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61 - Chapter 70

182 Chapters

061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1)

며칠 뒤 비가 내리던 밤, 도진은 다시 차 안에 앉았다.휴대전화 메모 상단에는 며칠 전 만들어 둔 세 항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본 것.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 소설에서 바꿔 쓸 것.새 기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는 그 기준이 현실에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할 차례였다.도진은 와이퍼가 지워 내는 빗물 사이로 건물 입구를 바라봤다. 몇 번이고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졌다. 그 리듬에 맞춰 그는 새로 확인되는 사실만 기존 기록 아래에 덧붙였다.도착 시각. 차량 위치. 우산을 들지 않은 채 건물로 들어간 사람. 오래 꺼져 있던 휴대전화 화면.서아가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짐작은 사실 칸에 넣지 않았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은 끝까지 미확인 상태로 남겨 두기로 했다.도진은 손가락을 멈추고 메모 맨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명백한 위험 신호가 생기면 관찰을 중단한다.'며칠 전 정한 비개입 원칙을 뒤집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 관찰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생긴 예외 조건이었다."어디까지 가나 보자."도진이 낮게 말했다.그 말은 이제 서아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관찰자의 규칙이 실제 상황에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 있었다.그는 서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평소라면 늦는 아내에게 보낼 안부 메시지도 쓰지 않았다. 질문 하나가 상대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신 휴대전화는 손이 닿는 곳에 뒤집어 두었다. 위험 신호가 보이면 기록보다 행동이 먼저라는 예외를 실제로 지킬 수 있는지, 도진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건물 불이 하나씩 꺼지고 켜질 때마다 그는 시간을 적었다. 비는 굵어졌다가 가늘어졌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때문에 입구가 잠깐씩 일그러졌다.도진은 서아가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올 때의 표정을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상상은 관찰을 오염시킨다. 그 원칙 역시 며칠 전 만든 기록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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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2)

도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아, 응……. 택시 타고 와서 괜찮아. 늦을 거라고 메시지 남겼는데, 먼저 자지."서아가 하이힐을 벗으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도진은 그녀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트렌치코트를 받아 들었다."전시 준비가 많이 바쁜 모양이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어? 아……. 그게, 작가님이 워낙 완벽주의자라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많아서." "그 이안이라는 화가?" "……응."서아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긴장하고 있다. 자신의 남편이, 이 완벽하고 다정한 남편이 무언가를 눈치챘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동시에, 도진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았다.비 냄새. 서아의 평소 향수 냄새. 그리고……. 테레빈유의 알싸한 향과 섞인, 낯선 남자의 짙은 체취.도진의 입가에 찰나의 미소가 스쳤다 사라졌다."씻어. 피곤하겠다. 따뜻한 차 끓여놓을게." "고마워, 여보. 역시 당신밖에 없네."서아가 도진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뺨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하지만 도진은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척추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도진은 그녀가 벗어놓은 트렌치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물줄기 아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에 대한 죄책감? 아니면,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의 몸을 탐했던 그 젊고 오만한 화가의 손길?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하아……."도진은 깊은 숨을 내쉬며 다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깊숙이 앉은 그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여전히 깜빡이는 커서.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도진의 눈동자에는 전례 없는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엉켜 있던 실타래가 단숨에 풀려나가는 기분. 며칠 전 되살아난 창작욕 위로, 아내의 불륜이라는 끔찍한 진실이 더 선명한 장면과 문장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도진은 키보드 위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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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화 가장 완벽한 피사체(3)

도진은 마지막 줄 아래에 잠시 펜을 멈췄다가 한 문장을 더 적었다.기록한 사실을 소설로 옮길 때는 실제 인물의 행동과 작가의 해석을 분리한다.그 문장을 적고 나서야 수첩을 덮었다.며칠 전의 원칙은 이제 막연한 결심이 아니었다. 실제로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 수정되고 정교해진 운영 규칙이 되어 있었다.그 과정이 자신을 더 안전한 남편으로 만드는지, 더 잔인한 작가로 만드는지는 아직 판단하지 않았다.달칵.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모니터를 끄고, 수첩을 덮었다. 만년필을 제자리에 둔 그는, 얼굴의 근육을 풀고 완벽하게 다정한 남편의 표정으로 갈아입었다.서재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거실로 들어서자, 가운을 입은 서아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는 뽀얗게 빛났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고급스러운 바디워시 향이 풍겼다. 테레빈유 냄새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차 끓여줄까?"도진이 부드럽게 묻자, 서아가 거울 너머로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응. 따뜻한 캐모마일로 부탁해." "알았어. 머리 다 말리고 침실로 와."도진은 주방으로 향하며 서아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녀의 목덜미.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 뽀얀 목덜미 어딘가에, 지우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도진은 시선을 집요하게 핥아내리며 속으로 문장을 조합했다.[그녀의 목선은 가녀리다. 그 가녀린 목선을 거친 화가의 손아귀가 움켜쥐었을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공포? 아니면 쾌락?]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도진의 머릿속은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단어와 단어가 부딪히고,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며 거대한 플롯이 축조되었다.도진은 쟁반에 찻잔 두 개를 받쳐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서아는 이미 침대에 누워 스탠드 조명 아래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갤러리 업무일까, 아니면 그놈과의 메시지 기록을 지우고 있는 것일까."자, 여기."도진이 침대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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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화 익숙해진 배덕감(1)

오후 4시 30분. 서아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까르띠에 시계를 신경질적으로 확인했다.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관장님."노크 소리와 함께 최 대리가 관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결재 서류철과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오늘 저녁 6시에 예정된 VIP 컬렉터 디너 말인데요. 레스토랑 예약은 프라이빗 룸으로 최종 확인했습니다. 도진 작가님도 6시 반쯤 도착하신다고 방금 연락받았고요."최 대리의 말에 서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VIP 디너. 갤러리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월례 행사 중 하나였다. 평소 같았으면 일주일 전부터 입을 드레스와 와인 리스트를 꼼꼼하게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아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최 대리." "네, 관장님." "오늘 디너, 최 대리가 대신 호스트 맡아." "네? 하지만 오늘 자리는 도진 작가님도 오시는데…."최 대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아가 갤러리 공식 행사를 당일 취소하는 일은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갑자기 급한 일정이 생겼어. 이안 작가 작업실에 좀 가봐야 해." "이안 작가님이요? 어제도 다녀오시지 않았나요?"최 대리의 순진한 반문에 서아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어제. 그랬다. 어제도 갔다. 그제도 갔고, 삼 일 전에도 갔다. 이번 주에만 벌써 네 번째 방문이었다."전시 오픈이 코앞이잖아. 근데 메인 작품 진도가 전혀 안 나가고 있어. 작가가 슬럼프인지 붓을 놨다는데, 관장인 내가 가서 어르고 달래서라도 그리게 만들어야지."거짓말. 서아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문장은 놀랍도록 매끄럽고 유창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VIP분들께는 관장님께서 작가 케어 때문에 부득이하게 참석 못 하셨다고 잘 말씀드릴게요. 도진 작가님께는 직접 연락하시겠어요?" "응. 남편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게. 수고해."최 대리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마자, 서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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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화 익숙해진 배덕감(2)

4층. 철문 앞에 선 서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끼기긱-.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훅 끼쳐오는 테레빈유와 오래된 먼지 냄새. 그리고 캔버스와 물감 튜브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작업실 한가운데, 이안이 서 있었다.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캔버스를 노려보고 있던 이안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왔네."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의 눈빛은 며칠을 굶주린 짐승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서아가 문을 닫고 도어락을 잠갔다. 찰칵.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이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늦었어. 30분이나." "차가 막혀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거친 손이 서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아쥐었다. 그의 손끝에 묻어 있던 유화 물감이 서아의 비싼 실크 블라우스 허리춤에 그대로 묻어났다. 예전 같았으면 기겁을 하며 화를 냈겠지만, 지금의 서아는 그 더러운 물감 자국마저도 자신을 향한 소유욕의 증표처럼 느껴졌다."기다리다 미치는 줄 알았잖아."이안이 서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억센 입술이 그녀의 귓바퀴를 질겅질겅 씹듯이 애무했다."아, 읏…. 이안, 잠깐만. 나 숨 좀 돌리고…." "숨 돌릴 틈이 어딨어. 관장님 오늘 바쁘다며."이안이 비아냥거리듯 속삭이며 서아의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뜯어내듯 풀기 시작했다."저녁에 그 잘난 남편이랑 고상하게 와인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나? 나 같은 뒷골목 환쟁이 만날 시간이 어딨다고 여기까지 행차하셨어."그의 입에서 '남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서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안 가. 남편한테는… 변명해 뒀어."서아의 대답에 이안의 손길이 딱 멈췄다. 그는 서아의 턱을 억센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뭐라고? 안 간다고?" "…응. 디너 모임 취소했어. 최 대리 보냈고." "강도진한테는 뭐라고 거짓말했는데?" "당신… 당신 작업실 가봐야 한다고. 전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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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화 익숙해진 배덕감(3)

두 시간 후.작업실 안에는 짙은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서아의 실크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스타킹이 물감 묻은 헝겊들과 뒤엉켜 널브러져 있었다.서아는 이안의 좁은 침대에 누워 홑이불로 몸을 가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나른했다.창틀에 걸터앉은 이안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회색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서아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을 느꼈다.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늘 그렇듯 짙은 허무함과 공포였다. '내가 또 무슨 짓을.' 습관처럼 밀려오는 죄책감.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죄책감의 농도가 예전만큼 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이안과 선을 넘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며 며칠 밤을 잠을 못 이뤘다. 도진의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몸에 남아 있는 이안의 흔적을 씻어내고, 다시 단정한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 그 이중적인 삶의 패턴에 그녀는 소름 끼치도록 빠르게 적응해 가고 있었다."무슨 생각해."이안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물었다."…몇 시야?" "7시 반."서아의 눈이 커졌다. 7시 반. 도진이 참석한 VIP 디너가 한창 무르익을 시간이었다.서아는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파우치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자 부재중 전화 2통과 메시지 3개가 와 있었다. 전부 남편 도진이었다.[도진: 여보, 미팅은 잘 끝났어? 디너 분위기 아주 좋아. 당신이 안 와서 사람들이 다들 아쉬워하네.] [도진: 비 오려나 봐. 하늘이 어둡네. 일 끝나면 전화해. 데리러 갈게.] [도진: 아직 바쁜가 보네. 천천히 일 봐.]다정한 문장들. 서아는 액정을 응시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또 남편?"이안이 침대로 다가와 서아의 옆에 누우며 빈정거렸다. 그는 서아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액정을 훔쳐보았다."참 눈물겹네. 마누라가 딴 놈 밑에서 다리 벌리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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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1)

최고급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뿌리는 프라이빗 다이닝 룸. 크리스털 와인잔이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가 고급스러운 공간을 채웠다."강 작가님, 오늘 백 관장님이 안 보이시네요? 두 분 늘 잉꼬부부처럼 같이 다니시더니."맞은편에 앉은 중견 기업 회장이 붉은 와인을 머금으며 물었다. 그의 옆에 앉은 사모님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그러게요. 오늘 백 관장님 입고 오실 드레스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워낙 센스가 좋으시잖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진에게 향했다. 최고급 맞춤 수트를 빈틈없이 차려입은 도진은, 입가에 여유롭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냈다."아, 네. 아내가 기획 중인 신진 작가 전시 때문에 골치를 좀 앓고 있어서요. 오늘 도저히 시간을 못 빼겠다고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신진 작가요? 누군데 우리 백 관장님을 그렇게 애태울까." "능력은 출중한데, 예술가 특유의 고집이 좀 있는 친구인가 봅니다. 아내가 직접 달래가며 작업실에 붙어 있는 중이거든요. 갤러리 일이라는 게 겉보기엔 화려해도 뒤에서는 늘 진흙탕 싸움이죠."도진의 대답에 테이블 곳곳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허허, 강 작가님처럼 이해심 넓은 남편이 있으니 백 관장님이 그렇게 갤러리를 훌륭하게 키워내는 겁니다. 아주 복 받았어." "과찬이십니다. 아내가 자기 일에 열정적인 모습이 저는 참 보기 좋거든요."완벽한 남편. 이해심 많고 젠틀한 지식인. 도진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기해 냈다.그는 사람들과 건배를 나누며, 테이블 아래로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일반 지도 어플로 위장된 '위치 추적 앱'이 켜져 있었다.[백서아: 현재 위치 - 해방촌 작업실 주변]화면 위에서 붉은 점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안의 작업실 주소. 오후 5시 10분에 멈춘 붉은 점은, 두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단 1미터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열정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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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2)

김 편집장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찬사를 늘어놓았다."칭찬은 나중에 탈고 다 끝나면 듣죠. 오늘 밤에도 진도를 좀 빼야 해서요. 4챕터는 내일 아침에 보내놓겠습니다." [네! 네! 작가님, 건강 챙기시면서 하십쇼. 원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전화가 끊기고, 차 안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도진은 신호 대기 중에 스마트폰을 다시 확인했다. 아내의 붉은 점이 해방촌 작업실 주변에서 집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서아가 귀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도진은 재빨리 또 다른 어플을 실행시켰다. 아내의 포르쉐 파나메라에 몰래 설치해 둔 차량용 소형 녹음기와 연동된 클라우드 앱이었다. 화면을 터치하자, 조금 전 서아가 차에 올라탔을 때부터 이어진 오디오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치익-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곧이어 거친 숨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하아… 하아….]마치 쫓기는 짐승처럼 헐떡이는 아내의 호흡. 도진은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부스럭, 스윽.] 스타킹을 끌어 올리거나 치마를 정리하는 듯한 마찰음이 생생하게 들렸다.[미쳤어… 백서아. 진짜 미쳤어….]떨리는 서아의 혼잣말이 녹음기를 뚫고 전해졌다. 도진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그래, 미쳤지. 하지만 아직 멀었어. 넌 더 미쳐야 해, 서아야.'[띠띠띠, 뚜루루루.] 녹음기 너머로 서아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갤러리 최 대리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네, 관장님! 디너 모임 방금 끝났습니다.] ["아, 최 대리. 수고했어. 별일은 없었고? 남편은 언제 갔어?"] [아, 도진 작가님요? 작가님이 분위기 정말 잘 이끌어주셨어요. 관장님 빈자리 안 느껴지게 커버 잘해주시더라고요. 작가님은 10분 전쯤에 먼저 일어나셨어요.] ["그래… 다행이네. 수고했어. 내일 봐."]통화를 끊은 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다행이다….]도진은 그 대목에서 소리 내어 큭큭거렸다.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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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화 활자로 박제된 배덕(3)

밤 11시 30분. 서아는 수면제를 삼키고 침대에 누운 지 10분 만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깊은 피로와 정신적 소모가 그녀를 짓누른 탓이었다.도진은 서아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안방 문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서재였다.끼기긱-.두꺼운 방음문이 열리고, 도진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묵직한 오크나무 책상,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대형 모니터. 도진의 절대적인 성역이자, 서아의 영혼을 해부하는 해부실이었다.도진은 의자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바탕화면에 있는 '작업 폴더'를 열었다. 수십 개의 하위 폴더들이 보였다.[동선 기록_GPS] [음성 녹음_차량] [영수증 및 카드 내역] [작업실 체류 추정 시간표]도진은 얼마 전 해방촌 옥탑 건물까지 서아를 직접 뒤쫓았던 밤을 떠올렸다. 테레빈유 냄새와 낯선 셔츠, [B동 옥탑]이라고 적힌 열쇠는 그전까지 어디까지나 의심을 키우는 단서였다. 외도를 사실로 확정한 것은 레이스 커튼 너머에서 서아와 이안의 관계를 직접 목격한 순간이었다. 보통의 남편들이라면 그 자리에서 들이닥치거나 아내를 추궁했겠지만, 도진은 달랐다.당시 그는 3년째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확인된 현실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문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나를 완전히 속인다고 믿는 아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에서 관망하며 글로 쓰는 남편.'그날 이후 도진은 직접 미행만으로는 놓칠 반복 동선과 설명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서아의 차에 위치 기록 장치와 초소형 녹음기를 달았다. 기록은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 쌓았다. 확인되지 않은 장면은 소설 칸으로 옮겨 변형했고, 실제 동선과 음성은 원본 그대로 보관했다. 그 데이터가 늘어날수록 도진의 키보드 위에서는 죽어 있던 문장들이 더 빠르게 되살아났다.도진은 워드 프로세서를 켰다. 화면 상단에 적힌 제목.[타인의 뮤즈]도진은 손가락의 관절을 꺾으며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고요한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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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1)

지퍼가 올라가는 소리가 건조한 작업실 공기를 갈랐다. 지이익-.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H라인 스커트가 다시 서아의 허리 위로 감겼다. 조금 전까지 이안의 거친 손길 아래서 짐승처럼 뒹굴던 육체가, 다시금 우아하고 단정한 갤러리 관장의 껍데기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서아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흩어진 스타킹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오후 6시 10분.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남편 도진이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또 시계 보네."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이안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회색 담배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물감과 땀방울이 뒤섞인 맨가슴을 드러낸 채, 그는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서아의 뒷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리고 있었다."늦었어. 오늘은 도진 씨랑 저녁 먹기로 한 날이야. 시어머니가 보내주신 한우가 들어왔다고, 남편이 직접 요리하겠다고 일찍 오랬거든."서아는 스타킹을 발끝에 꿰며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초조함이 묻어났다."도진 씨, 도진 씨. 그놈의 도진 씨."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비벼 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넌 그 이름 부를 때 안 역겨워?" "뭐?" "방금 전까지 내 밑에서 그렇게 미친년처럼 울어놓고. 옷 주워 입자마자 그 완벽한 남편 타령하는 거, 안 역겹냐고."이안의 거친 언사에 서아의 동작이 딱 멈췄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묘한 흥분이 동시에 혈관을 타고 돌았다."말 함부로 하지 마, 이안. 여긴 네 작업실이고 난 네 스폰서야. 갤러리 관장으로서 전시회 점검차 온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스폰서? 관장? 하, 지랄하네."이안이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서아에게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고 있던 서아의 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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