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었다.햇살은 오늘따라 무척 투명했고,따뜻하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냉기가 덜한 부드러운 공기가 유리창을 타고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주방 한편, 낡은 수납장 서랍을 정리하던 그녀는 무심코 한 권의 노트를 꺼내 들었다.진회색 가죽 커버의 작고 두꺼운 수첩.그녀가 서울을 떠나올 때 버리지 못하고 함께 싸왔던 것 중 하나였다.‘언젠가 다시 꺼내야지’생각만 하다가 차마 펼치지 못했던 노트였다.조심스럽게 펼친 첫 장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2020년 3월 14일 마늘 3알, 양파 반 개, 올리브유 1큰술, 소금 약간 첫 파스타 소스, 실패. 너무 짰다.”그 글씨를 보는 순간 유리는 웃음이 나왔다.당시엔 참 심각하게도 요리를 하나하나 기록했었구나, 싶었다.장 하나, 또 하나를 넘길수록 그녀는 놀라운 감각으로 그 시절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냈다.어느 날은 반복된 실패에 짜증이 가득 배어 있었고,어느 날은 직장 상사의 말 한마디에 그날의 수프까지 짜게 되어버린 기록이 있었다.그리고, 어느 페이지에선 멈춰섰다.“오늘은 그냥 국 끓였다. 맛도, 냄새도, 기억도 없는 날. 그런 날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짧은 문장. 그러나 그 한 줄이 그녀의 가슴을 조용히 두드렸다.그날이 언제였는지도 잊고 있었지만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녀는 그날의 공기까지 고스란히 떠올렸다.어느 봄날, 창밖에선 벚꽃이 피고 있었지만 유리는 단 한 송이의 꽃잎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회사의 실적 압박, 좁은 방에 홀로 남겨진 감정,멀어져만 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그녀는 음식조차 무미건조하게 끓여낼 수밖에 없었다.‘그런 날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그 말은 어쩌면 그녀가 자신에게 건넨 작은 위로였는지도 모른다.지금의 유리가, 그날의 유리를 껴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노트를 조심스레 덮었다.그리고 오늘의 메뉴를 적기 위해 새 종이를 꺼냈다.그 위에는 이상하게도 그날의 감정이 조금 묻어나기 시작했다.“오늘은 따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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