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Kabanata 1 - Kabanata 10

182 Kabanata

002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2)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서아가 정중하게 물었다."오늘은 별다른 외부 일정은 없습니다. 오전부터 서재에 들어가 글을 좀 정리할 생각입니다.""그러시군요.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외출할게요. 저는 오늘 오전 중에 갤러리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오늘도 바쁜 하루가 되겠군요. 차 조심해서 가십시오.""고마워요, 도진 씨."도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끝까지 밀어 넣은 뒤, 서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늘 아침도 훌륭했습니다. 매번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군요.""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향했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서아는 식탁 위에 남겨진 빈 접시들을 바라보았다.잔해조차 깨끗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도진의 습관 덕분에 접시 위에는 소스의 흔적만이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서아는 리넨 냅킨을 접어 식탁 위에 놓았다. 냅킨에 배어든 자신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외형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부부가 있을까.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젊은 소설가와, 상류층의 신망이 두터운 유명 갤러리의 관장. 자산, 학벌, 외모, 교양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조합이었다. 남들은 그들을 부러워했고, 그들의 삶을 동경했다.하지만 서아는 알고 있었다.이 집 안의 모든 것은 잘 만들어진 연극 무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과 도진은 관객이 없는 무대 위에서조차 배역을 내려놓지 못하는 비참한 배우들이라는 것을."완벽해……."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스스로가 채운 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이라는 사슬이, 오늘 아침에도 그녀의 목을 숨 막히게 조여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아는 그 사슬을 풀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바쳐 구축해 온 삶의 방식이었으므로.그녀는 차갑게 식어버린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검은 액체가 하얀 대리석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려 사라졌다.서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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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3)

비슷한 색, 비슷한 구도, 비슷한 설명.몇 장을 넘기자 지루함이 먼저 왔다. 그녀는 연필로 짧게 메모했다.‘기술적 완성도 양호. 새로움 부족.’다음 작품에도 비슷한 문장이 적혔다. 그다음에도.서아는 문득 손을 멈췄다. 모든 것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었다. 집도, 결혼도, 갤러리도, 지금 눈앞의 작품들까지. 오래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다.그녀는 그 감각을 피로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대부분의 문제는 관리 가능한 항목이 되었다."관장님, 커피 가져왔습니다."문밖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서아는 파일을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입가에는 이미 업무용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오늘 심사는 예정대로 열 시에 시작하죠?""네. 한 분이 교통 때문에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서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회의는 예정대로 시작합니다. 늦는 사람을 기준으로 시간을 바꾸지 마세요.""알겠습니다."직원이 나간 뒤 서아는 차가운 커피잔을 손끝으로 돌렸다. 예정대로. 평소대로. 계획대로. 그 세 단어만 지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그때까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심사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남은 삼십 분 동안 서아는 직원들이 올린 전시실 사진을 하나씩 확인했다. 프레임 한 점이 수평에서 미세하게 벗어나 있었다. 육안으로는 알아채기 어려운 정도였지만 그녀는 담당자를 불렀다."3전시실 두 번째 작품, 오른쪽이 조금 내려갔어요. 다시 맞춰 주세요.""관장님, 레이저로 확인했을 때는 오차 범위 안이었습니다.""오차 범위라는 말은 관람객에게 하지 않잖아요."직원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서아는 자신이 까다롭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 까다로움 덕분에 도아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다고 믿었다. 작은 틀어짐을 허용하면 다음에는 더 큰 흐트러짐이 온다. 전시도, 회사도, 사람도 다르지 않았다.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도 그녀는 가장 먼저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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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화 마침표가 없는 방(1)

같은 날 오전 7시 40분.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하얀 모니터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깨어났다.화면 중앙에는 마침표 하나 없는 빈 문서가, 마치 조롱하듯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키보드 위에 양손을 가볍게 올렸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자, 시작해보자.'도진은 눈을 감고, 소설 속 첫 장면을 그려보려 애썼다.하지만 머릿속은 마치 거대한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어떤 이미지도,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다닥, 타닥.[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그는 이내 'Backspace' 키를 연타했다.투투투투툭.비? 너무 진부해. 창밖을 바라보며? 소설의 시작치고는 너무 나약해.도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그는 또다시 'Back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투툭.견딜 수 없었다? 무엇을?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가슴 한구석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3년이다. 3년 동안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한 거지?'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는 대한민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 중 한 명이었다. 첫 소설부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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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화 마침표가 없는 방(2)

"젠장."그는 다시 책상 서랍을 열었다.아까 피운 담배 냄새가 아직 서재에 남아 있었다.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못했다.모니터의 빈 문서와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번갈아 보던 도진은, 끝내 담배를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다.도망치듯 같은 행동을 반복해 봐야 한 문장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만 선명해졌다.그는 편집장에게서 와 있던 미확인 메시지 알림을 내려다보다가, 끝내 내용을 열지 않은 채 키보드 앞으로 몸을 숙였다.이번에는 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3년째 쓰지 못하는지를 적어보기로 했다.'이제는 진짜다. 무조건 써야 해.'그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그러나 몇 줄을 이어가기도 전에 손이 멎었다. 아까 지웠던 문장과 다를 게 없었다.도진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나는 소설가가 아니야. 나는 사기꾼이야.'잠시 뒤, 그는 다시 서랍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쓰지 못할 때마다 도망치듯 손을 뻗던 익숙한 곳이었다.도진의 손은 서랍 손잡이에 닿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안쪽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 몇 달 전 출판사에서 보내온 계약 변경 서류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담배 대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잠금 화면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세 개 떠 있었다. 모두 김 편집장이 보낸 것이었다.[선생님, 이번 주 안에는 1차 원고 방향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분량은 상관없습니다. 한 장이면 됩니다.] [답장만 부탁드립니다.]한 장이면 된다는 말이 더 잔인했다. 한 장조차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분량을 배려하는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확인서였다.도진은 답장 창을 열었다.‘오늘 중으로 보내겠습니다.’문장을 적었다가 지웠다.‘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그것도 지웠다.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화면을 껐다. 검게 변한 액정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독자들이 사진으로 기억하는 강도진은 없었다. 피곤한 눈과 굳은 입술을 가진 마흔 언저리의 남자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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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화 마침표가 없는 방(3)

‘관찰.’그는 아직 무엇을 관찰할지 몰랐다.다만 누군가가 안전한 선을 넘는 순간을 보고 싶다는 욕망만은, 놀랄 만큼 선명해져 있었다.점심이 가까워질수록 서재의 빛은 더 밝아졌다. 블라인드 틈을 통과한 햇살이 책상 위에 정확한 사각형을 만들었다. 도진은 그 안에 놓인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몇 년 동안 수천 장을 썼고, 지금은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그는 일부러 오래된 인터뷰 영상을 틀었다. 화면 속 젊은 도진은 창작의 고통을 묻는 질문에 웃으며 답하고 있었다.‘못 쓰는 날도 쓰는 게 직업이죠. 영감은 나중 문제고요.’도진은 영상을 멈췄다."잘도 말했네."그 시절의 자신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 마감이 오면 썼고, 쓰다 막히면 산책했고, 돌아와 다시 썼다. 실패는 하루짜리 사건이었다. 지금의 실패는 삼 년짜리 생활이 되어 있었다.그는 지난달 작업 기록을 열었다. 하루 평균 서재 체류 시간 여섯 시간. 실제 입력 시간 이십칠 분. 삭제한 글자 수는 쓴 글자 수보다 많았다. 숫자로 보니 더 우스웠다.도진은 파일을 닫지 않았다. 오히려 표 아래에 오늘의 기록을 새로 만들었다.‘오전 7:40~9:10. 소설 0자. 관찰 메모 417자.’0이라는 숫자를 적고도 창피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실패를 숨기지 않고 기록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잠시 후 가사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선생님, 점심 준비해 드릴까요?""괜찮습니다. 커피만 부탁할게요.""아침 드신 뒤로 계속 서재에만 계셨는데요."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밖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 그는 서아가 식사를 마치고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버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둘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끝냈지만, 서로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는 또 한 줄을 적었다.‘상대의 침묵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침묵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번 문장은 인물의 냄새가 났다.도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를 한 바퀴 걸었다. 책장 사이에는 수상 트로피와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문학상 시상식에서 서아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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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

같은 날 오후 3시.갤러리 ‘도아’의 오후는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 굽의 또각거리는 소리.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관장님, 안녕하십니까.""안녕하세요."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과 그것을 비추는 핀 조명의 각도를 향해 있었다."윤 큐레이터."서아가 걸음을 멈추고 낮게 불렀다. 뒤따르던 후배 윤지수가 황급히 다가왔다."네, 관장님.""2관 메인 벽면에 걸린 저 추상화. 조명 각도가 어제랑 다른 것 같은데요.""아, 오늘 아침에 램프를 교체하면서 기사님이 조금 건드리신 것 같습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작품의 질감은 빛이 결정해요. 1도의 각도 차이가 캔버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꿉니다. 관람객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인데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되죠.""죄송합니다. 꼼꼼히 챙기겠습니다.""그리고 실내 온도가 어제보다 0.5도 높네요. 공조기 세팅 다시 확인하세요. 작품에 미세한 균열이라도 가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네, 명심하겠습니다."서아는 완벽주의자였다. 아니, 완벽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녀의 갤러리에서는 먼지 한 톨, 빛 한 줄기, 심지어 공기의 온도조차 통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그녀의 집, 그녀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녀의 남편 강도진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로 존재해야만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서아는 윤 큐레이터를 뒤로하고 관장실로 향했다.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자, 시그니처 향인 무화과와 시더우드가 섞인 고급스러운 디퓨저 향이 훅 끼쳤다. 투명한 통유리로 된 책상 위에는 서류와 태블릿 PC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각을 이루며 놓여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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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에너지는 때로 천박함으로 흐르기 쉬우니까요. 정제되고 다듬어진 미학이야말로 오래 살아남는 법입니다.'남편의 그 매끄럽고 서늘한 목소리.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강도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술이든 삶이든, 통제되고 다듬어진 것만이 이 상류층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정보가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이름 석 자와 연락처 하나가 전부였다.[ 권이안 ]"권이안……? 이름이랑 번호만 달랑?"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성의 없는 포장에 기가 찼다. 이런 식으로 지원 서류를 보내는 인간은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아마추어니까.쓰레기통에 바로 던져버리려던 찰나,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너무 가지런히 정돈된 서류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구겨져 있는 그 봉투가 묘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얼마나 대단한 천재이길래 이런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내."서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투박하게 스테이플러로 찍힌 A4 용지 뭉치가 튀어나왔다. 자기소개서나 별도의 작업 노트는 없었다. 작품 사진 아래에는 재료와 크기, 한두 줄짜리 짧은 설명만 무성의하게 적혀 있었다.서아는 첫 번째 장을 넘겼다.그리고, 숨을 멈췄다."……!"순간, 갤러리의 차가운 공기가 증발해 버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인쇄된 종이일 뿐인데, 그림에서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첫 번째 사진은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인물화였다. 아니, 인물화라고 부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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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3)

윤지수는 흠칫 놀라며 문가에 멈춰 섰다."아, 그…… 서류가 하나 누락된 게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너무 붉으신데요.""아니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온도가 좀 높아서요. 서류는 거기 두고 나가보세요.""네, 알겠습니다."윤지수가 서류를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서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떨리는 손으로 뒤집어 놓았던 크라프트지 봉투를 다시 가져왔다.자신의 삶은 강도진이라는 남자가 만들어 놓은 정교하고 우아한 소설 같았다. 그 안에서 자신은 오차 없이 움직이는 완벽한 아내이자, 지성적인 큐레이터라는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그녀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원래대로라면 이 불쾌하고 통제 불능인 포트폴리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마땅했다. 그것이 이 갤러리의 룰이었고, 서아의 룰이었다.하지만 서아의 손은 쓰레기통이 아닌, 포트폴리오의 겉면으로 향했다.사각, 사각.펜촉이 거친 크라프트지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관장실의 정적을 갈랐다.그녀는 '권이안'이라는 이름 옆에, 붉은색 잉크로 선명하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쳤다. 추가 검토를 의미하는 개인 표시였다."만나봐야겠어."서아는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졌다.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이 지독한 그림을 그린 자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잠시 뒤 다른 심사 담당자들이 관장실로 들어왔다. 서아는 심사표를 처음부터 넘겼다. 작품성, 시장성, 전시 공간 적합성, 작가의 지속 가능성. 갤러리 도아가 신진 작가를 고를 때 사용하는 네 개 항목은 수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각 항목에 점수를 매겼고, 점수는 대개 자신의 첫인상을 배신하지 않았다.문제는 이안의 작품이었다.기술 점수만 놓고 보면 최고점이 아니었다. 시장성은 오히려 낮았다. 붉은 색면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인물의 몸은 수집가의 거실에 걸어두기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인 긴장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아의 연필은 탈락 칸으로 가지 못했다."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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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

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도아의 관장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관장님……."문가에 서 있던 윤지수가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요?""네. 포트폴리오 봉투에 적혀 있던 번호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나옵니다. 아무래도 오늘 안 올 것 같은데……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실까요?"서아는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좁혔다.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약속을 취소하고 그 보잘것없는 크라프트지 봉투를 파쇄기에 넣어버리는 것이 맞았다. 그것이 서아가 평생을 지켜온 규칙이었다.하지만.서아의 시선이 책상 한쪽에 놓인 이안의 포트폴리오로 향했다.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색채. 어제 처음 그 그림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등골을 타고 오르던 서늘한 전율이 아직도 생생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죠.""네? 하지만 30분이나 지났…….""기다려요."서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윤지수는 입을 다물었다.그때였다.쾅-!노크도 없이 관장실의 육중한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앗!"문 앞에 서 있던 윤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서아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역광을 받으며 문가에 서 있는 남자."여기가 갤러리 도아 맞나? 하도 미로 같아서 길을 좀 헤맸는데."낮고, 긁히는 듯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남자는 삐딱하게 서서 사무실 내부를 훑어보고 있었다.서아의 눈동자가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스캔했다.정돈되지 않아 눈을 반쯤 가린 흑발. 피로감이 짙게 묻어나는 나른한 눈매.계절감이 맞지 않는 낡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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