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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죄책감의 온도, 그리고 관찰자의 아침(1)

제31화 죄책감의 온도, 그리고 관찰자의 아침(1)쏴아아아-최고급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한남동 빌라의 넓은 욕실.해바라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가 서아의 정수리를 때리고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욕실 안은 이미 뽀얗고 매캐한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흐읏…… 하아……."서아는 샤워 부스 벽에 이마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운 온도였지만, 그녀의 턱끝은 추위에 노출된 사람처럼 잘게 떨렸다.벅벅, 벅.서아의 양손은 미친 듯이 자신의 쇄골과 가슴, 허벅지를 문지르고 있었다.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잔뜩 묻혀 몇 번이나 거품을 내고 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부가 벗겨질 것처럼 손톱을 세워 살갗을 긁어내렸다."안 지워져…… 왜 안 지워지냐고!"신경질적인 서아의 목소리가 물소리에 묻혀 욕실 바닥으로 흩어졌다.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쇄골 아래에 머물렀다.어젯밤 이안이 짐승처럼 물어뜯고 빨아들였던 자리에, 검붉은 피멍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와 골반 부근에는 이안의 크고 거친 손가락 모양대로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찍혀 있었고, 손톱 밑에는 아무리 솔로 문질러도 미세하게 남아있는 붉은 유화 물감의 찌꺼기가 보였다.'이렇게 한 번 풀어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천박한 년이니까.'귓가에 이안의 낮고 긁히는 조소가 환청처럼 맴돌았다."아아악!"서아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뜨거운 물줄기가 무방비하게 웅크린 그녀의 등을 때렸다.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흐르는 물에 섞여 자신이 울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미쳤다. 완벽하게 미쳐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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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죄책감의 온도, 그리고 관찰자의 아침(2)

제32화 죄책감의 온도, 그리고 관찰자의 아침(2)권이안이라는 싸구려 붓의 터치를 온몸에 묻힌 채, 죄책감과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섰다."하하."도진의 입술 틈으로 참지 못한 웃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손끝이 짜릿하게 저려왔다. 당장이라도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이 상황을 활자로 미친 듯이 쳐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딸깍.그때, 욕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도진은 순식간에 얼굴에서 서늘한 미소를 지워내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편의 가면을 완벽하게 뒤집어썼다.끼이익.문이 열리고, 하얀 샤워 가운을 여며 입은 서아가 밖으로 나왔다."도진 씨……."서아는 침대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도진을 발견하고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나왔어? 목욕이 꽤 기네."도진이 커피잔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아…… 네. 피곤해서, 따뜻한 물에 좀 오래 있었어요."서아는 시선을 도진의 눈동자에서 슬쩍 피하며 화장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모르게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웠다. 허벅지 안쪽의 뻐근한 통증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신경을 긁었기 때문이다.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아의 뒤로 다가갔다."앗."도진의 큰 손이 서아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자, 서아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몸을 굳혔다."왜 그래? 놀랐어?""아, 아니요. 손이…… 갑자기 닿아서."서아가 화장대 거울을 통해 등 뒤의 도진을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도진은 화장대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냈다."내가 말려줄게. 가만히 앉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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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완벽한 세계의 균열, 불청객(1)

제33화 완벽한 세계의 균열, 불청객(1)부아앙-!매끄러운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포르쉐 파나메라의 엔진음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운전대를 쥔 서아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하아……."막히는 올림픽대로 한가운데. 서아는 신호 대기에 걸리자마자 운전대에 이마를 처박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에어컨을 가장 낮게 틀어놓았는데도 셔츠 안은 온통 식은땀으로 축축했다.아침 내내 남편 도진의 그 서늘하고 기묘한 시선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방금 막, 사랑에라도 빠진 여자 같아.'다정하게 웃으며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도진의 손길. 그 감각이 떠오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올랐다.도진은 알고 있을까?아니, 모를 것이다. 그가 완벽주의자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서아였다. 만약 자신의 외도를 눈치챘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짐을 싸서 내쫓거나 이혼 서류를 집어 던졌어야 맞다. 그렇게 여유롭게 웃으며 머리를 말려줄 남자가 아니었다.'그래, 그냥 기분 탓일 거야. 내가 지레 겁먹은 거야.'서아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백미러로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었다. 창백한 피부 위로 도발적으로 칠해진 붉은 립스틱. 평소의 단정하고 우아한 '청담동 갤러리 관장'의 모습과는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징징- 징징-조수석에 던져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서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발신자 제한 번호? 아니, 화면에 뜬 이름은 더욱 끔찍했다.[권이안]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서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버렸다. 하지만 전화가 끊기자마자, 이번에는 카카오톡 알림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카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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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완벽한 세계의 균열, 불청객(2)

제34화 완벽한 세계의 균열, 불청객(2)"아, 기획전 말씀이시군요. 이번에 저희 갤러리에서 새로 발굴한 루키들인데…….""아니, 다른 애들은 다 고만고만하고. 그 왜, 검붉은 색 잔뜩 써서 엄청 거칠게 그려놓은 거 있잖아. 묘하게 야해 보이기도 하고, 막 소름 끼치기도 하고. 그거 작가 이름이 뭐더라?"서아의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사모님이 말하는 그림은 단 하나뿐이었다."……권이안 작가 작품 말씀하시는 건가요?""맞아! 권이안. 그 작가 아주 물건이던데? 선 쓰는 게 꼭 누구 잡아먹을 것처럼 흉폭한 게, 아주 매력 있어. 오늘 그 작가 혹시 갤러리에 있어?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서아는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피 맛이 비릿하게 퍼졌다."아…… 권 작가님은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계시는 분이라서요. 외부 일정은 일절……."똑똑-그때, VIP 라운지 문에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최 팀장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관장님. 죄송하지만, 밖으로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왜요? 지금 사모님이랑 미팅 중인 거 안 보여요?"서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최 팀장이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꼭 지금 관장님을 뵙고 싶다고 떼를 쓰셔서…….""누군데 예의도 없이 약속도 안 잡고 찾아와? 돌려보내요!""그게…… 권이안 작가님이라고 하시는데요."쨍그랑-!서아의 손에 들려 있던 베르사체 찻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뜨거운 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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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완벽한 남편, 그리고 차가운 금속의 질감(1)

제35화 완벽한 남편, 그리고 차가운 금속의 질감(1)삑, 삑, 삑, 삐릭-현관문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서아의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렸다.네 자리의 숫자를 누르는 데만 평소의 세 배는 걸린 것 같았다.철컥.무거운 현관문이 열리고, 집 안의 따뜻하고 은은한 조명이 서아의 창백한 얼굴 위로 쏟아졌다.최고급 편백나무 향 디퓨저가 뿜어내는 우아한 공기. 먼지 한 톨 허락하지 않는 대리석 바닥.바깥세상의 그 어떤 소음도, 더러움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요새였다."……하아."서아는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댄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오늘 하루 종일 갤러리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대낮의 갤러리 메인 홀을 유유히 걸어 들어오던 권이안의 모습. 집무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턱을 틀어쥐며 조소하던 그 미친 눈빛.'수신 차단, 풀어. 오늘 밤에 또 연락할 테니까.'귓가에 맴도는 이안의 목소리에 서아는 다시금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그는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언제든 이 완벽한 일상을 박살 낼 수 있다는 폭력적인 우월감. 자신이 쳐놓은 덫에서 발버둥 치는 꼴을 보며 즐거워하는 포식자의 여유."왔어?"그때, 거실 안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복도 끝에서 도진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편안한 캐시미어 니트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다정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도, 도진 씨.""안색이 왜 그래. 하루 종일 혼 쏙 빠진 사람처럼."도진이 다가와 서아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하고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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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완벽한 남편, 그리고 차가운 금속의 질감(2)

제36화 완벽한 남편, 그리고 차가운 금속의 질감(2)'어젯밤, 당신의 몸에 짐승 같은 흔적을 남긴 그 싸구려 수컷의 집이겠지.'도진은 열쇠의 거친 단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쇠비린내가 코끝을 찌르는 것 같았다.서아가 이 열쇠를 일부러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 리는 만무했다. 그 겁 많은 여자가 이런 확실한 증거물을 남편이 옷을 벗겨주는 순간까지 주머니에 방치했을 리 없다.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그 수컷이 찔러 넣었군.'오늘 갤러리에 권이안이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도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서아는 모르겠지만, 갤러리 메인 홀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그 무명 화가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는 소문은 이미 최 팀장의 입을 통해 도진의 귀에도 들어온 상태였다. 최 팀장은 관장님의 안색이 창백해져서 집무실에 단둘이 들어갔다는 시시콜콜한 보고까지 빼놓지 않았다.집무실이라는 닫힌 공간.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아내.그리고 그녀를 조롱하며, 코트 주머니 속에 몰래 이 천박한 목줄을 집어넣었을 권이안."하, 하하……."도진의 입술 사이로 기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웃음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노골적인 환희로 변했다."이거, 기대 이상인데."도진은 열쇠를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보통의 남편이라면 아내의 불륜 상대가 아내의 주머니에 제 집 열쇠를 찔러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코트를 찢어발기고 욕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아내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하지만 백도진은 아니었다.그의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것은 분노나 치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예술적 희열'이었다.'너무 뻔하게 발을 빼면 재미가 없지.'도진은 고개를 돌려 욕실 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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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그림자들의 축제, 관찰자의 시선(1)

제37화 그림자들의 축제, 관찰자의 시선(1)"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 뒀었는데……."다음 날 오전, 드레스룸에서 서아의 비명이 나직하게 터져 나왔다.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스타일러에서 막 꺼낸 캐멀색 코트 주머니를 미친 듯이 뒤집어엎고 있었다. 양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왼쪽 주머니, 텅 비어 있었다.오른쪽 주머니, 얇은 영수증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말도 안 돼. 분명히 주머니에 넣는 감각이 있었는데."서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권이안이 갤러리 집무실에서 그녀를 몰아붙인 뒤, 나가는 길에 억지로 찔러 넣었던 그 차갑고 투박한 열쇠. [B동 옥탑]이라는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던 싸구려 가죽 키링.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와 도진에게 코트를 넘겨주기 직전까지 분명히 주머니 속에 묵직한 이질감이 존재했었다.'도진 씨가 발견한 걸까?'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서아는 등줄기에 얼음물이 쏟아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만약 도진 씨가 그걸 봤다면 나한테 물어봤겠지. 그 사람은 숨기는 게 있으면 눈빛부터 변하는 사람이야. 어제는…… 평소처럼 너무 다정했어.'그렇다면 남편이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코트를 스타일러에 넣는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졌거나, 아니면 애초에 갤러리에서 집무실 바닥 어딘가에 흘렸을 가능성이 컸다.서아는 서둘러 옷가지를 정리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갤러리 최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어, 최 팀장. 나예요."네, 관장님! 출근 중이신가요? 사모님 어제 전시는 아주 만족스러워하셨어요."그것보다, 혹시 어제 내 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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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그림자들의 축제, 관찰자의 시선(2)

제38화 그림자들의 축제, 관찰자의 시선(2)서아가 조심스럽게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오늘 밤에 급하게 외주 컬렉터들이랑 미팅이 잡혔어요. 아무래도 밤늦게까지 회의가 이어질 것 같아서…… 먼저 자요. 나 좀 늦을지도 몰라요."도진은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바르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그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서늘하고 깊은 눈동자가 서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이 시간에 미팅을?""네. 외국계 투자자 쪽이라, 시차 때문에 밤늦게 화상 회의를 겸해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강남 쪽 호텔 라운지에서 보기로 했어요."서아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거짓말을 더듬거리지 않고 뱉어냈다. 손바닥에는 침이 고일 정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도진은 가만히 서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그래. 당신 요새 정말 열심히 하네. 백 작가 마누라로만 살기엔 아까운 재능이지.""……고마워요, 도진 씨. 이해해 줘서.""조심해서 다녀와. 밤길 위험하니까 운전 살살 하고.""네, 그럴게요."서아는 안도감에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도진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의심하고 있다면 이런 밤늦은 외출을 순순히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식사를 마친 서아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화려한 샤넬 투피스에 높은 힐을 신고, 주머니에 들어있지 않은 열쇠 대신 거액의 수표가 든 봉투를 핸드백 깊숙이 집어넣었다."다녀올게요.""응. 너무 무리하지 말고."현관문 앞에서 도진은 서아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주었다.삑, 삑, 삐리릭-서아가 나가고 현관문이 굳게 닫히는 순간.도진의 얼굴에서 다정한 남편의 가면이 흔적도 없이 벗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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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죽은 활자의 부활(1)

제39화 죽은 활자의 부활(1)콰아앙!도진은 운전대를 거칠게 내리쳤다.차가운 가죽 표면에 부딪힌 손날이 시큰거렸지만,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어두운 SUV 차량 내부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창문 밖으로 신림동의 구질구질한 골목길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하…… 윽……."목구멍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역겨움이었다. 동시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노골적인 분노였다.눈을 감으면 방금 전 보았던 잔상이 망막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붉은 조명.때 묻은 레이스 커튼.그 너머로 기괴하게 엉켜 들던 아내의 실루엣.그 고상하고 우아하던 백서아가, 자신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노골적인 몸짓으로 다른 사내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으아아악!"도진은 차를 한적한 도로변에 급정거하고는 소리를 질렀다.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3년이었다.글이 써지지 않아 방황하던 3년 동안, 그의 곁을 지키며 위로해 주던 아내였다.자신의 무기력함을 묵묵히 견뎌주던 성녀 같은 여자였다.전부 가짜였다.그녀가 지어 보이던 다정한 미소도, 걱정 어린 눈빛도, 그 지저분한 옥탑방 바닥에서 풍기던 악취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위선에 불과했다.도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눈물인지 식은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왜…… 도대체 왜……."이유를 묻고 싶었다.당장 그 옥탑방 문을 부수고 들어가 두 사람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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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죽은 활자의 부활(2)

제40화 죽은 활자의 부활(2)네?"준비나 해둬. 당신이 평생 보지 못했던, 한국 문단에서 가장 노골적이고 잔인한 소설이 될 테니까."작가님! 백 작가님! 그게 정말입니까!도진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그리고 핸드폰을 책상 구석으로 던져버렸다.편집장의 환희에 찬 비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도진의 온 신경은 오직 눈앞의 하얀 빈 공간에만 쏠려 있었다.띵동-.그때, 아래층에서 아내의 귀가를 알리는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시간은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도진은 서재 의자에 앉은 채 몸을 굳혔다.아래층에서 서아의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이힐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 소리, 그리고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향하는 소리.잠시 후,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재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도진 씨……? 아직 안 잤어요?"서아였다.그녀는 샤넬 재킷을 벗어 손에 든 채, 얇은 블라우스 차림으로 서재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도진은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보았다.방금 전까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짐승처럼 헐떡이던 여자.그녀의 목덜미는 살짝 붉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강남 호텔 라운지에서 화상 회의를 했다던 거짓말의 대가치고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수가 너무 짙었다. 이안의 작업실에 가득했던 테레빈유 냄새와 땀 냄새를 덮기 위해 급하게 뿌린 게 분명했다."어, 당신 왔어?"도진은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가슴 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냉정하게 가라앉혔다."왜 이렇게 늦었어. 미팅이 길어졌나 봐?""네…… 그 투자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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