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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자몽
성우현은 여전히 지은수의 손을 꼭 잡고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질책은커녕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대했다.

이어서 윤채아를 향해 무심코 한 마디 내던졌다.

“인사해, 이쪽은 지은수야. 외국에서 몇 년 지내다 와서 말이 좀 거칠 수 있으니 네가 이해해.”

윤채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나직이 물었다.

“아, 너랑 부적절한 관계라던 그 소문의 의붓여동생 말하는 거야?”

“채아야!”

성우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내뱉었다.

“딴 사람들 말은 믿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은수 심장이 안 좋아서 수술하려고 돌아온 거야. 새언니로서 좀 더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런 근거 없는 소문이나 믿지 말고! 아줌마!”

그는 곧장 가정부 변미진을 쏘아보며 냉혹하게 명령했다.

“일 똑바로 하세요! 채아 눈이 안 보여서 딴사람 만날 일도 없겠지만 또다시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듣게 한다면 그땐 각오해요!”

변미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성우현은 더는 눈길조차 안 주고 지은수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식탁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별안간 변미진이 비명을 질렀다.

“사모님, 왜 울고 계세요? 의사 선생님이 눈 회복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절대 울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윤채아는 휴지를 집어 들고 눈물을 닦아냈지만, 어느덧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아줌마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변미진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번졌다. 그녀는 이 별장에서 오래 일해온지라 성우현과 지은수의 관계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안주인인 윤채아에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성우현이 3층에 지은수만을 위한 방을 따로 꾸며놓았다는 사실도 윤채아에겐 철저히 함구했다.

그녀의 처지가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어쩌겠는가? 재벌가 남자들이 밖에서 딴살림을 차리는 건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인 것을.

“사모님, 사실 도련님은 그래도 사모님을...”

변미진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윤채아가 쏘아오는 시선을 느끼고 말았다.

눈물은 닦아냈지만, 눈빛에 서린 짙은 고통은 감출 수 없었다.

변미진은 결국 양심에 걸리는 위로의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날 밤, 윤채아는 저녁을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침실로 올라가던 길에 마침 아래로 내려오던 성우현과 마주쳤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올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윤채아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계속 위로 올라갔다.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무리 앞이 안 보여도 이 별장은 손금 보듯 훤했다. 눈을 감고도 어디든 가뿐히 이동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성우현이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알아갈 생각조차 안 했다.

윤채아가 아랑곳하지 않으니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두세 걸음에 다가와 윤채아의 손목을 낚아채며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지금 나랑 기 싸움 하자는 거야?”

윤채아는 침묵했다. 그녀가 대꾸하지 않으니 성우현은 기분이 좀 풀렸는지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제 3층은 은수가 쓸 거야. 아직 정리 안 된 짐이 많으니 위층에 올라가지 마. 부딪히기라도 하면 위험하잖아.”

윤채아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그녀가 머무는 2층과 달리 3층은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곳은 필시 성우현과 그의 의붓여동생이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온 은신처였을 것이다.

설령 잡동사니가 굴러다녔다 한들 그가 벌써 말끔하게 치웠겠지.

윤채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과 자기혐오가 섞인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이 텅 빈 눈빛은 예전 앞을 보지 못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3년이나 앞을 보지 못했던 윤채아에게 장님 행세는 이제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성우현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 역겨움, 또 혹은 그저 생기를 잃은 두 눈동자가 지겨워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눈도 전에는 분명 밝게 빛났었다...

윤채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니 아니면 ‘장님’인 내가 지은수를 괴롭힐까 봐 두려운 거니?”

성우현이 미간을 확 구겼다.

그녀의 입에서 이토록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온 건 처음이니까. 스스로 ‘장님’이라고 할 줄이야.

몇 초간의 정적 끝에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성우현이 막 자세히 들여다보려던 순간, 위층에서 불현듯 지은수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악!”

성우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황급히 발을 떼려고 하는데 윤채아가 새하얀 손으로 소매 끝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울먹이는 조로 말했다.

“아직... 대답 안 했잖아.”

성우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는 꼭 마치 만반의 준비를 다 한 사람처럼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말투에도 절망과 함께 마지막 도박을 건 사람 특유의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시력을 회복했다면 넌 혹시...”

성우현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매정하게 손을 뿌리치며 착잡한 어투로 말했다.

“나중에 얘기해! 은수 심장이 안 좋아서 혼자 두면 안 돼!”

얼마나 지났을까?

윤채아는 허공을 향해 뻗었던 딱딱하게 굳은 오른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너덜너덜해진 심장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

깊은 밤, 침대에 누운 윤채아는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등 뒤에서 남자가 눕는 인기척이 느껴졌고 여느 때처럼 그녀를 품에 안으려 했다.

다만 그녀는 몸을 뒤척여 이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성우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강제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남자의 몸에서 은은하게 배어 나는 여자 향수 냄새... 윤채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심장이 쿡쿡 쑤시듯이 아팠다.

“아까 계단에서 하려던 말이 뭐야?”

3년 동안 성우현은 늘 이렇게 다정한 말투로 그녀와 대화했다.

하지만 이미 시력을 되찾은 윤채아는 이 남자의 표정을 빤히 보게 되었다.

지은수와 함께할 때의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무덤덤한,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무관심뿐이었다.

3년 내내 눈이 멀지만 않았어도 애정 따위 없는 이 남자의 마음을 진작 알아챘을 텐데...

윤채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까먹었어. 자자 그만.”

다음 날 아침, 성우현은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났다.

사실 윤채아는 그가 매일같이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고 종일 회사에만 머무는 일상에 진작 익숙해졌다.

다만 이번에는 성우현이 침실을 나서자 그녀도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을 열었더니 뜻밖에도 새로운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그 메일은 국내 생명공학계의 권위자이신 임지호 교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윤채아는 과거 임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학원생으로 특히 생명 약품 연구에 몰두했었다.

어젯밤, 그녀는 교수님께 다시 한번 연구실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었다. 물론 늦은 답장이나 거절을 예상하고 있었다.

시력을 잃으며 3년간의 학업 공백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으니까.

하지만 교수님은 곧바로 그녀에게 연구실 초대장을 보내왔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당장이라도 대학원에 나와 연구를 재개할 수 있다는 따뜻한 허락이었다.

윤채아는 떨리는 가슴으로 답장을 보낸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성우현은 회사에 가지 않고 식탁에 앉아 지은수와 다정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끈적할 정도로 지은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토록 뜨거웠던 3년 전의 연애 시절에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저토록 깊고 애틋한 눈빛!

윤채아는 위층에 서서 휴대폰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들이 아침을 비우는 내내 남매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이미 찢겨 나간 심장의 구멍 사이로 다시금 찬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감각조차 무뎌질 만큼 지독하게 아팠다.

침실로 돌아온 윤채아는 방금 녹화한 두 남녀의 애틋한 영상을 저장하고 절친 이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연아, 나 이만 이혼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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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윤채아는 숙취로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 쥐며 어렴풋이 눈을 떴다.정신을 차리기도 전, 옷장 앞에서 정장 넥타이를 고르고 있는 성우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돌아왔다.“깼어?”성우현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나름 기분이 좋은가 보다.“일어나서 이것 좀 골라봐. 오늘 어떤 넥타이가 어울릴까?”시력을 잃기 전, 윤채아는 늘 그의 출근길을 도우며 넥타이를 골라주곤 했다.성우현은 이제 그녀가 시력을 회복했으니 다시 예전처럼 아내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하지만 그

  • 바람도 너, 눈물도 너   제11화

    한정빈이 떠나는 쪽을 바라보며 성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그가 부른 ‘선배’라는 호칭, 그 목소리까지 왜 이토록 윤채아를 연상시키는 걸까?아무래도 착각이겠지.어제 그녀가 얄짤 없이 자신을 차단해 버린 일로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목소리가 좀 비슷하다고 해서 바로 그녀를 떠올리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윤채아 따위가 무슨 학문을 연구한단 말인가?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제대로 된 학벌 하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성우현은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 아는 거라곤 아내가 보육원 출

  • 바람도 너, 눈물도 너   제10화

    윤채아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성씨 저택에서 나왔다.택시도 부르지 않고 저택의 기사도 부르지 않았다.성씨 저택은 부유층 거주 지역이라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그녀는 말없이 길거리를 걸었다.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는데 죄다 성우현이 보낸 메시지였다.답장을 안 하면 전화까지 걸어대는 이 남자, 윤채아는 끊이지 않는 휴대폰 벨 소리를 들을 뿐 받지도, 차단하지도 않았다.지금 자신이 어떤 심정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만약 성우현이 당장이라도 지은수와 선을 긋겠다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할까?윤채아는 창백한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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