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71 - Chapitre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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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마지막 문 앞에서

유리는 그날 밤 이현이 놓고 간 전세 계약서 복사본을 다시 꺼내 펼쳤다.한참 동안 그 서류 위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아무 말도 없이 그림 속 집의 구조를 천천히 눈으로 따라갔다.주방은 작고, 거실엔 오래된 조명이 있었고, 창밖으로는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그녀는 그 감나무 아래 이현이 앉아 있는 상상을 그림처럼 떠올렸다.그 상상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무섭게 익숙해지는 속도가 오히려 그녀를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함께 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집을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었다.그녀에게는 누군가와 같은 문을 열고, 같은 시간에 불을 끄고,같은 식탁에 앉는 일이 무언가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그녀는 자신이 만든 삶의 방식이 얼마나 외롭고 단단했는지를 알고 있었다.이현이 그 단단한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멀리 함께 올 수 있었던 거였다.그 다음 날. 이현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가게 옆 벽에 기대 기다리고 있었다.유리는 그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평소처럼 다가가 작은 말도 없이 그 옆에 섰다.그날 따라 말이 없었다.하지만 이현은 그 침묵이 그녀에게 필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묻지 않았다.결정했는지, 생각은 다 끝났는지, 혹은 준비는 됐는지를.그는 그녀가 내릴 대답이 지금의 고요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한참이 흐른 뒤, 유리는 작게 입을 열었다.“…집 구경은 한 번 더 같이 가보면 안 돼요?”그녀의 말은 ‘좋다’도 ‘살자’도 ‘이제 그만 망설이겠다’는 선언도 아니었지만,그 말 안에 담긴 감정만큼은 어느 대답보다도 더 분명했다.이현은 입꼬리를 조용히 올리며 짧게 말했다.“네. 같이 가요.”그 말이 끝나고도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그 밤, 그들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마지막 문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유리는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전에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싶었다.이 사람이라면, 같이 아침을 맞아도 괜찮을 것 같고같은 냉장고를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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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안정의 학습

그날, 그들은 함께 걷고 함께 구경하고함께 숨 쉬며 작고 낡은 공간을 ‘우리의 것’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은 천천히 걷혔고,햇살이 작은 마당의 감잎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적은 짐 속에도 수십 겹의 마음이 천천히 풀리고, 묶이고, 다시 정돈되었다.유리는 이현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간 첫날,책상 위치를 놓고 세 번 자리를 바꾸었다.“햇살이 너무 비치면 책이 바래니까…”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책상을 창문 가까이에서 멀리로, 다시 안쪽으로 옮겼다.이현은 그런 유리의 말에 하나도 끼어들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책상 다리를 붙잡고,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맞춰주었다.“…이현 씨는 뭐 불만 없어요?”유리가 마지막으로 책상의 방향을 정하고 나서 물었다.이현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나는 유리 씨가 편한 자리가 나한텐 제일 좋아요.”그의 말은 익숙한 위로도 아니었고, 형식적인 배려도 아니었다.그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처음으로 내놓는 조용한 합의처럼 들렸다.부엌은 유리의 공간이었다.그녀는 자신의 조리도구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이현에게 말했다.“…여기 칼은 이쪽에만 놔요. 그리고 이 칸은 간장류만. 혼동 생기면 내가 힘들어져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메모장을 꺼내 유리가 말한 순서대로 적기 시작했다.유리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내가 좀 피곤하죠?”이현은 그 말에 고개를 들고 웃지 않고 대답했다.“아니요. 정확해서 좋아요. 그리고… 당신이 익숙한 방식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걸 나는 배워야 하니까.”유리는 그 말에 표정을 잃었다.그녀는 그간 많은 사람을 사랑했지만그 어떤 사람도 이토록 조용하게 ‘내 방식’을 인정하고 함께하려 한 적은 없었다.그날 저녁. 작은 공간 안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국을 나누며 그녀는 처음으로 이 공간이 ‘우리 집’ 같다고 느꼈다.숟가락 소리,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이현이 물컵을 건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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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공간의 구체화

“이건 집주인 방식이라면서요?”그의 말에 유리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 내가 더 오래 살아봤으니까.”그녀의 말은 처음으로 ‘이 집’을 ‘우리 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은근한 고백이었다.식사 후, 둘은 나란히 작은 마당 의자에 앉아 햇살을 맞았다.무언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하지만 그 정적은 함께라서 편안했고, 같아서 다정했다.유리는 햇살을 받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나누는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이현은 그런 유리 옆에서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작은 잎사귀를 툭, 떼어냈다.그녀는 그 손끝의 사소한 움직임조차 마치 ‘돌봄’처럼 느껴졌다.그날 하루, 그들은 장보는 리듬, 요리하는 순서,햇살을 맞는 각도까지 서로의 방식에 맞춰 하루를 완성해나갔다.그리고 그 하루는 다음에도 반복되기를 바라는 소중한 리듬이 되었다.‘같이’ 라는 말이 이제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조용한 오후. 빨래를 널고, 함께 요리를 하고,점심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두 사람은 마당으로 나갔다.햇살은 느슨했고, 공기엔 은은한 바질 향이 떠 있었다.유리는 마당 끝 작은 의자에 앉아 천천히 커피를 식히고 있었고,이현은 그 옆에서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있었다.그런 오후는 이제 일상이 되었고, 서로에게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그런데 유리는 문득 조용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이현 씨.”“응.”“혹시… 나 아니었으면 누구랑 같이 살았을 것 같아요?”그 말은 질투도, 시험도 아니었다.그저 가볍게 던진 말,스스로도 왜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그 말은 고요하던 공기 한 가운데에 돌 하나를 던진 듯 작게 파문을 남겼다.이현은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왜 그런 질문을 해요?”유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그냥, 당신이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기다렸던 이유가정말 ‘나’여서였는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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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배려의 거리감

그 말은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엔 다정한 확인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유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정리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어서 오세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이현은 그녀 옆에서 작게 웃었다.성운은 금세 익숙하게 식탁에 앉았고,이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유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싱크대 앞에 섰다.그녀의 손이 다시 익숙한 칼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이 공간에 이현의 친구가 앉아 있다는 것.그 사실은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현이 웃는 얼굴로자연스럽게 ‘우리 집’이라 말하는 순간, 그 어색함은 천천히 부드러워졌다.“성운아, 유리 씨 된장찌개 진짜 맛있어. 내가 먹어본 된장찌개 중에 젤 조용한 맛이랄까?”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조용한 맛이 뭐예요?”이현은 그녀를 향해 웃었다.“먹는 동안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하는 맛.”성운은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그런 맛이야. 너 되게 잘 어울린다. 둘이 이렇게 있는 거.”그 말에 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그 말이 어색하지 않게 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우리 둘이 있는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비쳐질 수 있다는 건그만큼 이현과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였다.저녁 식사 후, 성운이 돌아가고 두 사람만 남은 집.유리는 식탁에 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어요.”이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건 아마 우리가 이제 ‘보여져도 되는 사이’가 됐다는 뜻 아닐까?”유리는 그 말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예전엔 이런 거 다 두렵고, 귀찮고, 숨기고 싶었는데…”“지금은?”유리는 이현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지금은 누가 봐도 상관없어요. 이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게 내가 선택한 거니까.”그 말은 어느 고백보다 더 단단했다.그리고 이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그 말 한마디를 그저 온전히 기억 속에 새겼다.그날 밤, 그들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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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일상의 예열

그 농담에 유리는 피식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그날 오후. 둘은 세탁기 앞에 나란히 앉아세제를 몇 스푼 넣는 게 맞는지를 두고 짧은 ‘타협’을 벌였다.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방식’을 배워가는 첫 번째 시도였다.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를 조용히 들여다보며 처음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조율하는 관계로 걸어가고 있었다.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법.그리고 그 틈을 자신만의 속도로 메워주는 법.그들의 일상은 그날 한 뼘 더 자라 있었다.밤공기가 차분하게 식어가던 시각,유리는 거실 조명을 낮춰두고 이현이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따뜻한 물이 담긴 머그를 건넸다.“카페인 끊는다더니 아직도 매일 마시죠.”그녀의 말투엔 잔소리보다도 조용한 일상 같은 온기가 섞여 있었다.이현은 머그를 받아 양손으로 감싸쥐며 웃었다.“이제는 카페인이 아니라 유리 씨 목소리가 더 깨우는 것 같아서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그 웃음은 이 집 안에서 익숙한 음악처럼 번져나갔다.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두 사람의 공간은 이미 완성된 대사처럼 무게와 리듬이 있었다.잠시 후, 이현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유리는 그의 옆에 앉아 조용히 책을 펼쳤다.시간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그저 조용한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그리고 창밖에서 흔들리는 바람의 결이 서로의 마음을 연결하고 있었다.어느 순간, 이현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유리 씨.”“네.”“같이 산다는 게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안심되는 거라면, 나 진작 했을 것 같아요.”그의 말은 감정을 드러내려 하기보다감정을 내려놓는 방식의 고백처럼 부드러웠다.유리는 책을 덮고 그를 바라보았다.“…그런데 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사람이 처음이에요.”그녀의 말은 이현이 들려준 말보다 더 낮고, 더 천천히 이 밤에 흘러들었다.그들은 어떤 사랑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그 밤의 조용한 평온이 말보다 더 깊게 그들의 마음을 감싸 안고 있었다.유리는 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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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거절의 잔향

그녀 자신도 놀랐다. 예전 같았으면 다녀와요라고 차갑게 말하고 조용히 자신을 지켰을 텐데.이현은 그 말에 잠시 숨을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고개를 저었다.“…유리 씨한테 괜한 상처될 수도 있어요. 그쪽은…당신을 환영하지 않을 거예요.”유리는 그 말에 손끝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나는 괜찮은데요.”그녀는 작게 말했다.“…나는, 지금쯤이면 당신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그녀는 그 말이 서운함도, 서글픔도 아닌 순수한 자기 확인의 말이란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이현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안았다.“곁에 있어요. 지금처럼. 멀어지는 거 아니에요.”그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 말로 채울 수 없는 낯선 경계가 이미 둘 사이에 생기고 있었다.유리는 그날 밤 이현의 그림자가 현관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멀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믿고 싶어.그러나 그 조용한 틈에 들어온 그림자는 이미 그녀의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다.이현이 떠나고 그 집엔 조용한 바람만 남았다.문이 닫힌 순간부터 유리는 익숙하게 돌아오던 발소리 대신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시작했다.작은 주방에서 혼자 요리를 하고, 마당에 물을 주고,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들.그 모든 일상이 이현 없이도 반복될 수는 있었지만 그 리듬은 어딘가 기울어져 있었다.그녀는 그런 기울기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현이 없는 공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되살아나는 감정들이 있었다.‘혹시 다시는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그 집에서 유리 씨는 부담이라고 하면.’‘형이, 어머니가, 그쪽 가족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이현이 가기 전 남긴 “그쪽은 당신을 환영하지 않을 거예요.”그 말 한 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그녀는 평소처럼 커피를 내렸고 평소처럼 아침 식탁을 차렸지만누군가가 빠져 있다는 감각은 온기 없는 공간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한편 이현은 형을 만나고 있었다.서울 외곽의 한 병원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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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말하지 못한 것들이 터질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유리는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조명이 없는 공간은 낯설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그녀는 그 어둠 속에 오래 익숙해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이현은 현관에 들어서며 작게 말했다.“…나 왔어요.”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이현은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그녀의 앞에 섰을 때,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보고 싶었어요.”유리는 그 말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식탁 위 머그잔 옆에 놓인 핸드폰 화면엔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읽지 않음으로 남겨져 있었다.“…문자 봤어요.”유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그 차분함 안엔 무언가 오래 눌러온 감정이 곧 흘러나올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보고도… 답을 못 했어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이현은 그녀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괜찮아요.”그 말에 유리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 말,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뭐가요?”“‘괜찮다’는 말이요.”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말했다.“늘 그래요. 나는 조금 늦게 말해도 괜찮다고, 조금 덜 표현해도 괜찮다고, 당신은 늘 기다려준다고 했죠.”“근데, 당신은 항상 그렇게 나를 배려하는 말로내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얼마나 혼자 삼켜왔는지를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요.”이현은 그제야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유리 씨,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요?”그 말에 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당신은 늘 잘했어요. 너무 잘해서 내가 더 말 못했어요.”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식탁 아래에서 꼭 움켜쥐고 있었다.“…당신이 가족 일로 떠난 그날, 나는 내 자리를 누가 치워갈까 봐 무서웠어요.”“그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과거가 당신의 이름으로 내 옆에서 나를 밀어낼까 봐…”그녀는 처음으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괜찮다는 말 대신, ‘네가 없어지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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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동행의 언어

그들의 하루는 그렇게 평소처럼 시작되었지만, 그 평범한 일상 속엔 조금 다른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식사를 마치고 둘은 마당에 나란히 앉았다.감나무 그림자가 그들 사이로 드리워졌고, 이현은 조용히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유리는 그 손 위에 다른 손을 얹었다.“고마워요. 나 기다려줘서.”그녀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기다린 거 아니에요. 같이 걸은 거죠.” 그 말은 더 이상 누가 앞서거나 뒤처지는 게 아니라는 가장 따뜻한 동행의 언어였다.그날 하루, 두 사람은 멀리 가지 않았다.작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가고, 오래된 국그릇을 하나 새로 샀으며,이현은 유리 몰래 주방 장갑을 새로 바꿨다.그는 이제 그녀가 지친 밤이면 말 없이 등 뒤에 서 있고,그녀는 그가 말없이 앉아 있을 땐 따뜻한 물을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사랑이 크게 고백되지 않아도 하루 속에 분명히 묻어나는 것임을 두 사람은 조용히 배워가고 있었다.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말로 붙잡지 않아도 흐트러지지 않는 온기 속에 머물고 있었다.햇살이 유난히 맑던 늦은 오후, 유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이현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그냥 오늘… 우리, 좀 걷고 싶어요.”그 말은 언젠가 그가 먼저 꺼냈던 말과 닮아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유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이 되었다.작은 가방 하나. 긴 팔 셔츠를 접어 걷고, 마당 끝에 걸어둔 스니커즈를 신었다.이현은 따로 묻지 않았다.그저 유리의 발걸음 속도에 자신의 리듬을 맞춰 걸었다.그들이 향한 곳은 동네 끝 오래된 커피집.유리가 예전부터 자주 가던 곳이었지만 이현과 함께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여기 사장님이 커피보다 사람을 더 잘 끓여요.”유리는 농담처럼 말했고, 이현은 웃었다.그 작은 유머 속에는 유리가 이 공간을 얼마나 편안하게 여겨왔는지가 자연스레 담겨 있었다.그들은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 마주 앉기보다 같은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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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말하지 않아도, 닿는 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조용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집 안엔 낮의 온기보다 더 부드럽고 은은한 공기가 흘렀다.이현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에 물을 올렸다.유리는 거실 창가에 앉아 발끝을 말고 앉은 채 천천히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오늘 고마워요.” 그가 먼저 말했다.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왜요?”“그런 곳들.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들, 당신의 시간들. 그런 걸 나한테 보여준 거.”그의 말은 크지 않았지만 그 속엔 분명한 감동이 있었다.유리는 잠시 침묵하다 작게 웃었다.“당신은 보여준 걸 고마워하고, 나는 받아준 걸 고마워하고 있어요.”그녀의 말에 이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엔 묻지 않음이 있었다.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감정을 꺼내든 혹은 꺼내지 않든 자신은 괜찮다는 묵직한 기다림.유리는 그 눈빛 앞에서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이현 씨.”“네.”“나는… 누군가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늘 어렵게 생각해왔어요.”그녀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해버리면 무언가 확실하게 소유하거나 내줘야 할 것 같아서.”“그래서 늘 조심스러웠고, 그만큼 늦었고…”이현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유리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근데 지금은요,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감정 안에 있는지 스스로 너무 잘 알아요.”“그래서 굳이 말로 확인하고 싶지 않아요.”그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진한 고백이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작게 웃었다.“…알아요. 그 말 안 해도 지금 당신이 무슨 마음인지.”유리는 그 손을 꼭 쥐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구보다 명확하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그리고 이현은 그 말 없는 고백을 누구보다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그 밤, 둘 사이엔 말보다 진한 감정이 조용히 오래도록 머물렀다.토요일 오전. 이현은 회의 일정이 생겼다며 아침 일찍 외출했다.유리는 그가 현관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당분간 움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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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시선의 대치

그 말은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약속이었다.이현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때도, 당신은 내 옆에 있어요.”그들의 사이에는 오늘을 준비한 사람이 있었고, 그 준비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다.이제 둘은 서로에게 기다리는 사람도,뒤처지는 사람도 아닌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가게를 잠깐 쉬기로 했다.이현이 반나절 연차를 썼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그냥 나른하게 집에 머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창문을 열면 봄기운이 제법 짙게 들어오고 있었고,주방에는 오전에 남긴 장국 냄새가 미묘하게 퍼져 있었다.모든 게 익숙하고, 따뜻하고, 너무 조용했다.그래서였을까. 초인종이 울렸을 때, 유리는 잠깐 숨을 멈췄다.“누구예요?”이현이 나서기 전, 유리가 문을 열었다.문밖에 선 사람은 이현의 형수였다.깔끔한 셋업 수트에 눈썹 하나 흐트러짐 없는 얼굴,그리고 유리를 올려다보는 매끈하지만 낯선 시선.“…아, 당신이구나.”형수는 마치 이미 얼굴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반쯤 웃으며 말했다.“서 회장님 댁에서 지금 같이 계신다는 분.”‘서 회장님 댁.’‘지금 같이 계신다는 분.’모든 단어가 유리라는 사람을 이현 옆에 둘 수 없는 그 외부의 존재로 규정하는 말처럼 또렷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 유리예요.”“나, 이현이 형수예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해서 왔어요.”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문장 끝은 명확했다.이현이 방에서 나왔을 때 형수와 마주친 장면은 잠깐의 정적을 만들었다.“형수… 무슨 일이에요?”“어머, 너 아직 이 집에 있었구나. 나 그냥 인사도 할 겸 들른 거야.”그러면서도 시선은 다시 유리에게로 향했다.“실은 우리 쪽에서 조만간 작은 가족 식사 자리가 있거든.이현이 올 수밖에 없는 자리인데… 그쪽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그 말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에게 조용히 들이대는 경계였다.유리는 말없이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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