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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Chapters

제71화

주문 완료 화면이 뜨자, 영이는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받는 사람 이름 유영, 그 아래에 적힌 선명한 집 주소까지.“기다릴 게 생겼어.”“컵?”“응. 내일이 조금 빨리 와도 좋을 것 같아.”기대감이 잔뜩 담긴 말투와 표정이 얼마나 귀엽던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영이의 모습에 ‘키울맛이 난다’는 생각이 스치자, 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앞으로 필요한 건 이렇게 쇼핑하면 돼.”“난 오빠랑 마트 가는 게 더 좋은데.”“응, 당연히 마트도 가고.”영이가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더니, 컵이 올 자리를 이미 머릿속에 그려둔 사람처럼 주방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오빠, 새 컵 오면 내가 커피 타줄게.”“엄청 기대되네?”“응. 엄청 엄청 맛있게.”***다음날 오후, 회의를 막 마치고 한숨을 돌리던 중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영이에게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 오빠, 새 컵 왔어. 예쁘지?방금 막 도착한 머그컵 사진까지 첨부한 게, 이제는 핸드폰도 제법 능숙하게 쓰는 모양새였다.심지어 사진의 각도도, 초점도 나쁘지 않았다. - 응. 영이가 고른 거니까. - 근데 인터넷 보니까, 저녁에 마시는 커피는 안 좋대. 커피는 내일 아침에 타줄게.자꾸만 웃음이 났다. 별것 아닌 문장 하나가 하루를 가볍게 만드는 기분.그리고, 내일 아침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오가는 게 언제부터였나 싶어서.결국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집에 조금 더 빨리 가고 싶어졌다. 커피는 내일이지만, 그냥 이유 없이 그래야 할 것 같았다.사무실을 나서자, 태블릿을 손에 든 석현이 다가왔다.당당했던 준호가 깜짝 놀랄만큼 정확한 타이밍.“대표님, 어디 가십니까?”“농땡이.”“야! 다음 주에 중요한 미팅 있는 거 몰라?”“알지. 근데 어여쁜 영이가 집에 혼자 있잖아.”지금의 신준호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아무것도 몰랐던 석현은 결국 직원이 아닌, 친구로서 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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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아무리 좋아 죽겠어도, 당장이라도 침실로 달려가고 싶어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확한 설명이 필요했다.“맞아. 어떤 일은 정말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해. 근데, 이 말이 상처가 되는 건 타이밍 때문이야.”“타이밍?”“응. 들은 사람이 하필 가장 아픈 순간일 때.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혹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뭔지 알겠어. 위로가 아니라 미루는 말이라 그런 거구나.”“맞아.”영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생각에 잠긴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준호를 올려다봤다.“나한테 이 말이 지금 괜찮았던 건, 힘든 순간이 다 끝난 다음이라서 그랬었나 봐.”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왠지 모르게 영이의 말이 준호에게도 위로가 됐다. 이미 끝난 아픔을 돌아보며 덤덤한 말로 내뱉는 것.도망치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고, 그냥 그랬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보다 확실한 치유가 또 어디 있을까.“영아. 너 혹시 천재야?”“응?”“우리 영이 천재야. 천재가 분명해.” 영이는 당황한 듯 눈만 깜빡였지만, 준호는 확신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은 팔불출이다. 영이 한정, 꽤나 지독하고 평생 바뀌지 않을 그런 팔불출.“오빠, 가짜 오빠는 또 안 와?”“왜. 보고 싶어?”“그냥. 가짜 오빠 덕분에 노트북이 많은 걸 알려주니까.”“영이가 직접 전화해 봐.”핸드폰 잠금을 풀어 건네주자,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어색하게 미끄러졌다.그리고 주소록을 여는 순간, 화면을 가득 채운 이름들에 두 눈이 동그래졌다.“왜 이렇게 많아?”“검색창에 이름 적어 봐. 영이가 직접.”“이름이.... 아 맞다. 강석현이랬어.”석현의 이름이 뜨자, 영이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준호는 살짝 손을 뻗어 스피커폰으로 설정을 바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왜. 농땡이 씨.”“가짜 오빠. 저 영이에요.”이번에도 석현의 목소리가 단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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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이어가던 중, 영이가 석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석현이 먼저 눈치를 챘다.“영아?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어?”그 순간이었다. 영이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아니, 스르륵이 아니라 활짝이었다. 입이 귀에 걸릴 듯한, 숨길 생각조차 없는 웃음. 처음이었다. 영이가 그렇게 웃는 건.“축하해요.”“응? 그게 무슨 소리야?”갑작스러우면서도 알 수 없는 말에 준호와 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영이는 자꾸만 웃기만 했다.마치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고,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기분 좋은 물벼락.”“물벼락?”“여기까지만요.”준호는 알았다. 영이가 방금 무언가를 봤구나.그 미래라는 것. 석현에게 조만간 닥칠 일. 그걸 본 것이 틀림 없었다.하지만 분명히 나쁜 기척은 아니었다. 그래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강석현, 복받은 줄 알아라.”“이게 다 무슨 소리인데!”“영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순간, 석현의 머릿속에도 준호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영이는 미래를 본다고. 그게 산속에 갇힌 이유 같다고. 어느 날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기분 좋은 물벼락이 뭔지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자세히 묻고 실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와~ 영아! 웃으니까 더 예쁘네.”그제야 영이의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지었던 미소가 갑자기 민망해진 탓이었다. 문제는 준호는 석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쁘다는 말이 신경쓰여 죽겠다는 것.“예쁘다는 말 금지다.”“야, 진짜 남매처럼 굴어. 보통은 눈깔이 삐었냐고 반응하는 게 정상이야.”진짜 남매. 그 말에 준호는 입이 다물렸고, 영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남매 아닌데요?”생각지도 못한 말에 석현은 당황한 듯 준호를 바라보았고, 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영, 영아. 물 줄까?”영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식탁 위에는 다시 젓가락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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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그때, 영이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향해 머그컵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오더니, 석현을 향해 내밀며 이리저리 움직였다.“이거 봐요. 인터넷으로 처음 산 물건이에요.”“컵이네? 영이 거야?”“아니요. 준호 오빠 거요. 오빠가 손이 커서 손잡이가 큰 컵이 필요했거든요.”“야.... 신준호... 좋겠다..... 부럽다.”준호는 괜히 컵을 들어 올려 손에 쥐어봤다.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들어갔고,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영이가 말한 그대로였다. 딱 맞는다는 말이 이렇게 정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마음껏 부러워하거라.”“얄미워 죽겠네.”투덜대는 석현을 두고, 영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눈동자가 바쁘게 오가는 게, 꼭 상황을 파악하려는 얼굴이었다.“오빠도 필요해요?”“오빠도 사 줄 거야?”준호의 목소리가 버럭, 평소보다 훨씬 크게 튀어나왔다.“안 돼!”석현이 준호를 향해 눈을 좁혔다.저 속 좁은 자식 같으니라고. 저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영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왜? 석현 오빠는 사주면 안 되는 거야?”“어, 저 자식은 집에 컵이 100개나 있어. 나보다 손도 훨씬 더 작고.”스스로가 생각해도 유치한 질투심. 다행히도 석현은 별다른 의심이 없어 보였다.“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이런 식으로 쪼잔하게 굴 줄은 진짜 몰랐다.”“미안해요. 준호 오빠가 안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석현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됐어.”한숨처럼 웃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만 간다.”영이가 곧바로 따라 일어났다.“오빠... 화났어요?”“아니 아니, 저녁도 먹었고 끝내주는 타자 구경도 했으니까. 오빠도 이제 집에 가야지.”“정말 화난 거 아니죠?”“조금 삐치긴 했는데, 괜찮아.”그 말에 영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금방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번졌다.“강석현, 적당히 해라. 괜히 영이 신경 쓰이게.”“뭐! 삐친 거 맞거든?”“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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