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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1)

제41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1)깜빡.깜빡.깜빡.모니터 화면 위, 검은 커서가 규칙적으로 점멸했다.텅 빈 백지. 단 한 글자도 적히지 않은 워드 프로세서 창은 벌써 3개월째 도진을 비웃고 있었다."……."도진은 마른세수를 하며 책상 위로 몸을 기댔다.식어버린 커피의 씁쓸한 향이 서재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차기작에 대한 압박감. 전작의 성공이 가져다준 왕관의 무게는 그를 서서히 옥죄는 단두대와 같았다.글이 써지지 않았다.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인물들은 하나같이 생명력이 없었고, 억지로 쥐어짜 낸 플롯은 종잇장처럼 얄팍했다.살아 숨 쉬는 이야기, 독자의 숨통을 틀어쥐는 날것의 감정이 필요했다.위이잉-.그때, 책상 한구석에 뒤집어둔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도진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액정을 확인했다.[아내]여보, 나 오늘 갤러리 일이 늦어질 것 같아. 먼저 자요. 미안해.도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건조한 텍스트. 그러나 도진은 저 문장 이면에 숨겨진 수많은 정보들을 읽어내고 있었다.'갤러리 일이 늦어진다.'서아가 최근 들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변명이었다.새로운 전시회를 기획 중이라고 했지.그 천재적이고, 야생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화가. 이안.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창가로 다가갔다.창밖으로는 짙은 어둠이 깔린 고급 주택가의 정경이 보였다.가로등 불빛 아래로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미안하다고."도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보통의 남편이라면 아내의 잦은 야근과 묘하게 들뜬 태도를 의심하고, 분노하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하지만 도진은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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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2)

제42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2)하지만 도진은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시시하게 느껴졌다.흔해 빠진 치정극. 삼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전개.'아니, 내 작품은 달라야 해.'도진은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서아는 완벽주의자다.대외적인 이미지, 우아한 사모님이라는 타이틀, 갤러리 관장으로서의 명예.그녀는 이 모든 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그 알량한 자존심과 사회적 체면이 그녀를 붙잡고 있는 한, 그녀는 결코 먼저 나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못한다.그녀는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즐길 것이다.낮에는 완벽한 아내로, 밤에는 발정 난 암캐처럼 그 화가의 작업실을 드나들겠지.그 배덕감.그 아슬아슬한 줄타기.거짓말을 거듭하며 서서히 망가져 가는 인간의 추악한 심리."이보다 완벽한 소재가 또 있을까."도진은 속삭였다.그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그는 더 이상 상처받은 남편이 아니었다.그는 카메라 렌즈 뒤에 숨은 철저한 관찰자였고, 이 잔혹한 비극의 무대를 설계하는 전능한 작가였다.타다닥.키보드 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그녀는 거짓말을 할 때면 오른쪽 눈을 가늘게 뜨는 버릇이 있다. 오늘 밤, 현관에서 나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정확히 오른쪽 눈을 세 번 깜빡였다. 그녀의 코트 자락에서는 싸구려 테레빈유 냄새가 났다. 그녀는 아마도 그 냄새를 지우기 위해 욕실에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비누칠을 하고 있을 것이다.]도진은 글을 쓰며 욕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쏴아아-세차게 쏟아지는 물소리.'씻어내 봐, 서아.'도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네 몸에 묻은 그 자식의 흔적을, 네가 느끼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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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익숙해진 배덕감(1)

제43화 익숙해진 배덕감(1)오후 4시 30분.서아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까르띠에 시계를 신경질적으로 확인했다.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관장님."노크 소리와 함께 최 대리가 관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결재 서류철과 태블릿 피씨가 들려 있었다."오늘 저녁 6시에 예정된 VIP 컬렉터 디너 말인데요. 레스토랑 예약은 프라이빗 룸으로 최종 확인했습니다. 도진 작가님도 6시 반쯤 도착하신다고 방금 연락받았고요."최 대리의 말에 서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VIP 디너. 갤러리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월례 행사 중 하나였다. 평소 같았으면 일주일 전부터 입을 드레스와 와인 리스트를 꼼꼼하게 챙겼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서아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최 대리.""네, 관장님.""오늘 디너, 최 대리가 대신 호스트 맡아.""네? 하지만 오늘 자리는 도진 작가님도 오시는데…."최 대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아가 갤러리 공식 행사를 당일 취소하는 일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갑자기 급한 일정이 생겼어. 이안 작가 작업실에 좀 가봐야 해.""이안 작가님이요? 어제도 다녀오시지 않았나요?"최 대리의 순진한 반문에 서아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어제. 그랬다. 어제도 갔다.그제도 갔고, 삼 일 전에도 갔다. 이번 주에만 벌써 네 번째 방문이었다."전시 오픈이 코앞이잖아. 근데 메인 작품 진도가 전혀 안 나가고 있어. 작가가 슬럼프인지 붓을 놨다는데, 관장인 내가 가서 어르고 달래서라도 그리게 만들어야지."거짓말.서아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문장은 놀랍도록 매끄럽고 유창했다.스스로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자연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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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익숙해진 배덕감(2)

제44화 익숙해진 배덕감(2)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훅 끼쳐오는 테레빈유와 오래된 먼지 냄새.그리고 캔버스와 물감 튜브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작업실 한가운데, 이안이 서 있었다.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캔버스를 노려보고 있던 이안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왔네."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의 눈빛은 며칠을 굶주린 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서아가 문을 닫고 도어락을 잠갔다. 찰칵.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이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늦었어. 30분이나.""차가 막혀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거친 손이 서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아쥐었다.그의 손끝에 묻어있던 유화 물감이 서아의 비싼 실크 블라우스 허리춤에 그대로 묻어났다.예전 같았으면 기겁을 하며 화를 냈겠지만, 지금의 서아는 그 더러운 물감 자국마저도 자신을 향한 소유욕의 증표처럼 느껴졌다."기다리다 미치는 줄 알았잖아."이안이 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그의 억센 입술이 그녀의 귓바퀴를 질겅질겅 씹듯이 애무했다."아, 읏…. 이안, 잠깐만. 나 숨 좀 돌리고….""숨 돌릴 틈이 어딨어. 관장님 오늘 바쁘다며."이안이 비아냥거리듯 속삭이며 서아의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뜯어내듯 풀기 시작했다."저녁에 그 잘난 남편이랑 고상하게 와인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나? 나 같은 뒷골목 환쟁이 만날 시간이 어딨다고 여기까지 행차하셨어."그의 입에서 '남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서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안 가. 남편한테는… 변명해 뒀어."서아의 대답에 이안의 손길이 딱 멈췄다.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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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1)

제45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1)최고급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뿌리는 프라이빗 다이닝 룸.크리스털 와인잔이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가 고급스러운 공간을 채웠다."한 작가님, 오늘 윤 관장님이 안 보이시네요? 두 분 늘 잉꼬부부처럼 같이 다니시더니."맞은편에 앉은 중견 기업 회장이 붉은 와인을 머금으며 물었다.그의 옆에 앉은 사모님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그러게요. 오늘 윤 관장님 입고 오실 드레스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워낙 센스가 좋으시잖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진에게 향했다.최고급 맞춤 수트를 빈틈없이 차려입은 도진은, 입가에 여유롭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냈다."아, 네. 아내가 기획 중인 신진 작가 전시 때문에 골치를 좀 앓고 있어서요. 오늘 도저히 시간을 못 빼겠다고 무척 아쉬워했습니다.""신진 작가요? 누군데 우리 윤 관장님을 그렇게 애태울까.""능력은 출중한데, 예술가 특유의 고집이 좀 있는 친구인가 봅니다. 아내가 직접 달래가며 작업실에 붙어 있는 중이거든요. 갤러리 일이라는 게 겉보기엔 화려해도 뒤에서는 늘 진흙탕 싸움이죠."도진의 대답에 테이블 곳곳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허허, 한 작가님처럼 이해심 넓은 남편이 있으니 윤 관장님이 그렇게 갤러리를 훌륭하게 키워내는 겁니다. 아주 복 받았어.""과찬이십니다. 아내가 자기 일에 열정적인 모습이 저는 참 보기 좋거든요."완벽한 남편.이해심 많고 젠틀한 지식인.도진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기해 냈다.그는 사람들과 건배를 나누며, 테이블 아래로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힐끗 내려다보았다.화면에는 일반 지도 어플로 위장된 '위치 추적 앱'이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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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2)

제46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2)[부스럭, 스윽.]스타킹을 끌어 올리거나 치마를 정리하는 듯한 마찰음이 생생하게 들렸다.[미쳤어… 윤서아. 진짜 미쳤어….]떨리는 서아의 혼잣말이 녹음기를 뚫고 전해졌다.도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그래, 미쳤지. 하지만 아직 멀었어. 넌 더 미쳐야 해, 서아야.'[띠띠띠, 뚜루루루.]녹음기 너머로 서아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잠시 후, 갤러리 최 대리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네, 관장님! 디너 모임 방금 끝났습니다.]["아, 최 대리. 수고했어. 별일은 없었고? 남편은 언제 갔어?"][아, 도진 작가님요? 작가님이 분위기 정말 잘 이끌어주셨어요. 관장님 빈자리 안 느껴지게 커버 잘해주시더라고요. 작가님은 10분 전쯤에 먼저 일어나셨어요.]["그래… 다행이네. 수고했어. 내일 봐."]통화를 끊은 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하아… 다행이다….]도진은 그 대목에서 소리 내어 큭큭거렸다.그녀의 안도감이 묻어나는 그 한숨 소리가 도진에게는 최고의 교향곡처럼 들렸다.'자신이 완벽하게 속였다고 믿는 저 가련한 착각. 저게 바로 내 소설의 가장 완벽한 조미료지.'도진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아내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서, 그녀를 맞이할 '따뜻한 무대'를 세팅해야 했으니까.밤 10시.도진은 거실 소파에 앉아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탁자 위에는 미리 우려놓은 캐모마일 차가 두 잔 놓여 있었다.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띠리리릭.현관문이 열리고 서아가 들어왔다.도진은 읽던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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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1)

제47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1)지퍼가 올라가는 소리가 건조한 작업실 공기를 갈랐다.지이익-.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H라인 스커트가 다시 서아의 허리 위로 감겼다.조금 전까지 이안의 거친 손길 아래서 짐승처럼 뒹굴던 육체가, 다시금 우아하고 단정한 갤러리 관장의 껍데기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서아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흩어진 스타킹을 집어 들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오후 6시 10분.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남편 도진이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또 시계 보네."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이안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그의 입술 사이로 회색 담배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물감과 땀방울이 뒤섞인 맨가슴을 드러낸 채, 그는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서아의 뒷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리고 있었다."늦었어. 오늘은 도진 씨랑 저녁 먹기로 한 날이야. 시어머니가 보내주신 한우가 들어왔다고, 남편이 직접 요리하겠다고 일찍 오랬거든."서아는 스타킹을 발끝에 꿰며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초조함이 묻어났다."도진 씨, 도진 씨. 그놈의 도진 씨."이안이 코웃음을 쳤다.그가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비벼 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넌 그 이름 부를 때 안 역겨워?""뭐?""방금 전까지 내 밑에서 그렇게 미친년처럼 울어놓고. 옷 주워 입자마자 그 완벽한 남편 타령하는 거, 안 역겹냐고."이안의 거친 언사에 서아의 동작이 딱 멈췄다.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묘한 흥분이 동시에 혈관을 타고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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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2)

제48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2)이안은 그 모습을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서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찾지 마.""닥쳐! 찾을 거야. 당장 찾아내!""그딴 반지 하나 없다고 세상 안 무너져. 내가 새걸로 사줄 테니까 당장 일어나.""네가 무슨 돈으로 사! 도진 씨가 맞춘 거야. 도진 씨가 나한테 준 거라고! 네가 감히 나한테… 흑…."결국 서아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어두컴컴한 작업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반지를 찾는 그녀의 손끝이 시커먼 물감 떼로 엉망이 되어갔다.그녀의 눈물은 이안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긁어놓았다.이안은 성큼성큼 다가와 바닥에 엎드린 서아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올렸다."일어나라고 했지!""놔! 놓으라고!"이안은 버둥거리는 서아를 번쩍 들어 올려 다시 소파 위로 내동댕이쳤다.서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안이 곧바로 그녀의 위로 올라타 허벅지로 그녀의 다리를 짓눌렀다."이안… 제발 이러지 마. 나 무서워. 나 진짜 늦었단 말이야."서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그녀의 하얀 얼굴에 검은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이안은 서아의 양볼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윤서아. 내 눈 똑바로 봐.""흐윽….""네가 그렇게 벌벌 떠는 그 완벽한 남편. 한도진. 그 새끼가 진짜 널 사랑하는 것 같아?"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집요했다.서아의 정신을 헤집어놓으려는 듯, 뱀처럼 교활한 속삭임이었다."도진 씨는 날 사랑해. 나한테 한 번도 화낸 적 없어. 나를 완벽하게 지켜준다고.""화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화낼 가치가 없는 거겠지. 그 새끼 글 쓰는 꼬라지 봐. 온통 머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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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1)

제49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1)따뜻한 물줄기가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렸다.욕실 안은 짙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아는 샤워기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어깨를 벅벅 문질렀다.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쓰라릴 정도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이안의 거친 손길이 닿았던 허리, 그가 억세게 쥐었던 손목, 그리고 노골적으로 파고들었던 허벅지 안쪽까지.마치 피부 아래에 스며든 불결한 흔적을 도려내려는 사람처럼, 서아는 거친 타월로 온몸을 문질러댔다."하아… 아앗…."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샤워기 물소리에 묻힌 처절한 오열이었다.두 시간 전. 이안의 낡은 소파 위에서 헐떡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구역질이 치밀었다.바닥에 뒹굴며 반지를 찾던 그 비참하고 추악했던 순간들.짐승처럼 자신의 몸을 탐하던 이안을 밀어내기는커녕,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오히려 그에게 매달렸던 자신의 밑바닥.'쓰레기. 윤서아, 넌 진짜 쓰레기야.'수치심에 숨이 막혔다.하지만 서아를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은,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편 도진의 존재였다."서아야. 다 씻었어?"불쑥, 욕실 문 너머로 도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아는 흠칫 놀라며 급하게 울음을 삼켰다."어, 응! 다 씻었어. 금방 나갈게."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서아는 급하게 샤워기를 끄고 가운을 걸쳤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서아는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어색하고 기괴한 미소였다.달칵.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도진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그는 서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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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2)

제50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2)그때, 도진이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서아의 왼손을 가볍게 덮어 쥐었다."어?""어제부터 신경 쓰였는데."도진의 시선이 서아의 네 번째 손가락에 머물렀다.정확히는, 어제 이안이 억지로 반지를 빼앗으려다 긁힌 붉은 상처 자국 위였다."손가락이 왜 이렇게 빨갛게 부었어? 여기 긁힌 자국도 있고.""아…!"서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도진은 다정한 힘으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그는 서아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어디 긁힌 거야? 아팠겠다. 연고 발라야겠는데.""아, 아니야! 괜찮아.""안 괜찮아 보이는데. 반지 빼다가 쓸렸어? 아니면 뭐에 걸렸나?"서아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어제 이안이 이 반지를 쓰레기통에 던졌을 때의 그 날카로운 금속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바닥을 기어 다니며 이 반지를 찾던 자신의 비참한 모습. 그리고 반지를 돌려주는 대가로 이안에게 바쳤던 치욕스러운 굴복.그 더럽고 끔찍한 사연이 담긴 반지를, 도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어제… 갤러리 화장실에서 손 씻다가…. 비누에 미끄러져서 세면대 모서리에 좀 세게 부딪혔어.""조심 좀 하지. 이 반지, 내가 당신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석 달을 고민해서 직접 디자인한 거 알잖아. 이 세상에 당신이랑 나, 우리 둘만 가지고 있는 반지인데. 다치면 내가 속상해."도진이 서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닿는 순간, 서아는 속에서 무언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욱…."서아는 급히 입을 틀어막고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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