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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적색(赤色)의 각인(1)

제51화 적색(赤色)의 각인(1)오후 2시.청담동에 위치한 ‘갤러리 도아’의 메인 전시실은 차가운 백색 조명 아래 고요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관장님. 메인 파티션 쪽 조명 조도,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큐레이터 최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아는 팔짱을 낀 채,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캔버스를 응시했다. 기괴하게 얽힌 인체의 형상들이 캔버스 위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안의 신작이었다."아니. 핀 조명 각도를 15도만 더 내려요. 캔버스 우측 하단에 유화 질감이 죽어 보이잖아. 그림자가 지게 만들어서 질감을 더 도드라지게 해야 해.""아, 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서아의 지시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적어도 이 갤러리 안에서 윤서아는 빈틈없는 안목을 가진 유능한 관장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였다."관장님, 오전 VVIP 프라이빗 뷰잉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벌써 두 작품은 홀딩 요청이 들어왔고요.""당연한 결과야. 그림 자체의 에너지가 워낙 압도적이니까. 오프닝 파티 케이터링 업체는 컨펌 났어?""네. 관장님이 지시하신 대로 샴페인 리스트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맞췄습니다."보고를 받는 서아의 얼굴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하지만 속은 달랐다.그녀는 지금 살얼음판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서아는 무의식적으로 목에 두른 아이보리색 에르메스 스카프를 매만졌다.오늘 아침, 도진이 직접 매어준 그 스카프.‘이거 절대 풀지 마. 목 따뜻하게 하고 있어야 해. 알았지?’도진의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맴돌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스카프 아래에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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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적색(赤色)의 각인(2)

제52화 적색(赤色)의 각인(2)"도, 도진 씨가… 남편이 사준 거야. 감기 걸렸다고….""남편?"이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내가 어제 네 몸에 똑똑히 내 거라고 마킹을 해놨는데, 그 새끼가 준 천 쪼가리로 그걸 덮어? 네가 무슨 포장육이야? 이놈 저놈 라벨지 번갈아 붙이게?""말 함부로 하지 마! 아침에 도진 씨가 직접 매준 거야. 이거 안 매고 나왔으면 들켰을 거라고! 네가 어제 미친 짓만 안 했어도…!""들키라 그래!!"이안이 폭발하듯 소리치며 서아의 스카프를 확 찢어버릴 듯 낚아챘다."아앗! 안 돼!"서아가 사색이 되어 이안의 손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에르메스 스카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서아의 숨을 조여왔다."이거 풀면 안 돼… 도진 씨가 절대 풀지 말랬단 말이야. 직원들이 내 목덜미를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제발 이러지 마, 이안!"서아는 거의 울먹이며 애원했다.남편이 준 선물을 지키기 위해, 아니, 남편에게 철저하게 속이고 있는 자신의 완벽한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그 필사적인 태도가 이안의 이성을 완전히 끊어놓았다."아… 도진 씨가 풀지 말라고 했어? 그 위대하신 한도진 작가님이?""이안, 제발….""그럼 풀지 마."이안은 스카프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헝클어진 스카프를 다시 목 위로 끌어 올리려던 찰나였다.이안이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작은 튜브 형태의 고급 유화 물감이었다.색상은 아주 짙고 검붉은, 마르면 핏자국처럼 보인다는 '알리자린 크림슨(Alizarin Crimson)'."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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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다정한 도축(屠畜)(1)

제53화 다정한 도축(屠畜)(1)갤러리 앞 도로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검은색 벤츠 세단의 조수석 문이 열리고, 서아가 도망치듯 차 안으로 파고들었다."하아…."문을 닫자마자 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의 서늘한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운전석에 앉은 도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많이 기다렸어? 차가 좀 막히더라고.""아, 아니야. 나도 방금 나왔어."서아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그녀는 트렌치코트의 깃을 목 끝까지 바짝 세우고, 두 손으로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목을 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필사적인 방어 자세였다.도진은 차를 출발시키며 조수석에 앉은 아내를 힐쩍 곁눈질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무엇보다 아침에 자신이 직접 매어주었던 아이보리색 에르메스 스카프가 사라진 휑한 목덜미.그리고 코트 깃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테레빈유와 알리자린 크림슨 유화 물감의 냄새.도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찰나의 순간 호선을 그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근데 여보.""어? 으, 응?"도진의 차분한 부름에 서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스카프는 어쩌고 코트 깃을 그렇게 세우고 있어. 목 춥다며.""아… 그게."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기 시작했다."그… 갤러리 화장실에서 손 씻다가, 실수로 세면대에 떨어뜨렸어. 물바다가 되어있던 참이라 엉망으로 젖어버려서….""그래? 아깝네. 당신한테 참 잘 어울렸는데.""미안해. 진짜 조심하려고 했는데&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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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다정한 도축(屠畜)(2)

제54화 다정한 도축(屠畜)(2)도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윤서아. 당신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이렇게 허술한 핑계를 대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게, 나와의 가정일까 아니면 그 천박한 화가의 성기일까.'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도진의 표정은, 오직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애틋함뿐이었다."하아… 난 또 뭐라고. 진짜 피인 줄 알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잖아."도진이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아를 품에 꽉 안았다."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미, 미안해. 놀라게 해서.""스태프들이 칠칠맞게 조심 좀 하지. 당신 스카프도 그거 때문에 더러워져서 버린 거지?""응….""어휴, 바보. 그걸 왜 숨겨. 혼자 얼마나 찝찝했을까. 피부도 약한 사람이 유화 물감을 맨살에 묻히고 몇 시간을 있었던 거야."도진은 서아를 안은 채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서아의 뺨을 타고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남편을 완벽하게 속여 넘겼다는 안도감과, 이렇게 순진한 남편을 기만하고 있다는 참담한 죄책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이리 와. 얼른 지워야지. 독한 물감이라 피부 다 상해."도진은 서아의 손을 이끌고 안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대리석으로 마감된 고급스러운 욕실.서아는 세면대 앞의 작은 스툴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도진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였다.그는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고, 최고급 이집트산 면 수건을 적셔 물기를 짜냈다. 그리고 서아의 화장대에서 클렌징 오일과 화장 솜을 챙겨 왔다."유화 물감은 비누로 안 지워지잖아. 오일로 녹여내야지."도진이 클렌징 오일을 화장 솜에 듬뿍 묻히며 말했다."내, 내가 할게. 내가 할 수 있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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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발가벗겨진 뮤즈(1)

제55화 발가벗겨진 뮤즈(1)오전 10시. 청담동 갤러리 도아.서아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오늘 그녀가 선택한 의상은 목 위까지 빈틈없이 올라오는 검은색 하이넥 실크 드레스였다. 단정하고 우아한 실루엣이었지만, 계절감이나 갤러리의 화려한 오프닝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답답한 차림이었다."관장님. 오늘 의상이… 평소보다 좀 어두우시네요?"전시 브로슈어를 정리하던 최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아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안 작가 작품들이 워낙 색채가 강렬하잖아요. 메인 컬러가 붉은색이기도 하고. 관장인 나까지 화려하게 입으면 작품에 가는 시선을 뺏을까 봐요.""아하! 역시 관장님 디테일은 못 따라가겠네요. 작가님 작품 돋보이게 하시려고 일부러 블랙으로 톤다운 하신 거구나."최 대리의 감탄 섞인 대답에 서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거짓말이었다.그녀가 이 답답한 하이넥 드레스를 입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도진이 따뜻한 오일로 닦아내 주었던 붉은 유화 물감의 흔적. 그 아래에 흉측하게 남아있는, 이안이 짐승처럼 물어뜯어 남긴 피멍 든 잇자국을 가리기 위해서였다.화장품으로 두껍게 덮고, 그 위에 목을 조이듯 드레스 깃을 끝까지 올려 잠그고 나서야 서아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관장님, 케이터링 업체 도착했습니다. 샴페인 세팅 시작할까요?""네. VVIP 명단 다시 한번 체크하고, 동선 꼬이지 않게 입구 쪽에 직원들 더 배치해요. 30분 뒤면 프레스(Press)랑 비평가들 먼저 들어올 테니까."지시를 내리는 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드레스 자락을 꽉 쥔 그녀의 손바닥은 이미 차가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무사히 끝나야 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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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발가벗겨진 뮤즈(2)

제56화 발가벗겨진 뮤즈(2)어제 수장고에서 이안이 서아의 목에 강제로 붉은 물감을 짓이겨 바르며 '메인 조명을 15도 내리라'고 지시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사람들이 그림 앞에 둥그렇게 반원 형태로 모여들었다.웅성거리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며, 기묘한 정적이 갤러리 안을 감돌았다.그림은 압도적이었다.거친 나이프 자국과 꾸덕한 유화 물감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한 배경 속, 한 여자의 형상이 캔버스 중앙에 묘사되어 있었다.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오직 등 뒤에서 바라본 여자의 하얀 목덜미와 매끄러운 쇄골, 그리고 어깨의 곡선만이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그리고 그 여자의 하얀 목덜미 위로, 마치 피를 흩뿌려놓은 듯한 검붉은 '알리자린 크림슨' 물감이 폭력적일 만큼 짙고 거칠게 짓이겨져 있었다.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고, 에로틱하면서도 잔혹한 그림이었다."세상에…."박 편집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탄성을 내뱉었다."이건 단순한 추상이 아니군요. 철저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해체한 뒤에, 작가의 욕망을 때려 부은 느낌입니다. 이안 작가, 이 그림 속의 피사체… 실제 모델이 있는 겁니까?"편집장의 질문에 갤러리 안의 모든 이목이 이안에게 집중되었다.서아는 숨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안 돼. 제발….'서아의 시선이 이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있었다.이안은 샴페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서아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네. 당연히 있죠.""오! 누군지 여쭤봐도 됩니까? 이렇게 관능적이고 완벽한 선을 가진 모델이라니.""글쎄요. 비밀입니다. 제 예술에, 그리고 제 밑에서 기꺼이 완전히 타락해 준…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이고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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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1)

제57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1)갤러리 오프닝 파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바깥에는 추적추적 얇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앞유리를 닦아내는 소리만이 차 안의 유일한 백색소음이었다.조수석에 앉은 서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검은 실크 드레스 위로 걸친 코트 자락을 생명줄처럼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많이 춥나 보네. 히터 온도 좀 올릴까?"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적막을 깼다."아, 아니. 괜찮아. 온도 딱 좋아."서아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평소의 차분하고 기품 있던 목소리와 달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떨렸다.도진은 룸미러를 통해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슬쩍 살폈다."안색이 안 좋아. 갤러리 일로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그런가 봐. 아무래도… 이번 전시가 우리 갤러리 올해 메인 기획이다 보니까, 신경 쓸 게 너무 많았어.""그래도 첫날부터 반응이 아주 뜨겁던데. 성공적이야.""…….""사람들이 다 당신 안목을 칭찬하잖아. 그 이안이라는 작가, 확실히 사람 시선을 끌어당기는 기묘한 힘이 있더군."'이안'이라는 이름이 도진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서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도진 씨.""응. 말해.""오늘… 전시장에서 말이야."서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이상한 소리 수군거리는 거, 못 들었어?""이상한 소리?""그… 메인 캔버스에 있던 그림 모델 말이야. 나랑…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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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2)

제58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2)어제 이안이 짐승처럼 물어뜯어 남긴 잇자국이 화끈거렸다. 컨실러와 파운데이션으로 두껍게 덮어두었던 자국들이 물에 씻겨 내려가며 다시 그 적나라한 자태를 드러냈다."더러워…."서아는 비누를 듬뿍 짜서 목을 벅벅 닦아내기 시작했다.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도 멈추지 않았다.전시장 한가운데서 자신을 발가벗기듯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라 구역질이 났다.이안의 그 비릿한 조소가 귓가를 맴돌았다.네 그 고상한 타이틀이 박살 나는 기분이 어때?"닥쳐… 닥쳐, 제발!"서아는 세면대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오열했다.모든 것이 통제 불능이었다.이안과의 관계는 그저 일탈이어야 했다. 무료한 일상 속에서 잠시 즐기는 자극.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끊어낼 수 있는 안전한 불장난.하지만 아니었다.이안은 불길 그 자체였다. 자신을 태워버리는 것도 모자라, 서아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남편과의 완벽한 가정, 사회적 지위, 갤러리 관장이라는 명예까지 모조리 다 태워버리려 작정한 미친놈이었다.'끝내야 해. 어떻게든 그 미친놈이랑 끝내야 해.'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래, 도진이 모르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도진은 자신을 완벽하게 믿고 있다. 이 굳건한 성벽 안으로 숨어 들어가면, 이안 따위는 밖에서 짖어대는 미친개에 불과할 것이다.똑똑-그때,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서아야. 목욕 오래 걸려? 따뜻한 차 끓여왔는데."도진의 다정한 목소리였다.서아는 흠칫 놀라며 서둘러 목에 수건을 두르고 샤워 가운을 챙겨 입었다."어, 다 했어! 지금 나가."서아는 거울을 보며 억지로 입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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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1)

제59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1)아침 햇살이 두꺼운 암막 커튼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침대 발치를 비췄다.서아는 눈을 번쩍 떴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텅 비어 있었다. 도진이 먼저 일어난 모양이었다."하아…."마른세수가 이어졌다.어젯밤 도진의 품에 안겨 오열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남편의 다정한 위로 속에서 그녀는 철저한 안도감을 느꼈다.이제 다 끝났다고, 이안이라는 미친 불장난은 어제로 끝이라고 다짐하며 잠들었었다.그런데 왜.왜 꿈속에서조차 이안의 그 짐승 같은 눈빛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걸까.서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거울 앞에 선 그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어젯밤 벅벅 문질러 닦아낸 목덜미는 여전히 울긋불긋했다."미친년. 백서아, 이 미친년…."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서랍을 열었다.가장 커버력이 좋은 컨실러를 꺼내 목덜미에 두껍게, 아주 두껍게 발랐다. 마치 자신의 죄악을 덮어버리려는 듯이.가면을 써야 했다. 완벽하고 우아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도한 갤러리 관장의 가면을.다이닝 룸으로 나가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일어났어?"도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샷을 내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온화한 미소. 완벽한 남편의 표본이었다."어… 일찍 일어났네.""당신 어제 늦게까지 갤러리 일로 고생했잖아. 조금이라도 더 재우고 싶어서 안 깨웠어. 식빵 구웠는데, 버터 발라줄까?"서아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고마워. 근데 입맛이 별로 없어서 커피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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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2)

제60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2)그러나 서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인지.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열었다.[지하 수장고로 내려와. 5분 준다. 안 오면 내가 그쪽으로 올라갈게. 관장님 체면 구기기 싫으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텐데.]"미친…."서아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협박이었다. 명백한 협박. 당장 이 메시지를 무시하고 비서에게 지시해 보안 요원을 부르면 그만이었다.'가면 안 돼. 절대 가면 안 돼.'이성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하지만 서아의 몸은 이미 덜덜 떨리며 구두를 다시 꿰어 신고 있었다.이안이 진짜로 관장실로 쳐들어오면 어떡하지?갤러리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제처럼 미친 소리를 지껄이면?그 두려움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명분이었다.적어도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이건 갤러리의 평판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딸깍.관장실 문을 나선 서아는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지하 2층. 수장고.평소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라 인적이 드문 곳.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도착하고,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서늘한 공기와 퀴퀴한 먼지 냄새, 그리고 미술품을 보존하기 위한 특유의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뚜벅. 뚜벅.수장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서아의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조명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복도 끝.그곳에,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이안의 실루엣이 보였다."시간 딱 맞췄네."어둠 속에서 이안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아는 걸음을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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