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41 - Chapter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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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 자리는 내가 만든다.

다음 날. 유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가게를 열었다.어제 이현과의 대화는 그녀 안에 쌓였던 불안과 두려움이온전히 사라지게 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의 발걸음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게 할 만큼의 힘은 되었다.“오늘은… 아무도 제 자리를 정해주지 않게 제가 정리하겠습니다.”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유리는 칼을 들었다.오늘의 재료는 예상치 못한 손님을 위해 준비되어야 했으니까.점심시간 무렵. 유리의 가게에 익숙하지 않은 고급 차량이 멈춰섰고, 정장 차림의 손님들이 들어섰다.“여기가… 조유리 셰프님 가게 맞죠?”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약은… 없으신데요?”“없습니다. 그냥… 소문 듣고 찾아왔어요.”그들은 국내 톱 그룹 임원들이었고, 유리에게도 일종의 ‘시험대’ 같은 자리였다.“조유리 셰프, 한 번 제대로 먹어보겠습니다.”그 말은 격려가 아니라 경계였고, 동시에 무언의 압박이었다.그러나 유리는 조용히 앞치마 끈을 고쳐 맸다.‘누가 와도, 내 요리는 변하지 않아.’그건 유리만의 방식이었고, 그녀만의 자존심이었다.그 시각. 이현은 본가에서 한소정 여사와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이현아. 언제까지 이런 어린애 같은 고집 부릴 거니?”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어머니. 이건 고집이 아니라 선택이에요.”“그 여자, 우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선 견딜 수 없어.”“그래서 그 사람이 도망치면 제가 다시 붙잡을 거고, 세상이 뭐라고 해도 제가 그 사람 곁에 있을 거예요.”그의 대답은 이전보다 훨씬 확고했고, 더 이상 타협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소정은 그 표정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좋아. 그럼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자.”가게에선 유리가 직접 만든 장어구이가 VIP 손님들의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한 입 먹은 뒤, 긴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리더 격인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다르네요. 조유리 셰프만의 맛이.”그 말 한마디에 주방에 서 있던 유리는 비로소 작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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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시선 뒤의 침묵

‘이유 없는 압박이 아니라 계획된 시나리오.’그걸 모를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그 말, 이번 주까지만 기다릴게.”형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그 시각. 유리는 요리사로서의 이름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셰프님, 해외 셰프 협회에서 콜라보 제안이 들어왔어요.”“이탈리아 쪽도 반응 좋아요.”언젠가 바라던 일이었지만, 그녀의 마음 한켠은 불안이 스며들고 있었다.‘나는… 이걸 정말 바랐던 걸까?’이현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세상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그날 밤. 이현과 유리는 서로 피곤한 얼굴로 가게에 마주 앉았다.“오늘도 많이 힘드셨죠?”유리가 먼저 말을 건넸다.“조유리 씨야말로… 이제 대한민국 최고 요리사 되시겠네요.”“그런 말씀… 무겁게 들려요.”“…우리, 같은 방향 보고 있는 거 맞나요?”이현의 말에 유리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에요?”“요즘 유리 씨, 나한테만 조심스럽고 세상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잖아요.”“…그건, 이현 씨 세계가 더… 두렵고 어렵기 때문이에요.”그 말에 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그렇게까지 어려운 사람 아니었는데요.”유리는 고개를 숙였다.“…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이 요즘 제일 싫어요.”이현의 말은 조용했지만 날카로웠다. 유리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둘 사이엔 처음으로 언어가 아닌 침묵이 더 깊게 내려앉았다.그날 밤, 이현은 혼자 가게 뒷골목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불을 붙인 담배 끝이 그의 손끝보다 더 떨리고 있었다.‘같은 방향인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했나.’그 말이 그의 가슴 안에서 낮게, 오래도록 울리고 있었다.유리는 조심스럽게 이현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이현 씨.”“네.”“잠시만요, 저 혼자… 좀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요.”그 말은 마치 조심스럽게 그려진 선처럼 둘 사이에 새로운 벽을 그었다.이현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입술만 달싹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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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두 번째 시작

그날 밤. 둘은 말 없이 같은 자리에서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나눠 먹었다.그것만으로도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충분히 사랑하고 있었다.서로를 향해 다시 작은 걸음을 내딛은 밤이었다.아침이슬이 내려앉은 골목길.유리는 식지 않은 된장국 냄새를 따라 천천히 눈을 떴다.주방엔 이현이 서툴게 계란을 굽고 있었다.“오늘은 내가 밥 준비해도 될까요?”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서툴고 그렇기에 더 따뜻했다.유리는 미소를 지었다.“…이번엔 태우지 마시고요.”“유리 씨가 계속 봐주면 태우지 않아요.”그 대화 속엔 서로가 더 이상 벽을 두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이 담겨 있었다.오후가 되어 이현은 이우가 주재한 이사회에 참석했다.그곳은 서이현의 ‘사적인 감정’ 따윈 아무도 관심 없어 보이는 냉정한 공간이었다.“오늘부로 내 입장, 공식적으로 밝힙니다.”회의장 안이 조용해졌다.“앞으로 조유리 씨와의 관계, 그 누구도 간섭하거나 견제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이우는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말, 아버지께서도 들으셔야겠지.”“네. 들으셔야죠.”이현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그 순간, 이현과 이우 사이 치열한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한편, 유리는 가게에서 새로운 메뉴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손님들의 반응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고,유리의 이름은 요리사로서의 자리 안에서도 확고하게 빛나고 있었다.이현과의 관계, 자신의 요리사로서의 자리.그 모든 게 이제는 더 이상 서로의 걸림돌이 아니라서로를 채워주는 원동력이라는 걸 유리는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그날 밤.둘은 아무 말 없이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나눠 마셨다.“이현 씨.”“네.”“이제…다시 시작해도 되겠죠?”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미 우린 다시 시작했어요. 다만 이번엔 좀 더 천천히, 좀 더 깊게.”유리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기대며 그의 손을 잡았다.서툴지만 단단한, 두 번째 시작이었다.이현이 정면으로 가족을 상대로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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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교묘한 스캔들

그 시간. 유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레스토랑 런칭을 준비하고 있었다.“조유리 셰프님. 정말 S그룹과 독립하시는 건가요?”“네. 이제 제 이름으로 제 식탁을 만들고 싶어요.”그녀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했고,더 이상 누구의 보호 아래도 서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그날 밤. 한소정 여사는 언론을 통해 둘을 정면으로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S그룹 대표, 내부 결속 깨뜨린 채 외부 셰프와의 사생활로 도마 위’‘조유리 셰프, 실력 논란 속 S그룹 내부 파열음의 원인으로 떠올라’파장은 생각보다 더 거세게 퍼졌다.유리는 가게에서 그 기사를 보고 깊은 숨을 삼켰다.“이현 씨… 괜찮으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이현은 고개를 젓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요. 유리 씨만 옆에 있어주면 이런 거, 다 이겨낼 수 있어요.”유리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기댔다.“…저도 이제는 숨지 않을 거예요.”그렇게 둘은 더 깊게, 더 조용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그 포옹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연대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만큼차갑고 단단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그날 밤. 유리는 늦게까지 레스토랑 주방에서 새로운 메뉴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이 세상은 이미 그녀를 향한 새로운 스캔들로 들끓고 있었다.‘조유리 셰프, 과거 스캔들 연루설’‘서이현 대표, 조유리 셰프와의 관계 유지 위해 그룹 비자금 유출?’기사 제목들은 유리와 이현, 그들의 이름을 교묘하게 엮어 두 사람을 흔들어놓고 있었다.“이현 씨… 이게… 뭐예요.”유리는 손에 핸드폰을 쥔 채 입술을 떨었다.그 순간, 이현의 핸드폰에도 언론사, 이사회, 수십 통의 전화가 쏟아졌다.“누구야.”이현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이런 짓을 했어.”하지만 그건 이미 예상된 공격이었다.“어머니겠지.”그는 스스로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유리는 조용히 이현을 바라보았다.“…저 때문에 이현 씨가…”“조유리 씨.”그녀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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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밀려난 자리

그녀의 자존심, 자신의 손으로 세워왔던 모든 신념이 서서히 균열을 내고 있었다.그녀는 숨을 삼키고 조용히 두 손을 꼬옥 쥐었다.‘흔들리지 마, 조유리. 이현 씨를 믿고, 우릴 믿고… 끝까지 버텨.’그러나 그 다짐조차 오늘의 어둠 앞에선 쉽게 휘청였다.다음 날.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마주했다.이현의 사무실 안. 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그녀의 발걸음도, 그녀를 바라보는 이현의 시선도 둘 다 어색했고 서툴게 멈췄다.“…이현 씨.”“유리 씨…”둘은 동시에 말을 꺼냈지만 그 말들은 서로 닿기 전에 허공에 부서졌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 저 때문에…”이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요.”하지만 그의 말투에도 어느 때보다 피로감과 누르지 못한 깊은 한숨이 배어 있었다.그들의 대화는 둘 사이의 문제라기보다 세상이 만들어낸 골짜기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우리는…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고 했는데.”이현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했었죠.”그러나 그 말들이 서로를 안심시키기보다는 어쩐지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밀어 넣는 듯했다.그리고, 그날 오후. 이현의 자리에서 그의 이름이 걸린 명패가 조용히 내려졌다.‘사임’ ‘대표직 이현 퇴진’ ‘경영권 재편’이사회와 언론이 만든 거센 파도가 그를 완전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서 밀어냈다.그 사실은 유리에게 더 이상 상대방이 되어줄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의 벽이었다.같은 시간. 유리의 가게 앞에도 폐업 권고 스티커가 붉게 붙여졌다.‘보건 위생 조사 실시. 사업 중지 권고.’더 이상 가게조차 그녀의 자리를 지켜주지 못했다.둘 사이의 거리는 처음보다 훨씬 가까워졌지만,세상이 벌려놓은 틈은 그보다 더 크고 깊었다.이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S그룹이라는 이름은 이젠 그의 명함에서도, 그의 사무실 문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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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낡은 고백

유리는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던 칼을 이젠 아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버렸다.그녀는 그동안 요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버텨왔고 그 안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아왔다.하지만 그곳에서조차 이젠 머물 수 없게 되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요리 외의 것들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오래 걷던 길의 골목. 평소라면 지나쳤을 작은 꽃집,커피가 식은 작은 책방, 평범한 사람들 속을 서성이는 시간.그녀는 처음으로 조유리라는 사람을 요리사라는 이름 없이 그냥 ‘유리’라는 이름만으로 이 거리에 내보내고 있었다.그건 생각보다 더 쓸쓸했고 예상보다 더 자유로웠다.“…괜찮아. 이현 씨 없이도 나는 괜찮을 수 있어.”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홀로 서보려 했지만그 말의 끝에는 늘 눈물처럼 이현이라는 이름이 맺혀 있었다.한편. 이현은 S그룹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떠난 뒤 작고 낡은 건물 한 층을 사무실로 꾸미고 있었다.예전의 호화롭고 냉랭한 공간이 아니라, 햇살이 스며들고 텀블러 위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다.‘이곳에서 다시 시작하자.’그는 유리 곁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손에 계획서와 펜을 쥐었다.하지만 그의 손끝에도 그녀의 부재는 차갑고 무겁게 스며들어 있었다.어느 흐린 오후. 유리는 가게 뒷주방에서 우연히 한 상자를 발견했다.그 안에는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낡은 편지들과 오래된 메모지들이 담겨 있었고, 그 안쪽 가장 밑에서한 장의 편지를 찾아냈다.[조유리 씨에게.]이현의 글씨였다. 손끝이 떨렸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편지를 열어보았다.그 안엔 이현이 자신에게 주지 못했던 낡은 감정들이 낯설고 조심스러운 문장으로 담겨 있었다.‘유리 씨. 언젠가 당신이 제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그래서 지금 이 말을 꼭 남겨두고 싶었습니다.당신 없이 저는 아마 아무 맛도 없는 사람일 거예요.당신이 없는 세상,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유리는 손끝을 덜덜 떨며 그 편지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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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용기 없는 체념

그 제목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조유리라는 사람 자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잔인한 한 줄이었다.이현은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손끝에 힘이 풀렸다.“…어머니.”그의 입술 끝에서 비죽이 새어나온 어머니라는 단어조차 오늘따라 낯설고 차가웠다.그는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막상 그 칼날이 유리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함께 찢어버리려 드는 순간,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유리는 그 뉴스를 평범한 손님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카페 안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마주했다.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듯마구잡이로 소비했고, 그녀는 그것을 말없이 듣고 있어야 했다.‘내가… 누구지?’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유리라는 사람의 정체가이렇게 하루아침에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가장 깊은 곳부터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핸드폰 화면 너머 세상은 이제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세상이 아니었고,사람들은 그녀가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그녀가 숨기고 살아왔던 과거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유리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그럴수록 이현의 얼굴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조차 더 이상 자신이 마주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밤이 되어서야 서로의 번호를 수십 번 눌렀지만 둘은 끝내 걸지 못했다.대신 이현은 그녀가 혼자 숨 쉬고 있을 낡은 가게 앞에 혼자 서 있었다.그녀는 그가 거기 있을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그날 밤.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지만 그 어떤 때보다 멀고 낯설었다.말 한마디만 하면 모든 오해가 풀릴 것 같으면서도 그 한마디조차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유리는 혼자서 천천히 주방 불을 껐다.그 불빛이 꺼지는 순간, 이현 역시 그 자리에서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그들이 서로 마주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아니, 이번엔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질지도 몰랐다.밤은 조용했고, 모든 불빛이 꺼진 골목 끝 유리는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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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동반자의 팀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빛으로 창문 틈새를 타고조유리의 방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그녀의 마음 속엔 여전히 어둠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낡은 앨범을 펼치고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수십 번 부정하고 수천 번 외면했던 그 이름. 그 얼굴.‘아버지.’그 이름은 유리의 입 안에서 한참을 맴돌다쉽게 소리 내어 말해지지 않았다.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이름을 도망치지 않고 직접 입에 올려야 했다.그래야만 그녀는 이현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그래야만 자신의 과거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자신 스스로 정리하고 그 이후의 삶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가장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아버지가 머무는 병원으로 향했다.좁고 오래된 복도. 인공 조명 아래 차가운 바닥 위를 구두 소리 하나 없이 그녀는 천천히 걸어갔다.병실 문 앞. 이름표 위에 쓰여 있는 친부의 이름이 마치 오래된 채무처럼 유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그녀는 숨을 들이쉬고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내가 이 문을 열 수 있을까?’문 앞에서 주저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조용히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다.서이현이었다.그는 그녀가 이 순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이겨내기를 바랐고그렇기에 그녀가 보지 않는 거리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한참을 기다린 끝에 유리는 마침내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문이 천천히 열렸다.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한 남자.그녀가 수십 년간 애써 외면해왔던 자신의 피의 절반.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시간은 그 자리에서 오래 멈춰선 듯 느리게 흘렀고유리는 한참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오랜만이에요. 아버지.”그 말은 유리 자신에게조차 낯선 감정이었다.분노와 슬픔과 허무가 뒤섞인 말.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유리는 이번만큼은 그런 무시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당신을… 이젠 미워하지 않아요. 그냥… 그게 당신이고 그게 제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려 해요.”그녀의 말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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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오래된 리듬

이제 그 누구도 그들 사이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한소정조차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유리와 이현은 다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러운 일상을 나누고 있었다.가게 앞 작은 평상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커피를 나눠 마시며그들은 특별하지 않은 대화로 하루를 시작했다.“이현 씨, 오늘은 제가 점심 사줄까요?”유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이현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좋죠. 이번엔 조유리 셰프님 추천 메뉴로.”이제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됐고,더 이상 긴 설명이나 서투른 변명도 필요 없었다.둘은 마치 오래된 팀처럼 서로의 리듬에 자연스럽게 맞춰지고 있었다.오후가 되어 이현은 새로 출범한 자신의 회사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유리 앞에 조심스럽게 내밀었다.“조유리 씨. 우리 회사 첫 프로젝트, 당신하고 하고 싶어요.”유리는 놀란 듯 명함을 받아 들었다.“제 요리로요?”“조유리 셰프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만들어보죠. 이번엔 제가 당신 이름에 기대고 싶어요.”그 말은 서이현답지 않게 솔직했고, 유리답지 않게 조용히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이현 씨. 좋아요. 그럼 우리 일도 같이, 사랑도 같이 한 팀으로 해봐요.”둘의 악수는 가벼웠지만 그 속엔 과거 그 어떤 약속보다더 단단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며칠 후. 두 사람은 한 언론사의 요청으로 첫 공식 커플 인터뷰를 준비하게 되었다.“정말 하실 거예요? 대표님이랑 셰프님이 공식으로 같이 인터뷰라니.”스태프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이제 숨기지 않을 거예요.”유리의 말은 차분했지만 확고했다.이현도 그녀의 말에 미소 지었다.“숨기고 사는 거 너무 지쳤거든요.”그들의 손끝이 다시 자연스럽게 맞닿았다.이번엔 세상 앞에서도 그들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리고 인터뷰 당일. 둘은 나란히 앉아 카메라 앞에 섰다.둘 사이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따뜻했고, 기자가 그들의 손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서이현 대표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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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안전한 식탁

“조유리 씨. 전 당신 옆에 서는 게 아니라 당신 뒤에서당신 세계가 얼마나 멋진지 지켜보는 사람일 거예요.”그 말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고, 그렇기에 더 울림이 컸다.유리는 그의 손등을 조용히 감싸며 웃었다.“…그럼 가까운 자리에서 제 세계 보실래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최고의 자리에서 박수칠게요.”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사랑의 확신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가장 성숙하고 단단한 신뢰의 언어였다.그리고 세계 요리 대회 출발 당일.이현은 공항까지 배웅하며 유리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봤다.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여자가 아니라스스로 누구보다 빛나는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여자였다.‘이젠 내가 그 사람 세계 안에 머물 수 있어서 다행이다.’이현은 그녀의 작은 뒷모습이 자신의 세계 전체보다 더 크고 빛나 보이는 걸 천천히 인정했다.그것만으로도 이젠 충분했다.세계 요리 대회 결승 무대.수백 명의 관객과 수십 대의 카메라가 유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쫓고 있었다.그러나 유리는 그 수많은 시선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녀의 손끝은 어느 때보다 차분했고, 그녀의 눈빛은 이곳이 마치 자신의 주방인 양 익숙하고 안정적이었다.이현은 그 무대 아래 가장 관객석 끝자락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수많은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이현의 눈엔 유리 한 사람만 보였다.‘지금 이 순간, 당신이 제일 멋져요.’그의 속삭임은 소리 내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크고 진하게 유리에게 닿을 것 같았다.요리가 완성되고, 유리는 마지막 플레이팅을 마쳤다.그녀의 요리는 평범한 한식이 아니라 그녀만의 색으로 풀어낸 기억의 요리였다.‘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그 따뜻한 국. 그리고 이현 씨가 내게 남긴 가장 뜨거운 온기.’그녀는 그 모든 기억과 사랑을 한 접시에 담아냈다.심사 결과는 압도적이었다.유리는 세계 요리 대회의 최종 우승자로 호명되었다.수십 개의 플래시, 카메라,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고그녀는 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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