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81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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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우리가 손을 놓기 전의 풍경

이른 아침, 유리는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창가에 서 있었다.서늘한 유리창에 손을 얹고 차가운 온기를 느끼며 그 안쪽에 잠들어 있는 이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는 평온하게 자고 있었지만 그 평온함 속엔 지쳐 있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요즘 들어 그가 부쩍 말이 줄었고그 줄어든 말 속엔 많은 감정들이 이미 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유리는 느끼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걸 그에게 말하지 않고 있는지 알았다.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젠 말해봤자 바뀌는 게 없을 거란 생각.그 침묵 속에서 유리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이 사랑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조심스럽게 자각하고 있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카페로 향했다.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기보다,단지 집 안에 머무는 것이 그에게 더 불편을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그는 그녀의 산책을 막지 않았다.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었다.“기분 전환 잘 하고 와요. 춥게 입고 나가지 말고요.”그 다정한 말은 어딘가 너무도 자동화된 문장처럼 들렸고그 다정함이 전해주는 체온보다 이제는 거리감이 더 먼저 느껴졌다.카페에 앉아 유리는 커피 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아무 것도 쓰지 않은 노트북,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책,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오늘도 혼자세요?”그는 어제의 남자였다.자신을 묻지 않고 자신에게 스며들려 하지 않으면서도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하는 사람.“네.”유리는 짧게 대답했다.“그게… 어울리는 날도 있죠.”그는 쓸쓸하게 웃었다.“혼자 있는 게 어울리는 날이라니… 좀 슬픈 말이네요.”“하지만 편하잖아요. 어울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웃고 싶지 않을 땐 그냥 조용하면 되니까.”그 말이 요즘 그녀의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누군가에게 어울리려 애쓰는 것보다,차라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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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의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아침

그날 아침, 유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파리의 겨울 아침은 유난히 빛이 얕았고 그 빛 아래에서 그녀의 실루엣은 어딘가 조금 더 멀어 보였다.이현은 문틈 사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숨소리를 죽이고 서 있었다.유리의 일정은 말하지 않아도 늘 명확했기에 그녀가 갑작스레 아무런 언급도 없이 나간 일이그에게는 사소하지만 선명한 파문처럼 남았다.핸드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고, 식탁에는 흔히 보이던 그녀의 메모도 없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아무 이유 없이 그의 아침에서 빠져 있었다.그날 오전, 이현은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머릿속에서 자꾸만 유리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가 아침에 보여준, 조금은 덜 잠긴 눈빛과 잊은 듯 한 미소.그 미소가 최근 자주 보던 그 남자의 표정과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을 건드렸다.물론, 유리는 변하지 않았다.변한 것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런 변명도 없이스스로의 시간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듯한 모습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의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당혹을 느꼈다.오후가 되어 유리는 돌아왔다.그녀의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고 눈가에는 조금은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길 가다 너무 예쁜 꽃이 있어서… 당신 좋아하는 색이길래.”그녀는 말하며 꽃을 식탁 위에 놓았다.이현은 어색하지 않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녀의 손끝에 남아 있는 외부의 공기,그것은 늘 그랬던 일상의 일부였지만 오늘만큼은 낯설게 느껴졌다.그는 조용히 물었다.“누구랑 갔어요?”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응? 그냥 혼자 걷다가 봤어요.”그 말은 자연스러웠고 그 표정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녀의 ‘혼자’라는 단어가 그를 더 멀게 만들었다.저녁이 되자, 이현은 평소보다 먼저 식사를 준비했다.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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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우리가 마주보지 않게 된 이유

창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리의 겨울비는 조용했고,그 조용함은 마치 방 안의 공기처럼 무겁고도 눅눅했다.유리는 작은 창가에 기대 앉아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굴렸다.잔 속의 홍차는 아직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이 더 이상 그녀의 손끝까지 닿지는 않았다.이현은 맞은편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말을 걸까 망설였고, 한 발자국 다가설까 생각했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녀가 침묵 속에 머물러 있을 때 건드리지 않는 것이 배려라고 믿어왔다.하지만 그 배려가 이제는 관심 없는 사람의 태도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유리 씨, 오늘 오후엔 뭐해요?”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창밖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말했다.“그냥… 카페나 다녀오려고요. 책 좀 읽고.”“같이 갈까요?”그의 제안은 자연스럽고 조심스러웠지만 유리는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혼자 다녀올게요. 요즘 당신, 많이 피곤해 보이니까.”그 말에 담긴 온기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이현은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나 그 말이 어디까지가 배려이고어디부터가 거리두기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고 슬펐다.“그래요… 다녀와요.”그는 그렇게 대답했다.그 말은 허락이라기보단 자신이 더는 붙잡을 수 없다는 스스로를 향한 체념처럼 들렸다.카페에서 유리는 책을 펼쳤지만 페이지는 몇 장 넘기지 못했다.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이현의 얼굴, 그의 말투, 그의 웃음.그 모든 것이 여전히 익숙하고, 어쩌면 여전히 좋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녀는 점점 그를 마주 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고 있었다.그가 다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의 다정함은 너무 조심스러웠고,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그녀를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이현은 집에서 혼자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유리가 좋아하던 그린 샐러드, 구운 가지를 올린 파스타,그리고 레몬드레싱을 가볍게 뿌린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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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가장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날

늦은 오후, 유리는 혼자 바람이 흐르는 센 강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찬 기운이 살짝 내려앉은 강변의 공기는 어딘가 감정을 정리하게 만드는 무뚝뚝하고도 평화로운 냄새를 품고 있었다.그녀는 길게 목도리를 여미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해가 기울어가는 방향으로 마치 그 끝에 무언가가 있을 것처럼 자꾸만 시선이 끌렸다.그리고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조유리 씨?”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어제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그리고 그보다 며칠 전부터 자주 시야 끝자락에 스며들던 한국인 남자였다.그는 놀란 듯 다가오며 어색하게 웃음을 띠었다.“이 근처 사시나 봐요?”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표정에는 놀라움보다 묘한 낯익음이 먼저 번지고 있었다.“네, 근처에 살아요. 여긴 자주 걸으세요?”“네. 혼자 있는 게 익숙해서요. 여긴… 이상하게 조용해서 좋더라고요.”그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이 조용한 풍경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위로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혹시, 커피 한 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 시간에 괜히 말 걸었다면 미안하고요…”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유리는 망설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좋아요. 저도 오늘은 말하고 싶던 날이었어요.”그들은 근처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낮은 조도의 조용한 공간, 창가 자리엔 낙엽 그림자가 어른거렸다.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이름 대신 표정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그는 말이 많지 않았고 유리는 말 대신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이 도시에 오래 있었어요?”“몇 달 됐어요. 파리는… 혼자 있기에 참 알맞은 도시라서요.”그의 말에 유리는 조용히 웃었다.“맞아요. 혼자 있어도 풍경이 너무 꽉 차 있으니까. 비어 있다는 기분이 덜하죠.”“그래도… 가끔, 너무 조용한 날은 마음이 더 시끄러워져요.”그 말은 유리의 가슴을 조용히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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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말해지지 않은 것들 사이

파리의 아침은 유난히 천천히 밝아졌다.이현은 유리보다 먼저 깨어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빛은 부드럽게 방 안을 감쌌지만 그 따뜻함이 그들의 사이를 덥히기엔 무언가 더디고 조심스러웠다.옆자리엔 유리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그러나 이현은 그녀가 잠든 얼굴조차 더 이상 오롯이 믿을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어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그저 우연한 인연이었을까.’‘혹은, 그녀가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던 이유였을까.’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를 의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미세한 거짓이 자신을 얼마나 멀리 두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유리는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그리고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현을 바라봤다.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평온이 오히려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어젯밤의 침묵,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자신 역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조용한 시간은 그 어느 날보다 숨이 막혔다.그녀는 알아차리고 있었다.무언가가 틀어졌고, 그 틈이 지금 둘 사이에 서서히 침묵의 벽을 쌓고 있다는 것을.아침 식사 시간, 식탁 위엔 따뜻한 오믈렛과 신선한 과일,구운 바게트와 고소한 커피 향이 흘렀다.그러나 음식보다 더 진하게 테이블을 채운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었다.“오늘… 일정은 어때요?”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리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오전엔 도서관 좀 다녀오려 해요. 요즘 책이 잘 읽혀서…”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이현은 그 대답에서 어딘가 정리된 감정을 느꼈다.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하루를 자세히 나눠 말하지 않았다.“그래요. 책 읽는 거… 좋죠.”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식지 않은 커피처럼 쓴맛이 맴돌았다.도서관에 도착한 유리는 책을 펼쳤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문장 위로 겹쳐지는 어젯밤의 카페 창가,그 남자의 조용한 눈빛, 그리고 이현의 무심한 침묵.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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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말 한마디가 어려운 이유

유리는 아침을 준비하며 냄비 속으로 고요히 퍼지는 수프의 향을 맡았다.파르르 끓어오르는 자작한 야채 국물은마치 오래전, 이현이 처음 그녀의 식당을 찾았을 때 내어주던 그것과 닮아 있었다.그때의 그는 까다로웠고, 냄새에도, 맛에도 날카로운 기준을 세우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내어놓는 음식에도 그 어떤 평가도 남기지 않았다.식탁 위, 그녀는 조용히 국을 따르고 구운 빵을 놓았다.이현은 오늘도 늘 그렇듯, 정확한 시간에 나와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두 사람의 아침은 오히려 그 정갈함 속에 더 깊은 정적을 품고 있었다.“맛있네요.”이현이 조심스레 말했다.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너무 가벼웠고 너무 늦었다.유리는 짧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하다는 말조차 생략한 반응은사실 그녀도 모르게 삐걱거리는 마음의 소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 이현은 주방 정리를 돕겠다고 했지만 유리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됐어요. 제가 금방 할게요.”“같이 해도 되는데…”“괜찮아요. 괜히 정신만 산만해져요.”그녀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속엔 미세한 단절의 기류가 숨어 있었다.이현은 그것을 느꼈지만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대신 뒤돌아서며 속으로만 되뇌었다.‘이제는… 내가 설 자리가 없는 부엌이 되어버렸구나.’그날 오후, 유리는 마트에 다녀오겠다며 외출을 준비했다.얇은 코트에 스카프를 둘렀고, 자그마한 장바구니를 들었다.이현은 그녀가 현관 앞에 서자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같이 갈까요?”유리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그냥 혼자 걷고 싶어요. 요즘 답답한 기분이라 바람 좀 쐬려고요.”그 말에 이현은 작게 숨을 삼켰다.그녀의 미소는 분명 부드러웠지만그 부드러움은 자신을 멀리 밀어내는 방식의 일종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그래요. 다녀와요.”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너무도 조용히 들어야만 했다.유리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찬 공기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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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작은 기차는 파리에서 멀지 않은 근교 마을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창밖에는 안개에 젖은 들판과 초록이 가득한 나무들이 이어졌고,기차 안의 사람들은 각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이현과 유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대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기차 유리창에 비친 서로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돌리길 반복하는 시간.그들이 오가는 말은 적었고, 함께 바라보는 것은 풍경뿐이었다.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바람이 자주 스치는 높은 언덕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가득했다.유리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고 이현은 그녀의 반 걸음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골목길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고 붉은 지붕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어느 카페 앞에 멈춰선 유리는 이현을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여기… 예쁘네요.”그 목소리는 오래간만에 들은 조금 부드러운 음색이었다.이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잠깐 앉을까요?”테라스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앞엔 따뜻한 홍차와 레몬 케이크가 놓였다.유리는 조용히 컵을 들어 입을 적셨고, 이현은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요.”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응… 그래도 공기가 좋네요. 이상하게 마음이 좀 정리되는 것 같기도 하고…”그녀의 말에 담긴 여운을 이현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삼켰다.‘정리.’그 단어는 그에게 무겁고 낯선 예감처럼 느껴졌다.오후가 되어, 두 사람은 마을 언덕 위 전망대로 향했다.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파노라마처럼 넓고 고요했다.이현은 가방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내 풍경을 몇 장 찍었다.그리고 조심스럽게 유리를 향해 렌즈를 돌렸다.그녀는 잔잔한 눈으로 멀리 언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햇살이 그녀의 볼에 조용히 닿았고, 그 순간의 유리는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멀게만 느껴졌다.찰칵~이현은 소리를 내지 않게 셔터를 눌렀다.그녀의 눈빛과, 바람에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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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당신이 모르는 내가 되어가고 있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파리의 하늘은 흐림이었다.한낮임에도 짙은 구름이 지붕 위를 덮고 있었고, 바람은 창문 틈새로 싸늘하게 스며들었다.유리는 식탁 앞에 앉아 조용히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풀었다.이현은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머그컵 안에 차오르는 진한 향이 은근하게 주방을 채우고 있었다.“따뜻한 거 마실래요?”이현이 물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조심스럽게 잔을 건넸다.따뜻한 도자기 잔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을 때, 그녀는 묘하게도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지금 이 순간, 이현은 너무 익숙한 사람인데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이현은 노트북을 펼쳐 업무 메일을 정리하고 있었다.그의 이마 위엔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화면 속 숫자들과 보고서 사이를 오가는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깊고 바빴다.유리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문득 눈을 떼었다.그의 옆얼굴. 그토록 오래 바라봐 온 얼굴이었는데,지금은 알 수 없는 장벽 너머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이 사람은 나에게 어디까지 보여주고 있는 걸까.’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표정 하나, 시선 하나를 분석하고 있었다.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속에서도그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하루 종일 가슴 어딘가를 찔렀다.오후시간, 그녀는 혼자 카페로 향했다.낮은 구름 아래에서 유리는 길가 작은 화단에 피어 있는 연분홍색 제라늄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그 꽃은 멀리서 보면 연약해 보이지만, 바람을 오래 견뎌낸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녀는 그 순간, 자신도 저렇게 겉으론 괜찮은 척 서 있지만안에서는 수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파리 초입에서 마주쳤던 그 관광객 남자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그의 말투, 그의 무심한 다정함, 그리고 오래 앉아 있던 테이블 위의 정적까지.그 모든 것이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선 어딘가 따뜻한 바람이 났다.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감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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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우리가 다시 손을 잡는다면

그날 오후, 파리의 하늘은 유난히 투명했다.이현은 느지막한 아침을 지나 거실 창문을 열었다.햇살이 길게 드리우고, 창틀 위에 올려둔 라벤더 화분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유리를 불렀다.이전처럼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오히려 낮고 담담하게, 어딘가 떨리는 마음을 꾹 누른 채마치 물가의 얇은 돌을 던지는 아이처럼 가볍게, 그러나 간절하게.“유리 씨… 우리 오늘,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유리는 고개를 들었다.침실 안엔 그가 불러낸 작은 울림만이 잔향처럼 맴돌고 있었다.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레이스 커튼을 부드럽게 흔들었고,그 아래 유리는 잠시 멈춰 서서 작은 숨을 들이쉬었다.“네. 조금 이따 나갈게요.”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닫히는 문 틈새에서 이현은 조용히 한 발 물러났다.카페처럼 꾸며놓은 주방 한켠,그들이 가장 자주 마주 앉던 작은 원형 테이블에 이현은 잔 두 개와 레몬 민트티를 준비해놓았다.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는 어딘가 아련한 기시감을 남겼다.잠시 후, 유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회색 니트에 머리를 반쯤 묶은 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그 순간, 이현은 그녀를 보고 싶었지만 쉽게 눈을 맞추지 못했다.“고마워요, 나와줘서.”그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유리는 작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이런 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이현이 말을 이어갔다.“요즘 우리, 뭔가…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아요.”유리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그 말은 어쩌면 그녀가 수없이 가슴속으로 반복했던 것이었기에 그토록 낯설지 않게 들렸다.“맞아요. 어긋나고 있죠.”그녀의 말은 짧고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안엔 작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이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는 주먹을 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말을 이었다.“나는요… 지금이라도 우리가 서로를 다시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뭘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진심이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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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파리는 생각보다 좁으니까요

파리의 오후는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웠다.세느강을 따라 걸으며 유리는 가볍게 목도리를 고쳐 맸다.그녀의 손끝엔 따뜻한 라떼가 담긴 종이컵이 들려 있었고, 바람은 잔잔하게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지금 이 길은 이현 없이, 혼자 걷는 유리만의 길이었다.그녀는 마음 깊은 곳이 조용히 뻐근한 채로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달래는 습관적인 발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작은 골목 끝, 햇살이 드리운 회색 건물의 낮은 문턱 앞.그곳에 자리한 조용한 로스터리 카페 하나가 유리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바닥은 조용히 울렸고, 나무 의자와 흰 벽 사이로 따뜻한 커피 향이 퍼지고 있었다.카운터 앞에 선 순간,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혹시… 우리가 어딘가에서 본 적 있나요?”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낯설면서도 어딘가 기억 저편에 걸려 있던 얼굴이었다.그는 여행 가방을 옆에 두고 있었고, 베이지 코트에 짧게 정리된 머리, 단정하고 무심한 듯한 말투.그 순간 기억의 조각이 파르르 떠올랐다.며칠 전, 루브르 앞의 분주한 골목에서 사진을 찍다 그녀에게 길을 묻던 남자.그러나 그날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고, 이름도, 말 한 마디도 없었다.“그때… 루브르 앞에서…”유리는 무심하게 웃었다.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머금었다.“맞다. 맞아요. 그때는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여기서 또 보네요.”그들은 자연스럽게 창가 쪽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저는 민우라고 해요. 한민우.”그의 소개는 간단하고 어딘가 투명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유리입니다.”“여행 중이세요?”“아니요. 살고 있어요. 여기, 잠깐 머무는 중이에요.”그녀의 말에 민우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와, 진짜요? 파리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저도요. 이런 식의 만남은… 드물잖아요.”그들은 웃었고, 그 웃음 사이로 어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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