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181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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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파멸의 타건음(3)

  자신의 발밑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여자.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거실에 세워진 거대한 누드화 속에서 다리를 벌리고 헐떡이던 그 천박한 모습과, 지금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이 비참한 모습이 정확히 겹쳐진다는 사실을.도진은 아주 천천히,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도, 도진 씨… 쓰지 마… 제발…!"도진이 다시 타건을 시작하려 하자, 서아가 기겁하며 도진의 무릎을 마구 흔들었다. 그녀는 도진의 바지를 찢어버릴 듯 꽉 움켜쥐고 악을 썼다."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거 쓰면 나보고 죽으라는 거잖아!! 이 개새끼야, 쓰지 마!! 악!!"도진은 서아의 발악을 철저히 무시했다.오히려 그의 손가락은 더욱 경쾌하고 빠르게 키보드를 타격하기 시작했다.타닥, 타다다닥! 타다닥!『완벽하게 붕괴된 여자는 남편의 발치로 기어들어 왔다. 그녀의 눈물은 참회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얄팍한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그 짐승 같은 생존 본능만이 남아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게 만들었다.』"흐아아악! 도진 씨!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서아가 도진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오열하며 세게 깨문 입술에서 배어난 피가 도진의 바지에 붉게 번졌다.도진의 시선은 오직 모니터 화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화면 속에서 커서가 깜빡이며,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그녀는 울부짖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그저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남편의 눈에 비친 아내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걸작을 완성시켜 준, 가장 아름답고 추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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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완벽한 성자(聖者)의 얼굴(1)

  [ - 본편 끝 - ]모니터 하단의 문구는 그대로였지만 저장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작업용 파일과 외장 저장장치, 편집장에게 보낼 원고 폴더까지 세 개의 저장본이 같은 수정 시각으로 남아 있었다. 도진은 더 이상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대신 메일 창을 열었다.받는 사람 칸에는 김 편집장의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은 짧게 적었다.[신작 본편 원고 송부]첨부 버튼을 누르자 방금 완성한 본편 파일이 올라갔다. 도진은 파일명이 맞는지, 마지막 페이지가 `[ - 본편 끝 - ]`에서 끝나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새로 만들어 둔 에필로그 파일은 첨부하지 않았다. 그 파일에는 아직 한 문장도 없었다.본문에는 더 긴 설명을 쓰지 않았다.[본편까지 보냅니다. 에필로그는 마지막 장면을 확인한 뒤 보내겠습니다.]커서가 전송 버튼 위에 멈췄다. 몇 주 전 1부 1차 원고분을 보낸 적은 있었지만, 완성된 본편 전체를 편집장에게 넘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도진이 망설인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다. 편집장이 지금까지의 일부가 아니라 이 이야기의 본편 결말까지 읽게 되는 순간, 아내의 현실을 모르는 독자 한 사람이 작품 전체를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했다.도진은 결국 버튼을 눌렀다.전송 완료 표시가 떴다.그는 보낸편지함에서 첨부 파일의 용량과 전송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본편은 자신의 서재 안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도진은 메일 창을 닫았다.모니터의 전원을 껐다.파앗-.서재를 채우고 있던 푸른빛이 꺼지고, 방 안은 다시 깊은 어둠과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역광만이 남았다."하아…."도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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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완벽한 성자(聖者)의 얼굴(2)

  도진은 저항하는 서아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억지로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도, 도진 씨… 살려줘… 제발….""나 봐봐, 서아 씨. 고개 들어."도진이 다른 한 손으로 서아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들어 올렸다.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서아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도진의 시선과 마주쳤다.도진의 표정.그것은 분노도, 혐오도 아니었다.슬픔에 잠긴 채 아내의 배신을 자책하는 남편의 얼굴조차 아니었다.그것은… 너무나도 완벽한 '자비'였다."얼굴이 이게 뭐야. 피가 다 나네."도진이 자신의 셔츠 소매를 끌어당겨, 서아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고급 실크 셔츠가 아내의 피와 눈물로 시커멓게 얼룩졌지만, 도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당신은 참 바보 같아, 서아 씨."피를 닦아내는 도진의 손길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다정했다."바보라니… 무슨….""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어. 얼마나 끔찍했어."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무슨 말을 하는 거지?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도, 도진 씨… 나 안 때릴 거야…? 나 안 죽일 거야…?""때리다니. 내가 내 아내를 왜 때려."도진이 픽, 하고 헛웃음을 지으며 서아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당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굳이 잘못이 있다면, 그 미친놈을 불쌍히 여겨서 호의를 베풀어준 죄밖에 없지.""……어?"서아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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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완벽한 성자(聖者)의 얼굴(3)

  서아는 도진의 셔츠 자락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틀어쥐었다."도진 씨… 당신 진짜 나 안 버릴 거지…? 저 그림… 저 그림 때문에 나 버리는 거 아니지…?""내가 널 왜 버려. 넌 내 아낸데."도진이 서아의 귓가에 입술을 묻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울지 마, 당신 탓이 아니야."그 빈틈없는 위로.세상 어느 성직자보다도 자애롭고 고결한 목소리."흑, 으흐흑… 고마워, 도진 씨… 진짜 고마워…."서아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도진의 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감싸주는 남편의 위대함에 뼛속까지 안도하며, 그녀는 남은 평생을 도진의 발밑에서 기어 다니더라도 그를 섬기며 살겠다고 속으로 수백 번 맹세했다.하지만.서아의 시야는 도진의 품에 가려져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볼 수 없었다.자신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리고 있는 도진의 얼굴을.열린 서재 문틈 너머로, 거실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는 그 거대한 나체화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남편의 눈빛을.도진의 입술은 서아의 정수리에 다정하게 닿아 있었지만,그의 입꼬리는 차갑고 일그러진 각도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울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도진이 서아의 등을 토닥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그의 맑고 검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오직, 자신이 쳐놓은 정교한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스스로 밧줄을 목에 걸고 안도하는 멍청한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철저한 조소만이 가득할 뿐."내가 다 해결할게. 당신은 그저… 지금처럼 내 곁에서 예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돼."도진의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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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가장 우아한 폭력(1)

  새벽 1시 무렵.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는 한산했다.작업실 골목으로 향하는 새벽 도로 위에서 도진은 이안을 만나는 목적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그가 실제로 가진 자료가 무엇인지 확인한다. 둘째, 서아를 위협하는 조건을 정확히 듣는다. 셋째,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필요한 만큼만 보여 준다.폭력은 계획에 없었다. 상대를 때려눕히면 말이 끝난다. 도진이 원하는 것은 반대로 더 많이 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그는 차 안에서 몇 개의 질문을 입 밖으로 연습했다."언제부터였습니까.""그날 비가 왔습니까.""그 그림은 몇 점입니까."단순한 질문일수록 상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를 추측하기 어려웠다.도진은 출력물을 조수석에 뒤집어 놓았다. 처음부터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상대가 가장 자신만만해졌을 때 한 장씩 꺼낼 것이다.그것이 도진이 준비한 가장 우아한 폭력이었다.도진은 이안을 만나기 전 차량의 블랙박스와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확인했다. 상대가 위협하거나 서아 관련 자료를 언급할 경우 사실 관계를 남길 필요가 있었다.준비는 치밀했지만 목표는 단순했다.이안이 스스로 가장 많은 말을 하게 만들 것.도진은 질문을 줄이고 침묵을 늘리기로 했다. 사람은 상대가 답을 주지 않을 때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려 더 많이 말한다.그 심리를 소설에서 수없이 사용해 왔다.오늘은 현실에서 시험할 차례였다.도진은 운전석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은 짙은 네이비색 맞춤 정장, 빳빳하게 다려진 흰 셔츠, 그리고 단정하게 매듭지어진 실크 넥타이.밤새 집 안을 뒤흔든 혼란과 아내의 붕괴를 가까이서 지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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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가장 우아한 폭력(2)

  누가 보아도 광기와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역겨울 정도로 적나라한 포르노그라피의 현장이었다.이안은 도진이 그 수많은 서아의 누드화들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기를 기대했다. 그는 양팔을 가슴에 꼬고 벽에 삐딱하게 기댄 채, 도진의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했다."어때? 당신의 그 고결하고 우아한 아내의 진짜 모습이."이안이 도발하듯 이죽거렸다."형은 평생 상상도 못 했을 표정들이지? 형 밑에서는 항상 교양 있는 척, 성녀인 척 굴었을 테니까. 근데 내 밑에서는 아니더라고. 아주 천박하고, 솔직하고, 끝내주게 달아올랐지."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욕적이고 저열했다. 다른 남편이었다면 이안의 입을 찢어버리고도 남을 폭언이었다.하지만."흐음…."도진은 이안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벽에 걸린 그림들을 천천히 감상하기 시작했다.그는 그림 속 아내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보고 분노하지 않았다. 수치심에 치를 떨지도 않았다. 그저 갤러리에 전시된 낯선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듯, 아주 객관적이고 서늘한 시선으로 캔버스를 훑어보고 있을 뿐이었다."이안아.""왜. 이제야 피가 거꾸로 솟아?""이게 다야?"도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질문에, 이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뭐?""이게 네가 그토록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그려낸 결과물의 전부냐고 묻고 있잖아."도진이 뒤를 돌아 이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도진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실망감'이 가득했다."나는 네가 조금 더… 압도적인 걸 그려낼 줄 알았거든.""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안이 으르렁거리며 도진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자기 마누라가 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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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가장 우아한 폭력(3)

  "거… 거짓말… 서아가 그럴 리가 없어….""거짓말? 네가 백서아라는 여자를 그렇게 몰라? 걔는 자기 명성, 돈, 갤러리, 그리고 '강도진의 아내'라는 타이틀 없이는 숨도 못 쉬는 여자야. 널 사랑해? 아니, 걘 그냥 일탈의 도구로 널 쓴 것뿐이야. 네가 젊고, 짐승 같고, 뒤탈 없을 것 같으니까 가지고 논 거지."도진은 이안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네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그려낸 이 그림들. 서아가 이걸 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저 쓰레기 같은 거 당장 찢어버리자고 소리치더군. 자기를 이렇게 천박하게 그려놓은 너를 찢어 죽이고 싶다면서 말이야.""아, 아아아아-!!"이안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두 손으로 제 머리통을 감싸 쥐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아니야! 서아는 나한테… 나한테 분명히 날 원한다고 했어! 네가 모르는 그 여자의 진짜 얼굴은 나만 안다고!""네가 안다고 착각하는 그 얼굴조차, 서아가 너한테 보여주기로 허락한 연극의 일부일 뿐이야."도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진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는 이안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메스와 같았다."너는 서아를 가졌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너도 서아의 위선에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리고 지금 네가 싸질러 놓은 이 쓰레기 같은 그림들은, 네가 얼마나 어리석고 통제 불능인 짐승 새끼인지를 증명하는 영수증이고."도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이안의 팔레트와 붓들이 담긴 통을 집어 들었다."아, 그리고 한 예술가로서 마지막 조언을 하나 할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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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영감을 위한 도구(1)

  끼익-.등 뒤로 차가운 철문이 닫히려는 찰나였다."기다려…."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안이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와 도진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었다.물감과 술,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범벅이 된 이안의 손이 도진의 바짓단을 구겨 쥐었다. 그 손아귀에는 어떻게든 남자의 그 완벽한 평정심에 흠집을 내겠다는 듯한, 오기와 발악이 담겨 있었다."어딜 가… 이 새끼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이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충혈된 두 눈은 독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넌 지금 도망치는 거야. 쿨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연기하면서 도망치는 거라고!"도진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이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쾌한 기색조차 없었다. 그저 길가에 버려진 오물 덩어리를 보는 듯한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도망?""그래, 이 병신아! 네 마누라가 내 밑에서 짐승처럼 헐떡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나를 깎아내리고 짓밟아야 네 알량한 자존심이 지켜지니까!"이안은 쉰 목소리로 악을 썼다."네가 백날 여기서 내 그림을 쓰레기라고 떠들어대도 진실은 안 바뀌어! 서아는 나를 원했고, 나는 서아를 가졌어! 너는 네 침대에서 네 마누라가 딴 놈을 생각하며 젖어 드는 꼴도 눈치채지 못한 등신 머저리라고!""……."이안의 거친 숨소리만이 작업실의 적막을 채웠다.그는 도진의 눈동자에서 단 한 줌의 분노나 절망이라도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남자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지기를, 제발 한 대만이라도 좋으니 주먹을 날려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도진은 그저 가만히 이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이안아."도진의 입술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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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영감을 위한 도구(2)

  이안이 다시 앉자 도진은 봉투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어 두었다. 더는 자료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내놓는 말만으로도 남은 빈칸이 충분히 채워지고 있었다."그 첫날 밤부터 짚어보지."도진의 입에서 나온 구체적인 정황에, 이안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너는 서아를 네 작업실로 불렀지. 갤러리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끝난 지 사흘째 되던 가을밤, 서아는 내게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오후 일곱 시에 해방촌 옥탑 작업실로 향했어.""……네, 네가 그걸 어떻게.""그날 넌 서아의 비싼 실크 블라우스를 거칠게 잡아뜯었어. 자개 단추들이 바닥과 캔버스 사이로 사방에 흩어졌지."이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숨이 턱 막혔다."그리고 새벽 2시 30분. 집에 돌아온 서아는 네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어. 와인을 쏟아 혜진이 오빠 옷을 빌렸다고 했지. 하지만 그 셔츠에는 담배와 테레빈유 냄새가 배어 있었고, 오른쪽 귓바퀴 아래엔 붉은 물감 자국까지 남아 있었어."도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귓바퀴 아래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나는 그 거짓말을 모르는 척 받아줬어. 다음 날 아침엔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처럼 젖은 머리까지 말려주면서 말이야.""거짓말… 거짓말 마! 네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네 마누라가 나랑 붙어먹고 온 걸 알면서도?!""모른 척한 게 아니야."도진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고 서늘해졌다."내가 그 무대를 세팅해 준 거지."순간, 작업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이안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도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도진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사방에 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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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영감을 위한 도구(3)

  자신은 강도진의 우아한 세계에 균열을 낸 '치명적인 파괴자'라고 믿었다.백서아를 통해 저 거만한 강도진을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다.이 수많은 그림들이 그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여겼다.그런데.그 모든 것이.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강도진이 쳐놓은 거미줄 위에서의 발버둥에 불과했다는 건가?"너는 내 영감을 위해 쓰인 도구였을 뿐이야."도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 문장.그것은 이안의 척추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결정타였다."도구…."이안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그래, 도구. 잉크가 다 떨어져서 이제는 버려야 할, 싸구려 일회용 펜 같은 거."도진이 쓰레기통에 손수건을 툭 던져 넣었다."네가 죽을힘을 다해 그려낸 이 그림들조차, 결국 내 소설의 본편 결말을 장식하기 위해 쓰인 소품에 불과해. 이 누드화들 덕분에 서아가 내 발밑에서 평생 복종을 맹세하는 장면까지 본편에 이미 봉인했지. 본편은 끝났고 편집장에게도 넘겼어. 이제 현실에 남은 건 하나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을 본 서아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 마지막 장면이 내 에필로그를 완성해 줄 거야."도진이 이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악마의 미소였다."고맙다, 이안아. 네 덕분에 출간되는 순간 세상을 뒤흔들 역작의 본편이 완성됐어. 이제 네 선택이 만들어낼 마지막 에필로그만 남았지. 독자들이 열광할 때 네 이름도 아주 잠깐, 마음속으로나마 떠올려주지."도진은 더 이상 이안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뒤를 돌았다."이, 이 개새끼야… 강도진… 이 악마 새끼야!!"이안이 등 뒤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지만, 도진의 발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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