 다치면 그만이야. 다시는 내 눈앞에서 다치는 꼴 못 봐!”사고 당일, 성우현을 구하느라 그녀의 새하얀 원피스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흘러내리는 핏물과 함께 윤채아의 목숨도 점점 위태로워졌다.성우현이 가진 힘과 인맥을 총동원해 남주시 최고의 의료진을 수소문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그때 차가운 주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윤채아는 믿었다. 그 사고가 둘 사이의 가장 큰 시련이자 마지막 고비라고.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애초에 그녀는 대체품에 불과했다.사고 당시 성우현이 보였던 극심한 당혹감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바로 옆에서 그를 사랑해주는 윤채아일까 아니면 해외에 있는 지은수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상상했던 것일까?...다음 날 오후, 윤채아는 안과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검사가 끝난 후, 의사는 그녀에게 다시 안약을 점안하고 안대를 씌워주며 후유증을 남기지 않도록 하루 이틀 정도는 빛을 피하라고 당부했다.병실을 나선 윤채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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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날 밤.성우현이 귀가해 샤워를 마쳤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흰 가운을 걸친 그의 윗몸으로는 탄탄한 복근이 비쳤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 좋은 기색이 역력했다.침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스위치를 올리고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는 찰나, 그는 텅 빈 침대를 마주해야 했다.순간 성우현의 입가에 얼음장 같은 냉기가 맴돌았다....객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던 윤채아는 누군가 강제로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곧이어 성우현의 확대된 얼굴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서늘하고 음울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성우현은 화들짝 놀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이 남자가 느닷없이 객실 불을 켜자 잠결에 안대를 하고 있지 않던 윤채아의 눈은 갑작스러운 빛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시야는 온통 희뿌연 안개에 갇힌 듯 흐릿해졌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성우현의 분노를 생생하게 감지했다.결혼 생활 3년 동안 둘은 거의 다툰 적이 없었다. 윤채아는 워낙 성격이 유해서 남편의 분노가 느껴지면 늘 먼저 달래주곤 했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 지쳤고 잠 좀 자고 싶었다.윤채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성우현은 그 자리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다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저번에 룸에서 있었던 일로 화난 거 알아. 다음엔 그런 소리 못 하게 애들 잘 단속할게.”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냉소와 짜증이 가득했다.시력을 되찾은 윤채아의 눈에 그 비열한 얼굴이 똑똑히 들어왔다.“벌써 3년이야, 우현아. 정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 바로잡았겠지.”성우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이혼해.”윤채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이혼 서류에 서명하고...”“꿈 깨. 나 없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앞도 못 보면서!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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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윤채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어 택시를 잡아 성씨 저택을 떠났다.다만 그녀는 이나연의 집 대신 이원대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구했다.그사이 성우현에게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이틀간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눈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제야 성우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이혼 얘기를 꺼냈다.오늘 아침 이원대로 향하기 전, 윤채아는 습관처럼 성우현과의 대화창을 열어 보았으나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날의 전화 외에는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이원대학교 생명과학연구원.윤채아는 임 교수님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가 자신을 마중 나올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한정빈은 그녀를 보자마자 반색했다.“선배, 진짜 시력 회복하신 거예요? 며칠 전에 교수님께 말씀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는데...”윤채아는 머쓱했다. 3년간 학업을 중단한 사이 한정빈은 어느덧 임지호 교수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선배’라는 호칭이 영 어색할 따름이었다.그러나 그녀의 고민을 들은 한정빈은 시무룩한 얼굴로 투덜거렸다.“안 돼요! 제가 처음 연구실 들어왔을 때 교수님이 선배한테 저를 맡기셨어요. 누가 뭐래도 저한테는 선배이세요!”윤채아는 빙긋 웃었다.“교수님은 연구실에 계셔?”“아뇨, 안 계세요!”한정빈이 흥분 조로 말을 이었다.“아직 모르셨죠? 며칠 전에 우리 연구실에 엄청난 거물급 인사가 수십억 원을 후원하면서 학생 한 명을 교수님 밑으로 들이려고 했어요. 그분들 마침 오늘 오셨는데 비주얼이 기가 막혔어요. 교수님은 아마 응접실에서 그분들을 맞이하고 계실 거예요.”한정빈은 말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 후원받아 온 여학생이 선배랑 좀 닮긴 했는데... 그래도 선배가 훨씬 예쁘세요! 이름이 뭐였더라... 지은수라고 했나?”윤채아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소매 안으로 주먹을 꽉 쥐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날 지경이었다.“선배, 왜 그러세요? 채아 선배?”“아, 아니야 아무것도.”윤채아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주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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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어쩌면 진짜 연인일지도 모르지.”“네?”윤채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아침 회의가 끝나고 임지호는 윤채아에게 실험 프로젝트를 하나 맡겼다.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그때, 성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내일 집에 들어와. 아버지 생신이야.”성준석의 생일은 매년 대규모 잔치였다. 성씨 가문과 피 한 방울이라도 섞인 친척들은 물론 수많은 어린것들까지 모두 모여들었다.눈이 멀었던 지난 3년간 윤채아는 그 어린것들이나 성우현의 사촌 동생들에게 놀림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아이들의 악의는 늘 노골적이고 거침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성우현이 곤란해할까 봐 한 번도 그에게 이런 사정을 말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우현도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윤채아는 한때 수영장에 밀쳐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성우현이 겨우 그녀를 물 밖으로 끌어냈을 때 위로의 말을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았었다.예전에는 눈이 멀고 마음마저 어두워져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되새겨보니 헛웃음밖에 안 났다.수영장이 연회장에서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그곳까지 가게 되었는지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 따돌림을 당하든 모욕을 겪든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겠지.“...”휴대폰 너머에서 성우현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내 말 안 들려?”“듣고 있어.”윤채아의 말투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안 가.”뚝! 성우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곁에 있던 지은수는 그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속에 윤채아를 향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장님 주제에 아무리 자신이 대체품인 걸 알게 됐어도 마땅히 성우현을 놓치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했어야지.대체품치고 수법이 꽤 고단수였다.그런 식으로 나오면 성우현이 자신을 싫어하고 깔보게 될 거라는 걸 간파했으니 ‘잡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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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으악!”지은수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그 소리에 성우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는 본능적으로 윤채아의 반응을 살피려 했다.눈은 보이지 않더라도 지은수의 비명을 들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할지 몹시 신경이 쓰였다.하지만 지은수의 신음이 너무 고통스럽게 들려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초조하게 물었다.“은수야? 또 심장 아파서 그래?”바로 그때, 윤채아가 자리를 떠났다.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도 윤채아가 나가자마자 서둘러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아이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으로 도망쳤다.사촌오빠 성우현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호되게 혼날 게 뻔하니까.마침 옆방에 있던 성우빈이 밖으로 나왔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형, 그렇게 지은수 사랑하는 거면 형수님이랑 빨리 이혼하고 보상이라도 제대로 해드려.”성우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이혼은 절대 해줄 생각이 없었다.윤채아는 앞이 안 보여서 그를 떠날 수 없다.게다가 설령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다 한들 이런 장면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윤채아는 절대 그에게 이혼을 요구할 리가 없다.적어도 성우현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한편 윤채아는 비틀거리며 겨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화려한 파티의 열기는 그녀의 처지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뒤를 쫓아오던 여자아이가 나쁜 궁리를 하는 듯 눈알을 굴리면서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저리 가! 썩 떨어지라고.”한 번도 본 적 없는 새언니의 사나운 모습에 아이는 멈칫했다.윤채아는 서둘러 빈 휴게실을 찾아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주저앉았다.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젖히는 순간, 책상 위에 놓인 앨범들이 눈에 들어왔다.안개처럼 뿌연 시야였지만 앨범 속 사진들은 선명하게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참아왔던 통곡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앨범 속엔 3년 전 성우현의 모습이 가득했다.그 옆엔 늘 지은수가 있었다.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고 더 깊숙이 밀착한 채 찍은 사진들까지...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난날의 기록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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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성우현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을 때, 지은수는 미처 본론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윤채아가 갑자기 지은수를 물속으로 밀쳐 버렸다.“야, 너!”곧이어 윤채아도 물에 뛰어들었다.이 광경을 본 성우현은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지은수는 물에 잠기며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혹여나 3년 동안 저 대역과 지내면서 성우현의 마음이 변했을까 봐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하지만 성우현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두세 번 첨벙거리더니 바로 그녀를 물 밖으로 건져 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우현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역력했다.“너 대체 왜 그래! 심장도 안 좋고 수영도 못하는 애가!”지은수는 흐느끼며 그의 품에 기댔다.얇은 드레스가 물에 젖어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녀는 솔직히 조금 두려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안도감에 사로잡혔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오빠... 새언니가 물에 뛰어들라고 강요했어요. 안 그러면 밀어버린다고... 오빠가 언니를 먼저 구할 거라면서 윽박질렀는데 역시 저부터 구했네요. 오빠 마음속에 여전히 제가 있을 줄 알았어요.”그녀의 나른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자 성우현의 멈췄던 머릿속에서 불현듯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는 호흡이 멎을 것만 같았다.“채아야...”윤채아가 아직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당장 구해야 할 사람은 그녀인데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그녀는 성우현 때문에 눈이 멀었고 예전에 다른 사람에게 밀쳐져 물에 빠졌던 트라우마 때문에 물이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했다.그런데 방금 성우현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어떻게 머릿속에서 윤채아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었을까?처음부터 거짓된 사랑을 연기하며 그녀를 쫓아다닌 것은 바로 성우현이었다.설령 그녀가 지금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지은수에게 따진다 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윤채아는 애초에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성우현은 숨을 헐떡이며 속눈썹이 미친 듯이 떨렸다. 품에 안겨 서럽게 울고 있는 지은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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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윤채아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성씨 저택에서 나왔다.택시도 부르지 않고 저택의 기사도 부르지 않았다.성씨 저택은 부유층 거주 지역이라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그녀는 말없이 길거리를 걸었다.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는데 죄다 성우현이 보낸 메시지였다.답장을 안 하면 전화까지 걸어대는 이 남자, 윤채아는 끊이지 않는 휴대폰 벨 소리를 들을 뿐 받지도, 차단하지도 않았다.지금 자신이 어떤 심정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만약 성우현이 당장이라도 지은수와 선을 긋겠다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할까?윤채아는 창백한 입술을 깨물며 씁쓸하게 웃었다.그녀는 성우현을 정말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했었다.그래서 방금도 용서해줄 거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말았다.이 남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지은수와 더는 얽히지 않겠다고 해준다면야...그런데 정말 그럴까? 성우현이 정말 개과천선할 수 있을까?포기를 모르고 연달아 걸려오는 전화, 윤채아는 심호흡하고 마침내 통화를 연결했다.휴대폰 너머로 성우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어디야 지금?”“용건 있어?”“일단 내 말 좀 들어, 채아야. 은수가 내 동생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그토록 끈질긴 매달림 끝에 고작 이런 말이나 내뱉을 줄이야.“그래서?”“성씨 가문 사모님의 본분을 지켜. 자꾸 투정 부리지 말고. 위치 찍어. 기사 보낼 테니까.”윤채아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날 대체품으로 이용했다는 건 끝까지 인정 안 하겠단 거네?”“말했잖아. 은수랑은 평범한 남매 사이라니까.”윤채아는 이미 그들의 뜨거웠던 연애 시절 사진들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코끝이 찡했다.이런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할 따름이었다.결혼한 지 3년이나 됐으면 이 남자를 충분히 파악했어야 했는데 아직도 그의 사과나 후회를 기대하고 있다니.게다가 지난 3년간 기만당해온 이 마음은 또 누가 보상해 주는 걸까?“내 말 안 들려? 당장 위치 보내라고.”윤채아는 성우현에게 무척 감사했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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