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당신을 버릴 차례: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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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효찬이 답답하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맑음이 또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약물을 먹었어. 이번에는 양도 많아서 정말 위험했어. 다행히 응급 처치가 잘돼서 고비는 넘겼다.”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들은 남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자신이 도착하기 전 맑음이 생사의 경계까지 갔다는 뜻이었다.‘그래도 살았어. 다행이야.’안도도 잠시, 남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또 그 약이라고? 대체 누가 애한테 이런 짓을 해?”이를 악문 목소리에는 살기까지 묻어 있었다.효찬의 말을 들은 영은은 울음소리를 더 키웠다.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떨며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연기했다.“나도 정말 모르겠어...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생겨? 맑음이는 아직 어린애인데 대체 누가 이런 짓까지...”남우는 무심코 영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너무 울지 마. 내가 범인 꼭 찾아낼 거야. 맑음이한테 이런 짓을 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게.”그 말에 영은의 눈에 잠깐 불안이 스쳤다.영은은 남우의 옷자락을 붙잡고 더 서럽게 우는 척했다.“꼭 잡아야 해. 맑음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도 못 살아...”울먹이는 목소리가 복도에 퍼졌다.효찬은 안경을 고쳐 쓰고 차분히 설명했다.“이번 약물은 맑음이 연이랑 같이 먹은 음식에서 검출됐어. 둘이 원래 친하잖아. 연이도 많이 놀랐고, 자기는 음식에 그런 게 들어 있는 줄 전혀 몰랐다고 해.”“현재 정황만 보면 연이 쪽에서 들어온 음식이 문제인 건 맞아. 다만 아직 약물 출처가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누가 일부러 넣었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고.”임연이라는 말을 들은 남우의 표정이 더 굳었다.“임연이든 누구든 상관없어. 내 딸을 건드렸으면 그냥 안 넘어가.”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남우는 임씨 집안에 압박부터 넣기로 했다.곧바로 비서에게 전화했다. “임산그룹 쪽이랑 진행 중인 사업 전부 확인해. 내일부터 하진그룹과 임산그룹 측의 모든 거래를 중단해. 하나도 남기지 말고.”전화를 끊은 남우는 처치실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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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남우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차갑게 대답했다.[범인이 확인될 때까지 임산그룹과는 어떤 협력도 하지 않겠습니다.]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임빈에게 더 설명하거나 항의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핸드폰을 움켜쥔 임빈은 화를 참지 못했다. 재계에서 하씨 집안의 영향력은 컸고, 하진그룹은 오랫동안 임산그룹의 주요 사업 파트너였다.남우가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으면서 진행 중인 여러 사업이 멈출 위기에 처했고 자금 운용에도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하남우... 이 자식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군!”임빈이 분노를 터뜨렸다. “의심 하나만 가지고 거래를 전부 끊어?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물론 임빈 측이 하진그룹과의 협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해도 다른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잠시 생각하던 임빈은 핸드폰을 들어 강씨 집안의 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회장님. 임빈입니다.”“요즘 바쁘신가요?”전화기 너머로 강한철 회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아이고, 임 대표. 정말 오랜만이네요.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하셨어요?]임빈은 하씨 집안과 벌어진 일을 간단히 설명한 뒤 본론을 꺼냈다.“지금 상황을 보면 저희 회사는 당분간 하진그룹과는 일을 같이 하기 어렵게 됐습니다.”“우리 두 집안도 오래 알고 지냈으니 앞으로 사업 협력 범위를 조금 더 넓혀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서로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말이에요.”강한철은 바로 답하지 않고 잠깐 생각했다.[갑자기 생긴 일이라 저도 회사 내부하고 얘기는 해 봐야겠어요. 그래도 우리 사이가 있는데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돕겠습니다.]통화를 마친 임빈은 그제야 조금 숨을 돌렸다.하지만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일부러 판을 짠 흔적이 너무 분명했다. 남우가 그걸 알아보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다.남우는 임빈이 아무 이유 없이 남우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번 일을 빌미로 임빈을 압박하고 있었다.임빈은 남우 측이 전부터 임산그룹과 거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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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안 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콩쿠르는 무리야.”맑음은 울먹이며 남우를 고집스럽게 바라봤다.“아빠, 연이랑 약속했단 말이야. 누가 더 잘하는지 꼭 겨뤄 보자고 했어. 내가 꼭 대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했어.”맑음은 이전부터 이번 콩쿠르를 위해 아주 열심히 연습해 왔다.은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은희 이모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조른 적도 있었다.하지만 당시 남우는 모두 거절했다. 그 시기만큼은 누구도 맑음에게 함부로 접근하게 둘 수 없었다.맑음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고, 동시에 은희가 또 의심받는 상황을 막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맑음아, 네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건 아는데 네 몸이 아직...”맑음은 남우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아빠, 나 진짜 괜찮아. 내가 조심할게. 진짜 약속해.”현재 맑음의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같은 약물만 다시 먹지 않는다면 당장 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낮았다.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딸을 이기지 못한 남우는 결국 허락했다.“알았어. 대신 경호원 아저씨들이 계속 같이 있어야 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꼭 말 잘 들어.”맑음은 신이 나서 자리에서 폴짝 뛰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진짜 말 잘 들을게!”...곡 작업에 몰두하던 은희의 귀에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잠깐 고민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은희 씨 맞습니까? 저는 임연의 아버지 임빈이라고 합니다.] 은희의 손이 멈췄다. ‘임빈?’‘맑음의 약물 사건 때문에 남우와 완전히 틀어진 바로 그 임씨 집안의 임 대표?’핸드폰을 쥔 은희의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임 대표님,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임빈은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고은희 씨가 콩쿠르 준비 중인 건 알고 있습니다. 이런 때 이렇게 연락드리는 게 실례인 것도 압니다만 저도 사정이 급해서요.][제 딸 연이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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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은희야.]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우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요즘 내가 너한테 신경을 못 쓴 건 알아. 맑음이 상태가 어땠는지는 너도 알잖아.][근데 맑음이 계속 너한테 배우고 싶대. 이번 콩쿠르 준비를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게 애 소원이라는데, 혹시...]“싫어.”은희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난 앞으로 맑음이한테 가까이 안 갈 거야. 내가 접근할수록 애가 또 아플 가능성이 커지잖아.”남우는 뜻밖의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되물었다.‘전에 내가 의심했던 걸 비꼬는 건가?’“그게 무슨 말이야?”은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남우를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영은이 벌인 일이라는 걸 정말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어주는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 은희도 남우의 반응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더 이상 그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아직도 모르겠어? 누군가 맑음이를 이용해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면 내가 맑음이한테 가까이 갈수록 애가 또 위험해질 가능성만 커져. 맑음이를 위해서라도 이제 나를 끌어들이지 마.”은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남우의 전화를 끊었다.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남우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답이 없는 일이었다.영은은 자기 친딸까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희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가까이 갈 수 없었다.맑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지금 자신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남우는 은희가 이런 이유로 자기 부탁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은희와 맑음은 원래 사이가 좋았다. 맑음도 예전부터 입만 열면 은희 이모를 찾았다.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방금 말도 자신을 믿지 않았던 일을 원망하는 뜻처럼 들렸다.게다가 암시장 사건에는 세준까지 끼어들었다. 은희가 세준의 말을 믿었을 가능성도 컸다.최근에는 맑음을 돌보느라 은희를 찾아가 제대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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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무대 위에 조명이 환하게 쏟아졌다.임연은 피아노 앞에 앉아 가느다란 손가락을 건반 위에 가볍게 올렸다.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연이어 터졌다.심사 위원들은 짧게 의견을 나눈 뒤 임연을 유소년부 1위로 발표했다.크게 놀랄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임연에게는 은희의 지도가 있었다.짧은 기간에도 실력이 빠르게 늘었고, 연주 기교뿐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도 또래보다 탁월했다.임빈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남우가 일방적으로 협력을 끊은 뒤부터 쌓인 불만도 컸다.그런데 이제 자기 딸이 1위를 차지했고, 그 뒤에는 남우의 아내인 은희의 도움이 있었다.임빈에게는 상당히 통쾌한 장면이었다. 옆에 있는 남우를 흘끗 바라보는 눈에는 대놓고 도발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임빈은 비서에게 말했다. “고은희 선생님 모셔 와. 선생님과 연이의 우승을 같이 축하해야지.”하지만 얼마 뒤 돌아온 비서의 표정은 다급했다. “회장님, 고 선생님이 안 보입니다. 대기실하고 무대 뒤까지 전부 찾아봤는데 어디에도 없습니다.”임빈의 웃음이 사라졌다. 미간이 좁혀졌다.‘혹시 하남우를 마주치기 싫어서 먼저 자리를 피한 건가?’하지만 그동안 임빈이 지켜본 은희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그럴 리가 있나? 조금 전까지 있었잖아. 다시 찾아봐!”...한편 남우는 임빈의 도발에는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맑음을 안아 올리고 칭찬하고 있었다.“맑음아, 정말 잘했어. 2등도 대단한 거야. 아빠는 우리 맑음이 자랑스러워.” 맑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금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근데 아빠, 나도 1등 하고 싶었어. 은희 이모한테 내가 이기는 거 보여 주고 싶었는데.” 남우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맑음은 아직 은희가 임연을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결과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는 역시 주변을 둘러보며 은희를 찾았다.‘나를 보기 싫어서 도망친 건가?’ 남우는 맑음을 효찬에게 맡기고 혼자 은희를 찾아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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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은희는 눈앞의 남우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남우는 은희에게 섣불리 손을 댔다가 또 상처를 줄까 두려웠다.작은 행동 하나가 은희를 더 힘들게 만들 것 같아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웠다.효찬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남우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어도 지금 은희의 곁에서 말을 걸어 줄 수는 있었다.“왜 그래?”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무슨 일인지 나한테 말해 봐.”은희는 멍하니 남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눈물이 계속 뺨을 타고 흘렀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간신히 붙들고 있던 감정이 무너졌다. 은희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남우는 더 망설이지 않고 은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낮게 달랬다.“괜찮아. 나 여기 있어...”따뜻한 품에 안겼는데도 은희의 울음은 더 거세졌다.이런 온기를 느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정말 하남우야? 그런데 왜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잊을 수가 없어. 아무리 해도 그때 우리 집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울음에 젖은 목소리는 코맹맹이처럼 잠겨 있었다.“다시 피아노를 치면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러면 진실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 못 하겠어. 아무리 해도 이겨 낼 수가 없어...”울음이 터질 때마다 몸이 떨렸다. 두 손은 남우의 옷자락을 놓지 못한 채 꽉 움켜쥐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너무 지쳤어. 나 진짜 더는 못 버틸 것 같아...”딸 보미를 잃은 뒤부터 은희는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을 혼자 견뎌 왔다.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이번 무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지만, 오히려 마지막 버팀목까지 무너뜨렸다.은희가 흐느끼며 쏟아내는 말을 듣는 내내 남우의 가슴이 조여 왔다.남우는 은희를 더 꼭 안고 턱을 머리 위에 가볍게 기댔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렸다.“알아. 이제 알아.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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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남우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보미가 왜 죽어??”입술이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같은 말을 되뇌었다.남우가 알고 있기로 보미는 치료를 위해 외국에 나가 있었다. 언젠가 건강해져서 돌아올 날을 당연하게 기다렸다.그런데 은희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보미가 죽었다고?’늘 밝게 웃으며 아빠라고 불러 주던 귀여운 아이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아이는 살아 있었다.게다가 은희는 자신 때문에 보미가 죽었다고 했다.효찬은 차로 이동하는 동안 은희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했다. 과도한 자극 때문에 감정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조금 전 투여한 약이 효과를 내면서 은희는 잠시 진정됐고 그대로 잠들었다.남우는 넋이 나간 채 함께 차에 올라 은희 옆에 앉았다. 시선은 잠든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효찬아, 은희가 한 말 사실 아니지?”쉰 목소리에는 애원에 가까운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남우가 효찬을 바라봤다.효찬은 시선을 피했다. 잠깐 망설인 뒤 낮게 말했다.“지금 정신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잖아. 방금 한 말을 전부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가 잘랐다. “거짓말하지 마. 오히려 저런 상태니까 숨기던 진심이 나온 거잖아.”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들리는 건 은희의 약한 숨소리뿐이었다.남우는 은희의 손을 꼭 잡았다. 효찬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사실 답은 이미 뻔했다. 은희가 보미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혼자 아이를 외국에 보내 장기간 치료하게 둘 사람이 아니었다.남우도 전에는 의심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은희가 너무 독해졌다고 생각했다.보미를 핑계로 자신을 붙잡고 협박하려 한다고 믿었다.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진실은 전혀 달랐다.은희가 예전에도 보미가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우는 아이에게 불길한 말을 한다며 화를 냈다.어쩌면 그때부터 은희는 이미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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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넌 먼저 가. 여긴 내가 있을게.”지나치게 냉담한 반응에 영은은 불쾌했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남우를 은희에게서 떼어낼 궁리로 눈을 굴리던 영은은 맑음을 앞으로 데려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맑음이도 은희 이모를 많이 걱정하고, 네 곁에 있고 싶어 해. 그냥 여기 있게 해 줘.”맑음은 얌전히 남우 곁으로 가 손을 잡았다.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사랑스러운 맑음을 보자 오히려 남우의 머릿속에는 보미의 모습이 떠올랐다.예전의 보미도 이렇게 어린 목소리로 자신을 위로하곤 했다.하지만 이제 보미는 영영 돌아올 수 없었다.그 생각에 남우의 눈가가 다시 젖었다. 맑음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한편 은희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을 떠돌며 꿈으로 빠져들었다.꿈속에서 은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부모님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마당을 마음껏 뛰어다녔다.장면이 바뀌자 보미가 나타났다. 작은 몸으로 품에 달려들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꿈속의 풍경이 갑자기 뒤틀렸다.오래전 고씨 집안이 무너졌던 일이 다시 벌어지고, 보미의 작은 몸도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은희는 목이 터지도록 불렀지만 멀어지는 딸을 붙잡을 수 없었다.공포와 절망에 휩싸인 채 꿈속에서 몸부림쳤다. 입에서는 힘없는 신음이 계속 새어 나왔다.“안 돼!”은희는 식은땀에 젖은 채 꿈에서 깨어났다.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주변을 멍하니 둘러보다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머릿속은 텅 빈 듯했고 꿈과 현실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큰 위험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모든 감각이 낯설었다.옆을 보니 남우가 의자에 앉아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왜 자신이 병원에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무대에서 연주를 끝낸 뒤부터 자기 상태가 이상해진 것만 희미하게 떠올랐다.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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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남우의 다리에서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죽었다고... 정말 죽었다고...”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두 눈은 빠르게 충혈됐다.몸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계속 고개를 저었다.“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머릿속에서는 보미의 귀여운 웃는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자신을 부르던 부드러운 ‘아빠’ 소리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완전히 무너진 남우를 바라보는 은희의 마음도 아팠다.은희가 보미를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있을 리 없었다. 딸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은희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남우를 더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왜... 언제 그런 거야? 대체 무슨 일 때문에...”남우는 거의 매달리듯 물었다. 목소리에는 절망만 남아 있었다.이제는 보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못했다.“넌 알 자격 없어.”은희가 고개를 돌려 남우를 바라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보미에게 필요한 조혈모세포 이식을 외면한 사람도 남우였다.남우는 딸 보미에 관한 일을 알 자격이 없었다. 차라리 평생 이유도 모른 채 후회하며 살길 바랐다.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선 채 대치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병실 안의 공기가 숨 막힐 만큼 무거웠다.남우는 다시 묻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일단 쉬어. 너는 더 자극받으면 안 된대.”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다.남우는 등을 돌렸다. 몸이 휘청거려 벽을 짚어야 겨우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남우가 병실을 나간 뒤에야 은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낮게 흐느꼈다. 가느다란 어깨가 떨렸다.‘이제 와서 저런 표정을 왜 지어? 그때 보미를 외면한 건 본인이면서...’영은은 세준을 통해 은희의 상태를 알아냈다.오래된 기억 때문에 크게 무너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고, 지금도 감정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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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난 괜찮아. 방금 누가 병실에 들어왔어. 여기 보안이 생각보다 허술한가 봐.”남우는 말없이 굳었다. ‘누군가 병실까지 들어왔다고?’자신이 경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한 뒤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누군가 계속 눈앞에서 사람을 보내 은희를 건드리고 있었다.더는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남우는 감정을 눌러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바로 감시 영상 확인할게. 병실에 들어온 사람도 찾아낼 거야.”은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짧게 대답했다. 이렇게 대놓고 들어왔을 정도라면 감시 영상에서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자신을 향해 일부러 던진 도발처럼 느껴졌다.늦은 밤이라 남아 있는 영상도 흐릿한 일부뿐이었다.침입자는 온몸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고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얼굴 특징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남우는 기술 인력을 투입해 체형과 걸음걸이 같은 세부 특징을 분석하고 신원을 특정하라고 지시했다.여러 경로를 대조하며 확인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기술팀은 해당 인물의 신원을 확인할 만한 정보가 전혀 없으며, 기존 데이터에서도 일치하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조명까지 어두워 영상 자체가 심하게 흐렸기 때문에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더라도 얼굴을 정확히 식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남우는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같은 시각, 병실에 남은 은희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용한그룹을 다시 일으키자.’무너진 집안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숨어 있는 배후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이기도 했다.용한그룹은 오래전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기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회사를 떠나지 않은 옛 직원들과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업 자원도 남아 있었다.회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과거의 적들도 반드시 관심을 보일 것이다.그 기회를 이용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오래전에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다음 날 아침, 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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