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241 - Chapter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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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누군가의 입맛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는 식탁

“…처음엔 누군가의 입맛을 잡고 싶어서였어요.그 사람은 늘 까다로웠고, 내 요리를 먹으면서도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멀리에서 오는 물소리처럼 느리게 흔들렸다.“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죠. 그래서 더 조심하고, 더 노력했어요.”남자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리는 이어 말했다.“그 사람이 어느 날… ‘오늘 음식, 괜찮다’고 말했을 때그 말 하나가 저한텐 전부였어요. 그 말 들으려고 그렇게 오래, 요리를 했어요.”그 말 끝엔 작은 침묵이 따라왔다.햇살이 유리잔을 지나 식탁 위를 반짝이며 미끄러졌다.그녀는 말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사람 없이도 맛을 생각하게 됐어요. 입맛이 아닌 마음을 생각하면서요.”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의 요리는 먹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을 더 아끼는 요리예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그게… 보이나요?”“예.”그는 웃으며 말했다.“아마 그래서 자꾸 오게 되는 것 같아요.”유리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처음으로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올렸다.식사가 끝나고, 가게 문을 닫은 밤.유리는 조용히 불을 줄이고 천천히 주방 정리를 시작했다.그릇 하나, 냄비 하나를 씻는 일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손끝으로 남은 온도를 느꼈다.오늘 그가 밥을 비우던 숟가락의 무게,두부를 반으로 가르던 젓가락의 각도.모든 것이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마음에 스며 있었다.그러다 문득 오래된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삿짐을 풀며 ‘나중에’ 보자고 덮어둔 채 그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작은 종이 상자.유리는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그 안엔 한국에서의 사진 몇 장과 낡은 레시피 노트, 그리고 누렇게 바랜 메모들이 섞여 있었다.그녀의 손끝이 어느 한 장의 사진 위에서 멈췄다.사진 속 따뜻한 조명을 등진 긴 식탁,그리고 그 식탁 너머 조금은 무표정한 이현의 얼굴.유리는 천천히 그 사진을 들어 올렸다.사진 속 그녀는 웃고 있었다.그가 조금 웃은 날, 자신이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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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스며드는 이름, 스며드는 감정

그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공기엔 묘하게 젖은 냄새가 감돌았고,가게 안 창문에는 마치 투명한 안개처럼 햇살이 조용히 스며들었다.유리는 그 아침 기분처럼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감자와 양파를 다듬는 손끝이 유난히 조용했고, 칼날의 리듬은 규칙적이되 무표정했다.어젯밤 상자 속 사진을 본 이후 마음 한쪽이 오래 잠기듯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진 속 남자와 지금의 식탁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가어쩌면 어딘가 닮아 있는 것 같은 착각,아니, 그런 착각을 해도 되는 마음의 여지를 자신이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정이란 건 언제나 먼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스며드는 것이었다.점심 무렵, 문이 열렸다.그는 늘 그렇듯 시간도 말도 어긋나지 않게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났다.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고, 그는 언제나처럼 고요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오늘은… 특별히 준비한 메뉴는 없어요.”유리가 먼저 말했다.“그럼 오늘은 당신이 먹고 싶은 걸로 주세요.”그가 대답했다.“당신 기분에 맞는 걸, 먹고 싶어요.”그 말이 이상하게 뼈에 닿았다.그녀는 천천히 두부 조림을 만들고, 구운 감자와 버터간장을 섞은 밥을 준비했다.김은 살짝만 불에 구워 밥 위에 얹었고, 마지막으로 손수 끓인 미소된장국을 곁들였다.그는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숟가락을 든 손끝, 국을 식히는 숨결,밥알을 천천히 씹는 움직임까지 그 모든 것에는 과하지 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유리는 그를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이현은 늘 음식을 먼저 보고 사람은 나중에 보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사람을 먼저 보고 음식은 천천히 음미하듯 대하는 사람이었다.그 차이는 어쩌면 아주 작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서서히 물결처럼 흔들림을 만들고 있었다.“이 요리…”그가 국을 다 마신 뒤 말했다.“어딘가에 기억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기억이요?”“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런 맛은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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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그냥 오셔도 돼요"라며 마음의 문턱을 낮춘 유리의 조용한 고백

“……유리… 씨.”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다.그 사진엔 직접적인 태그도, 이름도 없었지만그의 눈엔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담겨 있었다.그녀가 좋아하던 얇은 린넨 앞치마.식탁 옆에 곁들이는 무화과 포트.그녀가 조용히 손에 얹어두는 왼손 검지의 작은 점까지.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그는 조용히 화면을 확대하며 숨을 깊이 삼켰다.이현의 밤은 길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감정조차 없는 일상의 반복에 몸을 던지고 있었고,그 속에서 모든 걸 지우려 애썼다.하지만 그 사진 한 장이 그의 모든 견고한 시간 위에 작은 금을 내기 시작했다.그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책상 위,여전히 남아 있는 그녀의 메모 한 장.“이현 씨, 따뜻하게 드세요.”그 글씨를 보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유리 씨, 거기서 괜찮아요?”질문은 그녀를 향했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그날 밤, 이현은 비행 일정을 확인했다.파리행 직항. 다음 주 수요일. 업무상 시찰이라는 명목은 손쉽게 붙일 수 있었다.하지만 그 모든 명분을 벗겨내면, 그 안에 남아 있는 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조유리. 그녀가 있는 그 도시. 그녀가 웃고 있는 그 창가.그리고, 자신만은 그 웃음 밖에 서 있다는 사실.그것이 그를 움직였다.같은 시간, 파리.유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늘, 남자와 함께 진한 닭개장 한 그릇을 나누었고그의 손끝에 닿은 숟가락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그러면서도, 사진을 찍고 간 손님들의 말투가 마음 한구석에 작게 남아 있었다.“그 파리 감성 브이로그에 나왔던….”그 말에서 ‘파리’도, ‘감성’도 문제는 아니었다.오히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나’라는 감각이 오랜만에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밤, 침대에 눕기 전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사진첩을 켜고 조용히 지난 몇 주를 훑었다.남자와 함께한 식탁들. 접시 위에 놓인 음식. 차마 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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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너를 닮은 음식, 너를 닮지 않은 마음

유리는 오늘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침을 맞았다.한 줌의 멥쌀, 손끝으로 만져본 무의 결,채 썬 대파를 아주 천천히 볶으며 그녀는 오늘의 온도를 느꼈다.요리란, 언제나 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일이었다.그리고 그 마음은 종종 너무 멀리서 출발해 현재의 자신과 엇갈리곤 했다.정오 무렵, 그가 가게에 들어섰다.유리는 등 뒤에서 그의 존재를 먼저 감지했다.문이 닫히는 소리, 걸음의 간격, 무심한 듯 놓인 시선까지.그의 존재는 이제 공기처럼 자연스러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은 무서웠다.“오늘은 된장미역국이에요. 어릴 때… 몸이 지칠 때마다 끓였던 맛이에요.”유리가 말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식탁 위에 놓인 된장국과 미역, 매끈하게 익은 가지무침과 달큰한 무생채.그는 숟가락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이 국… 예전에 누군가가 끓여줬던 맛과 비슷해요.”그 말에 유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는 말없이 국을 한 숟갈 떠 입에 넣고 오랫동안 씹었다.“그 사람은… 늘 말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 사람의 음식은 늘 감정이 많았죠.”유리는 젓가락을 쥔 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 말은 마치 자신이 오래전 보내고 온 사람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듯했다.“그런데 오늘 이 국을 먹는데… 그 사람 생각이 나더라고요.당신의 요리에서, 그 사람의 조용한 마음이 떠올랐어요.”그의 말은 칭찬도, 고백도 아니었다.그냥 기억에 잠긴 사람의 나직한 진심이었다.유리는 그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그의 마음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말없이 국을 한 숟가락 떴다.그리고, 작게 웃었다.“그 사람을 아직… 좋아하시나요?”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좋아했다는 감정보다는… 미안함이 더 커요. 그 사람은 늘 내 말보다 내 숟가락을 기다렸으니까요.”그 말에 유리는 깊은 숨을 삼켰다.그녀 역시 누군가의 말보다 손끝을 기다렸던 시절이 있었다.그 사람의 손이, 그 사람의 숟가락이 자신의 식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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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손끝의 온기

파리의 밤은 오늘따라 유난히 느리게 흘러갔다.유리는 커튼을 걷은 채,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창밖에서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고,그 소리는 마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했다.그녀는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누구에게라기보다,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런 사람에게.그래서 ‘민우’라는 이름을 떠올렸다.한국에 있는 민우. 한때 자신의 식당에 들렀고,자신보다 먼저 삶의 균열과 회복을 겪었던 사람.무심한 척 조용히 건넨 말들 속에서 자신을 가장 많이 위로했던, 그 유일하고 단단한 사람.그녀는 펜을 들었다.민우 씨, 잘 지내시죠.여기 파리는 지금 비가 내려요.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면서 문득, 예전 식당의 창가를 떠올렸어요.그때 그 공간에서 민우 씨가 앉아 있던 자리가,이상하게 지금 제 앞에 있는 창가랑 겹쳐져 보이더라고요.참 이상하죠.저, 요즘 누군가와 자주 식사를 해요.처음엔 그 사람이 그냥 이국의 낯선 얼굴이라 생각했어요.나를 모르는 사람. 나의 상처를 모르는 사람.그래서… 부담이 없고 편하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그런데요.그 사람의 식사 방식이, 자꾸 제 마음을 건드려요.젓가락을 드는 각도, 밥을 다 먹고 난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는 태도, 국을 식히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무는 숨결.그 조용한 리듬 안에 저도 모르게 같이 걸어가고 있어요.그리고 그 길 위에서 제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걸 느껴요.무섭기도 해요.‘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지?’‘또 상처받으면 어쩌지?’그런데… 민우 씨.제가 놀란 건, 그 사람 앞에선 그런 생각보다 먼저‘나답게 있어도 괜찮다’는 이상한 확신이 생긴다는 거예요.그건 이현 씨와는 달라요.이현 씨는 제가 사랑을 애써 만들어야 했던 사람이었고,지금 이 사람은…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그냥 있는 그대로를 편안하게 받아주는 사람이에요.그런 차이가 처음엔 미묘했는데, 지금은 아주 크게 느껴져요.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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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파리의 낮게 깔린 석양과 창 너머 마주한 기억의 미소

비행기는 부드럽게 착륙했다.창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하늘은생각보다 따뜻해 보였고,그 아래 펼쳐진 도시는 과거의 어느 장면처럼,그의 기억보다 훨씬 더 조용히 다가왔다.이현은 천천히 좌석벨트를 풀었다.아무 말 없이 손등을 만지작거리던 그는오른손 약지에 남겨진 가벼운 눌림 자국을 보며 문득 유리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조유리. 그 이름은 아직도 목구멍을 타고 오를 때마다 작게 떨렸다. 마치 오래된 노래의 첫 음절처럼.그는 파리의 거리 위를 걷고 있었다.짐은 최소한으로 줄였고, 동행도 없었으며 예정표도 따로 짜지 않았다.단지 그녀가 있을지도 모르는 골목을 그저 걷고 싶었다.어느 작은 카페 앞에 멈춘 순간,가게 창 너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두 여성의 뒷모습이 보였다.그 중 하나의 실루엣이 이상하리만큼 유리와 닮아 있었다.이현은 한 걸음 다가섰다가, 곧 조용히 발을 멈췄다. 그녀가 아니었다.하지만 그 순간, 가슴속 어디선가 잊었던 이름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유리 씨.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이현은 며칠 전, 우연히 SNS에서 본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창가의 식탁, 부드러운 조명,그 식탁 위에 담긴 기억에 닿는 음식.그는 확신했다. 그 식당엔 그녀가 있다고. 그 요리엔 그녀의 손이 닿아 있다고.그는 작은 수첩을 꺼내 주소 하나를 확인했다.한 한국 관광객이 남긴 글에 달린 댓글 속,작은 파리 골목의 좌표.그곳으로 가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그날 저녁, 이현은 마침내 그 골목에 들어섰다.조명이 낮게 깔린 석양빛 속, 한 집의 창가에 작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작은 간판 하나. 낯선 듯 정겨운 한글. 그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으면서도,또다시 상처만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오히려 껴안기로 했다. 그 두려움 속에 아직 남은 마음이 분명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가게 문을 열지는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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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오래된 문장,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아침이 밝았다. 파리의 공기는 여전히 무심하게 차가웠고,그날도 유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주방의 조명을 켰다.하지만 마음만큼은 어제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채 조금 더 느리고 조심스러워져 있었다.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국물의 첫 끓음이 났을 즈음,가게 입구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바람인가. 아니면 우연히 굴러온 나뭇잎인가.그녀는 조용히 문가로 다가가 문틈 아래 떨어져 있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그건 편지라기보다는 마음의 조각 같았다.조심스럽고, 다하지 못한 말들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쪽지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천천히 읽었다.유리 씨.말로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당신이 떠난 이후,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그때 왜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왜 그런 표정으로 당신을 보냈을까'스스로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그날, 당신이 내게 등을 돌리던 순간부터 저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아주 선명하게 알게 되었어요.그리고 지금, 그걸 어떻게든 전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습니다.당신이 웃고 있는 걸 봤습니다.아주 오랜만에당신의 그 웃음은 제게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유리 씨. 당신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든,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든,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다만, 제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이 말로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당신의 모든 계절을 한 번이라도 함께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 저는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이현.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 읽은 쪽지를 천천히 접으며, 손끝을 조심스럽게 눌렀다.그 문장은 그녀를 울게 하지도, 웃게 하지도 않았지만단 하나, 멈춰 있던 시간의 결을 천천히 열어놓았다.마치, 어떤 오래된 문이 다시금 미세한 틈을 만들어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는 것처럼.그녀는 그 쪽지를 식탁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국물에 소금 한 꼬집을 더했다.그 짠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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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다시 차려진 두 사람의 식탁

그날 아침, 유리는 평소보다 천천히 칼을 들었다.양파를 썰 때 나는 단내와 손끝에 스치는 얇은 껍질,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눈물 같은 수분.그 모든 것이 오늘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주방은 조용했다.오직 식재료가 내는 소리와 물이 끓는 리듬만이작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그런데 문득, 그 조용한 공기를 뚫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유리씨.”그 이름.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이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여느 날보다 망설임이 많은 눈빛으로.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와 작은 한마디를 건넸다.“같이… 만들어볼래요? 오늘 식사, 같이 준비하면 안 될까요?”유리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한때는 매일의 식탁이 당연했던 사람.그러나 그 당연함이 무너진 후, 그와 마주 선 식탁은 언제나 ‘그리움’이라는 허기만 남긴 채그녀의 손을 놓았던 기억이었다.그래서 그는 지금 ‘요리’라는 말로 그 모든 허기를 다시 채워보려 하고 있었다.유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앞치마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그 앞치마를 받는 그의 손에 작은 떨림이 스쳤다.그 떨림은 기쁨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다.하지만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분명한 허락이었다.함께 서는 주방. 그건 누군가에겐 일상이었겠지만그들에겐, 오랜만에 되찾은 침묵 속의 다정함이었다.이현은 야채를 다듬었고, 유리는 조용히 육수를 끓였다.칼끝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뜨거운 물이 끓어오르며 내는 숨결,그 모든 것이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다시 음표가 하나씩 채워지는 것처럼 들렸다.“이렇게 같이 서는 거, 정말 오랜만이네요.”그가 나직하게 말했다.“그러게요.”유리의 대답은 짧았지만그 안엔 담담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예전엔 내가… 당신 옆에서 뭘 그렇게 조급하게 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그의 말에 유리는 천천히 수저를 저었다.“사람 마음이란 게 급하게 끓이면… 속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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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민우의 도착

그날 오후, 파리의 골목은 유난히 고요했다.하늘은 흐렸고, 노란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공기가 천천히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유리는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고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스테인리스 바닥에 남은 물기를 닦고,칼과 도마를 말리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그러나 가게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그녀의 손끝이 멈췄다.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민우.“오랜만이에요, 유리 씨.”그는 예전과 똑같은 말투로,그러나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삼켰다.민우. 그 이름은 그녀에게 ‘안정’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깊고 단단한 무언가였다.“어떻게… 여기에…”“출장이 있었어요. 하필이면 이 근처로 오게 돼서.”민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예전처럼 담백했지만그 안에 깃든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유리는 알 수 있었다.그녀는 그를 안으로 들였다. 주방은 아직 따뜻했고, 남은 국물에서 김이 희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민우는 가게 안을 둘러보다 식탁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메모지를 바라보았다.“여전하네요. 이 공간도, 유리 씨도.”그 말에 유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안엔 숨기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여긴… 당신이 있을 줄 알았어요.”“그 말, 기쁘게 들어도 되나요?”그녀의 질문에 민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기뻐하려고요. 이런 건 기쁠 때 기뻐해야 하니까.”그들은 오래 앉아 있었다.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척만으로 시간이 흘렀다.유리는 문득 지난밤 이현과 함께 요리했던 순간이 떠올랐다.그때와 지금. 감정의 결은 분명히 달랐지만 이 고요한 안정감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잘 지냈어요?”민우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그러고는 조용히 대답했다.“…매일을 살았어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그게 유리 씨다운 말이네요.”그는 웃었고, 그 웃음은 여전히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그러나 편안함이 전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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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말없이 식탁을 채우는 따뜻한 여백

늦은 오후의 빛이 식당 유리창을 부드럽게 적시고 있었다.분명 해가 떠 있는 시간인데도,파리의 거리엔 느슨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속에서 유리의 그림자도 조용히 길어지고 있었다.그녀는 오늘 가게를 일찍 닫았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조용한 바람 한 줄기가 자신의 마음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조용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주방에서 작은 국물을 끓이며 그녀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누군가와 함께 가만히 식탁에 앉아 뜨거운 국물 속에 그날의 감정을 풀던 순간들.그 순간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였는지 이제야 또렷하게 알 것 같았다.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그리고 이현이, 그 고요한 공기 속으로 들어왔다.그는 말없이 그녀가 끓이던 냄비 쪽을 바라보았다.“무슨 국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배춧국이요. 소금만 넣고 끓인 거예요. 많이 익은 배추라, 그냥 물만 부어도 국물이 깊어요.”유리는 조용히 대답했고, 그의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유리 씨가 끓이는 국은…늘, 설명만 들어도 따뜻하네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그를 향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피하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그 말을 제대로 받아내기에는 아직 마음 한편이 너무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식탁이 차려졌다. 배춧국, 달걀찜, 마른 멸치볶음, 그리고 작게 쥔 두 개의 주먹밥.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상차림이었다.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숟가락이 국물에 잠기고, 젓가락이 천천히 멸치를 집어 올릴 때까지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은 예전의 어색함과는 달랐다.그건 마치, 서로를 기다려주는 조용한 여백 같았다.식사를 마친 뒤,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사람… 민우 씨, 오랜 친구예요?”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이현의 얼굴엔 그리움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게 스며든 불안이 겹겹이 겹쳐 있었다.유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주 오랜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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