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동안 그는 이 모니터 앞에 앉아 전지전능한 신처럼 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그녀가 전화를 받으며 초조해하는 표정, 몰래 향수를 뿌리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눈빛, 그 모든 것을 훔쳐보며 문장을 길어 올렸다.그 관음의 시간이 도진에게는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쾌락이었다.하지만 이제 모니터 속에는 아무도 없다.자신이 조종할 꼭두각시도, 해부할 표본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끝… 난 건가."도진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이야기는 끝났다.결말을 지었고, 책은 출간되었으며,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까지 받았다.모든 목적을 달성했다.그런데 왜.도대체 왜 이렇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처럼 무섭도록 서늘한 것일까.도진은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타닥, 타다닥.허공에 대고 무의미하게 타자를 쳐보았다.아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내면에는 세상을 감동시킬 어떤 철학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다는 것을.강도진이라는 작가는 오직 타인의 고통과 치부를 뜯어먹고 사는 기생충이자, 관음증 환자에 불과했다.그의 영감은 철저히 백서아의 타락에 기대어 있었다.백서아라는 살아 숨 쉬는 제물이 있었기에, 괴물 강도진은 그 피를 빨아먹으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그 제물을 스스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게 도살해 버린 것이다."아…."도진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사냥감을 모두 죽여버린 괴물은, 결국 텅 빈 우리 안에서 굶
도진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웃음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는 배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일 정도로 광기 어린 폭소로 변했다."크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아, 미치겠군. 진짜 완벽해서 미쳐버리겠어!!"그는 부서진 거실 바닥을 뒹굴 듯이 웃어댔다.자신은 신이었다. 인간의 삶을 조작하고,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뒤, 그 파멸마저 예술로 포장해 세상의 찬사를 받아내는 전능한 신.도진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얼마나 그렇게 미친 듯이 웃었을까.목이 쉬어갈 무렵,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하아… 하아…."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고르던 도진은, 다시 한번 기념패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이제 다음 작품을 구상해 볼까. 이번엔 어떤 사냥감을 골라서 밑바닥까지 발가벗겨 줄까…."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런데.어딘가 이상했다."뭐지."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폭풍처럼 휘몰아치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그 자리에 남은 것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깊고 무거운 '침묵'뿐이었다."……."도진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창밖으로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그리고, 벽에 걸린 앤틱 시계의 초침 소리.똑. 딱. 똑. 딱.규칙적이고 건조한 그 소리들만이, 도진의 고막을 기분 나쁘게 긁어대고 있었다.평소라면 이 정적을 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야 했다.자신
스르륵-.육중한 세단이 미끄러지듯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작가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 김 기사가 시동을 끄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강도진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창밖으로는 빗물에 젖은 거대한 저택의 철문이 차가운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수고하셨습니다, 김 기사님."도진이 나직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저기, 작가님."김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도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오늘 기념행사, 밖에서 차 대기하면서 유튜브 생중계로 봤습니다. 공식 연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작가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왜 그런 아픔을 겪으셔야 하는지, 참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사모님 일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다 작가님 편 아닙니까. 기운 내셔야죠. 위대한 작가님이신데."도진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위대한 작가.감동적인 공식 연설.이 늙고 순진한 운전기사조차 완벽하게 자신의 연극에 속아 넘어가, 가해자인 자신을 동정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강도진이 펜 하나로 빚어낸 거대한 권력이었다.하지만 도진은 짐짓 슬픔을 삼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위대하다니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아닙니다! 편히 쉬십시오, 작가님!"김 기사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도진은 묵직한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가 담긴 벨벳 상자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철문이 열리고, 차가 멀어지는
"이번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은, 제게 매일매일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깎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었습니다."도진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마치 환상 속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한 아련한 눈빛."인간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는 건, 결국 그 시선을 저 자신과 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글을 쓰는 내내 저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인물들이 파멸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며, 저의 세계도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습니다."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대중은 이미 그의 소설이 백서아의 불륜을 소재로 했다는 것을 안다. 남편이 아내의 배신을 두 눈으로 목도하며 글을 써 내려갔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상상하며, 사람들은 철저히 도진에게 동화되고 있었다."하지만…."도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그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자, 조명 빛을 받은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제가 이 지옥 같은 터널을 빠져나와, 오늘 이 뜻깊은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도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제게 있어 세상 가장 잔인하고도 매혹적인 예술적 영감이 되어준… 저의 아내, 백서아 덕분입니다.""헉.""세상에…."객석에서 억눌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해 도망친 불륜녀를 향해, 최고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제 소설 속 인물과 그녀를 겹쳐보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남편으로서, 그 화살을 제가 대신 맞아주지 못해 가슴이 찢어집니다."도진은 눈가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기자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아….""……."취재진 사이에서 짧은 탄식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어떤 기자는 그 우아하고도 처절한 태도에 압도되어 들고 있던 수첩을 내리기까지 했다. 아내의 추악한 불륜 스캔들 앞에서도, 남편이자 작가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강도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성역처럼 보였다.도진은 쏟아지는 플래시를 뒤로하고,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 로비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멍청한 것들. 저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다니.'도진의 입안에서 차가운 조소가 맴돌았다.그는 방금 자신이 던진 말이 내일 아침 포털 사이트 메인에 어떤 헤드라인으로 걸릴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강도진, 아내 스캔들에도 잃지 않은 품위… "개인의 아픔은 나의 십자가"]대중은 이런 비극적인 서사에 열광하는 법이다.출간 기념 행사 시작 삼십 분 전, 도진은 대기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맸다. 홍보팀 직원이 예상 질문 목록을 건넸다.신작의 집필 계기. 전작과 달라진 문체. 작품 속 ‘여자’의 모델. 아내의 최근 부재.마지막 항목에 도진의 손이 멈췄다."이 질문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답변은 준비하신 대로 가시죠. 사생활과 작품은 별개라고."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기념행사가 열리는 다이너스티 홀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황금빛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원형 테이블에는 대한민국 문학계의 거장들, 평론가들, 그리고 대형 출판사 관계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아, 강 작가님! 오셨습니까!"김 편집장이
"넥타이는… 블랙이 낫겠어."드레스룸의 거대한 전신 거울 앞.도진은 수십 개의 최고급 실크 넥타이 중, 가장 광택이 없고 차분한 무광 블랙 타이를 골라잡았다.평소 공식 행사라면 화려한 샴페인 골드나 딥 버건디 컬러를 매치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그가 연기해야 할 배역은 '최고의 영예를 안았음에도, 아내의 스캔들로 인해 깊은 슬픔과 고뇌에 빠진 비운의 천재 작가'였다.사각, 사각.빳빳한 흰 셔츠 깃 사이로 블랙 타이를 조여 매는 도진의 손길은 정교하고 우아했다.거울 속에 비친 사내는 완벽했다.흠잡을 데 없이 빗어 넘긴 머리,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이목구비, 은은하게 풍기는 톰 포드의 우디 향수까지.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가, 이내 슬픔에 잠긴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 표정 연습을 반복했다."조금 더… 수척해 보여야 하나."도진은 혀를 차며 서랍에서 아내가 쓰던 창백한 톤의 파우더를 꺼냈다. 눈 밑에 얇게 펴 바르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묘한 다크서클이 만들어졌다.지잉, 지잉-!그때, 화장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화면에 뜬 이름은 '문학정신 김 편집장'이었다."네, 편집장님. 강도진입니다."도진은 목소리를 한 톤 낮추고, 짐짓 피곤한 듯한 기색을 섞어 전화를 받았다.[작, 작가님! 아유,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시네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겁니까?]"네… 뭐.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수화기 너머로 김 편집장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게… 저도 방금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요. 백서아 관장님 말입니다&he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