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아내가 그룹 회장이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112 Chapters

제11화 — 흔들리는 왕좌

기자회견 다음 날 아침, JL그룹 본사는 발칵 뒤집혔다.검찰이 서동철 전무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비자금 조성, 횡령, 그리고 허위사실 유포. 박스가 열여덟 개 나왔다. 직원들이 복도 양쪽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어제까지 그 앞에서 허리를 굽혔던 사람들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서동철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끌려 나갔다. 로비를 지나면서 그가 한 번 고개를 들었다. 위층 창가에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지만,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박스가 실려 나간 자리에는 먼지 자국만 네모나게 남았다. 청소하는 분이 그 자리를 닦으며 혼잣말을 했다. 어제까지 여기 계신 분이 무섭다고들 했는데요.오후에 회사 주가는 오히려 올랐다. 시장은 곪은 데를 도려내는 쪽에 표를 준 것이다.이사회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이번 일로 확실해졌습니다. 회장님은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가장 보수적이던 노(老)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선대 회장 시절부터 회사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서지안이 처음 회장실에 들어선 날, 자리에서 끝까지 일어서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의심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후계자라니. 게다가 이혼에, 어린 딸까지. 하지만—"그가 서지안을 똑바로 바라봤다."위기 대처 능력, 결단력, 그리고 무엇보다 도망치지 않는 용기. 회장이 갖춰야 할 모든 걸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회장님을 지지합니다."회의실의 임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홍보실장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조언했던 사람도 그중에 있었다.서지안은 천천히 일어섰다.일어서면서 잠깐 아버지를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아버지는 스무 해를 앉아 있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박수를 친 적이 있었을까. 물어볼 사람이 이제 없었다."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JL그룹은 지난 10년간 곪아 있었습니다. 친인척의 사익, 불투명한 거래, 무너진 원칙. 저는 그걸 전부 도려낼 겁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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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 바닥

강민호의 하루는 무너지고 있었다.권고사직 후 재취업은 번번이 실패했다. 어디를 가도 JL그룹 입찰을 말아먹은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업계는 좁았다."강민호 씨? 아, 그… JL 건 그 사람."면접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그는 이제 익숙하게 알아봤다.처음 한두 번은 몰랐다. 세 번째부터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이미 알았다. 서류를 든 손이 잠깐 멈추고, 눈이 이력서에서 자기 얼굴로 올라오는 그 짧은 순간이 있다. 그 뒤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다음 순서도 안다. 이력서를 덮고, 서류는 잘 보관하겠다고 하고, 연락은 오지 않는다.한 곳에서는 아예 이렇게 물었다."전 부인이 JL 회장님이라는 게, 사실입니까?"강민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면접장을 나오면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이제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통장 잔액은 두 달치 생활비였다. 그는 그 숫자를 하루에 두 번씩 확인했다. 확인해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집에 오면 어머니의 한숨이 기다렸다."민호야, 우리 이러다 진짜 길바닥에 나앉는 거 아니냐. 서아라도 있었으면 양육비라도…""엄마!"강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식탁 위에는 반찬 두 가지가 놓여 있었다. 국은 없었다. 예전에는 이 식탁에 여섯 가지가 올라왔다. 누가 차렸는지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머니는 요즘 밥을 짓다가 자꾸 태웠다. 평생 며느리가 하던 일이었다."밥이 또 이렇게 됐네."어머니가 중얼거렸다. 강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에 대꾸할 자격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그날 밤, 강민호는 오래된 휴대폰 사진첩을 넘겼다. 서아의 돌잔치. 서아가 처음 걸은 날. 그리고 그 옆에서 환하게 웃는 지안.10년 동안, 그는 그 웃음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사진을 한 장 더 넘겼다. 서아가 처음 걸은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는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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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 빈자리

지안의 눈이 강민호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본 것처럼, 시선은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그게 강민호를 더 무너지게 했다. 분노도, 원망도 아닌, 완전한 무관심.차라리 화를 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소리를 지르거나, 왜 왔느냐고 물어봐 주기라도 했으면 그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 로비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10년 동안 그는 아내가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성격이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니 화를 낼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화를 내려면, 상대가 들어 줄 사람이어야 한다.옆에 있던 강도현이 그 시선을 눈치챘다."아는 사람?""아뇨."지안은 짧게 답하고 차에 올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10년을 같이 살았지만,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다.강민호는 멀어지는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손에 쥔 휴대폰에는, 차마 보내지 못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그는 그 여덟 글자를 세 번 지웠다가 다시 썼다. 무엇이 미안한지 적어 보려다가 손을 멈췄다. 적을 것이 너무 많았고, 그 많은 것을 그는 다 알지 못했다.그는 끝내 그 메시지를 지웠다.로비를 나오는데 회전문이 잘 돌지 않았다. 밀어야 하는 쪽을 당기고 있었다. 뒤에 선 사람이 대신 밀어 주었고, 그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왔다.건물 앞에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유리에 하늘이 통째로 비쳐 있었다. 저 안 어딘가에 아내가, 이제는 아내가 아닌 사람이 있었다.그는 다시는 이 앞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조차 자기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아직 몰랐다.한편 시댁 본가. 시어머니 김 여사는 텅 빈 서아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작은 침대, 흩어진 장난감, 벽에 붙은 삐뚤빼뚤한 그림. '엄마 아빠 할머니'라고 적힌 가족 그림이었다. 아래쪽에 크레파스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숫자 하나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그림 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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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 그 사람의 온도

주말, 서지안은 오랜만에 일에서 손을 놓고 서아와 시간을 보냈다.서아가 사흘 전부터 졸랐다.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친구는 벌써 두 번 갔다고. 지안은 일정표를 두 번 지우고서야 토요일을 비웠다. 비서에게 그날은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말해 두면서, 스스로도 조금 이상했다. 10년 동안 그녀에게 비울 일정 같은 것은 없었다.놀이공원. 서아는 솜사탕을 들고 깡충깡충 뛰었다."엄마! 저거 타자! 저거!""천천히, 서아야. 넘어져."입구에서 표를 사는데 서아가 지안의 옷자락을 계속 당겼다. 빨리, 빨리. 그렇게 급한 아이를 지안은 오랜만에 봤다.솜사탕이 서아의 볼에 붙었다. 지안이 손등으로 떼어 주는데, 아이가 몸을 비틀며 웃었다.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 아이를 데려온 게 처음이라는 걸, 지안은 그때 알았다. 지난 몇 년은 놀이공원 값이 아까웠고, 그 앞의 몇 년은 시간이 없었다.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생각보다 잘 노네, 회장님."강도현이었다. 캐주얼한 차림. 회사에서 보던 서늘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였다.지안은 그를 알아보는 데 잠깐 걸렸다. 이 사람의 티셔츠 차림을 본 적이 없었다."여긴 어떻게…""비서한테 물어봤지. 회장님 주말 일정.""그걸 왜—""같이 있고 싶어서."지안의 말문이 막혔다. 그때 서아가 강도현을 빤히 올려다봤다."아저씨 누구야?"강도현이 무릎을 굽혀 서아와 눈높이를 맞췄다."엄마 친구. 너 이름이 서아지?""어떻게 알아?""엄마가 자랑 많이 했거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이라고."서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강도현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같이 회전목마 타자!"서아가 그 말을 하면서 지안을 한 번 돌아봤다. 되냐고 묻는 눈이었다. 아이가 그런 눈을 하는 걸 지안은 여러 번 봤다. 무엇을 갖고 싶을 때, 무엇을 하고 싶을 때, 서아는 늘 먼저 엄마 얼굴을 봤다. 안 된다는 대답을 미리 준비하는 아이였다."타고 와."지안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10년을 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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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 함정

월요일 아침, 또 한 번 기사가 터졌다.[JL 서지안 회장, TK그룹 강도현 회장과 열애?… 재벌가 권력 결합설]이번엔 사진까지 있었다. 놀이공원에서 서아와 함께 있는 세 사람.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 사진이었다.지안은 그 사진을 두 번 확대해 봤다. 각도가 낮았다. 나무 그늘 쪽에서, 사람이 지나가는 틈을 기다렸다가 누른 사진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의 손에서 나올 사진이 아니었다.서아의 얼굴에는 흐림 처리가 되어 있었다. 흐려도 아이가 웃고 있는 건 보였다. 그것도 계산이었다. 아이를 지켜 준 척하면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남겨 둔 것이다.기사 아래에는 이미 댓글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사진 얘기였다. 저 집 애가 몇 살이냐, 재혼이냐, TK가 JL을 먹는 거냐. 며칠 전 그녀가 단상에서 한 말은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출근하는 동안 휴대폰이 여덟 번 울렸다. 홍보실, 법무팀, 그리고 번호가 저장되지 않은 곳들. 로비에서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눈이 따라왔다. 사원증을 찍는 소리 사이로 그 시선이 계속 붙어 왔다.엘리베이터에서 임원 하나가 같이 탔다. 층수를 누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실적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이었다.회장실에서 그 기사를 본 강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이건 단순한 가십이 아니야.""무슨 뜻이죠?""우리 둘을 엮어서, '권력 야합'으로 몰아가려는 거야. TK가 JL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프레임. 그러면 JL 이사회가 날 경계하게 되고, 네 입지는—""제가 당신 뒤에 숨은 꼭두각시처럼 보이겠죠."지안이 차갑게 기사를 덮었다.덮고 나서 손을 한 번 펴 봤다. 손끝이 차가웠다. 회사에 온 뒤로 이런 아침이 세 번째였다.겨우 되찾은 신임이었다. '애 딸린 이혼녀'라는 편견을 실력으로 깨부쉈는데, 이번엔 '남자 뒤에 숨은 여자'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그리고 이번 쪽이 더 나빴다. 앞의 것은 반박할 수 있었다. 실적을 내밀면 됐다. 이번 것은 실적을 낼수록 뒤에 누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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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 진짜 적

서영애. 선대 회장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자 JL그룹 부회장. 그룹 지분 12퍼센트를 쥔, 이사회의 실세 대주주였다.12퍼센트.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지만, 어느 편에 붙느냐로 모든 것을 정하는 숫자였다. 지난 20년 동안 이사회에서 표가 갈릴 때마다 그 숫자가 마지막에 움직였다.지안이 회장이 되고 두 달, 이 여자는 한 번도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이사회에도 서면으로만 표를 냈다. 사람들은 부회장이 몸이 편치 않다고 했다.몸이 편치 않은 사람이, 예고 없이 회장실 문을 열었다.그녀는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차를 음미했다.차는 지안이 권한 것이 아니었다. 들어와 앉으면서 비서에게 직접 시켰다. 잔을 드는 손에 반지가 셋이었고, 손톱은 색이 없었다. 이 방에 처음 온 사람의 몸짓이 아니었다."내 동생 동철이는 멍청했어. 비자금 같은 걸 직접 만들다니. 꼬리가 잡히는 짓을 하다니, 쯧."지안은 그 문장에서 '동철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제 검찰에 끌려간 사람을, 이 여자는 아직 아이 부르듯 불렀다."고모가 시킨 일이잖아요.""증거 있니?"서영애가 미소 지었다."없지. 난 한 번도 직접 손을 댄 적이 없거든. 동철이가 알아서 움직였고, 알아서 잡혀갔어. 난 그저… 지켜봤을 뿐이야."10년 전에도 이 여자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버지 서재 문 앞에서, 저 아이는 이 집에 있으면 안 된다고 조용히 말했다. 어린 지안은 복도에 서서 그 말을 다 들었다. 목소리가 낮아서 더 오래 남았다.지안은 알았다. 이 여자는 서동철과 차원이 다르다. 영리하고, 인내심 있고, 잔인했다.서동철은 화를 냈다. 화를 내는 사람은 어디를 노리는지 보인다. 이 사람은 웃고 있었다. 웃는 사람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모는 그때도 아무 말씀 안 하셨죠. 그냥 지켜보기만.""난 늘 그래 왔어."서영애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오래 지켜보면, 사람은 알아서 무너져.""원하는 게 뭐죠?""간단해. 회장 자리에서 내려와. 네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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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 반격의 패

지안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않았다.회장실 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 서류가 세 무더기로 쌓였다. 이사회 의사록, 계열사 감사보고서, 그리고 20년 치 주주명부.서영애의 약점. 분명히 있었다. 10년을 숨어 살며 그녀가 배운 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곳에 비밀을 숨긴다는 것이었다.숨긴 것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웃지 않는다.지안은 주주명부를 20년 전부터 한 장씩 넘겼다. 서영애의 지분은 늘 12퍼센트였다. 늘어난 적도, 줄어든 적도 없었다. 그 20년 동안 회사가 두 번 유상증자를 했는데도 숫자가 그대로였다.그대로 있으려면 그때마다 돈을 넣었어야 했다. 부회장 급여로 넣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펜으로 그 숫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동그라미를 두 번 겹쳐 그렸다.새벽 두 시가 넘어서 그녀는 한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실장은 세 번째 신호에 받았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지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한 실장님. 서영애 부회장의 지난 20년 자금 흐름을 전부 추적해 주세요. 특히 해외 재단으로 빠져나간 돈.""회장님, 그건 시간이…""3일 안에요. 그리고—"전화를 끊고 그녀는 창밖을 한 번 봤다. 새벽 세 시의 도시에는 아직 불이 켜진 창이 꽤 있었다. 저 창 안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지안이 노트북을 열었다. 아버지가 남긴 개인 금고에서 찾아낸, 오래된 USB 하나.금고를 열었을 때 안에 든 것은 많지 않았다. 도장 하나, 만년필 하나, 그리고 이 USB. 처음 봤을 때는 회사 서류인 줄 알고 옆에 밀어 두었다."아버지가 왜 저를 그렇게까지 숨겼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USB를 꽂기 전에 그녀는 잠깐 손을 멈췄다. 아버지 목소리를 들은 것이 몇 해 전인지 세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세면 손이 떨릴 것 같았다.USB 안에는 선대 회장이 생전에 남긴 음성 파일이 있었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안아. 네가 이걸 듣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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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 매달리는 사람들

제18화 — 매달리는 사람들같은 시각, 강민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모르는 번호였다. 요즘 그에게 걸려 오는 전화는 대출 권유 아니면 카드사였다. 그래서 받지 않으려다가, 받았다."강민호 씨 되시죠? 저는 서영애라고 합니다. 서지안 회장의 고모예요."강민호는 어리둥절했다."무슨 일로…""간단한 부탁이 있어요. 강민호 씨, 돈 필요하지 않아요? 재취업도 안 되고, 어머니 모시기도 힘들 텐데."강민호의 손이 멈췄다. 이 사람은 그의 사정을 이미 알고 걸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전처에 대해, 그러니까 서지안 회장에 대해 몇 가지만 증언해 주면 돼요. '결혼 생활 중 정서가 불안정했다', '아이를 방치한 적이 있다'… 뭐 그런 거요. 사례는 충분히 하죠. 3억이면 어때요?"3억. 지금의 강민호에게는 상상도 못 할 돈이었다. 그 돈이면 어머니도, 자신의 삶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전화를 끊고, 강민호는 오래 앉아 있었다.거실에서 어머니가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누구 전화냐고 묻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알아서였다.3억. 거짓 증언 한 번이면 되는 돈. 어차피 지안은 이미 자기를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죄책감 따위, 그 무관심한 눈빛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머릿속에서 계산이 저절로 돌아갔다. 어머니 병원비, 월세 밀린 것, 그리고 남는 돈으로 작은 가게 하나. 그 계산을 세 번쯤 했을 때, 자기가 이미 하겠다고 마음먹고 핑계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날 밤 그는 잠들기 전에 검색창에 서영애라는 이름을 넣어 봤다. 사진이 두 장 나왔다. 행사장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람이 왜 자기 번호를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이튿날 오후, 우편으로 서류가 왔다. 봉투가 두꺼웠고 반송 주소는 로펌 이름이었다.그는 펜을 들었다. 서영애 측이 보낸 증언서 초안. '서지안은 결혼 생활 중 정서가 불안정했으며, 아이를 방치한 일이 있었다.' 이 문장 끝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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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 우리가 사랑했던 시절

3억을 거절한 그날 밤, 강민호는 잠들지 못했다.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데,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밀려왔다. 막아도 막아지지 않았다.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처음 지안을 본 건, 열두 해 전 가을이었다.작은 출판사 앞 카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강민호는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고, 떨어졌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우산도 없었다.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비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옆에 우산을 내밀었다."이거 쓰세요. 저는 가게 들어갈 거라."그게 지안이었다. 평범한 카디건, 화장기 없는 얼굴. 그런데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환했다.우산은 손잡이가 헐거워서 접으면 덜컹거렸다. 그런 우산을 남에게 내미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는 생각하지 않았다.강민호는 그 우산을 돌려주겠다는 핑계로 다음 날 다시 그 카페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어느새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됐다.첫날, 우산을 내밀자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제 것도 아닌데요. 가게에 굴러다니던 거였어요. 그러고는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그는 그 우산을 4년쯤 썼다.그때 그는 취업만 되면 다 풀릴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까운 줄 몰랐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몇 달이 두 사람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시기였다.지안은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늘 화제를 돌렸다. 강민호는 그게 그저 수줍음인 줄 알았다.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다.한 번은 명절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잠깐 웃고는 컵을 돌렸다. 갈 데가 없어요. 그 대답에 그는 안됐다고만 생각했다. 왜 없느냐고 묻지 않았다.대신 지안은 강민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면접에서 또 떨어진 날, 그가 술에 취해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릴까" 하고 한탄하면, 그녀는 핀잔 한 번 주지 않았다."민호 씨는 분명 잘될 거예요. 지금은 그냥, 때가 안 온 것뿐이에요."그 말이 좋았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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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제20화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변화는 천천히 왔다. 너무 천천히 와서, 강민호는 알아채지도 못했다.회사에서 작은 승진을 한 뒤부터였던 것 같다. 월급이 조금 오르고, 사람들이 '강 대리'라고 불러주기 시작했을 때. 강민호는 처음으로 어깨가 펴지는 기분을 느꼈다.그 소리가 좋았다. 강 대리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적도 있었다.그러자 집이 작아 보였다. 라면을 나눠 먹던 단칸방의 추억은, 어느새 '가난했던 시절'이라는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회사 사람들을 집에 부르지 않았다. 부를 만한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그 집을 하루 종일 닦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떠올리지 않았다.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화살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로 향했다."넌 종일 집에서 뭐 하냐?"처음 그 말을 내뱉은 날, 지안은 잠시 그를 빤히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강민호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사실이잖아' 하고 자기를 합리화했다.그날 밤 그녀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는 그것도 화가 났다. 왜 말을 안 하느냐고 속으로만 따졌다.육아는 온전히 지안의 몫이 됐다. 강민호는 야근을 핑계로 늦게 들어왔고, 주말엔 피곤하다며 잠만 잤다. 서아가 처음 걸은 날도, 처음 '아빠'라고 부른 날도,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지안이 "오늘 서아가 처음 걸었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면, 강민호는 휴대폰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어, 그래."그게 다였다.그 뒤로 지안은 그런 이야기를 점점 덜 했다. 그는 아이가 이제 클 만큼 커서 이야기할 게 없어진 줄 알았다.어머니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마뜩잖아 했다. "집안일 하는 여자가 뭐가 힘드냐", "우리 민호가 아깝다"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강민호는 그때 아내의 편을 들었어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하지만 그는 어머니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곧 동조였다. 지안이 부엌에서 혼자 명절 음식을 하는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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