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91 - Chapter 100

270 Chapters

91. 대월(待月)

수장고의 창은 좁고 높아서, 빛이 칼처럼 비껴 들었다.서명 없는 서신 열여섯 장이 긴 탁자 위에 날짜 순으로 벌여졌다. 이른 것은 그 밤보다 반년을 앞섰고, 마지막 것은 보름을 앞섰다. 선우현이 한 장 한 장 획을 짚어 나갔다. 붓을 대는 첫 자리. 꺾는 버릇. 마지막 획이 종이를 누르며 끝나는 모양."같은 손이오." 그가 말했다. "물 위에서 본 수결과. 열여섯 장 전부."운설은 탁자 끝에서 그 종이들을 보았다. 글은 격조 높은 문어였다. 북쪽의 이리가 이빨을 간다. 눈이 녹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한다. 정병이 모이고 있다는 풍문이 있다 — 풍문이라는 말을 쓴 입이, 반년 뒤 그 풍문을 열두 줄의 공훈으로 바꾸었다. 십팔 년 전 온 중원이 믿은 침략설이 이런 담 안, 이런 서안 위로 배달되어 온 광경을, 운설은 벌여진 열여섯 장에서 보았다. 남궁가에 열여섯 장이면 다른 세가에는 몇 장이 갔을까."조부님은 만년에 달을 못 보셨어요." 남궁완이 말했다. 부채는 접힌 채 탁자에 놓여 있었다. "달이 뜨면 방문을 닫으셨죠. 다들 노환이라 했어요. 저는 열다섯에 이 서신들을 찾았고요. 태우라 명하신 걸 몸소 태우지 못하고 수장고 바닥에 감추신 것도, 노환이라면 노환이겠죠.""가문 회의는 이걸 압니까." 운설이 물었다."알면 제가 여기 서 있겠어요?" 여인은 처음으로 웃었는데, 웃음에 온기가 없었다. "회의는 명예를 씻으라고 절 보냈어요. 저는 — 씻어지는지 알고 싶어서 왔고요. 씻어지는 죄인지, 씻는 시늉만 해야 하는 죄인지."빛이 반 뼘을 옮겨 가는 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수장고 바닥에서 가문의 죄를 주워 들고, 십 년을 혼자 품고 산 셈이었다. 명예를 씻으러 온 사람은 부채를 든 영애였고, 지금 탁자 앞에 선 사람은 그 종이를 십 년 진 사람이었다.그 말투에는 부채도 격도 없었다. 운설은 이 여인이 처음으로 미워지지 않는 것이 불편했다. 미워할 수 있는 동안은 셈이 간단했다.대조는 한나절을 갔다. 선우현과 남궁완이 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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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진맥

"의원님, 비밀 하나만요."연지가 약방 문지방에 앉아 목소리를 낮춘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사시 낀 왼눈이 저 혼자 문밖을 살폈다. "아씨가 달포째 통 못 주무세요. 새벽마다 등이 켜져 있어요. 어의를 부르자니 본가에 말이 들어가고, 그냥 두자니 낯이 하루하루 종이 같아지고. 의원님이 몰래 좀 봐 주시면 안 돼요?""아씨가 청하신 겁니까.""아뇨." 연지는 당당했다. "제가 청하는 거예요. 시중드는 사람 눈이 제일 먼저 알아요."운설은 잠깐 망설였다. 어제 수장고에서 이 여인이 미워지지 않게 된 것과, 그저께 마당에서 이 여인이 놓은 가시들은 별개의 장부였다. 한데 의녀의 장부는 그 둘보다 오래된 것이라, 아픈 사람이 있다는 말 앞에서 결국 이겼다. 백로진의 약방에서도 그랬다. 밉든 곱든, 언 손은 언 손이었다.안채의 남궁완은 서안 앞에 앉아 있다가, 시비 뒤로 들어서는 객의를 보고 붓을 놓았다. 연지를 보는 눈이 반쯤은 나무람이었고 반쯤은 체념이었다."쫓겨나는 법을 모르는 아이라." 남궁완이 말했다. "의원까지 끌고 올 줄은 몰랐네요.""진맥만 하겠습니다. 싫으시면 이대로 나가고요."여인은 한참 운설을 보다가, 소매를 걷어 왼 손목을 서안 위에 얹었다. 항복이라기보다 셈이 빠른 것이었다. 실랑이가 길어지면 소문이 나고, 소문은 불면보다 값이 비쌌다.맥은 가늘고 급했다. 심화가 오래 눌러앉은 맥. 몸은 거짓말을 못 한다. 달포가 아니었다. 계절을 넘긴 불면이었다. 진맥하는 손끝 아래, 약지의 가락지 자국이 파인 채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반지를 뺀 자리는 살이 아물어도 자국이 남는다. 오래 낀 것일수록 깊게."언제부터 못 주무십니까.""의원이 맥으로 알아냈을 텐데요.""맥은 겨울이라 합니다."남궁완은 창 쪽으로 잠깐 눈을 돌렸다. "그이가 인수를 눈밭에 버렸다는 말이 세가에 닿은 게 겨울이었어요. 실성했다는 말과 같이 왔죠. 가문은 그날로 파혼 서신을 보냈고요." 목소리는 남의 집 제사 이야기를 하듯 골랐다. "반지는 돌려보내라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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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명부 (한겸)

한겸은 제 손으로 그린 얼굴이 저잣거리에 붙던 날을 기억했다.키를 반 자 늘였다. 흉터를 오른뺨으로 옮겼다. 눈매를 사납게, 콧대를 낮게. 화공에게 넘길 인상서를 적는 붓이 밤새 떨렸고, 다 적은 뒤에는 뒷간에서 속엣것을 게웠다. 스물여섯 해를 법이 좋아 산 사람의 생애 첫 죄였다. 촌에서 감찰이 났다고 잔치까지 벌였던 어미가 알면 몸져누울 일이고, 알 리 없는 누이는 지난달에도 서신을 보내왔다. 오라버니, 그 은인을 다시 뵈면 절을 올려 줘. 그때 못다 한 절이 아직 내 몫으로 남아 있어.침 세 대에 누이의 열이 내리던 밤, 한겸은 마룻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생각했었다. 이 빚은 평생 못 갚는다. 그 생각이 맞았다. 빚은 갚아지는 대신 자라서, 이제 그의 붓을 쥐고 흔들었다.집법당 안의 공기도 요즘은 낯설었다. 열두 줄이 물 위에서 읽힌 뒤로 늙은 감찰들은 말수가 줄었고, 젊은 축은 둘만 모이면 목소리를 낮췄다. 십팔 년 공훈의 임자들이 하루아침에 도살 장부의 임자가 된 판국에, 당주 어른만이 여느 때와 같았다. 여느 때와 같다는 것이 제일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한겸도 이제는 알 만큼 물이 들어 있었다.남궁가의 별저 대문 앞에서 한겸은 관복을 여몄다. 하루 일찍 온 것은 제 뜻이었다. 가는눈과 함께 오면 눈이 둘이다. 혼자면 하나다. 못 보는 것은 하나인 눈이 더 잘 못 본다."재감정 감찰, 집법당의 한겸입니다."안내를 받아 정당에 들자, 그 사람이 있었다.검신 선우현. 지난겨울 사흘 밤낮을 서툴게 밟다가 눈밭에서 놓친 사람. 물 위의 단에서 열두 줄을 읽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남궁가의 객경 자리에 앉아, 저를 밟던 신참 감찰을 알아보는 눈으로 조용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겸은 절을 올렸다. 여전히 서툰 절이었다. 몸에 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실성 재감정의 문목(問目)입니다." 그는 준비해 온 종이를 폈다. "형식이니 양해하십시오. 하나. 공자는 금년이 무슨 해인지 아십니까.""아오.""둘. 공자가 물 위에서 읽은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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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절

감찰이 대문을 나가고 한 식경 만에 되돌아왔을 때, 별저의 저녁은 아직 상도 물리기 전이었다."객의를 뵙겠습니다." 젊은 감찰은 그렇게 청했다. 명부에 성명 미상이라 적어 놓고 나간 입으로.후원 약방에서 마주 선 그는, 운설을 보자 먼저 두 손을 모으고 큰절을 올렸다. 마룻바닥에 이마가 닿는 절이었다. 배운 격식은 어디에도 없고, 몸이 아는 것만 있는. 서툴고, 길었다."재작년 겨울, 청하 의막에서 침 세 대로 누이를 살리셨습니다." 몸을 일으킨 감찰의 낯이 붉었다. "한겸입니다. 누이가 서신마다 적습니다. 그 은인을 다시 뵈면 못다 한 절을 올려 달라고. 그리고 —"그가 소매에서 봉서를 꺼내 약상 위에 놓았다. 두 줄의 해서가 등잔 밑에 드러났다. 재감정의 노고를 치하한다. 돌아오는 길에, 남궁가의 객의를 모셔 오너라."수배 방을 뭉갠 것도, 오늘 명부에 성명 미상이라 적은 것도 접니다." 한겸은 숨기지 않았다. 숨길 수 있는 자리를 이미 다 지나온 사람의 말이었다. "한데 당주 어른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알면서 하필 저를 보내셨고, 알면서 모셔 오라 적으셨습니다. 이 종이를 두고 도망치시면 — 제가 어찌 되는지는 상관없습니다만, 담이 무너집니다. 재감정도, 남궁가도, 객경 어른의 이름도요."운설은 젊은 감찰을 오래 보았다. 침 세 대의 밤을 그녀는 셈에 넣은 적도 없었다. 앓는 아이가 있어 침을 놓았을 뿐인. 그 밤이 이 사람의 안에서 두 해를 자라, 붓을 꺾고 명부를 굽히고 이제 제 관복의 목숨줄까지 걸고 있었다. 갚으라고 준 적 없는 것을 갚겠다고 온 사람 앞에서, 그녀는 빚이라는 말의 무서움을 새로 배웠다.정당으로 자리가 옮겨지고, 봉서가 상 가운데 놓였다. 늙은 당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두고 말들이 오갔다. 물을 세우는 힘이다. 아버지와 맺은 옛 약조다. 대월의 손이 닿기 전에 제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 어느 셈도 종이 두 줄을 다 덮지 못했다."가겠습니다." 운설이 말했다."안 되오." 선우현의 답이 반 박자도 늦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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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식은 차

간수문은 김이 다 가라앉은 차를 그제야 한 모금 마셨다."앉아라. 서서 듣기에는 긴 이야기다."차 따르는 소리 하나 없는 방이었다. 늙은이는 새 잔에 차를 부어 그녀 앞에 밀어 놓고, 김이 오르는 것을 잠자코 두었다. 마시라는 말도 없었다. 식기를 기다려 마시는 제 법을 손님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다만 잔 하나로 이 자리의 시간을 정해 두는 것이다. 이 차가 식는 동안만 이야기한다는 듯이.운설은 앉았다. 등을 돌렸다는 늙은이의 말을 그녀는 나중에 몇 번이고 뒤집어 보게 된다. 서른둘의 감찰이 등을 돌린 값으로 아이 하나가 살았고, 그 감찰은 마흔 해를 법 안에서 늙어 당주가 되었다. 후회하는 낯도 자랑하는 낯도 없이, 장부에 적어 두고 이자를 세어 온 낯. 지금 그녀 앞의 낯이 그것이었다.등 뒤의 문밖에 한겸이 서 있고, 담 밖에 남궁가의 가마가 서 있다는 것을 늙은이도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그것이 이 자리의 법도였다. 서로의 패를 상 위에 반쯤만 올려놓는 법도."그 밤에 나는 서른둘의 감찰이었다." 간수문이 말했다. 회고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문서를 읽듯 골랐다. "명을 받고 올라갔고, 명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명에 없는 것도 보았지. 불타는 장막 사이에서 네 아비가 강보 하나를 안고 나오는 것을. 나는 등을 돌렸다. 못 본 것으로 하는 값으로, 네 아비와 약조 하나를 맺었다.""어떤 약조입니까.""명을 내린 손을 찾는 것. 찾아서, 법의 이름으로 베는 것." 늙은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법을 맡고, 네 아비는 —" 거기서 말이 접혔다. 접는 솜씨가 하도 익어서, 접힌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뒤는 네 아비의 몫이니 네 아비에게 들어라.""십팔 년이 걸렸군요.""명은 종이에 남고, 종이는 봉인에 숨고, 봉인은 세 당주를 갈아치우며 버텼다." 간수문의 눈이 처음으로 늙은이답게 피로해 보였다. "물 위에서 열두 줄이 읽히던 날 — 그날이 내가 십팔 년을 기다린 날이다. 저들의 붓이 저들을 베는 날. 한데 마지막 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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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불티

물길 셋을 되건너는 동안, 하늘의 붉은 기운은 점점 자랐다.별저의 후원이 타고 있었다. 수장고 지붕이 이미 반쯤 내려앉아 불티를 물길 위로 뿜었고, 가병들이 물지게로 줄을 이었으나 불은 물을 비웃는 기세로 먹어 들어갔다. 운설은 가마가 서기도 전에 뛰어내렸다.대문은 열려 있었고 문지기는 없었다. 물지게꾼과 가병과 시비들이 뒤엉킨 마당에서, 불티가 눈처럼 내렸다. 눈은 세상을 덮어 재우는데 불티는 세상을 깨워 태운다는 것이, 같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들의 다른 성미였다. 운설은 그 붉은 눈발을 헤치고 사람부터 찾았다.마당 한가운데에 남궁완이 있었다. 그을린 낯으로, 물에 적신 장옷을 뒤집어쓴 채, 두 팔로 무언가를 품고 주저앉아 있었다. 선우현이 그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의 소매와 등에도 불이 지나간 자국이 있었다."열여섯 장은 못 꺼냈어요." 남궁완이 운설을 보고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목소리가 연기에 갈라져 있었다. "초고만. 대월이라 적힌 것만." 품 안의 첩이 물에 젖은 채 온전했다. 십 년을 품어 온 죄의 종이를 불 속에서 몸으로 꺼내 온 사람은, 제가 데인 자리가 어딘지도 모르는 낯이었다."수장고 바닥에서 이게 나왔습니다." 가병 하나가 검게 탄 쇠붙이를 내밀었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통. 표식이 있어야 할 자리가 민짜인, 화뢰의 몸통이었다. 협곡의 눈사태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이름을 지운 불.민짜 화뢰. 협곡에서, 이제 여기에서. 궁의 창고에서 새어 나가 이름을 지운 불이 세 번째로 낯을 내민 것이다. 종이를 태우러 온 불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어야 했다. 종이는 핑계고, 불은 사람들을 마당으로 끌어내는 몰이라는 것을.그때 운설의 등 뒤에서 한겸이 소리쳤다."공자! 지붕—"무너지는 지붕을 소리로 알리는 외침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젊은 감찰의 몸이 그 말과 함께 날았다. 내려앉는 서까래의 연기 그늘에서, 검은 것이 곧장 선우현의 등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칼이었다. 불 끄는 소란에 낯을 묻힌, 이름 없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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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달빛

초이레 달이 반을 채우고 떠 있었다.불탄 수장고의 뼈대 위로 그 달빛이 내려, 재와 그을음을 은회색으로 씻어 놓았다. 낮 동안 별저는 분주했다. 남궁완은 본가로 파발을 세 번 띄웠고, 간수문의 서리가 두 번 다녀갔고, 한겸은 어깨를 동인 채로도 명부와 문서를 오가며 세 집 사이의 다리 노릇을 했다. 세가의 명분과 집법당의 법과 붉은 달의 원한이 한 장부에 적히는, 어제까지는 없던 판이 짜이고 있었다.저녁상 곁에서 남궁완이 판의 그림을 마저 그렸다. 세가의 사병이 별저 둘레에 늘고, 집법당의 눈이 물길목마다 앉고, 보름밤에는 그 모두가 한 그물이 된다. "거두러 오라죠. 그물 한가운데로." 부채 끝이 상을 가볍게 짚었다. 그 말이 미더우면서도, 운설은 협곡과 물마당과 빈 볼모 집을 차례로 떠올렸다. 저들의 그물은 번번이 대월의 걸음보다 반 박자 늦었다. 이번 그물이 다르려면, 반 박자를 어디서 벌어 와야 하는가 — 답은 아직 아무에게도 없었다.밤이 되어서야 별저는 숨을 죽였다.운설은 불탄 후원을 혼자 걷다가, 뼈대만 남은 수장고 그늘에서 그를 만났다. 우연이라기에는 두 사람 다 잠들지 못한 밤이 잦았다."어깨는 좀 어떻답니까." 그가 물었다. 물어 놓고, 제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낯을 했다. "감찰 말이오.""사흘은 침을 맞아야 합니다. 오늘도 두 대 놓았고요.""두 대라." 그는 달을 한 번 보고, 재 위에 눈을 두었다. "앞으로 몇 대나 더 남았소."운설은 그 물음의 결을 알아듣고 걸음을 멈췄다. 침의 셈을 묻는 목소리라기에는, 세상에서 제일 옹졸한 셈을 하다가 들킨 사람의 것에 가까웠다. 달빛에 비친 그의 귀가 붉었다."방금 그 말은," 그가 먼저 항복했다. "잊어 주시오. 칼을 대신 받은 사람에게 할 셈이 아니오. 한데 그대의 손이 그자의 어깨에 얹히는 걸 볼 때마다 — 속에서 좁쌀만 한 것이 자꾸 일어서서.""좁쌀이요.""좁쌀이오. 검신 체면에 콩알이라고는 못 하겠고."운설은 웃음이 터졌다. 불탄 마당에서, 통첩의 달 아래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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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아비의 몫

무두장이 폐가의 마당은 밤새 등을 켜 두고 있었다.운백천의 잠자리는 개켜져 있었다. 책은 보자기에 싼 그대로 머리맡에 반듯이 놓였고, 그 위에 눌러 둔 것은 돌멩이 하나뿐이었다. 서신도, 유언 같은 것도 없었다. 떠나는 사람이 남긴 것이라고는 반듯함뿐이었다. 평생 셈이 빠르던 사람이 셈을 다 마치고 나간 자리의 반듯함."어젯밤 삼경에 뒷문 빗장이 열렸다." 혈비가 말했다. "지키던 아이는 우물가에서 잠들어 있었고. 잠든 것을 나무랄 수가 없는 게, 차에 수면 든 흔적이 있었다. 제 딸이 쓰는 법을, 아비가 옆에서 봐 뒀던 게지."곁의 선우현이 잠자코 그녀의 소매 끝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남들 눈에 안 보일 만큼, 그녀에게만 닿을 만큼. 화내는 것도 우는 것도 아직 이르다는 말을, 이 사람은 손으로 할 줄 알았다.수면산. 잿골 폐사에서, 물문 장터에서 그녀가 쫓는 자들에게 쓰던 수. 운설은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났다. 화가 나는데 그 화의 절반이 저를 향했다. 보름 통첩을 아버지도 들었다. 딸이 미끼가 되는 판을 듣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딸이 제일 잘 알았어야 했다."제 몫이라니요." 운설은 혈비에게 물었다. "언니는 아십니까. 십팔 년 전 약조에서 아버지가 맡은 몫이 무엇인지.""간수문이 법을 맡았다면," 혈비의 눈은 어두웠다. "남는 것은 하나지. 낯.""낯이라니요.""명을 내린 손의 낯을 아는 것." 혈비가 말했다. "나는 십팔 년을 찾아도 대월의 낯을 몰라. 간수문도 서신과 획밖에 모르지. 한데 네 아비는 — 그 밤 수괴의 처소에 들었던 사람이다. 열두 줄의 십일 줄. 처소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무언가를 본 것만은 분명하지. 대월이 십팔 년 동안 네 아비를 못 죽이고 옥에 두고 보기만 한 까닭도, 거기 있을 게다.""그래서 증인의 칸이었군요." 운설은 다실의 문서를 떠올렸다. 간수문이 아버지의 이름을 옮겨 앉힌 칸. 죄인은 지키면 되지만 증인은 살려야 한다. 늙은 당주는 처음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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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뱃전

배는 이틀째 물을 거슬렀다.노새가 구한 빠른 삯배에 혈비와 사백, 우르와 기수 여섯, 그리고 운설과 선우현이 탔다. 서른 기의 나머지는 책과 함께 뭍길로 뒤따랐다. 남궁완은 무한에 남았다. 세가와 집법당을 묶는 매듭이 저라며, 떠나는 가마 앞에서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한마디를 얹었다. "객경만 빌려 가는 거예요. 꼭 돌려주세요." 그 말이 농인지 셈인지 가시인지, 운설은 배에 오르고도 한참을 골랐다.한겸은 나루까지 따라 나왔었다. 동인 어깨로 서툰 절을 올리며, 그는 봉서 하나를 내밀었다. 당주 어른의 것이었다. 두 줄. 북에서 법이 필요하거든 이 종이를 꺼내라. 종이가 법이 되는 땅까지만.낮 동안 배 안의 말수는 적었다. 혈비는 뱃머리에 앉아 상류만 보았다. 십팔 년 만의 귀로가, 쫓겨 돌아가는 길이 되어 있었다. 제 궁 안에 대월의 손이 있다는 것을 이제 언니도 셈에 넣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셈이 언니의 등을 어제보다 좁아 보이게 했다. 운설은 몇 번 곁에 앉으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의 언니 곁에는 말보다 과녁이 필요해 보였다.물이 차가워질수록 밤은 맑아졌다. 열하루 달이 강 위에 길게 부서졌다.밤 당번을 바꾸고도 운설은 뱃전에 남아 있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겨울 궁의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온천의 유황내와 눈 냄새와, 여리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 그 냄새의 끝에 아버지가 있고, 케테가 있고, 낯 모르는 대월이 있었다."주무시오." 등 뒤에서 그가 말했다.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걸치며. "내일부터는 물살이 세오.""당신은요.""나는 —" 그는 그녀 곁 뱃전에 나란히 팔을 얹었다. "그대가 물을 보고 있으면 못 자오. 버릇이 됐소.""물마당 때문입니까.""그 전부터요." 그는 달 부서지는 강을 보며 말했다. 고백이라기에는 담담하고, 담담하다기에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대가 물가에 설 때마다 내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아시오. 물이 그대를 몰라보게 해 달라고 비오. 그대를 아는 것들이 자꾸 그대를 데려가려 하니 — 강도, 눈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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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보름달

보름달은 물에서 먼저 떴다. 물비늘이 은빛으로 뒤집힐 무렵, 삯배는 얼음강 어귀의 마지막 물목에 들어섰다.물이 좁고 벼랑이 높은 길. 사백은 초저녁부터 활을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거두러 오겠다던 달이 벼랑 위로 차올랐다.습격은 달이 중천에 걸리기 전에 왔다.첫 신호는 소리의 죽음이었다. 물목에 밤새 울던 소쩍새가 뚝 그쳤다. 사백의 활이 그 침묵을 향해 먼저 돌아갔고 — 다음 순간 벼랑 그늘에서 검은 배 셋이 미끄러져 나와 앞뒤 물목을 잘랐다."엎드려라!"쇠뇌의 일제사가 달빛을 가르며 왔다. 우르가 걷어찬 뱃짐이 절반을 받아 냈고, 나머지가 돛폭을 뚫고 물에 꽂혔다.기수 하나가 어깨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첫 합에 벌써 값이 나갔다."그릇만 산 채로!" 벼랑 위에서 사수의 외침이 떨어졌다. "나머지는 물에 재워라!"사백이 벼랑을 향해 살을 얹었다. 아우의 활은 벼랑 위, 달을 등진 자리 — 이쪽에서는 눈이 부시고 저쪽에서는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자리부터 진 싸움. 사냥꾼은 그래서 쏘지 않았다.시위를 반만 당긴 채 어둠에 귀를 열고, 아우의 손가락이 시위를 놓는 그 소리 하나를 기다렸다. 퉁 — 소리보다 먼저 몸을 접으며 사백의 살이 마주 날았고, 두 대의 살이 허공 어딘가에서 서로를 스쳐 지났다.벼랑 위에서 짧은 혀 차는 소리. 뱃전 돛대에 아우의 살이 박혔다.언니의 살은 벼랑의 어둠에 삼켜졌다. 한 살씩 주고받은 값으로, 사백의 살통에는 이제 여섯 대가 남았다.갈고리 넷이 한꺼번에 뱃전을 물었다. 낯 검은 자들이 줄을 타고 올랐다.좁은 삯배 위에서 수가 벌어질 자리는 세 걸음이 못 되었다. 선우현은 그 세 걸음의 한가운데, 운설의 반 보 앞에 섰다.검은 아직 검집 속이었다. 첫 자가 그 여유를 허점으로 읽고 칼을 세워 짓쳐들었다 — 읽은 대로 죽는 것이 허점의 무서움이었다.검집째 반보 마중 나간 검이, 뽑히는 결에 칼과 손목을 함께 지나갔다. 칼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와 사람이 무릎 꿇는 소리가 거의 같이 났다.둘째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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