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91 - Chapter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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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사랑이 끝나는 가장 조용한 방식

그날 저녁, 유리는 집 현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파리의 해는 느리게 지고 있었고, 회색 골목 끝 하늘은 은은하게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바람은 낮보다 차가웠고, 그녀의 손끝은 종일 쥐고 있던 종이봉투의 열기로 어딘가 낯설게 따뜻했다.그 안에는 민우가 건넨 작은 빵집의 크루아상이 들어 있었다.기념품처럼, 혹은 아무 의도도 없는 손끝의 예의처럼, 그는 고맙다며 자연스럽게 건넸다.유리는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오늘 있었던 그 조용한 대화. 그 어떤 진심도 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귀퉁이가 희미하게 간질거렸다.그것은 죄책감이라기보다 자신이 모르게 허락해버린 무언가에 대한 잔잔한 불안이었다.거실로 들어서자 이현은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조용히 칼질하는 소리.그리고 그가 등 뒤로 흘리는 잔잔한 음악.유리는 그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오랜 연인이 서로에게서 느끼는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거리.“왔어요?”그가 고개를 돌려 묻는다.유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그녀는 자연스러운 척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가방 안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그 동작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 속에는 말하지 않는 감정이 천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조심스럽게 조리된 파스타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 한 병이 놓였다.이현은 특별한 날도 아닌데 테이블 매트를 바꾸고 은은한 초까지 켜 두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앉기만을 기다렸다.유리는 조금 당황한 듯 자리에 앉았고, 이현은 잔을 채우며 말했다.“요즘… 우리 둘 다, 서로 피하는 것 같아서요.”그의 말에 유리는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잔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유리 씨가… 요즘엔 어디 다녀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안 해요.”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고, 책망도 아니었다.그저 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오른 슬픔의 언어.유리는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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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익숙한 사람, 낯선 거리

이른 오후, 파리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그 투명한 하늘 아래에서 이현은 창가에 서서 유리가 나서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가볍게 인사했고, 미소를 지은 얼굴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하지만 이현은 그 미소가 자신에게는 닿지 않는 거리에서 피어났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그리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그는 천천히 외투를 걸쳐 입었다.‘오늘은, 그냥… 따라가 보고 싶었다.’이유도 설명도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단지 그녀의 하루 속,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유리는 늘 그랬듯 익숙한 골목을 지나 강변 쪽으로 향했다.그녀의 발걸음은 급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꽃가게 앞에 멈추거나,카페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며 하루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이현은 그 걸음을 멀리서 따라가며 알지 못했던 그녀의 얼굴들을 하나씩 마주했다.유리는 혼자일 때 더 조용했고, 혼자일 때 더 부드러웠다.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독립적인 걸음.그러나 그 속엔 이상하리만치 많은 침묵이 있었다.그녀는 작은 서점 앞에 멈췄다.그리고 곧 익숙한 사람을 마주한 듯 짧게 웃으며 인사했다.이현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다.그 남자. 언젠가 루브르 앞에서 본,그리고 카페 근처에서 스친 적 있었던 낯선 한국인 남자였다.유리는 그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고, 둘은 말없이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은 문턱 바깥에서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한 채 멈춰 섰다.유리의 옆얼굴은 평온했다.오히려 이현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가볍고, 더 유연해 보였다.시간이 조금 흐른 뒤 두 사람은 서점에서 나와 강변 쪽 작은 벤치에 앉았다.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웃는 유리.그녀의 웃음은 이현이 너무 오래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그는 멀찍이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그녀의 표정에서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혹은 그 미소를 더 이상 자신이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깊고 날카롭게 그를 찔러왔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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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당신을 잃어가는 기분이 무섭습니다

파리의 아침은 흐렸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빛조차 유난히 희미하고 차가웠다.이현은 일찍 눈을 떴지만 그대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어깨에 담긴 묵직한 피로는 잠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유리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 모양이었다.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컵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리는 파도처럼 잔잔하게 울렸다.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마치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유리와 연결된 유일한 끈인 것처럼.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뜨거운 커피 사이로 흘러가는 조용한 숨소리와 어쩐지 익숙한 정적.유리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오늘은… 회사 가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잠깐 미팅 있어요. 오후엔 일찍 끝날 것 같아요.”그 말은, 저녁을 함께 하고 싶다는 숨은 제안이었지만 유리는 대답 대신 조용히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그 작은 회피는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더 깊이 가라앉게 했다.이현은 책상 앞에 앉아 일정표를 정리하다 유리의 이름을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저녁에 어디 가고 싶어요?''우리 예전처럼 바깥에서 밥 먹을까?''요즘 무슨 생각해요?'수없이 떠오르는 문장들 중 그 어떤 것도 지금 그녀에게 꺼내기엔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늦은 것 같았다.그는 그저 ‘오후에 갈게요’라는 한 문장만 남긴 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오후 세 시 즈음, 유리는 마트에서 돌아와 장바구니를 부엌에 내려놓았다.무심하게 쌓아둔 바나나, 신선한 샐러드 채소,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브리 치즈 한 조각.그녀는 문득 그 치즈를 고르는 자신의 손길이 자신의 의지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아직… 이현 씨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네.’그러나 그 기억이 더 이상 다정하지 않았다.그것은 지나간 사랑을 부여잡는 습관 같은 감정이었다.이현은 저녁 무렵 조용히 현관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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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마주보는 마음, 닿지 않는 온기

창문을 두드리는 가늘고 긴 빗소리. 파리의 밤은 온통 잿빛이었다.불 켜진 작은 부엌에서 유리는 조용히 찻잎을 우려내고 있었다.은은한 캐모마일 향이 잔잔히 번져나가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지만,그 어떤 따뜻함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지는 못했다.이현은 소파에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지만 책장은 넘겨지지 않았다.그는 방금 전 유리의 옆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그녀의 고요한 표정. 말없이 커피를 내리던 그 뒷모습은 그에게 점점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사랑을 어떻게 꺼내야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이제는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차 마실래요?”유리의 조용한 물음에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좋아요.”그녀는 두 잔의 찻잔을 들고 소파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그들의 무릎 사이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그 위에는 함께 놓인 책 한 권과 말라가는 라벤더 잎 몇 송이.이현은 잔을 들고 조심스레 물었다.“요즘은… 무슨 생각해요?”그의 물음은 무겁지 않았다.다만 너무 오래 묻지 못했던 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꺼내진 것이었다.유리는 잔을 들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생각이 많아요.”짧은 대답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변할까 봐 겁이 나요.”그녀의 고백은 정적 속을 천천히 파고들었다.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떼며 말했다.“나는… 그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요. 그러니까 유리 씨가 어떤 말이라도 꺼내줘도 돼요.”그의 말은 진심이었다.그러나 유리는 그 진심마저 버거워 보였다.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이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끝을 올렸다.그 미세한 접촉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또 동시에 조심스러웠다.유리는 손을 거두지 않았지만 그 손끝에 온기를 더하지도 않았다.그녀는 단지 그 온도를 가만히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이현은 그 침묵을 받아들이듯 작게 말했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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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당신 없는 풍경 속에서 가벼웠다

파리의 공기는 부드러웠고, 초여름을 닮은 바람은 오전의 거리를 조용히 매만지고 있었다.유리는 혼자 산책을 나섰다.목도리 없이 가벼운 셔츠 차림에 머리는 느슨하게 묶였고,가방에는 책 한 권과 작은 메모장이 들어 있었다.그녀는 오늘이 유난히 조용하고 싶었다.바람이 말을 거는 하루, 사람들이 천천히 걷는 거리,그 속에서 자신도 모든 생각과 감정을 한 템포 늦추고 싶었다.강변 쪽 오래된 벤치에 앉아 유리는 책을 펴지도 않은 채 멀리 강을 바라보았다.물결 위에 흔들리는 햇살, 유유히 지나가는 유람선,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자전거 바퀴 소리.그 조용한 풍경 속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안녕하세요.”낮고 담백한 목소리.고개를 돌린 순간, 그가 서 있었다.민우.그녀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짧게 웃었다.“또… 우연이네요.”그는 어깨를 으쓱였다.“이 도시가 그렇게 크지는 않나 봐요.”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기 자주 오세요?”“가끔요. 생각 정리하고 싶을 때.”그 말에 유리는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저도요.”민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말을 덧붙였다.“혼자 있는 사람의 기운은 서로 알아보는 것 같아요. 유리 씨도…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려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민우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침범하지도 않았다.그저 있는 그대로 그녀의 현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순간, 유리는 아주 잠깐 스스로가 ‘보호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꼈다.그 감정은 이현과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더 자주 잊곤 했던 것이었다.두 사람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오히려 그 침묵이 서로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민우는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괜히 적어본 건데요.”유리는 펼쳐보았다.짧은 문장들이 조용히 적혀 있었다.어느 날,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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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그날 밤, 유리는 오랜만에 불을 끄고 누운 방 안에서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창문 밖에서는 늦은 비의 잔재가 길가를 적시고 있었고,부드러운 빗소리는 방 안 공기마저 축축하게 적시는 듯했다.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민우가 건넸던 노트 속 문장을 조용히 떠올렸다.“그 부재가 자꾸 생각난다면, 그건 감정일지도.”그 문장은 하루 내내 그녀의 머릿속 어딘가에서맴돌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주는 무언의 거울처럼 반짝였다.‘나는 왜 자꾸… 그 사람과 있었던 시간을 떠올리는 걸까.’그 질문은 너무 솔직했고, 또 너무 위험했다.다음 날 아침, 이현은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식탁 위엔 따뜻한 크루아상과 그가 직접 내린 커피가 놓여 있었고, 그는 오랜만에 조금 더 정성 들인 아침을 준비했다.유리가 방에서 나왔을 때, 그는 반갑게 미소 지었다.“오늘은… 내가 먼저 준비했어요.”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식탁 위에 놓인 빵과 잔잔한 향기를 머금은 커피.그 익숙하고 다정한 풍경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고마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그녀의 말엔 분명 감사가 담겨 있었지만, 이현은 그 속에서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그건 마치 그녀가 감정을 완전히 실어 말하지 않는 사람처럼 마음을 숨긴 채 예의를 지키는 느낌이었다.아침 식사 후, 유리는 평소처럼 외출 준비를 했고이현은 책을 펴 들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자꾸만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가방을 메고 현관 앞에 선 유리.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유리 씨.”그녀가 고개를 돌렸다.“…오늘은 어디 가요?”그의 질문은 평범했지만 그 속엔 분명한 무게가 있었다.‘누구와’라는 단어를 삼킨 채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시선을 붙잡으려 했다.유리는 아주 짧은 침묵 끝에 작게 웃었다.“그냥 혼자 걸어요. 혼자 있고 싶어서요.”그 말에 이현은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혼자 있다는 말보다 ‘나누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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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당신의 세계에 내가 없을 때

이른 아침, 이현은 오랜만에 유리에게 여행을 제안했다.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모른 척 웃으며 말했다.“멀지는 않아요. 기차로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하니까요. 그냥 바람 쐬러 가는 거예요.”유리는 잠시 말이 없었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수락은 적극적인 것도, 기대에 찬 것도 아니었지만이현은 그 ‘그래요’라는 한 마디 안에서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읽고 있었다.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들판과 나무들,가끔 스쳐 지나가는 마을의 풍경이 유리의 눈동자에 흘러들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현은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그 손길에 유리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그 손에 스며드는 따뜻함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그녀의 손은 말없이 이현의 손에 얹힌 채 가만히 식어가고 있었다.도착한 도시는 작고 조용했다.산책하기 좋은 언덕이 있었고, 작은 포도밭과 돌로 된 골목길이 이어져 있었다.이현은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찍으며 간간히 유리의 모습을 담았다.그녀가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햇살이 머리카락을 통과해 빛날 때,조용히 벤치에 앉아 신발끈을 고쳐 맬 때.그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점심을 먹은 작은 레스토랑에서 이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나랑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어요?”유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힘들다기보다는…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그녀의 말은 길고 조심스러웠지만 그 속에 감춰진 감정은 오히려 명확했다.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괜찮아요. 말해줘서 고마워요.”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 뒤에 숨은 절망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해가 지고, 두 사람은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그 밤, 침대에 누운 유리는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을 애써 지우려 했다.민우와 함께 있었던 강변의 정적, 그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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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당신 마음한테 솔직하면 되는 거잖아요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이현은 유리의 손끝에서 느껴졌던 미묘한 떨림을 잊을 수 없었다.그것은 단순한 피로나 지침이 아니었다.손끝을 스쳐 지나가던 망설임,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동.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또렷한 신호처럼 느껴졌다.“괜찮아요?”그가 조용히 물었다.유리는 순간 작은 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냥 좀 피곤해서.”그 말은 익숙한 핑계였고, 그 익숙함은 오히려 이현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날 저녁, 이현은 평소보다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비했다.유리가 한때 좋아했던 가지 그라탱과 토마토를 얹은 바삭한 바게트, 그리고 레몬향을 곁들인 화이트 와인.식탁 위에 놓인 음식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준비된 것이 없었지만,그가 진짜로 차리고 싶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서로를 마주 보는 자리였다.“오늘은 내가 만들었어요. 맛 봐줄래요?”그는 조심스럽게 웃었고, 유리는 그 웃음에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응. 고마워요.”그녀는 포크를 들어 조용히 음식을 입에 넣었지만,그 안에 감탄도, 익숙한 미소도 예전처럼 머물러주지 않았다.식사가 끝난 후, 이현은 두 손을 모은 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유리를 바라보았다.“유리 씨.”그녀가 고개를 들었다.“나… 요즘 당신이 너무 멀게 느껴져요.”그 말은 마침내 꺼내든 고백이었다.유리는 입술을 다문 채 작게 눈을 감았다.“미안해요.”그 말은 사과가 아니라 회피였다.그녀조차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 그 외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이현은 그녀의 그 말이 지금껏 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가장 아프게 들린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왜 미안한 거예요?”그가 물었다.“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당신 마음한테… 솔직하면 되는 거잖아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자신이 조금씩 감정의 무게를 외면하고 있다는 걸.지금 이현이 건네는 손을 붙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걸.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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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홀로 남은 식탁의 온도

그녀 역시 이현과의 거리에서 숨을 쉬고 싶다고 느낀 적이 최근 들어 너무 자주 있었기에.“그래요.”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우리… 잠깐, 서로에게서 벗어나 있어봐요.”그 말은 이별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끝에 가까운 말이었다.그날 밤, 서로 다른 방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이불을 덮었다.이현은 손끝으로 휴대폰을 쥔 채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낼 말을 떠올렸다.그러나 어떤 말도 지금의 그녀에게 닿을 수 없을 거란 걸 알기에 그는 끝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유리는 베개를 껴안은 채 자신이 한 말을 되뇌었다.“우리… 떨어져 있어요.”그 말은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들렸지만그 속에 담긴 진심은 그녀의 심장을 천천히 조이고 있었다.며칠 후, 이현은 짐을 싸고 있었다.“당분간 회사 기숙사에 있을게요.”그는 조용히 말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 말 없이 그가 챙긴 셔츠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그들의 손끝은 가끔 마주쳤지만 이제는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이현이 현관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고마웠어요. 지금까지… 곁에 있어줘서.”그 말에 이현은 작게 웃었다.“…내가 더 고마워요. 그 곁에 있을 수 있어서.”그리고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유리는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긴장이 풀린 어깨, 멍해진 시선, 무언가를 참는 듯한 입술.사랑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거창한 말 없이, 비난도 없이, 눈물도 없이.단지, 마주 보던 두 사람이 서서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사랑은… 이렇게도 끝나는구나.”그리고 그 말 끝에 조용히 무너져내린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은 아직 그녀 안에 없었다.이현이 떠난 집은 그리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그의 옷 몇 벌이 빠져나간 옷장,책상 위에 놓였던 노트북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것 외엔, 소파도 그대로 화병의 꽃도 시들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하지만 유리는 안다. 그의 부재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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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끝내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

바로, 나눌 사람.해질 무렵, 거실 한 켠에 앉아 있던 유리는 이현이 남기고 간 노트를 펼쳤다.그 마지막 페이지엔 그가 썼던 낙서 같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유리 씨,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조차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었어요.''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였던 것 같아요.'그녀는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이제는 그 마음을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현이 떠나야 했던 이유,그가 머물며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것,그리고 그가 손 놓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까지.그 모든 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밤이 깊어지고, 유리는 식탁 앞에 다시 앉았다.그녀는 오늘 만든 요리를 작은 통에 담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그리고 종이 메모지 한 장에 짧은 글을 남겼다.'오늘은 가지를 구웠어요.''당신이 좋아하던 바질은 조금 진하게 넣었어요.''당신이 없으니까, 간을 맞추는 게 어렵더라고요.'그녀는 그 메모를 테이블 위 이현의 컵 옆에 놓았다.마치 그가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와 그걸 읽어줄 것처럼.그녀는 그렇게 그의 부재를 조용히 품고 앉아 있었다.그 공간에는 사랑이 남아 있었다.끝나버린 사랑이 아니라 아직 끝내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이.주말의 파리는 평일보다 더 조용했다.관광객들로 북적이던 중심가와는 다르게,강변의 작은 골목길은 누군가의 삶이 낮은 숨결로 이어지고 있는 공간이었다.유리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혼자 걸었다.가방도 없이, 목도리도 없이, 그저 걷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녀는 거리로 나왔다.이현이 떠난 뒤 처음 맞는 주말. 함께여서 익숙했던 풍경이 혼자여서 낯설게 느껴졌고, 그 낯섦은 그녀의 감정을 더 예민하게 깎아내고 있었다.카페 ‘Jardin’ 앞. 작은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유리는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으며,그녀 또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완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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