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아내가 그룹 회장이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51 챕터

제21화 — 너의 곁에서

서영애의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다.강민호의 거짓 증언은 무산됐다. 그리고 강도현이 동원한 회계 전문가들이, 서영애가 20년간 해외 재단으로 빼돌린 자금의 흐름을 하나씩 복원해냈다. 그 끝에는 비자금뿐 아니라, 더 오래된 기록이 있었다.15년 전, 한 교통사고와 관련된 의문의 자금."증거가 모이고 있어."강도현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늦은 밤 회장실,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무리하지 마. 너 며칠째 잠도 안 자잖아.""끝내야 하니까요."지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제야 강도현은 알았다. 그녀가 단단한 척하지만, 사실은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걸.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은, 아무리 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무게였다.강도현이 다가가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혼자 다 짊어지지 마. 나 여기 있잖아."지안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나 여기 있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문득 3년 전이 떠올랐다. 결혼 생활 내내,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작은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낮에는 평범한 주부로, 밤에는 노트북 앞에서. 그것만이 자신이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끈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대형 계약을 코앞에 두고 믿었던 현지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했다. 통장은 묶였고, 직원들 월급날은 다가왔고, 거래처들은 하나둘 등을 돌렸다. 그녀가 지켜온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그때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당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조건은 없습니다. 다만, 한 번 직접 만나주시겠습니까.]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약속한 날, 그녀는 서아를 시어머니에게 맡겨야만 했다."또 어딜 그렇게 차려입고 나가? 애 엄마가 돼서 바람이 단단히 들었구나."시어머니는 현관 앞에서 대놓고 혀를 찼다."엄마, 가지 마! 엄마아!"네 살배기 서아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몇 시간이면 돼요, 어머니.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라…""중요한 일은 무슨. 집에서 살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민호가 알면 뭐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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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 주주총회

서영애가 선수를 쳤다.긴급 임시 주주총회. 안건은 단 하나. '서지안 회장 해임의 건.'그녀는 자신의 12% 지분에 더해, 다른 친인척과 일부 외부 주주를 끌어모았다. 명분은 '경영 불안정과 사생활 논란'. 표 대결로 지안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었다.총회 당일. 대회의실은 긴장으로 가득했다.서영애가 우아하게 단상에 섰다."존경하는 주주 여러분.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제 조카가 회장이 된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지만… 현실을 봐야 합니다. 이혼, 사생활 논란, 그리고 외부 세력(TK그룹)과의 결탁 의혹. 과연 이 사람에게 JL을 맡길 수 있습니까?"웅성거림이 번졌다. 분위기가 서영애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서지안이 걸어 들어왔다. 한 손에는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서. 그 뒤로 강도현과 회사 법무·감사팀이 따라 들어왔다."늦어서 죄송합니다. 증거를 챙기느라."지안이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서영애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서영애 부회장님. 경영 불안정을 말씀하셨죠? 좋아요. 그럼 이 회사를 진짜로 불안정하게 만든 게 누구인지, 숫자로 보여드리죠."그녀가 대형 스크린에 자료를 띄웠다."최근 20년간, JL그룹의 자금이 해외 재단 세 곳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명목은 '문화 후원'. 하지만 그 재단의 실소유주를 따라가 보면..."화면이 바뀌었다. 복잡한 자금 흐름도의 끝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서영애."전부, 고모 개인 계좌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회삿돈 횡령, 그리고 비자금 조성. 확인된 금액만 천이백억입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주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영애에게 쏠렸다.서영애의 얼굴에서 우아한 미소가 천천히 굳어갔다."그, 그건… 정상적인 투자 집행이었어요. 증빙이 다 있는""증빙요? 이 자료, 회계법인 세 곳의 교차 검증을 거쳤습니다. 사본은 이미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에 접수됐고요."지안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회의실 구석까지 또렷이 박혔다."자, 다시 여쭙죠. 이 회사를 사익으로 망친 사람이 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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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 그가 그녀를 도운 이유

주주총회가 끝나고 사흘 뒤. TK인터내셔널 회장 집무실.강도현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스물여섯의 자신과, 인자하게 웃는 노신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서지안의 아버지. JL그룹의 선대 회장이었다.지안은 모른다. 강도현이 자신을 도운 진짜 이유를. 단순히 사업 안목 때문도, 첫눈에 반해서도 아니었다.빚이 있었다. 갚아야 할, 평생의 빚이.십수 년 전, 강도현은 빈손이었다. 작은 무역 사업을 시작했다가 동업자에게 배신당해 모든 걸 잃기 직전이었다. 빚쟁이들이 문을 두드렸고, 투자 설명회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근본도 없는 놈"이라는 비웃음이 따라다녔다.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선 설명회. 객석의 거물들은 그의 발표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단 한 사람을 빼고.맨 뒷줄에 앉아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은 노신사. 발표가 끝나자, 그가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젊은이. 자네 숫자는 형편없어. 그런데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무너지지 않으려는 눈빛이야. 그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지."그 말에, 강도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주 오래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들려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굶주리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한 후배.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인연이 훗날 어디까지 이어질지.JL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강도현에게 첫 거래를 터줬다. 그 한 번의 기회가, 오늘의 TK인터내셔널을 만들었다.강도현은 은혜를 갚으려 했지만, 노회장은 늘 손을 내저었다."나한테 갚을 생각 말게. 대신, 언젠가 자네처럼 무너지기 직전인 사람을 만나거든, 그때 손 한 번 내밀어 주게. 그거면 돼."그리고 노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날, 평소 가족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던 노인이 처음으로 속을 털어놓았다."내게 딸이 하나 있네. 지금은 세상 어딘가에서, 평범한 이름으로 숨어 살고 있지. 그 아이를 지키려고, 내가 일부러 멀리 보냈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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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 나를 살린 한마디

강윤서가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은 그날 밤, 강도현은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아주 오래된 기억이 그를 찾아왔다.스무 해 전. 그가 열아홉,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였다.그해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졌다. 빚쟁이들이 집을 들쑤셨고, 어머니는 몸져누웠다. 강도현은 새벽엔 신문을 돌리고, 방과 후엔 공사장 잡일을 했다. 그러고도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다.학교에서 그는 투명인간이었다. 아니, 투명인간이면 차라리 나았다. '집 망한 애', '거지', '문제아'. 아이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며칠씩 같은 교복을 입고 오는 그에게서 사람들은 슬그머니 멀어졌다.그날도 그랬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늦은 저녁, 텅 빈 학교. 배가 너무 고팠다. 점심도, 저녁도 거른 채였다. 강도현은 운동장 구석 수돗가로 갔다. 그리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찬물로 배를 채웠다. 물이라도 마셔야 허기가 가라앉았다.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1학년 명찰. 야자를 마치고 가던 길인 듯했다. 강도현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장 비참한 꼴을 들켜버렸다.여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서 갔다.'그래. 동정이든 비웃음이든, 어차피 다 똑같지.'강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닦았다.그런데 다음 날이었다.그가 늘 혼자 시간을 때우던 옥상 계단. 그 구석에, 빵 하나와 우유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작은 쪽지.[선배, 굶지 마요. 사람은 굶으면 안 돼요.]강도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장난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빵은, 그날 그가 먹은 유일한 끼니였다.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빵과 우유는 매일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떤 날은 삼각김밥이, 어떤 날은 따뜻한 캔커피가. 쪽지도 함께였다.[오늘도 힘내요.] [선배는 분명 잘될 거예요.]강도현은 이를 악물고 기다렸다. 대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그 사람을 잡았다.그 여학생이었다. 수돗가에서 그를 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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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 물러난 자의 칼

주주총회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서지안은 회장직을 지켜냈지만, 한가할 틈은 없었다. JL그룹은 지난 10년간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친인척이 알박기처럼 차지한 임원 자리, 실적도 없이 돈만 빠져나가는 자회사들, 불투명한 거래 관행.그녀는 하나씩 도려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칼날은, 서영애의 사람들이었다."이번 분기 적자 자회사 세 곳, 통폐합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임원으로 앉아 있던 분들—전부 서영애 전 부회장이 꽂은 사람들이죠. 경영 평가 후 재신임을 묻겠습니다."회의실 공기가 싸늘해졌다. 임원 몇몇의 얼굴이 굳었다. 서영애의 그림자가 여전히 이 방 안에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회의가 끝나고, 비서실장 한정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회장님.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서영애 전 부회장이 부회장직은 내려놨어도, 지분 12퍼센트에 우호 이사가 아직 넷입니다. 자칫하면...""알아요."서지안은 창밖을 바라봤다."하지만 천천히 가면, 저쪽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만 줄 뿐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못 합니다."그날 오후. 서영애는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맞은편에는 JL그룹 이사 한 명이 앉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부, 부회장님.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서 회장이 우리 쪽 사람들을 다 쳐내고 있습니다."서영애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가만히 있긴요. 난 한 번도 가만히 있은 적 없어요."그녀가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서지안이 해외에서 키웠다는 무역회사. 그 회사가 3년 전 위기 때, 정체 모를 외국 자본을 받았더군요. 출처가… 아주 흥미로워요."이사의 눈이 커졌다."그게… 문제가 됩니까?""문제로 만들면 되죠. '신임 회장이 출처 불명의 외국 자본과 결탁했다' 이 정도면, 금융당국도, 언론도 관심을 가질 만하지 않겠어요?"서영애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것은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독사의 눈이었다."서지안. 회장 자리에 앉았다고 끝난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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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 약혼녀라는 이름

약혼녀. 그 단어가 한참 동안 귓가에 맴돌았다."…과거형이네요."서지안은 떨어뜨린 펜을 다시 집어 들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네, 분명 과거형이에요. 양가 어른들끼리 정한 거였고, 난 끝까지 마음을 준 적 없어. 3년 전에 정리했어."강도현의 목소리에는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굳이 전화까지 한 이유는, 그 정리가 강윤서 쪽에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지안아. 윤서는… 한 번 마음먹은 건 절대 놓지 않는 사람이야. 네가 신경 쓰일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걱정 마세요, 선배.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전화를 끊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강윤서는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이틀 뒤, JL그룹 회장실로 약속도 없이 한 여자가 찾아왔다. 비서가 막을 새도 없었다. 명품으로 휘감은 차림, 흐트러짐 없는 미소.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기품이 흘렀다.강윤서. 이름만으로도 재계가 긴장하는 사람이었다.그녀의 집안은 HW그룹—반도체와 글로벌 유통을 거머쥔, 자산 규모로 JL의 다섯 배가 넘는 초대형 기업이었다. 강윤서는 그 외동딸이자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줄 알고 큰 사람.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본 적도,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한 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JL그룹 회장'이라는 자리는, 그저 한 뼘 아래에서 올려다봐야 할 상대일 뿐이었다.그래서였다. 상대가 한 그룹의 총수임에도, 그녀의 태도에는 거리낌이 없었다."서지안 회장님. 처음 뵙네요. 강윤서예요."그녀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서지안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손이었다."TK 부회장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무슨 일이시죠?"강윤서가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회장실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 눈빛엔 묘한 우월감이 어려 있었다."도현 씨 얘기 들었어요. 회장님을 꽤… 각별하게 챙긴다고요.""업무상 협력 관계예요.""그래요?"강윤서가 작게 웃었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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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 미련

서영애와 강윤서, 두 갈래의 위협 속에서도 일상은 굴러갔다.그러던 어느 날, 잠시 잊고 있던 이름으로 연락이 왔다.강민호였다."서아… 한 번만 보게 해줘. 아빠잖아.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면접교섭. 법적으로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서지안은 서아를 위해, 주말 오후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강민호는 한눈에도 초췌해져 있었다. 값싼 점퍼, 며칠은 못 깎은 수염. 한때 '집에서 노는 여자'라며 큰소리치던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서아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강민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지안아. 너… 잘 지내는 것 같더라. 회장님 소리 듣고, 좋은 차 타고.""용건이 서아 아니었나요?""…그 남자. 강도현이라고, TK 회장. 너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인터넷에 다 났더라."서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호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작게 떨렸다."내가…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정말 알아. 근데 지안아, 우리 10년을 같이 살았잖아. 서아도 있고. 우리…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면 안 될까. 내가 진짜 잘할게. 이번엔 정말로""강민호 씨."서지안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우린 끝났어요. 그건 당신이 이혼 서류를 내밀던 그날, 당신이 정한 거예요.""그땐 내가 미쳤었어! 네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으니까....""그래서요?"서지안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제가 회장이 아니었으면, 그냥 무능한 전업주부였으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안 나왔겠죠. 당신이 그리워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제 뒤에 있는 거예요."강민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앞으로 서아는 정해진 절차대로 만나세요. 그리고,"서지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저한테 사적인 연락은, 더 이상 하지 마세요."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잠깐, 아주 잠깐. 오래전 그 얼굴이 스쳤다.비 오던 카페 처마 밑에서 우산을 내밀던 청년. "지안 씨는 분명 잘될 거예요" 하고 웃어주던, 가진 것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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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 내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

강민호를 만나고 돌아온 밤, 서지안은 오래 잠들지 못했다.미워하려 해도, 자꾸만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사랑했던, 그 어리고 따뜻했던 시절이.서지안에게 'JL그룹 딸'이라는 이름은, 축복이 아니라 차가운 감옥이었다.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뒤, 그 큰 저택은 온기를 잃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파묻혀 살았고, 친척들은 어린 그녀를 후계 구도의 '변수'로만 보았다. 명절이면 웃는 얼굴로 다가와, 뒤에서는 그녀의 약점을 캤다.그 집에서 서지안은 단 한 번도 '서지안'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늘 '회장님 따님', '서씨 가문의 핏줄'. 사람이 아니라, 가문의 자산이었다.후계 다툼이 거세지던 어느 날, 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지안아. 한동안 네 신분을 지우고 살아라. 평범한 이름으로, 평범한 동네에서. 그게 지금 너를 지키는 길이다."처음엔 버려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본 그 동네에서, 서지안은 태어나 처음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그리고 그곳에서, 강민호를 만났다.비 오던 날, 우산도 없이 처마 밑에 쪼그려 앉은 청년. 그는 면접에 떨어지고도, 우산을 내미는 그녀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강민호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JL도, 재벌도, 후계도 몰랐다. 그저 '지안 씨'라고 불렀다. 그녀의 옷차림을 재지 않았고, 그녀의 배경을 계산하지 않았다."지안 씨는 참 잘 웃네요. 그 웃음 보면, 나도 잘될 것 같아."그 말에, 서지안은 무너지듯 빠져들었다.평생 '자산'으로만 살아온 그녀를, 처음으로 한 사람으로 봐준 사람. 가진 게 없어서 오히려 계산이 없던 사람. 그가 차려주는 라면 한 그릇이, 저택의 그 어떤 만찬보다 따뜻했다.'이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살 수 있겠다. 따뜻한 가정을 만들 수 있겠다.'그래서 서지안은 모든 걸 걸었다. 신분도, 재산도, 아버지가 정해준 화려한 미래도.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숨긴 채, 그의 손을 잡았다."민호 씨랑이라면, 난 평범해도 행복할 자신 있어요."결혼식 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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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 그때, 우리는

서영애가 보낸 남자는, 강민호를 조용한 룸으로 안내했다."강민호 씨. 부회장님 말씀은 간단합니다. 서지안 회장에 대해,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죠. 약점도, 과거도. 우리를 도우시면, 서아 양육권도, 어쩌면 서지안 회장도, 다시 당신 품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강민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술잔을 기울이며 자꾸만 옛날을 떠올렸다.가진 게 없던 시절이었다.첫 데이트는 한강이었다. 돈이 없어 편의점 라면을 나눠 먹었는데, 지안은 세상 제일 맛있는 걸 먹는 사람처럼 웃었다."민호 씨,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뭐 하고 싶어요?""글쎄. 너랑… 그냥 이렇게, 라면 먹으면서 웃고 싶은데."그 말에 지안의 눈이 촉촉해졌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그런 평범한 말 한마디에 울컥했는지.겨울이면 지안은 직접 목도리를 떠줬다. 코가 삐뚤빼뚤한 서툰 목도리였지만, 강민호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따뜻했다.서아를 가졌을 때, 입덧이 심하던 밤이면 강민호는 한밤중에 딸기를 사러 온 동네를 뒤졌다. 문 닫은 가게들을 돌고 돌아 겨우 한 팩을 구해 왔을 때, 부스스 일어난 지안이 "이 밤에 이걸 어떻게 구했어" 하며 울 듯이 웃던 그 얼굴. 그때의 강민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남자였다.그가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하던 날, 두 사람은 단칸방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서아가 생긴 걸 알았을 때, 강민호는 분만실도 아닌 화장실에서 혼자 펑펑 울었다. 너무 좋아서.그 좁은 방에서, 셋은 정말 웃었다. 분명히, 웃었었다.강민호의 손에서 술잔이 흔들렸다."…그때 지안이는, 나만 보고 웃었어."그런데 지금은. 그 웃음을, 강도현이라는 남자가 가져갔다. 회장이 된 지안의 곁에서, 그 남자가 웃고 있었다. 원래 자기 자리였던 곳에서.질투였다. 미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어둡고 끈적한 무언가로 변해갔다.'지안이는 원래 내 아내였어. 서아 엄마고. 그 웃음도, 그 여자도, 원래 내 거였어.'후회로 시작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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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 전남편의 칼

며칠 뒤, 한 시사 매체에 자극적인 제목의 단독 인터뷰가 떴다.[단독] "JL 서지안 회장의 전남편, 마침내 입을 열다.기사 속 강민호는 비통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서영애가 짜준 각본대로였다."저는 10년을 그 사람과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결혼 내내 저를 속였어요. 비밀리에 외국 기업과 손을 잡고 사업을 벌였고, 가정도 아이도 뒷전이었습니다. 지금 회장 자리에 앉은 것도… 떳떳한 과정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기사는 순식간에 퍼졌다.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렸다.'가정 버린 여자가 무슨 그룹 회장이냐''역시 외국 자본이랑 결탁한 거 아니야?''전남편이 오죽하면 저렇게 나왔겠어.'서영애가 퍼뜨린 '외국 자본 결탁설'과, 강민호의 '버림받은 남편' 서사가 맞물리자 파급력은 배가됐다. 주가가 출렁였고, 이사회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회장실. 비서실장 한정우가 다급하게 보고했다."회장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TK 강도현 회장님께 연락드릴까요? 그쪽 홍보망이면 여론을.....""아뇨."서지안이 단호하게 잘랐다."이건 제 일이에요. 제 이름으로, 제가 끝냅니다."그녀는 강도현에게 기대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자신의 싸움은 자신이 매듭지어야 했다.그날 저녁, 서지안은 한 사람을 조용히 불러냈다. 전 시어머니, 김 여사였다.김 여사는 불안한 얼굴로 나타났다. 한때 며느리를 '집에서 노는 여자'라 깔보던 기세는, 어디에도 없었다."어머니. 민호 씨가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저를 음해하는 인터뷰를 했더군요.""…그, 그걸 어떻게…"김 여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반응이 이미 답이었다."어머니도 알고 계셨네요. 민호 씨한테 들어온 그 돈.""지안아… 아니, 회장님. 난 그저, 민호가 누가 준 거라며 큰돈이 들어왔다고…""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이대로 두면 민호 씨는 명예훼손에 위증, 거기에 그 돈의 출처까지 엮여서 정말 끝장납니다. 지금 멈춰야 그나마 살아요."김 여사의 손이 떨렸다. 아들을 잃을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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