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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나는 공범이었다: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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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회사로 향한 준호는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회의실 문이 닫히고, 스크린엔 자료들이 차례로 띄워졌다.“다들 알다시피, 이번 일은 고위층들이 아주 줄줄이 엮여있어.”당당하게 굴기로 결심했다. 죄를 진 건 아버지고, 자신은 그 죄를 밝혀낼 가장 중요한 키를 가진 위치에 있으니까.“자료들은 전부 분산시켜 저장해뒀습니다.”“응. 일 순위 타겟은 신태호 준장이다.”회의실에 적막이 흘렀다. 그들이 부자 사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지금, 준호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석현이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쉽지 않을 겁니다.”“알아. 오늘 안에 1차 라인 정리한다.”그 말이 끝나는 순간, 키보드가 타닥타닥 정신없이 움직였다.각자의 화면에서 암호화된 창들이 하나 둘 열리고, 예약된 발송 리스트가 활성화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VIP들은 물론 신태호에게 영상 하나가 전송되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 속 앵커가 단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속보입니다. 차기 국방부장관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 신태호 중장의 사생활이 폭로되었습니다. 미래를 알려준다는 목적으로 상담소를 운영하며 상당한 금액을 받고, 상담자를 긴 세월 감금하고 성폭행, 성매매 알선까지 일삼았다는 충격적인 제보입니다. 게다가 상담자는 신태호 중장의 사생아로 알려져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데요.딱 거기서 화면이 정지되었다.정지된 영상 위로, 배경음 하나 없이 서늘한 문장 하나가 느릿하게 떠올랐다.- 다들 놀라셨나 봅니다? 잠깐의 공백 후 본론이 이어졌다. - 아직은 안심하시죠. AI로 만들어진 뉴스 화면이니까. 하지만 이 화면이 사실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의 선택이 중요하겠죠.- 이 메시지를 받으신 분들에게 기회를 한번 드려볼까 합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 첫째, 지금부터 신태호 중장과 그 어떠한 결탁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하십시오. - 둘째, 다시는 미래에 대한 조언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요구도, 접촉도, 시도도 모두 포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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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오후 두 시, 리스트에 있던 대부분의 VIP들에게서 각서가 도착했다.모두가 응할 거라 기대한 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1차 압박은 이 정도면 됐어. 다들 보안에 더 신경 써주고.”“알겠습니다.”차 키를 집어 들고 회사를 나섰다. 세시가 되기 전에 영이에게 가야 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유리창에 반사됐다.도로 위의 차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세상은 여전히 평온했다.“금방 갈게. 영아.”산 입구에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검은 세단 한 대가 보였다. 준호는 자연스럽게 핸들을 틀어 비켜갈 공간을 만들어줬다. 서로 한 번씩만 양보하면 지나갈 수 있는 무리 없는 너비.히지만 내려오던 차에는 오히려 속도가 더 붙고 있었다. “뭐야...?”클랙션을 울렸지만 반응은 없었다.브레이크등도, 방향지시등도 없이 그대로 쾅, 전면을 돌진하듯 들이받은 차. 안전벨트가 가슴을 강하게 죄여오던 순간, 그제야 깨달았다.아, 끝까지 각서를 보내지 않은 인물 중 하나겠구나.숨을 고르며 계기판을 확인했다.에어백은 터지지 않았고, 바닥으로 떨어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오후 2시 48분. 시간이 없었다.그때, 상대 차량의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둘.그들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사고를 낸 당황스러움은 전혀 없이, 정해진 절차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몸짓. 준호 역시 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통증보다 아드레날린이 먼저였다. 오히려 시야가 더 또렷해졌다.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리기 전, 석현에게 전화를 걸고 이어폰을 끼운 채 그들을 마주했다.“운전 미숙이 아니지?”“신준호 대표님, 저희랑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이따위로 모셔가는데 잘도 따라가겠어?”남자들의 표정이미세하게 굳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저희도 대표님께서 다치시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대가리가 누구야? 누구길래 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실까?”그들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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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드론이 띄워진 공중으로 향했던 김혁도의 시선이 다시 준호에게로 돌아왔다. 눈빛에 분노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계산이 겹쳐 보였다.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표정이었다.그는 결국 버티지 않기를 택했다. 욕설을 삼키며 뒤돌아서고, 올라탄 차는 공터를 다급히 빠져나갔다.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영이를 더 꼬옥 품에 끌어안았다.영이는 여전히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어깨가 작게 들썩였고, 손은 바르르 떨렸다.“왜 여기 있어. 왜 밖에 있어.”“오빠 올 시간 돼서 데리러 나왔어... 같이 집에 가려고...”“누가 누굴 데리러 와. 하....”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하마터면 정말로 위험할 뻔했다. 차에 태워 데려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또 가둬두고 망할 상담에, 옷까지 벗겼으면 어쩔 뻔했냐고. “밖에 나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문 열어주지 말라고도 했고.”“그치만, 혹시라도 오빠가 안 오면...”“오빠는 약속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손을 뻗어 영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차갑게 식어버린 체온. 그 온도에 맞춰 분노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응.”“미안해. 오빠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괜찮아. 왔으니까.”자리에서 일어나 영이를 조심스레 일으켰다.외투를 걸쳐주고, 몸으로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섰다.“집에 가자.”영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준호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공터에는 다시 찬 바람이 불었다.***준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 영이에게 건네주었다. 영이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으며 준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근데 오빠... 김혁도 의원님, 혼내지 마.”“뭐라고?”“어차피 혼나.”이상하리만큼 차분했지만,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준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영이는 찻잔을 조금 더 꼭 쥐었다. 손이 따뜻해질수록 말은 더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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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평소보다 이른 남편의 퇴근. 아내 숙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여보, 일찍 오셨네요?”태호는 입을 꾹 다문 채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숙경 역시 그 뒤를 따랐지만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요즘 들어 남편의 기분이 영 가라앉았다. 말수는 더 줄었고, 눈길은 어딘가를 비켜갔으며, 밤이면 침대 가장자리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눕곤 했다.고민인지, 분노인지.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는 공유되지 않는 종류의 것.“요즘 진짜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어떤 감정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숨이 흘러나왔다.그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침대 옆 협탁에 손을 짚었다. 손등의 힘줄이 유난히 도드라졌다.“여보?”“준호가 그 아이를 찾아냈어.”숙경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그 아이라면 분명 유영일 텐데. 그 이름은 십 년이라는 시간만큼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는데. 준호가 도대체 왜? 갑자기 왜?“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글쎄, 그 자식이 십 년 동안 유영을 찾고 있었다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발칙하게!”호통까지 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모든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말,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찾기만 한 게 아니야. 내 뒤통수를 완전히 날려버렸다고.”숙경은 그 말의 의미를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이 영이를 건드렸을 거라는 생각은 일절 하지 못했고, 그저 소름끼치는 능력을 이용했다는 것. 오직 그것 만으로도 얼굴에서는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제대로 숨겼어야죠...!”“그 자식이 대한민국에서 못 찾아낼 인간이 있던가? 내 그걸 놓쳤어. 그걸.”어떡하지, 이유가 어찌됐든 한 인간을 산 속에 가둬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오랫동안 쌓아온 명예와 명성은 와르르 무너질 텐데.게다가 준호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그 기지배를 챙겼었다. “당장 떨어뜨려 놔요. 혹시라도 마음 약한 준호를 꼬드기기라도 하면요? 다른 마음이라도 품기라도 하면요?”“아니, 서로가 남매인 줄 알아. 아직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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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준호가 지내던 집은 산속의 집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더 넓고,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문을 닫는 순간 자동으로 작동하는 잠금장치, 시선을 훑듯 따라오는 카메라의 미세한 움직임, 손을 대지 않아도 반응하는 센서들.그리고 현관에서부터 최신식 보안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설치되어 있는 곳.탁 트인 거실은 창 너머로 도심의 불빛이 내려다보였고, 불필요한 가구와 장식은 일절 없었다.준호는 영이를 데리고 자신의 침실 옆, 굳게 닫힌 방문을 살짝 열었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와 레이스 커튼, 화장대까지. 부드러운 색감으로 정돈된, 분명 여성의 방이었다.“여기야. 영이 방.”영이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위한 방이 준비되어 있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오빠, 내 방이... 있었어?”“당연하지. 영이만 찾아다녔는데. 이날만 기다렸는데.”방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침대 위에 손을 얹자, 낯선 감촉이 전해졌다. “마음에 안 들면 바꿔도 돼.”“아니야, 좋아.”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이 방은 환영의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돌아갈 곳이 없다는 신호와도 같았으니까. “좀 쉬어.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오빠. 나 정말 여기 있어도 돼?”“영이 방에 영이가 있어야지, 그럼 누가 있어.”고개를 끄덕이자 방문이 조심스레 닫혔다.영이는 혼자 남은 방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안전해 보이는 공간, 완벽하게 준비된 자리. 오빠가 자신을 그토록 찾아헤맸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오빠. 나를 잊지 않아서요. 나를 찾아줘서요.”혼잣말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리자,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각종 화장품, 머리끈, 향수, 새것 특유의 냄새들.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위해준 적이 있었던 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레이스 커튼 사이로 도심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산속의 밤과는 전혀 다른 색의 어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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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회사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준호는 가슴이 답답했다. 평생을 집안에 갇혀 지내던 아이였는데, 자신 역시 안전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를 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이게 정말 영이가 원하는 삶일까, 자유가 확실한 걸까.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다독이듯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적어도 예전처럼 방치하지는 않을 거라고.퇴근을 하고 나서는 저녁을 먹고, 동네를 거닐었다. 가로등이 두 사람의 앞길을 고르게 비춰주었고 아파트 산책로엔 아이들, 신혼부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까지.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얼굴들이 이어졌다.영이는 보도블록 위를 걷다 말고,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며 웃고, 누군가는 유모차를 밀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조깅을 하고 있었다.특별할 것 없는 풍경. 그래서 더 낯선 풍경이었다.“사람이 많아.”“이 시간엔 그렇지 뭐. 저녁 먹고 한 바퀴 돌기 딱 좋으니까.”가로등 아래,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영이의 표정은 여전히 아이 같았다. “오빠. 나도 이제... 저렇게 해도 돼?”“응. 지금도 하고 있잖아. 앞으로도 오빠랑 같이 천천히, 천천히 하면 돼.”허락 같기도, 유예 같기도 한 대답이었다.짧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귓가에 들리는 일상적인 소음들은 전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 일상이 영이에겐 연습이라는 것. 그리고 연습에는 언제나 다음 단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그날 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준호는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한 캔을 땄다. 캔이 따지는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영이가 고개를 돌렸다.“오빠, 그건 뭐야?”“맥주.”“맛있어?”“그냥. 시원하니까 마시는 거지.”영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캔을 바라봤다. 아니,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럼, 물이랑은 달라?”“응, 좀 써. 영이 입맛엔 안 맞을 거야.”“왜?”“영이는 단 거 좋아하잖아.”“그래도... 조금 궁금해.”준호는 한참을 고민했다.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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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준호 역시 곧바로 방 불을 끄지 못했다.영이의 입술을 닦아주던 그 감촉이 자꾸만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부끄러워하던 표정도, 같이 자자며 떼를 쓰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그 표정을 마주한 순간만큼은 동생이 이나리 확실한 여자로 느껴졌었다.그건, 보람이에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감정이었다.“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까.”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게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심보 역시 못되기만 한 보람이와 영이는 애초부터 결 자체가 다르잖아.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각자의 방, 각자의 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은 어딘가 평소 같지 않았다는 것. 아주 사소한 차이였지만 그 차이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까지도. 연습처럼 지나간 하루의 끝,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밤을 건너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하지만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연습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조금씩 늘어날 것 같았다.***영이는 출근을 한 준호를 기다리며 문득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겨왔다.영이는 책장마다 꽂혀있는 책들을 손등으로 훑으며 시집 한 권을 골라 꺼내들었다.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이 크게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사람은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면, 그 기다림의 모양으로 어느새 변해간다.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는 문장이었다. “기다리면... 변하는 거구나.”다음 페이지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단정하지만 힘이 과하지 않은 선이 또렷했다.- 사랑은 말보다 먼저 도착한다.손가락으로 그 밑줄을 살짝 따라 그었다. 심장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뛰었다. “오빠는 이걸 언제 읽었을까...?”단지 같은 문장을 읽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건지. 이상하게 차마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종이 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오후의 햇빛이 책장 사이로 기울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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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온 준호는 문 앞에 있는 어머니를 마주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뒤를 돈 숙경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준호야,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잖아.”“제발 그만 좀 하세요. 제발요...”“다 알고 왔어. 저 아이가 누구인지, 누구 핏줄인지.”결국 아버지는 모든 걸 털어놓으셨구나. 아마 역겹고 더러운 일은 쏙 빠뜨렸겠지. 지옥 같은 현실이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어머니도 이 사실은 아셔야 한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인생을 위해서. “그래서요? 사생아 라는 걸 알고 나니까, 영이가 전보다 더 미우세요?”“예쁠 리가 있니? 잘난 네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인데.”잠깐의 정적 후, “근데 어쩌죠, 그게 다가 아니던데요.”"뭐?""아버지가 영이를 성폭행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성매매까지 알선했어요. 자기 딸을, 자기 핏줄을. 이 얼마나 끔찍하고 더럽고 역겨운 일입니까?"숙경의 다리가 휘청거렸다.충격을 먹은 건, 남편 때문이 아니었다. 유영에게 단단히 홀린 아들이 벌써 거짓부렁에 놀아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너 미쳤니? 어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입에 올려? 유영이 그러든? 아니, 너는 그 기지배가 지어낸 소설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린 거고?""소설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CCTV로 다 확인 했습니다."CCTV? 산 속의 주택. 분명 이곳 저곳 CCTV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었는데.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된다. 남편이 외도를 했다고? 그리고, 그 상대가... 그 상대가.... 유영이라고?"이혼하세요. 이건, 가족에 대한 배신을 떠나 악랄하고 더러운 범죄입니다."숙경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핸드백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엔 어느새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아들은 정말 유영이 동생이라고, 그게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자보다는 동생으로 보는 편이 훨씬 낫겠지. 속이 뒤집히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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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매정했고, 정확하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영이가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보았다.눈망울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아... 아니.”“오빠도 싫어. 영이랑 떨어져 있기 싫어.”“근데 무서워... 나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생길까 봐.”버티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 듯, 솔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는 동의였다.“알아. 오빠는 그래도 영이 옆에 있을 거야.”영이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준호는 몸을 더 낮춰 영이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작은 등을 느릿하게 쓰다듬어 주었다.“기특하네. 이제 엉엉 소리 내서 울기도 하고.”그 말에 흐느끼는 소리가 더 커졌다. 준호는 영이의 눈물이 아팠지만, 동시에 다행이기도 했다.어릴 때부터 영이는 울기는커녕 늘 괜찮다는 말로 모든 걸 덮어왔었다.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야 했던 아이가, 지금은 괜찮지 않다며 울고 있었다.“울고 싶은 만큼 뱉어 내. 오빠는 괜찮으니까.” 한참을 이어지던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영이가 고개를 들며 준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손끝에 닿은 셔츠가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다 젖었어.... 미안해.....”“많이 울긴 했네.”손을 들어 영이의 머리칼을 한 번 정리해 주었다.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향긋한 샴푸 향이 풍겨오는데, 조금 전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한 향기였다.“이제 나갈까?”“아니...”고개를 천천히 젓던 영이가 준호의 목을 끌어안았다."영아?"대답은 말이 아니라, 입맞춤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돌처럼 굳어버린 준호는 눈만 크게 떴고, 영이는 반대로 눈까지 감은 채 준호의 입술을 사탕처럼 빨기 시작했다.그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혀의 느낌에, 아득했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곧바로 영이를 밀쳐내고, 옷장에서 한 걸음 멀어졌다."유영!"깜짝 놀랄 만큼의 호통이었지만, 눈물 범벅인 얼굴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표정이었다.이건, 그냥 인사같은 거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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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석현은 소파 끝에 멀리 떨어져 앉아서는 괜스레 말을 걸었다.“어? 오빠도 이 채널 좋아해.”“오빠도... 오빠예요?”너무나 아이같은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준호 친구니까 나도 오빠지.”“아... 저는 그럼 오빠가 두 명인 거네요.”“맞아, 든든한 오빠가 둘.”준호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었다.영이가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꽤 기특했다.“영아! 오빠가 진짜 오빠고 쟤는 가짜 오빠야.”“신준호! 훔쳐 듣지 마라.” “오빠가 집주인이고 쟤는 그냥 손님. 그러니까 훔쳐 듣는 건 애초부터 성립이 안 돼.”“너네 오빠 되게 웃긴다. 그치?”영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짧은 소리였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가짜 오빠도 괜찮아요.”석현의 표정이 환해졌다.“봐봐! 영이 이미 내 편이다!”“와서 수저나 세팅해.”“휴, 애가 성격이 더 나빠졌네.”잠시 후, 식탁 위에는 정성스러운 식사가 차려졌다.토마토 파스타와 샐러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했고, 무엇보다 막 만들어진 음식이었다.“오, 신준호. 요리 좀 한다?”“몰랐냐?”“집에서도 컴퓨터나 두드릴 줄 알았지.”석현의 장난에도 준호의 시선은 오직 영이를 향해 있었다.“호호 불어서 많이 먹어.”“오빠도. 아, 가짜 오빠도 많이 드세요.”“푸하. 영이 엄청 귀엽네.”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 샐러드를 집는 소리. 식탁 위에는 오늘도 소리다운 소리가 흘렀다.영이는 파스타를 한 입 먹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맛있어.”정직한 감상에 준호의 입꼬리가 바짝 올라갔다.석현은 그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이 집의 중심은 이미 정해져 있구나. “영아, 오빠가 요리 자주 해줘?”“네. 맨날 해줘요. 그리고 엄청엄청 맛있어요.”“뭐가 제일 맛있었는데?”“김치볶음밥이요.”“역시, 국룰이지.”영이는 대답은 꼬박꼬박 하면서도, 포크질은 영 어색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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