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31 - Chapter 40

182 Chapters

031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1)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내내, 서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살폈다.흐트러진 곳은 없는가. 표정에 불안감이 묻어나지는 않는가.그녀는 핸드백에서 새로 산 샤넬 향수병을 꺼냈다. 오늘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충동적으로 결제한, 아주 무겁고 관능적인 일랑일랑과 머스크 베이스의 향수였다.칙, 칙.귀 뒤쪽과 손목 안쪽에 향수를 한 번 더 뿌렸다. 평소라면 머리가 아프다며 절대 쓰지 않았을 독한 향이었지만, 지금 서아에게는 이 숨 막히는 향기가 절실했다.'이 정도면…… 가려지겠지.'오후 내내 해방촌의 그 낡은 옥탑방에서 이안의 시선 아래 발가벗겨졌던 시간. 그의 작업실에 배어 있던 테레빈유의 매캐한 냄새와, 그의 몸에서 나던 짙은 담배 냄새가 아직도 자신의 피부 밑에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옷은 갈아입었다. 아침에 입고 나갔던 네이비색 수트와 블라우스는 갤러리 근처 세탁소에 쑤셔 넣듯 맡겨버렸다. 지금 입고 있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와 원피스는 백화점에서 향수를 사며 급하게 맞춰 입은 새 옷이었다.완벽하다. 이성적으로 따져봤을 때, 남편 도진이 자신의 일탈을 의심할 만한 물리적 단서는 단 하나도 없었다.띠- 띠- 띠- 띠. 철컥.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도진 씨. 나 왔어요."서아는 현관에 들어서며 평소처럼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어, 왔어?"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도진이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늘 그렇듯 단정하게 다려진 면바지에 얇은 니트 차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남편의 모습이었다."오늘 좀 늦었네. 갤러리에 일 많았어?"도진이 다가와 서아의 핸드백을 받아주며 물었다."아…… 네. 다음 주가 전시 오프닝이라 체크할 게 좀 많았거든요.""피곤하겠네. 저녁은 먹었어?""간단하게 샌드위치 먹었어요. 도진 씨는요?"일상적이고 평화로운 대화. 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트렌치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도진이 평소처럼 서아의 코트를 받아 스타일러에 걸어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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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2)

문을 잠그고 변기 커버 위에 주저앉은 서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어떡해…….'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안의 작업실에서 느꼈던 그 짐승 같은 쾌감과 흥분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남편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공포와 수치심뿐이었다."미쳤어, 백서아. 정신 차려."그녀는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얼굴을 거칠게 세수했다. 그리고 거울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모델 서 준 것뿐이야. 그림을 위해서. 큐레이터로서의 비즈니스라고. 도진 씨도 이해할 거야…… 아니, 알 필요조차 없는 일이야."필사적인 자기합리화. 서아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샤워기 아래로 들어갔다.같은 시각.주방에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있던 도진의 표정은, 방금 전 서아를 향해 짓던 다정한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그의 얼굴에는 묘한 활기와 기분 나쁜 흥분감이 서려 있었다.도진은 찬장에서 최고급 다즐링 티백을 꺼내며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거짓말이 제법 늘었네. 우리 완벽한 아내께서.'도진은 서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새로 산 원피스의 구김 없는 질감. 평소보다 짙게 바른 립스틱. 그리고 무엇보다, 그 코를 찌르는 역겨운 향수 냄새.그 향수는 서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과하지 않은 은은함을 추구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자극적인 향을 뒤집어쓰고 왔다는 건,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감추고 싶은 악취가 있다는 뜻이었다.테레빈유. 싸구려 유화 물감. 지포 라이터의 기름 냄새. 그리고 젊고 거친 수컷의 체취.어젯밤 서아에게서 났던 그 냄새가, 오늘은 훨씬 더 짙고 농밀하게 그녀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고 있었다.'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걸까.'주전자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도진은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부으며 생각에 잠겼다.상식적인 남편이라면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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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3)

"도진 씨가요? 원래 내 일에는 잘 안 나서잖아요. 사람 많은 곳 싫어하기도 하고.""이번엔 좀 다가서 볼까 해. 당신이 그렇게 공들여 준비한 기획전인데, 남편으로서 얼굴 한 번 비추는 게 예의지."도진은 서아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것을 즐겁게 감상하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 이안이라는 작가.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네.""……!""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또 어떤 눈빛을 가진 사람인지. 궁금해졌거든."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그 천박하고 통제 불능인 이안과, 차갑고 예리한 남편 도진이 한 공간에서 마주친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도, 도진 씨. 굳이 안 와도 되는데. 기자들도 많이 오고 번잡해서 피곤할 거예요."필사적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도진은 단호했다."아니야. 갈게. 벌써 스케줄도 다 비워놨어."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차 다 마셨으면 먼저 들어가서 자. 난 서재에서 일 좀 더 하다 갈게."서아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도진은 주방을 빠져나갔다.식탁에 홀로 남겨진 서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식어가는 찻잔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녀의 세계에, 조금씩 파멸의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딸깍.서재의 문을 닫고 들어온 도진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어둠 속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책상에 앉은 도진은 새 문서를 열었다. 날짜와 시각을 적고, 오늘 본 것들을 짧게 기록했다. 귀가 시각. 평소보다 진한 향수. 오래 지속된 샤워. 질문 뒤 느슨해진 어깨.그는 그것을 ‘증거’라고 쓰지 않았다.‘관찰.’아직은 그 단어가 더 정확했다.도진은 자신이 왜 묻지 않는지 알았다. 진실을 빨리 확인하는 것보다, 사람이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는 일이 훨씬 흥미로웠다.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키보드 위 손가락이 움직였다.세 해 동안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기록을 마친 도진은 문서 속 단어 하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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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화 우아한 포식자와 거친 야수의 대면(1)

갤러리 도아의 메인 홀은 눈이 시릴 만큼 밝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클래식 현악 4중주의 연주가 부드럽게 홀을 채우고 있었지만, 백서아의 귀에는 그 어떤 우아한 선율도 들리지 않았다."관장님, VIP 명단 확인 부탁드립니다. K일보 문화부 기자님도 방금 도착하셨어요.""네. 안내해 드려요. 샴페인 잔 비지 않게 케이터링 팀에 전달해 주시고요."서아는 기계적으로 지시를 내리며 입가에 완벽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블랙 실크 드레스. 목선을 우아하게 드러내는 올림머리. 그리고 남편 도진이 작년 결혼기념일에 선물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오늘의 백서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갤러리 도아의 관장이었다.하지만 드레스 자락 아래,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발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샴페인 잔을 쥔 손가락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숨이 막혀…….'서아는 애써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정식 개막을 앞두고 마련한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막 시작됐다.서아는 다시 관장의 얼굴을 썼다. 작품 번호와 작가의 의도를 설명하고, 컬렉터가 머무는 시간을 살폈다. 이안의 붉은 작품 앞에서는 사람들이 유난히 오래 멈췄다."불편한데 눈이 안 떨어지네요."한 컬렉터가 말했다.서아는 준비된 설명을 건넸다."작가가 의도한 긴장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감상자가 작품 밖에 안전하게 서 있다고 믿지 못하게 만들죠."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설명하는 대상이 그림인지 작가인지 알 수 없었다.서아는 설명을 마친 뒤 무심코 홀 입구 쪽을 확인했다. 도진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휴대전화에 도착한 그의 짧은 메시지가 떠올랐다.[일이 조금 늦어질 것 같아. 그래도 꼭 갈게. 먼저 행사 보고 있어.]평소라면 다정하다고만 느꼈을 문장이 오늘은 예고장처럼 느껴졌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남편과, 자신이 숨기고 있는 것을 전부 아는 남자가 같은 홀에 있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목 뒤가 뻣뻣하게 굳었다.반대편에서 컬렉터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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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화 우아한 포식자와 거친 야수의 대면(2)

"색채의 대비도 좋고, 무엇보다 이 선을 쓰는 방식이 아주 흥미롭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 먹잇감을 물어뜯는 것 같은 날것의 에너지가 있어.""……감사해요.""그런데 말이야."도진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서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묘한 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이 그림 속의 피사체. 묘하게 익숙하네."쿵. 서아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네? 그게 무슨…… 추상화라서 형태가 뚜렷하지도 않은데…….""형태가 중요한 게 아니지. 본질이 중요한 거지. 이 그림 속의 여자는 겉으로는 웅크려 방어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이 폭력적인 붓 터치를 아주 관능적으로 즐기고 있잖아. 안 그래?""도진 씨…….""마치, 내가 아주 잘 아는 누군가처럼."도진이 서아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서아는 샴페인 잔을 쥔 손을 덜덜 떨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도진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아니, 확신하고 있다.당장이라도 이 홀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그녀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였다."작품 해석이 꽤나 노골적이시네요."낮고 거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서아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권이안. 그가 샴페인 잔을 한 손에 든 채, 두 사람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메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차림새는 갤러리의 분위기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격식을 차린 수트 대신, 그는 깃이 늘어난 검은색 리넨 셔츠의 단추를 가슴팍까지 풀어헤친 채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카락, 손톱 밑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물감 자국. 우아함과 허영으로 가득 찬 이 갤러리 안에서, 그는 마치 정글에서 갓 튀어나온 이질적인 맹수 같았다."아……."서아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샜다.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 눈앞에 닥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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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화 우아한 포식자와 거친 야수의 대면(3)

도진은 그 일련의 과정을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감상하고 있었다. 분노로 이성을 잃고 주먹을 날리기는커녕,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환희와 즐거움마저 서려 있었다."아내가 많이 긴장했나 보네요."도진이 서아의 어깨를 감싸 쥐며 자신의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이안의 시선 앞에서 보란 듯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행위였다."하지만 권 작가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피사체의 진짜 욕망을 끄집어내는 것, 그게 예술가의 역할이죠. 덕분에 저도 아주 큰…… 영감을 얻고 갑니다."도진이 이안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앞으로도 제 아내와 잘해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 갤러리 밖에서, 두 분이 만들어낼 '결과물'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테니까요.""……."이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는 도진의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도발을 했음에도, 저 가증스러운 소설가 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히려 판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그거 참, 영광이네요. 한국 최고의 작가님이 제 결과물을 기대해 주신다니."이안도 지지 않고 잔을 부딪쳤다.챙-.두 개의 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백 관장님을 더 깊고 철저하게 파고들어 봐야겠습니다. 뼈와 살이 분리될 때까지."이안의 노골적인 음담패설에 가까운 선언. 서아는 눈앞이 아찔해져 도진의 팔을 생명줄처럼 꽉 부여잡았다."기대하겠습니다."도진은 서늘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목으로 넘겼다."그럼, 파티의 주인공은 이만 놓아드려야겠군요. 여보, 나 먼저 저쪽으로 가 있을게. 천천히 일 봐."도진은 서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반대편 홀로 걸어갔다.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오만하고 완벽했다.도진이 멀어지자마자, 이안의 서늘한 시선이 서아의 창백한 얼굴을 향해 꽂혔다."남편이 꽤나 눈치가 빠른가 보네."이안이 서아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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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화 사각지대의 숨결(1)

파티는 충분히 무르익고 있었다.클래식 현악 4중주의 선율이 사람들의 낮고 우아한 웃음소리와 섞여 갤러리 메인 홀을 부드럽게 채웠다.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 고가의 향수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나른한 공기.하지만 서아에게 이 모든 것은 이명을 유발하는 끔찍한 소음에 불과했다."백 관장님. K일보 편집장님 가신답니다. 배웅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아, 네. 지금 갈게요."서아는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홀 입구로 향했다.도진은 여전히 파티의 중심에 있었다. 몇몇 평론가들과 VIP 컬렉터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는 특유의 지적이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완벽하고 다정한 남편. 대한민국 문단을 이끄는 젊은 거장.그러나 서아의 눈에는 도진의 그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아까 이안과 대치하며 내뱉었던 그 서늘한 문장들이, 아직도 귓가에서 독사처럼 쉭쉭거리고 있었다.'통제 아래 완벽하게 제어되어 벽에 걸렸지 않습니까.' '결과물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테니까요.'남편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이안과 모종의 아슬아슬한 선을 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눈치채고 있었다."하아……."서아는 갤러리 입구에서 손님을 배웅한 뒤, 무너져 내리듯 깊은숨을 토해냈다. 가슴이 답답했다. 코르셋처럼 허리를 꽉 조인 블랙 실크 드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공간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머리가 핑 돌며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관장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괜찮으세요?"근처를 지나던 어시스턴트 유진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어, 나 잠깐만. 잠깐만 쉴게. 머리가 좀 아파서.""네네, 얼른 들어가서 좀 쉬세요. 홀은 제가 보고 있을게요. 남편분께 말씀드릴까요?""아니! 절대. 도진 씨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서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유진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안쪽 스태프 휴게실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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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화 사각지대의 숨결(2)

"놔. 이거 안 놔?!""목소리 낮춰. 진짜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이안이 서아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그녀의 몸을 거칠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쿵."읏……!"서아의 등이 차가운 벽면에 강하게 부딪혔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의 등 뒤는 단단한 벽이었고, 앞은 거대한 이안의 몸이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미쳤어? 여기, 바로 벽 너머에 사람들 있어. 도진 씨도 있다고!"서아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헐떡였다."알아. 벽 하나만 넘어가면 우아하고 완벽한 당신들의 세계라는 거."이안의 한쪽 팔이 스르륵 내려와 서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아쥐었다.블랙 실크 드레스. 피부처럼 얇고 매끄러운 천 너머로, 이안의 뜨거운 체온과 거친 손바닥의 결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전해졌다."그런데 어쩌지. 나는 그 완벽한 세계를 부수고 싶어 미치겠는데."이안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꽉 주며 자신의 쪽으로 서아를 밀착시켰다."아앗……!"두 사람의 하반신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물 빠진 거친 청바지의 질감과, 그 아래로 느껴지는 이안의 노골적인 변화에 서아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이안 작가님, 제발…… 여기서 이러지 마.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 도진 씨가 알면…….""통제 아래 제어된 결과물이라며. 당신 남편이 그랬잖아."이안의 얼굴이 서아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올림머리로 고스란히 드러난 하얀 목선을 핥듯 스치고 지나갔다."이것도 통제해 보라고 해.""흐읏…… 안 돼, 진짜 미쳤어…… 놔!"서아가 주먹을 쥐고 이안의 가슴팍을 필사적으로 밀어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은 서아의 발버둥을 즐기듯, 그녀의 골반을 잡은 손을 더 깊고 집요하게 문질러댔다.벽 너머 메인 홀에서는 사람들의 우아한 대화 소리와 클래식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강 작가님, 이번 신작은 언제쯤…….] [백 관장님 기획력이 대단하시네요. 그림이 아주…….]바로 몇 미터 앞. 얇은 가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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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화 사각지대의 숨결(3)

메인 홀 쪽에서 다른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아, 그런가 봐요. 다시 가볼게요."또각. 또각. 또각.다행히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유진이 완전히 메인 홀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한 뒤, 이안이 천천히 서아의 입에서 손을 뗐다."하아아…… 하아…… 하아……."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며 서아는 크게 헐떡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그녀의 허리를 이안이 단단히 받쳐 안았다."스릴 넘치지?"이안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신 남편의 그 완벽한 통제, 내가 이 어두운 구석창고에서 박살 내버렸잖아.""미친 자식…… 진짜 미친 새끼……."서아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욕설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젖어 있었고, 이안의 옷깃을 움켜쥔 두 손은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떨리고만 있었다.이안이 서아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닦아냈다."울지 마. 당신 그 표정, 여기서 끝내기엔 너무 아깝잖아."이안이 서아의 허리에서 손을 풀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순식간에 짓누르던 체온이 사라지자, 서아는 묘한 상실감에 몸을 움찔거렸다."오늘은 이만 놔줄게. 더 있다간 진짜 그 샌님 남편 눈알이 뒤집히는 꼴을 볼지도 모르니까."이안이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짐승처럼 몰아붙이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여유로운 포식자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대신."복도를 빠져나가려던 이안이 고개를 돌려 서아를 똑바로 응시했다."다음번엔 당신 발로 직접 찾아와.""……뭐?""내 작업실. 당신 남편한테 아주 근사하고 완벽한 거짓말을 꾸며대고, 당신 발로 직접 기어들어 오라고."명령이자 통보였다."내가…… 거길 왜 가. 다시는 당신 볼 일…….""오게 될 거야."이안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당신 몸이 이미 내 붓 터치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숨 막히는 가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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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화 완벽한 거짓말, 그리고 추락의 방향(1)

갤러리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끝난 지 사흘이 지났다.그 사흘 동안 서아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화려한 갤러리의 조명 대신 어둡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사각지대의 복도가 떠올랐다.자신의 입을 틀어막던 크고 거친 손바닥. 실크 드레스 트임 사이를 파고들던 노골적이고 뜨거운 손가락의 감촉. 그리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던 남편 도진의 여유로운 목소리까지.‘다음번엔 당신 발로 직접 찾아와.’이안이 남긴 그 짐승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서아는 새벽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였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도진의 규칙적이고 평온한 숨소리는 오히려 서아의 목을 조르는 완벽한 밧줄 같았다.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어느 쪽이든 서아에게는 미칠 것 같은 형벌이었다. 그녀는 도진의 그 서늘하고도 다정한 시선 아래서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아침 7시 30분.한남동 2층 단독 대저택의 다이닝 룸은 오늘도 잘 연출된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따뜻한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고, 식탁 위에는 갓 구운 크루아상과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은은한 향을 풍기는 블랙커피가 놓여 있었다."……."서아는 포크로 애꿎은 샐러드 잎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음식은커녕 물조차 삼키기 힘들었다."안색이 안 좋네."신문을 넘기던 도진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아…… 조금. 프리뷰 리셉션 신경 쓰느라 피로가 덜 풀렸나 봐요."서아는 황급히 포크를 내려놓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무리하지 마. 갤러리 일도 좋지만, 난 당신 건강이 우선이니까."도진이 커피잔을 입에 가져가며 서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 서아는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말해야 해.'서아는 식탁 아래로 깍지 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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