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21 - Chapter 30

182 Chapters

021화 선을 넘는 온도(3)

서아의 입에서 결국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늘 교양 있고 우아한 언어만 사용하던 그녀였다. 남편 도진 앞에서는 목소리 한 번 높인 적 없는 완벽한 아내였다.하지만 이 야만적인 남자 앞에서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온 견고한 가면이 너무도 쉽게, 속수무책으로 박살 나고 있었다."그렇게 노려보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분노에 찬 눈동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농염하고 노골적인 시선. 시선만으로도 이미 옷이 벗겨지는 듯한 폭력적인 감각.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전율이었다."백서아."이안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직함이 아닌, 오롯이 그녀라는 존재 자체를 부르는 서늘하고 묵직한 음성.이안이 빈손을 들어 올려 서아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거친 굳은살이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스치는 감각에 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고상한 척, 완벽한 척 그만해. 역겨우니까."그의 입술이 서아의 귓바퀴에 닿을 듯 다가왔다."당신, 그 숨 막히는 진열장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치겠잖아.""…….""나한테 전시 비즈니스 운운하면서 내 반경 안에 얼쩡거리는 거. 사실은 내 그림이 필요한 게 아니라……."이안이 서아의 손목을 쥔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그녀를 자신의 넓은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시켰다.뜨거운 심장 박동이 서아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도되었다."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어버렸다.정확했다. 자신조차 외면하고 억눌러왔던, 가장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시커먼 욕망.완벽한 남편, 완벽한 집, 완벽한 직장. 박제된 나비처럼 아름답지만 생명력이 거세된 삶에서 벗어나, 피 흘리고 찢기더라도 숨통을 트고 싶었던 그 지독한 갈증을.이 짐승 같은 남자가 단숨에 꿰뚫어 보고, 기어코 입 밖으로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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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1)

차는 이미 한남동으로 향하는 도로에 올라 있었다.서아는 휴대전화 지도에 찍힌 도착 예정 시간을 세 번이나 확인했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남은 시간이 줄었지만 안도감은 따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집이 가까워질수록 무엇을 먼저 숨겨야 하는지가 더 선명해졌다.그녀는 오른쪽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렸다. 손목 안쪽에 남은 붉은 자국이 천 아래로 완전히 가려지는지 확인한 뒤에도 손을 떼지 못했다. 도진이 무심코 손을 잡기라도 하면 들킬 수 있었다. 현관 조명 아래에서는 지금보다 멍이 더 진하게 보일지도 몰랐다.서아는 핸드백에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 립스틱은 번지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볼에는 열이 올라 있었고 눈가에는 지나치게 오래 울음을 참은 사람 같은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그녀는 거울을 닫았다.겉모습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오늘 밤 전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차 안의 공기에도 낯선 냄새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서아는 자신의 트렌치코트 깃을 들어 냄새를 맡고 곧바로 손을 내렸다. 와인, 레스토랑의 향초, 바깥 공기.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의 체취가 섞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손님, 조금 추우시면 온도 올려드릴까요?"대리기사가 룸미러를 보며 물었다."아니요. 그대로 두세요."서아는 평소보다 빠르게 대답했다.차가운 바람이 손목과 목덜미를 스쳤다. 열을 식히고 싶은 게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게 만들고 싶은 사람처럼, 그녀는 송풍구를 자신 쪽으로 조금 더 돌렸다.도진이 아직 깨어 있다면 먼저 평소처럼 웃어야 했다. 회식이 길어졌다고 말하고, 직원들이 술을 많이 마셔 정리하느라 늦었다고 설명한다. 현관에서 오래 서 있지 말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간다. 트렌치코트는 침실 옷걸이에 걸지 않는다. 손목을 만질 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서아는 머릿속으로 귀가 뒤 동선을 하나씩 정리했다.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간, 스스로가 더 끔찍해졌다.아무 잘못도 없다면 이런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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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2)

"창문 조금 열어 주세요."기사가 말없이 버튼을 눌렀다. 밤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서아는 휴대전화 화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웃어 보았다가 지웠다. 피곤한 사람의 표정, 평범한 회식을 마친 사람의 표정,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의 표정을 차례로 만들어 보았다.도어락이 열리는 경쾌한 기계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최고급 호텔 라운지에서나 날 법한 은은한 시더우드 디퓨저 향이 서아를 감쌌다.반듯하게 정돈된 거실. 먼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대리석 바닥. 소음이라고는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뿐이었다."하아……."그제야 서아는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안전지대. 나의 성. 나의 완벽한 남편이 숨 쉬는 공간."도진 씨?"거실을 향해 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서재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침실 문틈으로만 옅은 무드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서아는 현관에서 트렌치코트를 벗어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혹시라도 그 천박한 담배 냄새가 이 말끔한 공간에 단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코트를 스타일러 안에 쑤셔 넣듯 걸어둔 서아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철컥, 문을 잠그고 세면대 앞에 섰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올림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아이라인은 미세하게 번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동자. 항상 차갑고 이성적이던 그 눈동자 안에, 낯선 정욕과 공포가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다.서아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펌프형 핸드워시를 두 번, 세 번 거칠게 눌러 손바닥에 듬뿍 짰다. 그리고 이안이 잡았던 오른쪽 손목을 미친 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거품이 일어나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지워져라. 제발…… 지워져."손톱으로 긁어대듯 피부를 문지르다 보니 옅은 생채기마저 생겼다. 하지만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그의 손에 잡혔을 때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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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3)

서아는 숨을 죽였다. 도진이 깨어 있었다. 그가 돌아누워 자신을 안아주기를, 이 서늘하고 지독한 혼란을 덮어주기를 기다렸다.하지만.도진의 커다란 손이 등 뒤로 넘어왔다. 그는 서아가 제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잡았다.그리고. 아주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차가운 동작으로 서아의 팔을 제 몸에서 떼어냈다."……어?"서아가 당황한 숨을 뱉었다.도진은 돌아눕지 않았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어둠 속에서 지독하게 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피곤해.""도진 씨…….""내일 아침 일찍 출판사 미팅 있는 거 알잖아. 이번 신작 방향성 때문에 윗선들 다 모이는 자리야."사무적인 통보. 그 안에는 아내에 대한 걱정이나 반가움 따위는 단 1그램도 섞여 있지 않았다."알아요. 아는데, 나 오늘 너무 힘들어서…….""그리고."도진이 서아의 말을 무 자르듯 뚝 끊어냈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처박혔다.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 미친 듯이 흔들렸다."냄, 냄새라니요……? 방금 샤워하고, 미스트도 뿌렸는데…….""향수 냄새 말고."도진이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도록 몸을 뒤척이며, 아까보다 더 창가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명백한 거리 두기였다."싸구려 담배 냄새. 그리고 정체 모를 기름 냄새 같은 거.""……!""회식 자리에서 누가 담배라도 피웠어? 아무튼 거슬려. 내일 출근할 때 그 옷 당장 세탁소에 맡겨."도진은 그 말을 끝으로 이불을 어깨 끝까지 끌어당겼다."불 꺼 줘. 잔다."대화의 완전한 단절.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잔인할 정도로 완벽한 축출이었다."……."서아는 허공에 뜬 자신의 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회식 자리에서 기사 식당에 들러서 그렇다든가, 길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옆을 지나가서 그렇다든가. 하지만 서아의 목구멍은 바짝 말라붙어 단 한 글자의 거짓말도 토해내지 못했다.도진이 정확히 짚어낸 그 냄새. 이안의 체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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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화 얄팍한 방어기제(1)

완벽한 화이트 큐브. 먼지 한 톨 없는 갤러리 도아의 VIP 접견실은 서아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이자 요새였다.항온 항습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 벽에 걸린 수천만 원짜리 단색화. 블랙 글래스로 마감된 차가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서아는 철저한 지배자였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오만한 작가들의 기를 꺾어 자신의 기획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관장."……하아."하지만 오늘 아침,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권위 있는 지시가 아니라 억눌린 한숨이었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를 강타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른쪽 손목. 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덮었다. 어젯밤 핸드워시로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문질러 씻었지만, 이안이 남긴 그 끔찍한 악력의 감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젯밤, 차갑게 돌아누운 채 자신을 밀어내던 남편 도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결국 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도진의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아침 출판사 미팅을 준비하려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서아는 자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자신이 왜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왜 이토록 끔찍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서아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을 떴다.'그 미친 예술가 놈이 일방적으로 선을 넘은 것뿐이야. 나는 철저하게 비즈니스로 대했어. 내 완벽한 일상에 그따위 불결한 해프닝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똑똑-.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어시스턴트 지수가 접견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관장님. 이안 작가님 도착하셨는데요."순간, 서아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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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화 얄팍한 방어기제(2)

"저는 제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와는 반드시 대면해서 소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작가님처럼 변수가 많은 분일수록 더더욱 철저하게 룰을 숙지시켜 드려야 하니까요.""룰?"이안이 낮게 비웃음을 흘렸다."어젯밤에 내 밑바닥 다 보고 도망쳐놓고, 오늘 아침에 또 기어코 얼굴을 보겠다고 부른 진짜 이유가 뭔데. 한 번 더 만져달라고 온 건 아닐 테고.""말조심해!"서아의 평정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여기는 내 직장이고, 내 구역이야. 어젯밤 일은…… 당신이 술에 취해 벌인 저급한 실수로 치부하고 덮어주기로 했어. 내 커리어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러니까 당신도 주제 파악하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려. 쓸데없는 환상 품지 말고."독사처럼 쏟아내는 서아의 경고. 그것은 이안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 앙칼진 저항이 그저 우습고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덮어준다고?"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큰 체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서아를 압박했다. 이안은 테이블을 돌아 서아가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 거기 앉아."서아가 본능적으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날 선 권위가, 그가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안은 서아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었다. 완전히 퇴로가 차단되었다.가까워진 거리. 오늘 아침 서아가 들이부었던 짙은 향수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찔렀다."독하네."이안이 서아의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며 중얼거렸다."뭐가…….""향수 냄새. 평소에 뿌리던 무화과 향이 아니잖아.""……!""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었어? 아니면, 뭘 감추고 싶었던 건가."서아는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버렸다. 남편 도진이 지적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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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화 얄팍한 방어기제(3)

압박감이 사라지자 서아는 무너져 내리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시선은 허공을 떠돌았고, 호흡은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었다."전시 기획안은 당신 마음대로 해. 내 그림을 화장실 벽에 걸든, 로비 바닥에 깔든 상관 안 하니까."서아는 접견실 문을 잠근 뒤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안을 다시 부른 이유는 명확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작품 설치 방식, 파손 책임, 전시 중 작가의 출입 범위. 모두 문서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여기 보세요. 전시장 내 행동은 갤러리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작품 수정도 협의 절차가 있고요."이안은 계약서를 보지 않았다."지금 나한테 규정 읽어 주려고 부른 거야?""업무 미팅이니까요.""그 말 되게 편하지."서아의 손끝이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계속 이런 식이면 전시 자체를 재검토하겠습니다."이안은 그제야 계약서를 끌어당겼다. 그는 몇 줄을 훑더니 서명란 바로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재검토해. 대신 왜 나를 또 불렀는지는 거짓말하지 말고."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 싫어서 그녀는 펜을 내밀었다."서명하세요.""작업실로 와. 거기서 작품 보고 결정해. 관장이라면 실물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니야?"논리는 얄팍했지만 서아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이었다.이안이 구겨진 면티를 대충 툭툭 털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철컥, 문고리를 잡은 그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보았다."다음번엔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작업실로 와.""…….""그때는 진짜로 벗겨줄 테니까."탁-. 육중한 접견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아아……."혼자 남겨진 서아는 그제야 억눌러왔던 비명을 짐승의 앓는 소리처럼 토해냈다.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테이블 위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눈물이 고급스러운 컨실러를 녹이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를 밀어내기 위해 세워두었던 논리와 이성의 벽은, 이안의 직관적인 폭력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그녀는 자신이 그 남자에게 철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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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1)

해방촌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오르막길을 오르며, 서아는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하아, 하아……."또각, 또각. 아스팔트 바닥을 내리찍는 지미추 힐 굽의 날카로운 또각거림이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자신의 하얀색 포르쉐 파나메라는 골목 초입에 간신히 구겨 넣듯 주차해 둔 상태였다. 평소라면 흠집이라도 날까 봐 절대 세워두지 않았을 비좁은 자리였지만, 지금 서아의 머릿속에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미쳤어. 내가 여길 왜…….'서아는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발걸음을 저주했다.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안이 알려준 낡은 적벽돌 빌라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다음번엔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작업실로 와.' '그때는 진짜로 벗겨줄 테니까.'오전 내내, 아니 갤러리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향하는 내내 이안의 그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서아는 그 말도 안 되는 도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관장으로서, 전시를 코앞에 둔 작가의 작업 진행 상황을 불시 점검하러 온 것뿐이다. 그 건방진 입에서 다시는 그런 천박한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그를 철저히 짓눌러버리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빌라의 옥탑방으로 이어지는 철제 계단 앞에 섰을 때, 서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녹슨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매 순간, 그녀가 겹겹이 껴입은 사회적 체면과 방어기제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끼익-.옥탑방 앞. 칠이 다 벗겨진 낡은 철문 앞에서 서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였다.덜컥.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서아는 흠칫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문턱에 선 이안. 그는 한 손에 지포 라이터를 든 채, 입에 물고 있던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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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2)

서아는 중심을 잃고 스툴 위에 주저앉았다."뭐 하는 짓이야!"분노에 차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안이 그녀의 양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며 다시 주저앉혔다."가만히 있어."이안의 목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깔렸다."작품 확인하러 왔다며. 그럼 앉아서 확인해. 내 영감이 어떻게 캔버스 위로 옮겨지는지.""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당신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고…….""구경이 아니라."이안이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이젤을 끌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몸집만 한 스케치북과 뭉툭한 목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모델.""……뭐?""당신을 그릴 거라고. 백서아."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왜 당신 모델을 해! 당장 비켜!""비키면?"이안이 이젤 너머로 서아를 똑바로 응시했다."도망치게? 아침에 그 비싼 갤러리 VIP룸에서 내뱉었던 그 잘난 방어기제, 또 줄줄 읊으면서 도망치려고?""…….""해봐. 지금 이 문 열고 나가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럼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그 완벽한 일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켜질 테니까."이안은 목탄을 쥔 손을 허공에 둔 채, 서아에게 완전한 선택권을 넘겼다.나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서아는 엉덩이를 떼고 당장이라도 문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이 불결하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서늘한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야 맞았다.하지만. 스툴에 닿은 그녀의 몸은 마치 납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이안의 시선. 도망칠 테면 쳐보라는 저 오만하고 확신에 찬 눈빛. 그 눈빛이 서아의 오기를, 아니,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기묘한 피학성을 자극하고 있었다."……빨리 끝내."침묵 끝에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나 시간 많지 않아."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항복 선언. 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았다.이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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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3)

"블라우스 단추도.""뭐……?""위에서 두 개. 풀어. 목선이랑 쇄골이 안 보여."이안의 요구는 점진적이고 교묘하게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이안 작가님. 제발, 그만해. 나 더 이상은…….""풀어."단호한 목소리. 그 안에는 일말의 타협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압이 서려 있었다.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에 뜨거운 열이 몰리며 시야가 흐려졌다.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아의 가녀린 손가락이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로 향했다.딸깍. 작은 진주 단추가 구멍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작업실 안을 크게 울렸다.두 번째 단추. 손끝이 벌벌 떨려 단추를 제대로 쥐지도 못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간신히 두 번째 단추마저 풀어냈다.브이(V)자로 깊게 파인 블라우스 틈새로, 그녀의 하얀 목선과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하아, 하아……."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심이었다. 대한민국 최고 갤러리의 관장이, 무명 화가의 더러운 작업실에 앉아 그의 지시대로 옷을 벗고 헐떡이고 있었다.이보다 더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황이 있을까.하지만. 그 끔찍한 수치심의 이면에서, 뱃속 깊은 곳을 헤집어놓는 듯한 기묘한 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완벽해야 해. 단정해야 해. 누구에게도 흠 잡혀서는 안 돼.' 평생을 옭아매던 그 지독한 강박의 끈이, 이 남자의 폭력적인 시선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묘한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었다.사각. 사각. 사각.이안의 스케치 속도가 현저하게 빨라졌다.서아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이젤 너머로 보이는 이안의 눈동자는 탐욕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드러난 서아의 쇄골을 핥듯 훑고 지나가,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긴장으로 인해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 끝에 머물렀다."아……!"서아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노골적인 변화를 깨닫고 황급히 팔을 들어 가슴을 가리려 했다."가리지 마."이안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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