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혁에겐 이제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가슴속은 시커멓게 타버린 구멍만 휑하니 남았을 뿐이었다. 권력의 최정상에 우뚝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는 돌연 이 모든 삶에 깊은 회의와 피로를 느꼈다.그는 제 명의로 된 모든 천문학적인 자산을 서이나에게 양도했다. 부디 그녀가 평생 돈 걱정 없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그리고 비서에게도 거액의 퇴직금을 안겨주며 조기 퇴직을 명했다.익숙한 방 안의 풍경을 둘러보던 그의 뇌리에 또다시 서이나의 잔상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하얀 등에 남겨져 있던 참혹한 상처가, 그녀가 자기를 바라보던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 가시처럼 박혀왔다.그제야 하지혁은 깨달았다. 오직 자신만이 아직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그는 셔츠를 거칠게 벗어 던지고 매질을 가할 회초리를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제 등을 향해 스스로 채찍질을 시작했다. 한 번 칠 때마다 살점을 도려내듯 온 힘을 다해 휘두르니, 얼마 안 가 그의 등은 시뻘건 피떡이 되어 처참하게 짓이겨졌다.“꼬맹아, 미안해.”“꼬맹아, 사랑해.”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가학하며 서이나에게 용서를 구했다.서이나가 없는 도시에서 하지혁은 단 하루도 숨 쉬며 버틸 수 없었다.만신창이가 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는 길을 나섰다. 과거 서이나와 마주 손잡고 걸었던 그 아련한 골목들을 다시 한번씩 밟아가며, 지난날의 부서진 아름다운 추억 조각들을 가만히 훔쳐 담았다.한편, 멀리 신도라에 훌륭하게 정착한 서이나는 개인 작업실을 열어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그녀의 바이올린은 제이가 구해다 준 것인데, 손에 아주 잘 맞았다.감사의 표시로, 그녀는 제이에게 고급 손목시계 하나를 선물했다.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저 한량인 줄로만 알았던 제이는 한때 해주를 호령하던 명문 성씨 가문의 금쪽같은 후계자였다. 당시 성씨 가문은 하씨 가문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세를 쥐고 있었으나, 돌연 해외 이민을 결정하며 모든 기반과 자산을 국외로 이전했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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