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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作者: 자몽
“성우현의 의붓여동생 지은수가 귀국했어.”

...

이나연은 지난 이틀간 벌어진 일을 모두 전해 듣고는 치를 떨었다.

“X발! 네가 목숨 걸고 그 인간 구하다 눈까지 멀었을 때, 평생 잘해주겠다고 맹세한 게 누군데! 이거 완전 쓰레기 아니야? 이래서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돼. 당장 짐 싸.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일단 우리 집에서 지내.”

윤채아와 이나연은 보육원 시절부터 친자매보다 더 각별하게 자라온 사이였다.

이나연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왔다.

황급히 달려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 이나연을 마주한 순간, 윤채아의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서러움이 둑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나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우선 윤채아의 눈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모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나연이 곁에서 함께 짐을 싸주니 윤채아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망설임마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사실 이나연은 사랑에 눈이 멀어 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제일 혐오했다. 윤채아는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서주는 친구의 진심을 이제 더 이상 저버릴 수 없었다.

성우현이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이 결혼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짐을 가득 들고 내려오는 윤채아를 보자 가정부 변미진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다급히 물었다.

“사모님! 이게 대체 다 뭐예요?”

서재에서 인기척을 느낀 성우현도 문밖을 나섰다.

“왜 그래, 채아야?”

윤채아는 고개를 살짝 들고 몇 미터나 떨어진 거리임에도 정확히 이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이건 절대 눈먼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제스처였다.

성우현은 미간을 구기고 의아함을 품었지만, 곧장 그녀의 손에 쥔 캐리어에 시선을 빼앗겼다.

남자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한편 윤채아는 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혼 합의서는 안방 탁자 위에 두었어. 재산 분할에 대해 이의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성우현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너 예전에 안 이랬잖아. 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무슨 일이에요?”

문득 가녀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은수가 언제 나왔는지 구경거리라도 난 듯한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상황 파악이 안 된 척 시치미를 뗐다.

윤채아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

“그러게. 전엔 나도 몰랐거든. 너한테 이렇게 친밀한 여동생이 있을 줄은.”

지은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혹시 제가 새언니를 장님이라고 해서 화난 걸까요?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다들 그렇게 말하길래 저도 그냥 따라 했을 뿐이에요.”

“가지가지 하네, 여우 같은 년이!”

옆에서 참다못한 이나연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지은수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다정하고 순수한’ 가면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이때 성우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아야, 지금 여기서 나가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윤채아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남자는 누구보다 잘 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앞이 안 보이고 고아 출신이라 성우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는 여자를 어르고 달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버릇을 들이면 버릇대로 더 심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윤채아를 달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녀가 울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다만 윤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이나연의 손을 꼭 잡은 채,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그 순간, 성우현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녀의 반항에 대한 분노였다.

혹시나 앞이 안 보여서 어디 부딪힐까 염려한 성우현은 본능적으로 쫓아가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지은수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오빠... 새언니 진짜 화났어요?”

성우현이 머뭇거리는 사이, 윤채아는 허리를 곧게 펴고 후회는커녕 뭔가 큰 결심을 내린 듯 결연하게 떠나갔다.

이에 남자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내버려 둬.”

지은수는 옅은 미소를 띤 채 그의 등 뒤로 더욱 밀착하며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오빠 곁에 있을 거예요...”

성우현은 그녀의 이런 친밀한 행동이 익숙한 듯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

이나연의 집으로 옮긴 뒤, 윤채아는 시력을 회복한 기념으로 저녁은 베프와 함께 외식하러 나갔다.

식사 도중, 윤채아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열려 있는 다른 방문 틈으로 안쪽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성우현이 한눈에 들어왔다.

올 블랙의 코트 차림, 오뚝한 콧날과 짙은 눈매는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귀티가 났다.

룸 안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다.

“채아가 진짜 이혼하겠대? 고작 은수가 귀국한 것 때문에?”

지은수는 성우현의 곁에 딱 붙어서 마치 그의 품에 기댈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런 짓궂은 농담에도 웃음을 띠며 짐짓 화난 척 능청을 떨었다.

“그런 말 마세요.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오해 사기 딱 좋잖아요.”

“두 사람 예전 일 이 바닥에서 누가 몰라?”

남자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낄낄거렸다. 성우현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남자는 더 기세등등해져서 아첨하듯 덧붙였다.

“게다가 너도 윤채아 얼굴 봤을 거 아냐? 우현이 마음 뻔한데 뭘 숨겨?”

성우현은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는 곧 묵인이나 다름없었다.

지은수는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채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삼켰다.

눈시울이 서서히 빨개지고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성우현을 수년간 좋아했다. 이제 모든 진실을 알았고 이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벗어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이토록 고통스러운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아, 맞다. 채아 눈이 안 보인다고 하던데 다행히 드디어 이사 갔네. 우현이는 이런 귀찮은 일 딱 질색이잖아. 그동안 참고 산 것도 용하지.”

“그러게 말이야. 우현이 때문에 눈먼 것만 아니었으면 누가 걔를 형수님으로 대하겠어?”

뭇사람들은 취기가 오르니 혀가 슬슬 풀리고 제멋대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우현이 너도 그래. 그 장님이랑 왜 하필 결혼까지 간 거야? 구해주긴 했다지만 돈 좀 쥐여주고 보내버리면 그만이잖아.”

문득 성우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맞아! 너 없으면 윤채아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은수랑 비교가 안 되지. 몸이 좀 불편해서 수업을 자주 못 나가긴 해도 생물학 전공으로는 수재 소리 듣잖아.”

“그나저나 채아 어디까지 나왔어? 대학은 물 건너갔겠지?”

“듣자니 부모도 없다던데 누가 등록금 대주냐? 중학교 자퇴하고 알바나 뛰었겠지. 하하...”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채아 그거 눈이 멀어도 운은 좋아.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꿈도 못 꿀 삶을 누렸잖아. 별장 사는 재벌가 사모님 소리도 들어보고 말이야.”

“그러게! 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채 가시지 않은 와중에 윤채아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성우현을 빤히 응시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남자를 보던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픽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누군가는 들었다. 순식간에 서로 눈치를 살피는 기류가 흘렀고 시끌벅적하던 룸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금세 정적에 휩싸였다.

윤채아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우현아, 너랑 네 친구들 다 최악이야. 역겨워서 구역질 난다고!”

“뭐라고?”

성우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는 분노가 서린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애들 틀린 말 했어? 네가 나 없이 뭘 할 수 있는데? 지금도 내 일정을 알아내서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얌전히 사과하고 앞으론 더 이상 소란 피우거나 사고 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계속 내 옆에 있게 해줄게. 성씨 가문 사모님 노릇 계속할 수 있다고!”

비록 그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성우현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윤채아의 두 눈에서 짙게 번져 나오는 복잡한 감정을 보았다. 실망 같기도 하고 고통 같기도 하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 그 어떤 사랑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치 무언가가 이제 곧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성우현은 차가운 얼굴로 그런 착각 따위는 애써 외면했다.

그가 원한 건 윤채아의 굴복이었다. 더는 거스르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매달려 고분고분하게 제 곁을 지키는 순종적인 사모님. 그게 성우현이 바라는 전부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미련 없이 떠나가 버리는 윤채아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길에 복도에 놓인 물건에 부딪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룸 안에는 윤채아의 눈을 비아냥대며 비웃으려던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녀가 성우현에게 너무나도 면박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이 남자의 표정을 본 순간, 아무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성우현은 멀어지는 윤채아의 뒷모습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눈가에는 분노가 들끓었지만, 표정만큼은 두꺼운 얼음장이 덮인 듯 차갑고 음침할 따름이었다.

그 기세에 눌린 지은수는 옆에 앉아 있다가 몸을 움츠렸다. 분위기를 틈타 나긋하게 위로라도 건네볼까 싶었지만, 성우현의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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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수를 자신의 두 눈으로 보게 된 이후에도 성우빈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끊임없이 성우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지은수가 잠에 든 걸 확인한 뒤 성우현은 휴대폰을 꺼내 윤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윤채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잠시 머뭇거리던 성우현이 다시 전화를 해보려는데 지은수가 잠에서 깼다.성우현은 곧바로 휴대폰을 껐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윤채아의 앞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 문이 서서히 열리며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표정의 강해준이 내렸다.강해준은 윤채아보다 더 놀란 듯 보였다.“아니, 멀리서 보니까 누가 혼자 서 있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또 너였어?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지?”검은색 정장을 입은 강해준은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윤채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타.”강해준은 덤덤한 목소리로 배려하듯 말했다.“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이지. 마침 길도 겹치니까 집까지 태워줄게.”운전하던 기사는 그 말을 듣고 뒤를 힐끗 바라봤다. 기사의 표정이 상당히 미묘했다.윤채아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계속 우연히 마주치는 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심지어 강해준과 마주칠 때마다 윤채아는 늘 초라하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차에 탄 후 친구 이나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우리 대표님이 방금 또 갑자기 업무 지시를 하셔서 새벽까지 야근해야 할 것 같아.][택시는 잡았어?][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집까지 태워준대.]이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다행이네. 그러면 나는 일하러 가볼게. 다음에 우리 대표님 사진 몰래 찍어서 보내줄게. 진짜 엄청 잘생겼어. 사진 보면 성우현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을걸?]대표는 아주 잠깐 얼굴만 비추고 업무를 지시한 뒤 급히 떠났다. 이나연은 대표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윤채아가 하루빨리 성우현을 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뭐가 그렇게 웃겨?”강해준은 윤채

  • 바람도 너, 눈물도 너   제17화

    지은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성우현에게 또 한 번 뽀뽀한 뒤 서류들을 챙겨서 떠났다.그날 밤, 성우현은 또다시 홀로 게스트룸에서 잠을 잤다.새벽쯤 잠결에 눈을 뜬 성우현은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윤채아의 이름을 불렀다가 뒤늦게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성우현은 윤채아가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면 윤채아를 달래주지 않을 생각이었다.‘내가 버릇을 잘못 들였다니까.’성우현은 윤채아가 생각을 정리한 뒤 먼저 자신을 찾아와 화해를 청하는 날을 기다릴 것이다....한편 윤채아는 이미 잠에서 깼다.아랫

  • 바람도 너, 눈물도 너   제16화

    저녁.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윤채아는 성우현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체적인 성우현은 거리낌없는 눈빛으로 윤채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윤채아는 볼이 살짝 붉었고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예쁜 몸매는 흰색 가운 아래 감춰져 있었다.윤채아는 성우현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리며 성우현의 존재를 무시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곧 성우현의 숨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성우현은 한 손으로 윤채아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짚고 고개를 숙여 윤채아

  • 바람도 너, 눈물도 너   제15화

    하지만 윤채아와 이혼하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성우현이 윤채아와 이혼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오빠, 그 여자랑 이혼하면 안 돼요?”“그만하라니까!”왠지 모르게 이혼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성우현은 짜증과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삼키던 성우현은 마침내 이유를 찾아냈다.‘그래. 지난 3년 동안 윤채아는 내 아내로서 충분히 나를 사랑해 주었고 최선을 다해 나를 챙겨줬어. 심지어 나 때문에 3년 동안 시력을 잃었잖아. 우연히 시력을 되찾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 앞을 보지 못했을 거

  • 바람도 너, 눈물도 너   제14화

    성우현이 성큼성큼 다가와 윤채아를 거칠게 밀어냈다.성우현은 지은수가 매우 걱정되었는지 윤채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그 탓에 윤채아는 테이블 모서리에 아랫배를 세게 부딪치게 되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성우현은 지은수를 안아서 들어 올렸고, 성우현의 품에 안긴 지은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우현 오빠... 저 너무 무서워요. 저 또 해외로 쫓겨나고 싶지 않아요...”“걱정하지 마. 그럴 리 없어.”성우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아주 빠르게 말했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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