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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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이름 모를 고백, 마음의 거리

그는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뒤돌아 나와 근처 벤치에 앉았다.담배를 꺼낼까 하다 말고, 그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웃음이… 그렇게 다르진 않았어.’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조차 위로가 되지 않았다.그는 유리의 미소를 기억했다.자신에게 보여주던 그 다정하고 단단한 웃음.그러나 방금 전의 미소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분명히 거기 담겨 있었다.그것이 그저 친절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이었는지를 이현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시간을 두고 들어간 가게 안에서 유리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맞았다.“오늘은 늦으셨네요.”그 말은 일상적인 인사였지만 이현은 속으로 자책했다.자신은 왜 그 말 속에서조차 감정을 의심하고 있는 걸까.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좀 늦게 끝났어요.”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그녀의 요리는 여전히 완벽했다.그러나 이현은 그 완벽함마저 어딘가 아프게 느껴졌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 매끄럽게 흘러가는 시간은,그가 느낀 찰나의 혼란을 더 또렷하게 떠올리게 만들었다.그날 밤, 이현은 침대에 누워 유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리 씨. 그 손님… 요즘 자주 오시나 봐요.”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네. 그냥, 한동안 파리에 머문다고 하시더라고요. 맛있게 드셔주시니까 저도 감사하죠.”그녀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그 ‘감사’라는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혹시… 그 사람과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있어요?”그는 묻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그런 의심을 입 밖에 내다니.유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럴 일 없어요.”짧고 단호한 대답. 그러나 이현은 그 단호함조차 완전히 안심이 되지 않았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날 밤, 이현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그녀의 등에 이불 너머로 닿는 거리조차 이상하게 멀게만 느껴졌다.그의 가슴속엔 불신이 아니라,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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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유리 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식사 후,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가끔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앞에 있으면 내가 너무 멀찍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당신이 아주 깊은 어딘가에 닿아 있는 것 같아서.”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그 남자의 시선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따뜻함조차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날 저녁, 이현은 평소보다 늦게 가게에 들어왔다.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맞이했지만 그의 눈은 무언가를 감지한 듯 짧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그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다.식탁 위엔 조용한 긴장감이 깔렸다.말 한 마디 없이 그들은 함께 식사를 했고, 그런 침묵조차 이젠 그들 사이에서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밤이 깊었다. 불을 끈 방 안에서 이현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그의 숨은 얕고 무거웠다.말로 꺼낼 수 없는 감정들이 그를 점점 조여오는 느낌이었다.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그 손끝이 이미 닿기엔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유리는 눈을 감은 채 작은 숨을 내쉬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이현이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한다는 걸.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대화도 자신의 마음을 진짜로 말해줄 수 없다는 걸.그녀는 말없이 속삭였다.‘사랑은… 늘 곁에 있다고 확신할 수 없을 때 가장 아프게 흔들리는 거야.’창문 밖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프랑스의 겨울은 서울보다 더 부드럽고, 더 길게 스며드는 습기와 함께 찾아왔다.유리는 고요한 주방 안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그녀의 앞치마는 아직 벗겨지지 않았고,주전자 안에서 물이 천천히 끓어오르는 소리만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이른 아침임에도 그녀는 밤을 꼬박 지새운 사람처럼 어딘가 멍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생각의 파도는 잔잔했지만, 그 아래로는 무언가가 고요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그날 오후, 이현은 평소보다 일찍 가게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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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사랑은 의지가 아니라 함께 머물고 싶은 것

잠들기 전, 이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그 남자랑 연락해요?”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몸을 더 깊이 묻었다.조금 있다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손님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이현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녀가 그 남자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 여운을 그녀는 스스로에게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이현은 등을 돌리고 누웠다.그의 어깨 너머로는 서늘한 공기만이 흘러갔다.그는 그 순간,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말하지 못하는 게 더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들의 다정함은 지금 너무 완벽했기에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그는 눈을 감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당신이 내 곁에 있어도 당신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있어.’아침 햇살은 벽을 따라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이국의 겨울은 흐린 날이 많지만, 그날만큼은 투명한 햇빛이 창가로 깊숙이 스며들었다.유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이현은 아직 잠들어 있었고, 그의 규칙적인 숨결은 이불 속으로 고요하게 퍼지고 있었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돌렸다.그와 함께 있는 아침.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메마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사랑은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데그 사랑이 주는 온기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그날은 휴일이었다.두 사람은 특별한 계획 없이 조용한 파리의 오후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이현은 아침을 차려주겠다고 말했고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부엌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유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허전해졌다.그는 예전보다 훨씬 자주 웃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기분을 살폈고,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행동들에도 세심한 배려를 담고 있었다.그러나 그 다정함 속에는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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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말하지 않은 이유, 닿지 않는 마음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조금 더 꼭 쥐었다.저녁이 되어 이현은 퇴근하듯 그녀를 마중 나왔다.그녀의 얼굴을 본 그는 웃으며 말했다.“오늘 많이 피곤해 보여요.”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오히려… 오랜만에 혼자 있어서 그런지 기분이 좀 정리됐어요.”그 말에 이현은 잠시 멈칫했다.혼자 있어서 좋았다는 말이 마음 어딘가를 찌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다정한 얼굴로 받아주었다.“그랬구나. 그럼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요. 유리 씨는 푹 쉬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그 말은 진심이었다.그러나 그 진심 속에는 조금씩 가라앉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밤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그녀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사랑은 식은 게 아니야. 그냥, 그 모양이 달라진 거야.’그러나 그 모양이 서로를 닮지 못할 때,사랑은 결국 서로의 마음을 어긋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들고 있었다.그날 아침, 유리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짧고 어지러운 꿈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이현은 등장하지 않았다.그녀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가슴 한가운데에 잔잔한 허기를 느꼈다.그것은 공복에서 오는 허기가 아니라,말하지 못한 마음이 쌓여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틈이었다.햇살은 여느 날보다 부드러웠고 그녀의 손은 평소처럼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였다.그러나 그 손끝의 움직임은 어딘가 느려지고 있었다.그녀는 이유 없이 칼질을 멈추고 주방 창 너머를 오래 바라보았다.마치 자신이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이 더는 누군가에게 닿지 못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이현은 오전 내내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했다.유리의 말없는 웃음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녀는 여전히 다정했다.그러나 그 다정함에는 더 이상 ‘기대’가 담겨 있지 않았다.이현은 안다.사람의 마음은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그 무게와 결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먼저 느끼게 된다는 것을.그는 그녀가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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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식지 않은 사랑, 달라진 모양

파리의 늦은 오후, 유리는 혼자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늘 가던 정육점, 채소 가게, 그리고 작은 꽃집 앞을 지나며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매장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코트 깃을 세운 채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그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그저 평온한 어느 주부의 일상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투명한 감정들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감정은 외로움이기도 했고, 지속되는 익숙함에 대한 피로이기도 했다.어느 순간부터 이현의 다정함은 그녀에게 따뜻함보다는 의무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집에 돌아와 식탁 위에 장을 풀어놓고, 채소를 씻기 시작한 유리는 문득 손끝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배춧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던 중,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얼굴이 있었다.며칠 전, 시장 입구에서 스쳐 지나간 그 남자.낯선 관광객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그의 이름도 모른 채 짧게 스쳤을 뿐인데,그 순간의 감정이 지금까지 그녀 안에서 희미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그건 설렘은 아니었다.그러나 분명히, 오랫동안 잊고 지낸 ‘자기 자신’이 그 짧은 교차 속에서 고개를 든 것이었다.그녀는 물에 젖은 손을 닦지도 않은 채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날 저녁, 이현은 퇴근하자마자 그녀가 좋아하던 레몬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오늘 기분 전환 좀 해볼까 싶어서.”그는 환한 웃음으로 말했다.유리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그의 그런 배려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다정함이 자꾸만 그녀의 안쪽을 건드렸다.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도 좋은 사람이라그가 주는 배려를 거절하는 것조차 잔인한 일이 되어버리는 사람.그래서 유리는 말하지 않았다.자신이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것도,마음의 방향이 어딘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도.그녀는 차라리 다정한 아내의 모습으로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케이크를 조심스레 잘랐다.식사 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이현은 책을 읽었고 유리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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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다정함이 상처가 될 때

“…네. 기억나요. 예전에 저 잼 바르고 빵 먹는 거 정말 좋아했어요.”“지금은요?”그가 묻자, 그녀는 망설였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좀 다른 사람 같아서요.”그 말에 이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병을 내려놓았다.그 말은 단순한 잼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그녀는 지금의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유리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했지만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이현은 자꾸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고, 유리는 그런 그를 애써 모른 척했다.식사 중,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유리 씨… 무슨 고민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요.”“그 생각… 혹시, 나 때문이에요?”그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아니요. 아니에요… 정말.”그러나 그 ‘아니에요’ 속에 이미 수많은 ‘그렇다’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이현은 느끼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작은 숨을 쉬었다.밤이 깊고, 불이 꺼진 집 안에서유리는 침대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옆에 누운 이현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지만,그녀는 그 손을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가만히 두었다.예전 같으면 그 손을 더 꼭 쥐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 다정함조차 자신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다.그저,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을 뿐.한밤중, 유리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 창가에 섰다.빛 하나 없는 창 너머 어둠 속에 자신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그녀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속삭였다.“…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걸까.”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지금 이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그저, 말하지 못한 감정이 가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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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다정함이 상처가 되어버린 밤

에펠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고,그 아래를 걷는 연인들은 각자의 언어로 속삭이며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고 있었다.이현은 유리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우리 예전엔 이런 산책 자주 했었죠.”그가 말했다. 유리는 작게 웃었다.“…그땐 그게 좋았어요.”그녀는 말했다.그 말 속에는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 조용히 녹아 있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고,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숨을 삼켰다.집에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그 고요함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로에겐 익숙해진 침묵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유리는 화분 옆에 걸터앉았다.이현은 가만히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유리 씨… 혹시, 내가 너무 다정한 게… 부담돼요?”그 물음은 생각보다 너무 정직해서 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 건 아니에요.”그녀는 겨우 말을 뱉었다.“그냥… 제가 지금, 누구에게든 받는 게 조금… 힘든 것 같아요.”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그녀가 덧붙였지만 그 말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찔렀다.눚은 밤.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운 두 사람 사이엔 한 뼘 남짓한 거리가 있었다.그러나 그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말하지 못한 감정이었다.이현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쉬었다.그는 다정함으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그 다정함이 그녀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다정함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무언의 상처가 되어버린 밤이었다.파리의 이른 새벽. 창밖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눈이 올 듯한 날씨였다.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거리에서, 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잠든 이현의 얼굴이 보였다.고르고 깊은 숨결.오래도록 자신이 의지해왔던 그 사람의 온기가 아직 곁에 남아 있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문득 이현이 없는 세상을 떠올렸다.그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그가 나로 인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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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이현 없는 삶을 상상할 때

그날 밤. 이현은 일찍 돌아왔다.손에는 작은 초콜릿 상자가 들려 있었다.“오늘 미팅이 잘 돼서요. 축하할 겸, 우리 둘이 좋아하던 거 사 왔어요.”유리는 초콜릿을 받아들고 작게 미소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오래 머물지 못했다.식사 후, 두 사람은 거실에서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이현은 유리의 손등을 감싸며 말했다.“요즘 우리, 자주 서로를 놓치는 기분이에요. 가까이 있는데도 멀게 느껴져요.”그 말에 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그 마음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도리어 숨이 막혔다.“그럴지도 몰라요.”유리는 조용히 말했다.“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이현의 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그 다정함이, 이제는 유리에게 상처였다.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이현 없는 삶’을 상상했다.그를 놓아주는 상상. 그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선택.그 상상은 차갑고, 아프고, 하지만 아주 조금, 해방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오래도록 울었다.그 울음은 어떤 말보다 정직한 자신의 고백이었다.파리의 겨울 햇살은 어제보다도 더 맑았다.하지만 그 빛이 부엌에 들이칠 때, 유리는 그것이 차갑다고 느꼈다.빛은 따뜻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은 점점 무채색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그날 아침, 식탁엔 따뜻한 수프와 갓 구운 바게트가 놓여 있었다.이현이 준비한 식사였다.그는 정성스럽게 접시를 정리하고 작은 꽃병에 라넌큘러스를 꽂아두었다.겨울에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꽃,그는 그것이 유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유리는 그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식사하세요. 금방 식겠어요.”이현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끝만 테이블을 쓸고 있었다.“…입맛이 없어요. 잠깐만, 이따 먹을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엔 어딘가 무거운 것이 고여 있었다.이현은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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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말이 아닌 표정으로 남는 감정들

겨울의 아침은 여전히 느릿했다.햇살이 이마를 스칠 때에도 그 빛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쉽게 읽히지 않았다.유리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긴 숨을 쉬었다.그 숨결은 새벽 내내 가라앉았던 감정의 무게를 조용히 토해내는 듯했다.이현이 바로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온기를 느끼지 않았다.아니, 일부러 느끼지 않으려 했다.그가 자신을 지켜보는 눈빛을 잠든 척한 채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말이라는 것이, 그 순간엔 너무나 큰 파장이었기 때문이다.주방에선 물이 끓고 있었다.이현은 커피를 내리는 손길로 아침을 열었고, 유리는 그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둘 사이엔 인사도, 조금 전의 기척도 오가지 않았다.그럼에도 두 사람은 묘하게 익숙한 동선으로 서로의 공간을 비켜갔다.이현은 커피잔을 두 개 꺼냈고 유리는 그 중 하나를 들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감사해요.”입술에 걸린 그 말 한마디. 그것조차, 이젠 다소 어색한 예의처럼 들렸다.아침 식사는 조용했다.바게트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식탁 위의 공기를 깨트릴 뿐이었다.유리는 국물을 천천히 떠올리며 이현의 눈을 피했다. 그녀는 알았다.그가 자꾸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는 걸.그 다정한 시선이 이제는 따뜻하지 않았다.그것은 조심스러운 감시처럼 느껴졌고, 그것이 그녀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이현 역시 말이 없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흘렀지만그 중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무슨 일이야?’‘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거야?’‘우리가… 멀어지고 있는 걸까?’그 물음표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그녀의 숟가락이 몇 번이나 멈추는지를 세고 있었다.오후가 되자, 유리는 산책을 나갔다.혼자서. 이현은 따라 나서지 않았다.그는 문틈 너머로 그녀가 코트를 입고, 천천히 목도리를 고쳐 매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녀는 그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 숨결 속에는 말이 되지 못한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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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다정해야 내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서

파리의 아침은 눈처럼 흩날리는 안개로 시작됐다.유리는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뿌연 창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바닥에 번지는 회색의 실루엣.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마치 지금의 자신의 마음처럼.이현은 부엌에서 익숙한 손길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단정하게 포개진 식빵 두 장,살짝 버터를 녹여 볶아낸 스크램블 에그,그리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놓여 있었다.그는 변함없이 유리를 위해 준비했고, 그 다정함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그러나 유리의 발걸음은 그 식탁으로 쉽게 향하지 못했다.“식사해요. 곧 식을 것 같아요.”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그녀의 손은 그릇을 들지도,음식을 입에 넣지도 못한 채 그저 무릎 위에서 얌전히 모아져 있었다.“어제는 산책 잘 다녀왔어요?”이현이 입을 열었다.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식은 손을 바라보았다.움직이지 않는 손,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손끝.“혹시… 무슨 일 있어요?”그 물음은 다정했지만 유리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아니에요. 그냥… 그냥 생각이 많아서요.”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눈빛 속엔 수많은 물음표들이 일렁였지만그는 그 어느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그날 오후, 유리는 조용히 외출을 준비했다.“어디 가요?”이현이 물었다.“그냥… 혼자 걷고 올게요.”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오래 붙들었다.“같이 갈까 했는데… 요즘 당신,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유리는 작게 웃었다.“가끔은, 그래야 하는 시간도 있는 것 같아요.”그녀의 그 말은 멀어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이현은 그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슬픔을 보았다.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 슬픔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유리는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어딜 가겠다는 목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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