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Kapitel 81 – Kapitel 90

216 Kapitel

81. 함께 걸어도 괜찮다는 확신

“…유리 씨입니다. 같이 살고 있고, 내가 지키는 사람입니다.”그 말은 소개이자 경계였고, 동시에 선언이었다.유리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 시선 속에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함께 나온 음식이 놓이고, 와인이 돌고, 형이 무심한 듯 건넨 말 한마디.“요리하신다면서요? 우리 이현이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버텨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유리는 웃으며 대답했다.“요리보다 더 어려운 건 이현 씨 마음이었어요. 입맛은… 오히려 쉬운 편이었고요.”순간, 짧은 정적이 돌았고 이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들었죠, 형?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요.”그 말에 누구도 더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자리에서 나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나, 잘했어요?”이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바라보다 짧게 대답했다.“아니. 예쁘게 했어요.”그 말은 외모에 대한 찬사도, 지나가는 농담도 아니었다.그녀가 자신의 세계 안에 스스로 서려고 애썼던 그 마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이현의 사람’이 아니라 ‘이현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 들어간 자리였다.이제 그녀는 이현 곁에서 당당히 걷는 사람이었다.이현은 그날,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았다.꽃도, 반지도, 촛불도 없었다.그저, 햇살이 길어지고 따뜻한 바람이 처음 커튼을 밀고 들어오던 오후.유리가 만든 콩나물국을 조용히 먹고 난 뒤,식탁 위에 놓인 물컵을 가볍게 돌리던 순간.그때 그는 입을 열었다.“…유리 씨.”“네.” 유리는 물수건을 개다가 손을 멈췄다.“…이렇게 같이 있는 거, 너무 좋아요. 편하고, 익숙하고, 이젠 안 그러면 불안할 만큼.” 그 말은 늘 해오던 그의 고백 같았다.그러나 이어진 문장은 처음이었다.“그래서… 우리, 이걸 좀 더 정식으로 이어가보면 어떨까 싶어요.”유리는 손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에요?”이현은 식탁에 손을 올린 채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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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내 방식대로 말하면

유리는 그날, 빨래를 널고 돌아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이현은 부엌에서 토스트를 굽고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마당에 햇빛이 퍼지듯 느릿하고 평화로운 시간.그 조용한 틈에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현 씨.”“네?”이현은 식빵을 뒤집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나… 결혼이라는 거, 진짜 오래 싫어했어요.”그 말은 아무 예고 없이 그날 아침의 공기 위에 조용히 떨어졌다.이현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유리는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누군가에게 책임지고, 누군가에게 예외 없이 설명해야 하고,법적인 이름으로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거 나는 그게 너무 숨 막혔어요.”“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나로 남지 못할까 봐, 그게 더 무서웠고요.”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말이 끝까지 흘러가도록 기다렸다.유리는 긴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당신이랑은, 뭔가를 묶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오래 같이 살고 있는 느낌이니까.”“그럼, 꼭 말로 내지르지 않아도 결혼이라는 것도 내가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그녀는 작게 웃었다.“그래서 오늘 아침에 세탁기 돌리면서 생각했어요.만약 결혼을 한다면, 당신이랑 같이 세탁망 사러 다니고, 수건 바꾸는 얘기 하면서 그게 우리만의 약속 같으면 그게 진짜 좋은 결혼 같다고.”그 말은 “결혼하자”는 대답이 아니었지만,“당신과 함께 걷겠다”는 가장 유리다운 방식의 대답이었다.이현은 그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조용히 물었다.“…그럼, 우리 지금부터 결혼이라는 단어, 조금씩 일상에 섞어도 될까요?”유리는 잠시 웃었다.“…그 단어, 조금씩 써봐요. 하지만 너무 자주 쓰진 말아요.”“대신, 당신 옆에 있는 일은 매일매일 할게요.”그 말은 계약보다 더 단단하고 서약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만의 사랑이었다.그날, 이현은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확신 하나를 품었다.이 사람과라면, 이 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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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호칭의 일상화

그날 밤, 서로의 이름이 처음으로 하나의 서류 안에 나란히 적혔고,그 글자보다 더 단단하게 그들은 서로의 삶 안에 묵직한 자리로 남았다.빨래를 널고 들어온 유리는 슬리퍼를 벗어놓고 주방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싱크대 앞엔 이현이 서 있었다.손에는 감자를 깎고 있었고, 입가에는 익숙한 조용한 집중이 담겨 있었다.유리는 그의 옆에 선 채 작게 말했다.“왜 갑자기 감자조림이에요?”이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칼질을 멈추지도 않은 채 답했다.“부인이 어제 단무지 하나 남기고 다 먹은 걸 봤거든요.”유리는 그 말에 손을 멈췄다.“…지금 뭐라 그랬어요?”그제야 이현이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부인.”그 말은 사전에도, 서류에도 존재하지만 두 사람의 일상 속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된 단어였다.유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단어, 이상하게 안 어색하네요.”“원래 어색한 단어일 텐데 그냥… 지금은 딱 맞는 것 같아요.”이현은 진지하게 대답했다.“그 말,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내가 불러도 된다는 게 이상하게 뿌듯해서.”유리는 싱크대에 기대어 말했다.“이현 씨가 이제 그런 이름 붙여도 되는 사람이란 게, 나도 괜찮아서 그래요.”그들의 웃음은 어떤 선언도, 기념도 없이 그저 조용히 생활의 틈으로 스며들었다.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던 유리는 이현의 옆에 다가가 작게 말했다.“그럼 나도 한번 불러볼까요.”이현이 고개를 들었다.“…뭐라고요?”유리는 살짝 기대듯 말했다.“남편.”그 말은 조금은 낯설었지만, 그 낯섦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이현은 작게 웃었다.“이름은 버리는 거예요?”“가끔은 이름보다 그런 게 더 따뜻하잖아요.”유리는 조용히 그의 어깨를 툭 쳤다.“그러니까 책임지세요. 감자조림도, 이 말도.”그 밤, ‘남편’과 ‘부인’이라는 단어가 처음 그들의 대화 속에 자리했고,그 이름들이 조금씩 서로를 부르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었다.말은 이름을 만들고, 이름은 관계를 다듬는다.그리고 유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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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나란히 걷는 풍경

그 말에 유리는 순간 눈이 시큰해졌다. 그는 늘 그래왔다.자신보다 그녀의 주변과 속도를 먼저 살피고 단 한 번도 억지로 서두르지 않았다.언니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커피잔을 들었다.“…유리가 예전엔 누구를 데려오면 꼭 뭔가 포장해서 설명했거든.‘이 사람이 왜 괜찮은지’ ‘왜 믿어도 되는지’ 막 설명하느라 눈빛이 흔들렸었는데.”“오늘은, 네가 설명하지 않아서 더 믿음 가.”그 말은 언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축복이었다.유리는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고마워요, 언니.”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그 순간, 유리는 처음으로 가족에게 누군가를 보여주는 일이 무언가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같이 나누는 일’이란 걸 느꼈다.그날 밤, 집에 돌아온 유리는 식탁 위에 이현이 사둔 감귤을 깎으며 작게 말했다.“…우리 엄마는 아직 만나기 어렵대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나는 지금처럼 하루하루 같이 살아가는 것도 이미 충분히 소중하니까.”유리는 그 말에 귤 조각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그럼 나도 하루하루 당신을 내 사람들한테 천천히 소개할게요.”그 말은 아직 닿지 않은 곳까지이현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유리의 방식으로 꺼낸 가장 다정한 미래였다.“엄마가, 오늘 저녁 괜찮대.”유리는 그 말을 꺼내고 나서도 한동안 식탁 위 머그를 말없이 만지작거렸다.이현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정말요?”“네.괜찮다고는 했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그냥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이현은 유리의 긴 숨을 지켜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유리 씨. 내가 가는 거잖아요. 당신 혼자 서 있는 자리 아니에요.”그 말에 유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약속된 장소는 시내 외곽의 작은 반찬가게 옆 소박한 한식 식당이었다.유리는 식당 앞에서 이현과 잠깐 걸음을 멈췄다.“…여기, 내가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데예요.”“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 손 벌리기 싫어서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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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조건의 탈피

이현은 그 말을 듣고 유리의 손을 잡았다.“그럼 이제 당신은 그런 말 해가면서 살아봐요. 내 옆에서.”유리는 눈을 감고 짧게 대답했다.“…네. 그렇게 살아볼게요.”그날 밤, 유리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과거 속에 이현이라는 이름을 앉혔다.그리고 그 이름은 그녀의 새로운 시간이 되는 준비를 조용히 마치고 있었다.S그룹 본관, 회장 전용 집무실.이현은 그곳에 다시 서 있었다. 오랜만이었다.대리인을 내세우고, 의결권을 위임하며 그 공간을 비켜 온 지 벌써 몇 년.그는 단 한 번도 그곳을 ‘자기 자리’라 부르지 않았고, 오늘 역시 그 마음은 같았다.그러나 오늘은 유리를 대신해 이 자리까지 와야만 했다.서이현이라는 이름이 가족의 장부 속 자리에 적혀 있지 않더라도,조유리라는 사람 옆에 있는 그 이름은 누가 부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문이 열리고, 서 회장이 들어섰다.여전히 굳은 자세, 절제된 시선, 그리고 감정 없는 인사.“이현아.”“네, 아버지.”짧은 응답 뒤, 서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곧바로 말했다.“네가 혼인신고를 했다는 얘기, 형수에게 들었다.”그 말은 ‘축하한다’도 아니었고, ‘왜 그랬느냐’도 아니었다.단지 사실 확인처럼 던져진 문장이었다.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원했고, 그 사람이 원했고. 그래서 했습니다.”서 회장은 잠시 무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그 여자는 네 곁에 둘 사람은 아니지.”이현은 그 말에 눈을 피하지 않았다.“왜 아니죠?”“너는 S그룹의 이름을 쓰는 사람이고, 그 여자는… 이 집안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없어.”“가정, 배경, 사회적 위치. 심지어 공개된 이력 하나조차.”그 말은 냉정하고 논리적이었으며,오래도록 이현이 들어온 그 집안의 방식 그 자체였다.이현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저도 그 사람에게 이 집안의 방식을 적용해 본 적 있어요.”“예전엔 ‘내가 이런 집안 사람이라 그 사람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그 생각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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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처음부터 함께 만드는 집

일요일 오후. 이현은 오래된 공책을 꺼냈다.대학 시절, 낙서를 하던 노트 뒷장에는그가 언젠가 혼자 살게 되면 갖고 싶었던 ‘집’의 구조가 손글씨로 그려져 있었다.햇빛이 잘 드는 거실, 주방 옆 작고 따뜻한 식탁,그리고 창가에 놓인 두 사람만의 커피머신.그는 노트를 유리에게 내밀며 작게 말했다.“…이건 예전의 상상이지만, 지금 당신이랑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그릴 수 있어요.”유리는 그 노트를 조용히 받아들었다.오래된 노트에서 느껴지는 그의 과거 온기와, 그 안에 적힌 조심스러운 꿈의 문장들.“‘밤늦게 돌아왔을 때 혼자 켜진 불 말고 누군가가 켜둔 불이 있었으면 좋겠다.’”유리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지금은 내가 그 불을 먼저 켜고 싶어요.”그녀의 말은 따뜻하고 작았지만, 명확했다.며칠 뒤, 두 사람은 새롭게 이사할 집을 보러 갔다.예전처럼 넓고 고급스러운 주거지가 아닌, 조금 더 오래된 동네의 작은 복층 집.창문은 오래됐고, 벽지도 낡았지만 햇살은 다정하게 들었고, 구조는 단정했다.유리는 주방 쪽을 한참 바라보다 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이 집, 우리가 살면서 조금씩 바꿔가면 좋겠어요.”“처음부터 완벽하게 꾸며진 집 말고, 우리가 매일 닦고, 이야기하고, 가끔 다투고 서로의 손길로 바뀌는 집.”이현은 그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완벽해서 들어가는 집이 아니라,우리가 살아서 완성되는 집이면 좋겠어요.”이사 당일. 유리는 작은 주방 선반에 자신이 직접 고른 커튼을 달았다.그가 고른 전자레인지 옆엔 유리의 도마가 놓였고,이현이 선물한 소금그릇 옆엔 유리의 오래된 찻잔이 나란히 놓였다.이현은 작은 손편지를 한 장 남겼다.“우리가 함께 산다는 건 이 공간을 매일 조금씩 당신에게 맞춰가는 일이에요.”유리는 그 편지를 읽고 조용히 접어 주방 서랍에 넣었다.그곳은 이제 두 사람이 살고, 같이 늙어가며, 서로의 소음을 받아줄 ‘우리 집’이었다.밤이 되어 정리가 끝난 공간에 두 사람은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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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마음이 머무는 거실

그녀의 말은 조용했고, 그러면서도 단단했다.며칠 뒤, 이현의 후배가 처음으로 집에 방문했다.후배는 조용히 실내화를 신으며 말했다.“집 냄새가 그 사람 냄새 같아요.”“어떤 사람?” 유리가 묻자, 그 후배는 웃으며 말했다.“살아있는 사람. 함께 살아가는 사람 냄새요.”그 말은 이 집을 ‘우리 둘의 공간’으로 만드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그날 밤, 유리는 일기를 썼다.'오늘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그가 떠난 뒤, 우리 둘만 남은 거실이 처음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처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감정이 된다.”유리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은 뒤 불을 끄고 이현 옆에 조용히 누웠다.처음이라는 이름들이 하나씩, 둘씩 쌓여가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관계를 더 깊게 단단히 묶어주고 있었다.“진짜 안 할 거야?”언니의 말이었다.평일 저녁, 유리가 잠깐 들른 집에서 밥을 먹으며 꺼낸 말.“응. 혼인신고 했고, 잘 지내고 있어.”“사진도 없어?”“없어.”“드레스도 안 입어봤고?”“응. 이현 씨도 안 입어봤을걸.”그 말에 언니는 웃었지만 한참 후에 덧붙인 말은 진심이었다.“…나중에, 네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래.”유리는 그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작은 아파트 복도 끝, 이현은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유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걸 보자 자연스럽게 일어났다.“언니네 다녀왔어요?”“응. 밥 먹었어요.”그 말뿐, 유리는 더 묻지 않았고 이현도 더 캐묻지 않았다.그러나 그날 밤, 샤워를 마친 유리가 머리를 말리며 조용히 말했다.“…이상한가요?”이현은 침대에 기대 앉아 책을 덮으며 물었다.“뭐가요?”“결혼식 안 한 거. 그게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나 봐요.”그 말에는 작은 체념이 섞여 있었다.“다들 그러더라고요. 사진 한 장 없다는 게 좀… 너무 조용한 거 아니냐고.”이현은 작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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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오후 늦은 시간, 가게 문을 닫고 돌아온 유리는 작은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유리야, 나 서울 온 거 아냐. 시간 되면 얼굴 좀 보자.”발신자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그리고 유리에게 ‘오래 전의 나’를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었다.가게를 그만두고 나오던 날,서로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멀어졌던 사람.그 시절, 유리는 모든 관계에서 자기를 방어하느라 바빴고,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도망치듯 떠났던 적이 있었다.그래서일까. 그 사람과 다시 마주하는 일이 어딘가 낯설고도 조금은 무서웠다.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자 유리는 걸음을 멈췄다.단발로 자른 머리, 익숙한 말투,그리고 오랜만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미소.“유리야.”“오랜만.”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앉았다.“여전하네.”그녀가 말했다.“근데 분위기는 좀 바뀌었어.”“그래?”유리는 웃으며 물었다.“예전엔… 눈이 조금 날카로웠는데 지금은…응, 좀 누그러졌어.”그 말에 유리는 짧게 웃었다.“지금은 나를 그렇게 세우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있으니까.”그녀는 그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스스로도 알고 있었다.“요즘은 뭐 해?”“식당 하나 조용히 하고 있어.”“혼자?”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이제는 혼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상인 것 같아.”그 말에는 조심스러운 애정이 담겨 있었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그 속엔 이미 설명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웃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 네 입에서 나오는 거 상상도 못 했을 걸?”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땐… 누가 뭘 물으면 다 설명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지금은?”유리는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지금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먼저 기다려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고 이현이 들어섰다.멀리서부터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그녀가 앉은 테이블로 조용히 다가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유리 씨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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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서로를 마주 보는 식탁

다음 날 아침, 유리는 혼자 일어났다.커피를 내리고, 조용히 빵을 굽고, 창문을 열었다.햇빛이 좋은 날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그 빛 아래 오래 머물지 못했다.부엌 테이블에 앉은 채, 이현이 내리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렸다.그러나 그는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날 오후, 이현은 조용히 주방에 들어와 물잔을 꺼냈다.유리는 말을 걸지 않았다.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금은 말보다 함께 있는 모양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이현이 물었다.“…아직도 화났어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저어보이지도 않았다.대신 작게 말했다.“그날 당신이 나를 잊었다고 느껴졌어요.”이현은 그 말에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나는 늘 당신을 생각했는데 그게 밖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그의 말은 어떤 해명도, 어떤 핑계도 아니었다.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었다.“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야 했는데, 그걸 놓친 건 나예요.”그 말에 유리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말하지 않아도 느끼길 바란다면,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우리는… 서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이현은 그 말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더 조심할게요. 내가 하는 조용한 사랑이 당신에겐 조용한 무관심처럼 느껴지지 않게.”그 말에 유리는 처음으로 조용히 웃었다.“그리고 나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볼게요.”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과하지 않았다.대신 주방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나눴고,거실 한가운데 앉아 각자의 책을 읽으며 때때로 눈을 마주쳤다.그 눈빛 안에는 ‘화해’라는 말이 없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마음이 머물고 있었다.어쩌면 사랑이란, 말없이 오래 머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그들은 서로에게 그렇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유리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이현은 주방에서 무심하게 말했다.“이번 주 금요일, 일정 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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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조용히 꺼낸 가장 오래된 이야기

늦은 밤이었다. 거실 조명은 희미했고,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오랜만에 라디오를 켜두고 있었다.방송에선 청취자의 사연이 흘러나왔다.“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 생신이었어요. 그날은 늘 뭔가 이상하게 멍해요. 시간이 이렇게 흘러도.”유리는 그 말을 듣고 손에 들고 있던 머그를 내려놓았다.그리고 옆에 앉은 이현을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조용했고, 무표정한 듯했지만 어딘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이현 씨.”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작게 대답했다.“응.”유리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혹시… 이현 씨 어머니 얘기, 한 번도 안 한 것 같아요.”그 말에 이현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조용히 라디오에서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고,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내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어요.”그 한 문장에 긴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그날 이후 우리 집에선 ‘엄마’라는 단어가 거의 사라졌어요.”“사진도, 기억도, 이야기도.”“아버지는 바빴고, 형은 어른스러웠고, 나는 그냥…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냈던 것 같아요.”유리는 그 말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이현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그는 말없이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래서 난 누가 내 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걸 무섭게 느끼는 사람인 것 같아요.”“그게 이유도, 인사도 없이 사라졌을 때 남는 감정이 어떻게 내 안을 잠식하는지 어릴 때부터 알아버렸거든.”유리는 그의 손을 살짝 더 감쌌다.“…그래서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그 조심스러움이 느껴졌어요.”“누군가를 안고 싶어하면서도 붙잡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현은 작게 웃었다.“…근데 유리 씨는그걸 자꾸 붙잡게 만들어요.”“당신은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붙잡히고 있는 사람이라서.”그 말은 사랑의 고백보다 더 깊었다.유리는 그의 어깨에 조용히 기대며 말했다.“…앞으로, 그림자처럼 남는 기억이 아니라 함께 지나가는 장면으로 당신 안에 남을게요.”“그리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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