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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Kapitel

제81화

오늘따라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준호의 표정이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투자는 확정됐고, 조건도 깔끔하게 정리됐다. 숫자와 일정, 법무 검토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성공이었다.문제는 그 다음 수순인 미국 본사 미팅. 파트너십 서명, 기술 브리핑. 아무리 서둘러도 일주일은 비워야 했다.회사 대표로서 당연한 일이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정이다. 다 알면서도 마음이 무거운 건, 당연히 영이 때문이었다. 똑똑.노트 소리가 들리고 석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그 역시 참조된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찾아온 것. “이러고 있을 줄 알았지.”“하... 주민등록증 발급하면서 여권도 만들어뒀어야 했는데.”“영이는 내가 살피면 되잖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준호는 그런 석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말하는 얼굴에 불편한 궁금증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왜냐니, 네 동생이니까.”정말 그게 다일까. 외동으로 자라온 탓에 동생이 생긴 기분이 좋다고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생각에 잠겨 뜸을 들이는 사이, 석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신준호. 영이는 그냥 동생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선 같은 거잖아.”“...맞아.”“걱정되는 마음은 알겠다만 일은 일이야. 지금 이러는 거 너답지 않아.”준호가 쓴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어른인 척이냐?”“원래 정신연령은 내가 더 높았거든.”“재수 없기는.”“고맙다는 뜻으로 알아들을게.”***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준호는 따뜻한 허브티 한 잔을 탔다.향이 너무 진하지 않게, 또 연하지도 않게. 영이가 딱 좋아할법한 그 온도로.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영이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자.”“고마워, 오빠.”자연스레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마음을 가다듬었다.일주일. 딱 일주일이다. “영아.”“응?”“오빠 다음 주에 출장이 잡혀서, 미국에 좀 다녀와야 해.”“우와... 미국?”“응.”걱정과 달리,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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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며칠 뒤, 출국 당일.출국 시간은 밤이었지만 준호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영이가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은 언제든 데워먹을 수 있게 냉동실에 얼려두고, 간단하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레트로트 국도 찬장에 채워놨다.- 전자레인지 3분 / 냄비에 붓고 끓이기만 하면 됨 / 가스밸브는 사용 뒤 꼭 잠글 것.포스트잇도 보기 쉽게 붙여두고, 마지막으로 과일까지 씻어서 밀폐용기에 담아두었다. 아, 혹시 밤에 배라도 고프면..?그 생각에 견과류도 식탁 위에 꺼내 놓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오빠, 뭐해?”“이리 와 봐.”영이는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향했고, 준호의 설명이 시작됐다.“김치볶음밥 얼려뒀으니까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돼. 용기 뜨거우니까 꼭 장갑 끼고 꺼내고.”“으응.”“여기 있는 국들은 전부 냄비에 붓고 끓이면 되고, 혹시 몰라서 즉석밥도 잔뜩 사놨어. 아, 그리고 냉장고에는...”“오빠.”“응?”“나 스물넷이야. 아기 아니야.”준호의 설명이 딱 끊겼다. 동시에 말없이 영이를 내려다봤다. 헝클어진 머리, 아직 잠이 덜 깬 눈, 파자마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선 모습은 스물넷이라는 숫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데.애 취급은 이제 싫어진 건가? 하긴, 침대 위에서의 영이는 완벽한 여자다. 그것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요물임이 틀림 없었다.“알지. 오빠는 그냥 영이가 덜 불편했으면 해서.”“밥도 잘 먹고, 혼자서는 절대 안 나갈게. 약속.”“그래. 약속.”냉장고 문을 닫고, 찬장 문도 닫고, 괜히 주방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분명 떠날 준비는 끝났는데 마음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아 맞다, 저녁까지 영이나 안아줘야지. 앞으로 일주일이나 못 볼 텐데.그대로 영이를 안아들었다. 영이의 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오, 오빠!""남은 시간은 전부 섹스만 할 거야.""꺄앙! 그건 너무 길어...!""하나도 안 길어."침실 문은 발로 밀어 열어재끼고, 몸에 걸친 파자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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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아침부터 시작된 섹스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준호는 욕실에서까지 영이를 놓아주지 않았고, 늦은 점심을 먹을때가 되서야 다정한 오빠로 돌아왔다.젓가락질을 하는 영이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힘들어?""팔도 다리도 기운이 하나도 없어.""미안해. 일주일이나 못 볼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안차려지네."영이는 금방이라도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잠을 자고 싶었다.하지만 그건 안 된다. 오빠를 배웅해줘야 하는 거니까. 오빠 말대로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오빠는 성격이 두 개야.""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평소에는 엄청나게 자상한데, 옷만 벗으면 꼭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 같아."준호가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렸다. 근데 그건, 나한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영이도 마찬가지야.""내가 뭘?""영이도 침대 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잖아. 특히나 오빠 위에 올라 탔을 때는... 하...."영이가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손부채질까지 해대기 시작했다. 한껏 즐겨놓고는 이제와서 부끄럽기라도 하다는 건지. 하긴, 오늘은 유난히 많이 싸기는 했어. 솔직히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얼마나 놀랐다고.매트리스 커버를 벗겨낼 때 ,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니까."그, 그만해...!""창피해?"끄덕끄덕.붉게 달아오른 두 뺨과 귓바퀴를 보고 있자니, 눈치 없는 성기에는 또 다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꾹 참아냈다. 손까지 떨어대는데 적어도 밥은 먹게 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그리고, 여기서 한 번이라도 더 했다가는 정말로 비행기를 타기 싫어질지도 몰랐다.요즘들어 회사고 나발이고. 영이를 제외한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다는 생각이 한 두번 드는 게 아니었으니까.***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인터폰 화면 안에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석현이었다. 영이와 함께 준호를 배웅해 주기로 한 것. 그는 신발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준호와 영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냥, 이 애틋한 남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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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한참을 웃고 떠들던 중, 공항 방송이 울렸다. 애석하게도 준호의 항공편 탑승 안내였다.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호. 캐리어 손잡이를 잡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여기서 빠빠이 하자고.”“그래. 그게 낫겠다.”순간, 영이의 입술이 빨대에서 떨어졌다. 준호는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금방 다녀올게.”“으응. 일주일.”“강석현이 괴롭히면 바로바로 전화하고.”“으응. 바로바로 이를게.”어처구니가 없어진 석현이 고개를 저었다. 괴롭히기는, 이게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아니, 그보다 이른다는 영이의 말이 더 기가 막혔다.“진짜 못 봐주겠네, 못 봐주겠어.”준호는 더는 머뭇거리기 싫어, 영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감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뒤를 돌아 걷는 동안 등 뒤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부르는 목소리도, 울음도,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도. 그래서 더 빨리 걸었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려서.석현은 준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영아. 이제 그만 집에 갈까?”영이는 한참을 그 방향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안 우네?”“네. 처음 헤어진 게 아니니까요.”“이번엔 헤어지는 게 아니잖아.”“맞아요. 그래서 하나도 안 슬퍼요.”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팔짱도, 맞잡은 손도 없었지만 발걸음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영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오빠들은 언제부터 친구였어요?”“대학교 때.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이 다 돼 가네.”“그동안 한 번도 안 싸웠어요?”“싸울 틈이 없었어.”“왜요?”“신준호는 10년 내내 너 하나 찾는 데만 미쳐있었으니까.”영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지만, 영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몰, 몰랐어?”“알았어요. 알았는데.....”“근데 왜 그래. 응?”“그냥.... 그냥... 가슴이 먹먹해서요.”석현은 그런 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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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영이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 너겟 사진을 찍더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뭐 해? 준호한테 보내는 거야?”“네.”“얼른 먹자. 이렇게 포장 뜯어서 손에 꼭 쥐고.”석현은 햄버거 포장을 벗겨 보란 듯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영이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보고 작게 웃었다.“오빠. 입에 다 묻었어요.”“햄버거는 원래 묻히면서 먹는 거야.”영이도 입을 크게 벌려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그리곤 석현을 따라 감자튀김은 빨간 케찹에, 치킨너겟은 노란 머스터드에 찍어 오물오물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맛있지?”“네. 근데 햄버거보다 감자튀김이 더 맛있어요.”“뭘 좀 아네! 아 맞다, 영아!”“네?”“내일은 공원에 산책하러 갈까? 그래도 주말인데, 집에만 있기도 답답하잖아.”“음... 좋아요.”대답과 함께 콜라를 마시던 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익숙하지 않은 탄산 덕분이었다. “으앗!”석현이 깜짝 놀라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왜...! 왜!”“목이 따가워요.”“아... 놀랐잖아!”“그래도 맛있어요. 희안한 맛이에요.”“콜라는 햄버거랑 궁합이 가장 죽여주는 음료야.”그렇게 한참 동안 식사가 이어졌다.바닥에 양배추가 떨어지든, 입가에 소스가 묻든. 두 사람은 그것조차 웃음으로 넘기며 식사 내내 미소를 머금었다.“잠은 잘 잤어? 혼자 있는 거 안 무서워?”“원래도 혼자 있었는데요, 뭐.”“아...”영이가 가끔 아무렇지 않게 지난 일을 툭툭 내뱉을 땐, 이상하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내온 시간을 몰랐다면 질문이라도 던졌을 텐데.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내일 12시쯤 데리러 올게. 같이 점심 먹고, 산책도 하고 영이가 가고 싶은 곳도 가자.”“가고 싶은 곳이요..?”“응. 자기 전에 눈 꼭 감고 생각해 봐.”“네.” ***다음날, 영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샤워를 끝내고 머리도 보송보송하게 말렸고, 옷장 앞에 서서 옷을 고르기까지 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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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영이가 작은 가방을 챙겨 나와 신발을 신자, 석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가방은 오빠가 사 준거야?”“네. 지갑도, 신분증도, 카드도 줬어요.”“좋은 오빠네.”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싣자, 영이한테서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그동안 적지 않게 맡아본 향수 냄새일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지? 등줄기에서는 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인 거지? “가고 싶은 곳은 생각해 봤어?”“네. 백화점이요.”“응? 백화점? 뭐 살 거 있어?”“오빠 돌아오면 줄 선물이요. 선물 사고 싶어요.”“와, 신준호 신나서 입 찢어지겠네.”석현은 웃었지만, 영이는 아니었다. “어차피 오빠가 준 카드지만... 그래도요..”“그런 게 뭐가 중요해. 마음이 중요한 거지.”“그럼 오빠가 같이 골라주세요.”차는 부드럽게 달려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점심부터 먹고, 쇼핑이 시작됐다. 한참을 둘러보던 영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보는 것들마다 익숙했다. 멋진 정장도, 넥타이도, 셔츠도.생각해 보니 준호는 이미 드레스룸이 가득 찰 정도로 가지고 있었고, 시계와 향수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오빠는.... 없는 게 없던데요.” “아무래도 만나는 사람이 많으니까. 신경 써서 차려입는 건 그 자식한테는 습관이야.”“그럼 저는... 오빠한테 선물할 게 없는 거네요?”“저거, 저거 어때?”석현의 손끝을 따라간 곳엔 고급스러운 전동 면도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저게 뭔데요?”“면도기. 매일 아침 쓰는 거.”“그것도 아마 가지고 있을걸요?”“이참에 새걸로 바꾸라고 해. 그럼 면도할 때마다 영이 생각할 거 아니야.”응? 면도를 할 때마다 내 생각을 한다고?얼마나 자주 하는지, 그게 정말인지는 몰랐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그럼 볼래요.”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다가와 상냥하게 응대를 시작했다.“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물건 있으신가요?”영이는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쭈뼛거렸고, 석현이 대신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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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역시나 영이에겐 늘 신준호가 일 순위다. 그러면 어떠한들, 눈앞에서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편해지는걸. 아, 정작 나한테 있어 일 순위는 뭘까?그동안은 분명 회사였는데,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요즘은 자꾸만 영이 생각이 난다. 영이 걱정이 된다. 설마 이 순해 빠진 유영이, 가장 친한 친구의 여동생이 어느새 나의 일 순위가 되어버린 건가.“영아, 영이한테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우리 오빠요?”“아니, 나.”영이는 빨대를 입에 문 채 잠시 고민했다.눈동자가 한 번, 두 번 굴러가더니 다시 웃었다.“엄~청 엄청 좋은 사람이요.”“정말?”“네. 우리 오빠 다음으로요.”솔직한 대답에 석현의 머릿속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애초부터 다른 오빠잖아. 신준호는 진짜 오빠다. 아무리 사생아라는 말이 따라붙어도, 절반은 같은 피가 흐른다.지켜야 할 이유가 명확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 역시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맞다. 가짜 오빠다.그러니까 언제든 남자로 다가갈 수 있는 위치. 심장이 뛰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라 뜻이다.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분명, 오랜 시간 갇혀 끔찍한 일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왜자꾸 영이가 여자로 보이는 건지.그 아픔과 상처마저 안아주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또렷하게 알려주고 싶었다.'서두르지 말자. 영이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익숙치 않을 테니까.'***호수 공원에서는 유독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어느새 바뀐 계절은 주변을 꽃과 풀로 한가득 메꾸었고, 넘실거리는 물결조차 평온한 모습이었다. “영이 오늘 많이 걸어야 돼.” “왜요..?”“휘핑크림을 산더미만큼 먹었으니까.”영이가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아.. 맞아요. 살쪄요.”“살쪄도 귀엽긴 하겠다.”“귀여우면 안 돼요.”“왜?”“사람들이 오해해요.”“무슨 오해?”“애기인 줄 알잖아요.”이렇게 귀여운데 그럼 어떡하라고. 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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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은 영이와 석현. 두 사람의 눈길이 같은 곳을 향했다.“가족끼리 나들이 왔나 보네.”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 김밥과 과일이 가득 찬 도시락, 그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웃음들까지.모든 게 행복이라는 단어와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준호 오면, 우리도 김밥 싸서 나들이 오자.”“네. 좋아요.”“아니다, 그냥 확 지금 당장 김밥 먹을까?”“지금요...?”석현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그곳에는 작은 푸드트럭들이 줄지어 세워져있었다.“응, 지금.”“네. 좋아요.”“잠깐 바람 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네.”석현의 뒷모습이 푸드트럭 쪽으로 멀어지는 내내, 영이의 시선은 여전히 그 가족을 향해 있었다. 풀밭에서는 아이가 활짝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넘어질 듯 말 듯, 그러다 쿵하고 넘어져도 다시 웃으며 무릎을 털어내는 모습. 그때, 순하게 생긴 리트리버 한 마리가 풀밭을 뛰어다녔다. 목줄이 풀린 채였다. 리트리버는 아이에게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더니, 혀로 할짝 얼굴을 핥아주었다. 꺄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 치자 주변 사람들 모두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아무 일도 아닌 장면. 그래서 더 따뜻한 장면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이의 시선이 계속해서 리트리버를 따라다녔다.시선은 곧 발길이 되었고, 리트리버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호숫가로 향했다.그 순간, 영이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거였구나. 이래서 그런 모습이 보였던 거구나.사실, 영이는 이미 봤다.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장면을. 그래서 놀랐고, 그래서 굳어버렸고,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따라온 거였다.더 늦기 전에 막아야 했다.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숨을 들이마시며 아이 쪽으로 달렸다.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래야 불러 세우기라도 할 텐데.“저기.. 얘.. 얘야!”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발이 젖은 풀을 밟는 순간 미끄러졌다. 작은 몸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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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석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영이의 가슴을 압박했다.하나, 둘 셋. 또다시 하나, 둘, 셋.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물이 바닥에 짙게 번졌다. “어떡해... 호흡이 없나 봐요..!”누군가의 외침에 입술을 겹쳐 숨을 불어넣었다. 또다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켁..”짧고 거친 소리와 함께 입가로 물이 흘러나왔다. 작은 몸이 튕기듯이 흔들렸다.“영아..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영이가 고개를 옆으로 틀며 남은 물을 토해냈다. 물과 숨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석현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텼던 감정이 한꺼번에 풀려버린 것.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아이의 부모가 쭈뼛쭈뼛 다가왔다.아빠는 흠뻑 젖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였고, 엄마는 울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영이 앞에서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깊게, 그리고 오래.“미안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저희가 병원까지 동행하겠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석현이 고개를 저었다.“아이부터 챙기시죠.”그 말에 엄마의 울음이 다시 터졌다.석현은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영이에게만 향해 있었다.구급 대원들이 다가오고, 영이의 입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졌다. 몸이 들것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눈썹이 찡그러졌지만,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구급차가 출발하는 순간, 영이가 석현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하.... 너 진짜..”호수 공원을 빠져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말없이 길을 열었다.방금 전의 소란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고요가 뒤따랐다.병원으로 향하는 길, 영이는 한 번도 소맷자락을 놓지 않았고, 석현은 그런 영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습니다. 호흡도 정상이고, 체온도 정상이네요. 충분히 쉬시면 됩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긴장했던 어깨가 풀렸다. 커튼이 쳐진 침상 위, 영이에게 다가간 석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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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석현과 영이.석현은 영상 통화를 걸어 영이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오빠가 걱정하니까 통화해 봐.”화면 너머 준호의 모습이 떠올랐다.준호는 영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영아, 괜찮아? 어디 아픈데 없어? 숨은? 숨은 잘 쉬어져?”“오빠.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겁도 없이 거길 왜 뛰어들어!”석현이 곧장 끼어들었다.“화낼 거면 끊는다.”“아니 아니..! 영아. 으슬으슬 춥진 않아?”“으응. 하나도 안 추워.”“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집에 가면 보일러 온도부터 높이고 두꺼운 이불 덮고 자.”그 말을 듣자, 석현의 머릿속에도 걱정이 들어섰다.괜찮다고는 해도 놀랐을 텐데. 하루 종일 젖은 옷으로 힘들었을 텐데. 밤새 감기 기운이라도 들면 어떡하지? 혼자 있는데 열이라도 오르면 큰일 아닌가?“신준호. 오늘은 내가 거실에서 잘게.”화면 너머, 준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뭐?”“긴장 풀리면 뒤늦게 몰려오잖아. 혹시 모르니까.”싫다는 감정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했다.당장은 자신이 지켜줄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강석현도 믿었고.“괜찮겠어?”“나? 아니면 영이?”“영이.”“저런... 은혜도 모르는 망나니 자식.”영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이제 오빠 오려면 네 밤 남았다. 그치?”“응. 네 밤.”“얼굴살이 좀 빠진 것 같아.”“하루 종일 영이 걱정하느라고.”“치이... 살 빠져서 오면 미워할 거야.”더는 들고 있기 힘든 수준의 애절함이었다.너무 느끼해서 막 끓인 김치찌개 국물이라도 퍼먹고 싶은 지경이랄까.얘네 진짜, 남매 맞아?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적당히 해라. 아오.”“강석현. TV 아래 서랍 열면 체온계랑 구급상자 있거든? 거기 웬만한 약은 다 있으니까 가자마자 체크하고, 보일러 온도 높이고, 따뜻한 우유 끓여서....”“알아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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