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01 - Chapter 110

275 Chapters

제101화 — 검은바위산

설한협의 눈시렁은 반쯤 녹아 있었다.겨울에 그들을 묻으려던 눈이 이제는 벼랑의 이끼 위로 가는 물줄기가 되어 흘렀다. 배를 버리고 협곡 길로 들어선 일행은 말없이 그 물소리를 들으며 올랐다.지난겨울 이 벼랑 밑에서 세상이 무너졌고, 눈굴 속에서 이름을 나눴고, 그 눈이 녹은 물이 지금 발치를 적시고 있었다. 운설은 한 번 걸음을 멈추고 벼랑을 올려다보았다.곁의 그가 같은 자리를 보는 중이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손이 먼저 서로를 찾아 잠깐 쥐었다 놓았다.협곡을 벗어난 첫 야영에서 더운돌 영감 이야기가 나왔다. 온천지기가 봄부터 무릎이 아파 절뚝인다고, 궁을 나올 때 여리가 편지에 적어 보냈다는 것이다. "물은 거짓말 안 한다던 양반이 제 무릎한테는 지는군." 우르가 낄낄대다가, 문득 조용해졌다. 다들 같은 셈을 하고 있었다. 궁의 낯익은 얼굴들 가운데 하나가 대월의 손이라는 셈. 낯익은 얼굴들이 그리움 대신 목록이 되어 가는 것 — 그것이 이 귀로에서 제일 쓴 대목이었다.검은바위산 남기슭에 궁의 지붕들이 보인 것은 이틀째 해 질 녘이었다.문루의 파수가 먼저 알아보고 뿔피리를 불었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안에서 작은 것이 튀어나와 비탈을 굴러 내려왔다.여리였다. 왼 새끼손가락 없는 손으로 운설의 소매를 붙들고, 아이는 울다가 웃다가 중원말과 북방말을 반씩 섞어 재잘댔다. 언니, 언니, 물의 도시에서 물을 세웠다면서요, 온 궁이 그 얘기뿐이었어요, 그리고 저 머리 좀 봐요, 땋을 사람이 없어서 겨우내 —"돌아왔구나." 문루 아래에서 흑요 노파가 말했다. 왼귀가 어두워 고개를 오른쪽으로 튼 채, 노파는 혈비에게 허리를 굽혔다. 굽힌 등이 이내 펴지며 낯이 굳었다. "한데 마님. 궁이 편치 않습니다."저녁상은 타간이 차렸다. 국은 여전히 맛이 없었고, 여전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운설이 두 그릇을 비우자 곰보 주방장은 "간이 좀 셌나" 하며 온 얼굴로 웃었다. 그 웃는 낯을 보며 운설은 제가 방금 이 사람의 이름을 목록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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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 넷째 이름

궁의 열쇠는 넷이 쥐고 있었다.대전과 새장의 열쇠는 흑요가, 창고 일체는 마르간이, 주방과 움은 타간이, 그리고 산신당과 무덤 벌판의 곳간은 부수 노인이 맡았다. 지난겨울 전서구가 번져 넷째 이름을 지웠던 그 목록이, 이제 마당의 탁자 위에 다시 펼쳐졌다."같은 덫은 두 번 안 걸린다." 사백이 말했다. 거짓 길로 케테를 몰던 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번 놈은 손끝이 아니라 손이다. 열쇠를 쥐고, 획을 쓰고, 십팔 년을 숨은 손. 미끼를 무는 급이 아니지.""그럼 어찌 가리지." 혈비가 물었다."의원이 가립니다." 사백의 눈이 운설에게 왔다. "몸은 거짓말을 못 한다며. 넷 다 늙었고, 늙은 몸에는 세월이 적혀 있다. 십팔 년 전 그 밤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 몸에 남은 것이 있으면, 네 눈이 읽겠지."그리하여 운설은 진맥을 돌았다. 명분은 봄철 문안이었다. 흑요의 손목은 마디가 굵고 맥이 곧았다. 왼귀의 어두움은 오래된 것으로, 화뢰 터지는 소리를 가까이서 들은 귀라 했다. 그 밤에요, 하고 물으니 노파는 코웃음을 쳤다. "그 밤에 안 다친 사람이 이 궁에 있을 성싶으냐." 마르간은 이불 속에서 손목만 내밀었다. 맥이 어지럽고 손끝이 차가웠다. 겁의 맥이었다. 스물여섯, 스물다섯, 하고 앓는 소리 사이에 창고지기가 속삭였다. "기름이 나간 게 아니오. 들어온 적이 없는 게요. 장부에는 들어왔다 적혔는데." 들이지 않고 들어왔다 적을 수 있는 손은 장부를 쥔 저뿐이라, 그래서 앓는다고 했다. 제 손이 제 모르는 새 무엇을 적는지 모르겠다고.장부가 조작되었다면, 조작한 손은 마르간의 글씨를 아는 자였다.타간의 맥은 소처럼 굵고 태평했고, 곰보 자국 사이로 근심이라고는 국 간뿐이었다. 부수 노인은 산신당 마루에서 순순히 손목을 내주며 물었다. "향내 말이냐. 늙은이가 잘못 맡았을 수도 있지. 한데 벌판의 향은 — 익은 향이었다. 서투르게 피운 게 아니라, 평생 피워 본 손이 피운 향."진맥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운설은 온천 마당에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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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 다섯째 열쇠

입에 올릴 수 없는 이름은, 올리지 않으면 안에서 곪는다.운설은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언니의 처소로 갔다. 혈비는 자지 않고 있었다. 등잔 곁에 어머니의 패를 놓아두고, 그 곁에 제 패를 나란히 놓고, 초승달 두 개를 오래 보고 있던 낯이었다."다섯째 열쇠 말이냐." 운설이 입을 떼기도 전에 언니가 말했다. "나도 같은 셈을 했다. 이 궁에서 열쇠 없이 다니는 것은 나와, 너와, 그리고 —""묵할멈."실어의 노파. 어머니 시절부터 궁에 있었고, 등잔을 꼭 두 개 켜고, 말 대신 손짓으로 온 궁을 다니는 사람.시중드는 자는 어느 문에서도 막히지 않는다. 열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열쇠가 필요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한데 묵할멈은 글을 모른다." 혈비가 말했다. "수결의 획은커녕 제 이름자도. 어머니가 손짓말을 지어 주신 것도 그래서다.""글을 모르는 손과, 획을 쓰는 손이 같은 손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운설은 제가 하는 말이 저도 싫었다. "안의 눈과 밖의 손. 케테가 그랬듯이요."말해 놓고 운설은 제 혀가 미웠다. 묵할멈은 그녀가 궁에서 처음 배운 손짓말의 임자였다.밥은, 하고 물으면 두 손을 모아 새 모이 주듯 벌리던 손. 어머니의 버릇 하나를 손끝으로 물려주던 손.그 손을 지금 목록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대월의 독은 이렇게 도는 것이었다. 칼도 불도 없이, 사람이 사람을 세게 만드는 것으로.혈비는 오래 말이 없었다. 등잔 두 개 켜는 버릇을 지어 준 것이 누구인지, 그 어둠 무서워하는 노파가 그 밤에 무엇을 보았는지 — 언니의 침묵이 그런 것들을 지나가는 동안, 운설은 문득 제 말이 놓친 자리를 보았다."언니. 등잔이요.""등잔이 왜.""묵할멈은 어둠이 무서워 등잔을 두 개 켭니다. 한데 흑요 님이 그랬지요. 전서구는 밤에만 난다고. 새벽마다 궁을 도는 게 묵할멈입니다. 등잔 둘을 들고요. 만일 그 등잔이 —" 운설은 무한의 물마당을 떠올렸다. 다릿기둥의 붉은 실. 사냥꾼들이 서로만 알아보는 표. "신호라면요. 밖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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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 스물일곱

무덤 벌판의 아침은 바람부터 낮았다.새벽의 등잔 신호를 두고 밤새 판을 짜던 사람들이, 해가 뜨자마자 벌판으로 올라온 길이었다. 등잔의 답은 기다리면 오지만, 무덤의 답은 파야 나온다고 혈비가 순서를 정했다.스물여섯 개의 봉분이 산기슭을 따라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그 줄의 맨 끝에, 흙빛이 다른 봉분 하나가 새로 앉아 있었다. 서둘러 쌓은 무덤이 아니었다. 반듯하게 다지고, 잔돌을 골라내고, 머리맡에 넓적한 돌 하나까지 놓은 무덤이었다."파겠습니다."부수 노인이 삽을 잡으려는 것을 운설이 막았다."제가 합니다. 안에 누운 이가 누구든 — 몸을 보는 건 의녀의 일입니다."흙은 아직 부드러웠다. 삽날은 금세 무엇엔가 닿았다.거적에 정성껏 말린 몸이 나왔다. 거적을 걷은 운설의 손이, 낯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멎었다.케테였다.곁에서 우르가 소리를 냈다. 말이 되다 만 소리였다. 허풍쟁이는 제 소매로 낯을 한 번 거칠게 훔치더니, 무덤가에 주저앉아 죽은 동료의 흙 묻은 낯을 제 소매로 마저 닦아 주었다."이 멍청아."지난겨울 정자에서 하던 그 말을, 우르는 꼭 그 말투로 다시 했다."말을 하지. 진작에 말을 하지, 이 멍청아."운설은 몸을 보았다. 의녀의 눈은 울음보다 먼저 일을 했다.죽은 지 사나흘. 사인은 등 뒤에서 든 한 칼. 깊고, 정확하고, 한 번뿐. 손목에도 발목에도 묶인 자국이 없었다. 도망치다 잡힌 몸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등을 내준 것이다. 아는 자에게. 경계하지 않는 거리까지 들인 자에게.그리고 목에는, 가는 것이 한 번 감겼다 풀린 붉은 자국. 실이었다. 핏빛 실."대월의 손이 지웠구나."혈비가 낮게 말했다. 언니의 눈이 스물여섯 개의 봉분을 천천히 훑고 새 봉분으로 돌아왔다."쓸모가 끝나서 지웠거나 — 쓸모 밖의 짓을 해서 지웠거나.""묻은 손은 따로 있습니다."운설이 말했다. 무덤의 반듯함, 골라낸 잔돌, 머리맡의 돌. 그리고 사흘 전 새벽의 향내. 익은 향. 평생 피워 본 손."아버지가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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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 우는 법

서신은 그날 저녁 마당의 탁자 위에서 모두에게 읽혔다.대월은 네가 아는 얼굴이다.그 한 줄이 읽히고 난 뒤의 침묵을, 운설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마당에 둘러선 낯들이 서로를 안 보려고 애를 쓰는 침묵. 안 보려는 애가 곧 보는 것이 되고 마는 침묵.혈비만이 서신을 두 번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에게 그 한 줄은 새 소식이 아닐지도 몰랐다. 십팔 년을 얼굴 없는 배신자를 쫓아온 사람에게, 그 얼굴이 아는 낯이리라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품어 온 독이었을 것이다. 다만 아우 앞에서 그 독을 꺼내 보이지 않을 뿐.흑요는 그 밤으로 궁의 야순(夜巡)을 배로 늘렸다. 사백은 해 지기 전에 산신당 뒤 능선으로 올라갔다. 등잔의 새가 날거든 향방을 밟겠다는 것이다.운설은 제 처소로 돌아와 등잔을 켰다. 하나만.앉자마자 할 일이 없어졌다. 하루 종일 손은 바빴다. 무덤을 파고, 몸을 보고, 염을 하고, 서신을 읽고, 판을 듣고. 손이 바쁜 동안 미뤄 둔 것들이, 등잔 하나 켠 방의 고요 속으로 한꺼번에 돌아왔다.벽에 기대앉아 운설은 아는 얼굴들을 하나씩 넘겨 보았다. 넘기다가 그만두고, 그만두었다가 도로 넘겼다. 아버지는 어째서 이름을 안 적었을까. 적으면 딸이 믿지 않을 이름이라서? 적는 순간 서신이 칼이 되는 이름이라서?어느 쪽이든 답은 같은 자리를 가리켰다. 가까운 곳. 아주 가까운 곳.문이 낮게 두 번 울렸다.그는 소반을 들고 있었다. 김이 오르는 국 한 그릇과 밥 한 덩이."저녁을 안 들었다기에.""입맛이 없습니다.""아오. 그래도 몸이 먼저요. 의원이 늘 하는 말 아니오."그가 소반을 내려놓고 물러앉았다. 먹으라는 재촉도 없이, 그저 국이 식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앉아 있었다. 운설은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국은 맛이 없었다.주방을 빌려 제 손으로 끓였는지, 간이 어중간하고 건더기는 설익어 있었다. 타간의 국하고 똑같네요, 하고 웃으려던 말이 목에서 걸렸다.타간의 국. 아무도 맛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국. 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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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 손님들

남궁가의 깃발은 궁문 앞에서 멎었다.흑요 노파가 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지팡이도 없이, 왼귀 어두운 고개를 오른쪽으로 튼 채."아홉째 줄."노파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는데 고갯길까지 갔다."남궁가의 창이 북문을 막았다. 그 북문이 이 문이다. 그날 밤 이 문에서 스물을 잃었다. 그 깃발은 — 이 문을 못 넘는다."행렬이 침묵했다. 말 탄 가병들의 손이 창대를 쥐었다 놓았다 했다.가마의 문이 열렸다.남궁완은 혼자 내렸다. 눈길을 걸어 깃대 앞으로 가더니, 제 손으로 깃줄을 풀어 남궁가의 기를 내렸다. 개켜서, 두 팔에 받쳐 들고, 노파 앞으로 걸어왔다."창이 진 빚을 아는 집안이라 깃발을 두고 들어가요."여인은 개킨 기를 흑요에게 내밀었다."맡아 두세요. 빚을 문서로 갚는 날 — 그날 돌려받으러 오죠."흑요는 오래 그 기를 보았다. 받지도 물리치지도 않는 침묵이 길었다. 이윽고 노파는 몸을 반 돌려 문을 열어 주었다. 기는 받지 않았다."빚 갚는 걸 보고 나서."그것이 삭월의 궁이 중원의 세가에게 연 문이었다.운설은 문루 아래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곁의 선우현이 낮게 말했다."저 사람은 평생 저렇게 살았소. 격을 무기로도 쓰고, 갑옷으로도 쓰고.""방패로도요."운설이 받았다. 깃발을 제 손으로 내리는 데 얼마만 한 것이 드는지, 가문이 정해 준 판 위에서만 살아온 사람에게 그것이 어떤 걸음인지 — 진맥을 해 본 손은 알았다. 미워하기로 한 사람의 걸음이 아까워 보이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불편한 채로 두기로 했다. 그것도 사는 법이었다.한겸은 걸어서 고개를 넘어온 낯이었다. 흰 관복에 흙이 묻고, 어깨의 동임은 아직 풀지 못한 채였다. 그는 궁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봉서를 꺼내 두 손으로 들어 보였다."집법당의 한겸입니다. 당주 어른의 명으로 — 종이가 법이 되는 땅까지, 왔습니다."법이 없는 땅에 종이 한 장 들고 선 감찰을, 궁 사람들은 신기한 짐승 보듯 구경했다. 우르가 노새에게 소곤대는 소리가 다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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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 절하는 법

등잔 셋의 뜻은 밤새 아무도 풀지 못했다.하나면 무사. 둘이면 전할 것이 있다. 그렇게까지는 읽어 두었는데, 셋은 문법 밖이었다. 혈비는 골방을 건드리지 말라는 영을 다시 내렸다. 묵할멈은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등잔 둘을 들고 궁을 돌았고, 물을 긷고, 손짓으로 여리를 나무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낯인지, 모든 것을 아는 낯인지 — 실어의 낯은 읽히지 않았다."셋이 문법 밖이면," 아침상에서 남궁완이 말했다. "문법을 아는 자한테 물어야죠. 신호를 정한 건 대월 쪽이에요. 받는 새장을 찾으면 문법책이 나와요.""새장은 사백이 밟고 있어요." 운설이 답했다."그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종이나 읽죠." 여인의 눈이 한겸 쪽으로 갔다. "감찰. 그 명부, 내가 좀 봐도 될까요. 세가의 서고에서 자란 눈이 쓸모 있을 때가 있어요."산신당 뒤 능선에서는 사백이 이틀째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한낮에 운설은 뜻밖의 것을 보았다.무덤 벌판에 남궁완이 올라가 있었다. 시비도 가마도 없이 혼자. 여인은 스물여섯 개의 봉분 앞을 하나하나 지나며, 봉분마다 멈춰 서서 허리를 굽혔다. 세가의 절이 아니었다. 무릎을 눈 녹은 흙에 꿇고, 두 손을 짚고, 이마가 흙에 닿는 절이었다.스물여섯 번.그리고 맨 끝의 새 봉분, 케테의 무덤 앞에서 여인은 오래 일어나지 않았다.벌판 어귀의 산신당 마루에서 부수 노인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설이 다가가 곁에 앉아도 노인은 눈을 떼지 않았다."중원 것들이 여길 올라온 게 십팔 년 만이다."노인이 말했다."하나는 향을 피우고 갔고, 하나는 저리 절을 하는군. 죄지은 것들의 자식이 죄를 아는 낯으로 오는 데 열여덟 해가 걸렸어.""늦었습니까.""늦었지." 노인은 담뱃대를 물었다. "한데 벌판의 것들은 시간이 많아. 늦게 온 절도 절은 절이지."벌판을 내려가는 여인의 등을 노인은 오래 배웅했다. 담뱃대의 연기가 스물일곱 봉분 위로 낮게 흘렀다.내려오는 길에 남궁완과 마주쳤다. 여인의 무릎과 이마에 흙이 묻어 있었다. 운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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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 달 월(月)

판독은 사흘째 계속되었다.명부의 뒷면을 등잔에 비스듬히 대고, 배어든 먹의 유령을 한 획씩 종이에 옮기는 일이었다. 눈이 아픈 일이라 세 사람이 번을 갈랐다. 한겸이 얼룩을 찾고, 운설이 종이의 결과 먹의 깊이를 읽고, 선우현이 획의 족보를 짚었다."여기."사흘째 밤에 선우현의 손끝이 멎었다."긁힌 줄의 끝 글자요. 왼쪽은 다 부서졌는데 — 오른쪽 획이 남았소. 삐침 하나에 안이 두 획."세 사람은 옮겨 그린 조각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부서진 왼쪽이 무엇이든, 오른쪽의 그것은 하나로밖에 읽히지 않았다.달 월(月)."이름 끝에 달이 든 자."한겸이 낮게 말했다."대월(待月)이라는 별호가 — 스스로 지었다는 그 별호가, 제 이름자를 품고 있었던 겁니다."제 이름을 명부에서 긁어낸 자가, 제 이름의 글자를 별호에 남겨 두었다. 지우면서 남기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운설은 짚어지지 않았다. 오만인가. 그리움인가. 아니면 — 찾아낼 테면 찾아 보라는 놀이인가.혈비는 그 조각을 듣고 오래 말이 없었다."달이 든 이름이라." 언니의 손끝이 탁자를 한 번 짚었다 떨어졌다. "삭월에서 달 든 이름은 발에 채인다. 나부터가 그렇지."혈비(血緋)에는 달이 없었으나, 그것이 본명이 아니라는 것은 이 방의 모두가 알았다. 붉은 달의 주인이 제 본명을 입에 올리지 않은 지 십팔 년이었다. 언니는 그 말을 더 잇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목록의 독이 어디까지 스며들 수 있는지, 그 침묵이 보여 주었다.이름에 달이 든 자를 궁의 장부에서 추리는 일은 흑요가 맡았다. 삭월의 이름에는 달이 흔했다. 달의 부족이었으니까. 그래서 목록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었고, 목록의 독은 그만큼 깊어졌다.낮의 궁은 그래도 살아 돌아갔다.연지와 여리는 온천 빨래터를 접수했다. 사시 낀 눈의 시비가 중원의 빨래 방망이질을 가르치고, 손가락 없는 소녀가 북방의 얼레빗질을 가르쳤다. 웃음소리가 유황 김에 섞여 오르는 것을 들으며, 더운돌 영감은 "물은 거짓말 안 혀" 하고 흐뭇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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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 반지 (남궁완)

남궁완은 밤마다 같은 자리에서 잤다. 잠들지 못하는 자리라는 뜻이다.삭월의 궁은 남궁가의 별저와 모든 것이 달랐다. 벽이 얇아 바람 소리가 방 안까지 들었고, 시비는 연지 하나뿐이었고, 아침이면 물이 손을 벨 듯 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면은 무한에서보다 얕았다. 계절을 넘긴 그 불면이.까닭을 그녀는 알았다. 알아서 더 우스웠다.이 궁에는 감출 것이 없었다. 가문의 낯도, 세가의 격도, 문갑 속의 반지도 — 여기서는 아무 값이 없었다. 깃발을 제 손으로 내린 날부터 그녀는 빚진 집 자식 하나였고, 빚진 자식의 잠은 영애의 잠보다 깊었다.반지는 품에 있었다.무한을 떠나며 문갑에서 꺼내 왔다. 왜 꺼냈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셈이 서지 않았다. 셈이 서지 않는 짓을 한 것이 살면서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열다섯에 태우라는 서신을 감춘 것. 두 번째는 깃발을 내린 것. 세 번째가 이 반지였다.아침에는 벌판에 오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스물일곱 배는 첫날 하루로 끝냈으나, 오르는 것은 그치지 않았다. 절 대신 요즘은 봉분의 잔돌을 골랐다. 부수 노인은 사흘째부터 곁에 삽을 세워 두기 시작했다. 쓰라는 말은 없었다. 세워 두었을 뿐이다. 세가에서 나고 자란 눈은 그런 문서도 읽을 줄 알았다. 삽 한 자루짜리 문서.연지가 여리와 몰려다니느라 시중이 뜸해진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중이 없는 하루는 처음이라, 제 손으로 머리를 빗다가 그녀는 거울 속 저를 낯설게 보았다. 낯선 것이 싫지 않은 것이 더 낯설었다.낮에 그녀는 두 사람을 보았다.명부 판독이 끝난 마당에서였다. 검신이 의원의 손에 붙은 먹을 보고 무어라 했고, 의원이 웃으며 그 손으로 검신의 소매에 먹 자국을 문질렀다. 아이들 장난 같은 짓이었다. 오 년 전의 그 사람은 — 우전만 마시고, 검보를 외우고, 예를 반 치도 어기지 않던 그 사람은 — 소매에 먹이 묻는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지금 그는 먹 묻은 소매를 그대로 두고 웃고 있었다.질투는 이상한 자리에서 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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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 두레박

등잔 셋의 답은 사흘 뒤 새벽에 왔다.그 사흘 동안 궁은 겉으로 여느 날과 같았다. 아이들은 한겸의 흙바닥 글방에 모였고, 남궁완은 벌판의 잔돌을 골랐고, 명부의 유령 획은 달 월 한 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여느 날 같은 사흘이 여느 날 같지 않다는 것은, 밤마다 지붕에 오르는 사냥꾼의 등만이 알았다.사백은 그동안 밤마다 후원 우물가가 내려다보이는 지붕에 엎드려 있었다. 묵할멈이 새벽 물을 긷는 우물. 궁의 모든 물길이 그러하듯, 그 우물가도 노파의 하루가 지나가는 자리였다.새벽 어스름에 노파가 두레박을 내렸다.올라온 두레박에는 물만 있지 않았다.기름 먹인 가죽에 싼 작은 꾸러미가 물에 젖은 채 얹혀 있었다. 노파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젖은 꾸러미를 앞치마에 감추고, 물동이를 이고, 노파는 여느 새벽처럼 걸어갔다."우물 속에 줄이 있습니다."사백이 아침에 보고했다."두레박 길 옆으로 가는 줄 하나가 벽을 타고 내려가 있어요. 물 밑 어딘가에 함이 있고, 밖의 손이 밤에 물길로 넣고 가는 겁니다. 궁의 우물이 저들의 문서함이었습니다."더운돌 영감이 불려 와 물길 그림을 그렸다. 궁의 우물과 온천과 배수가 어디서 갈라지고 어디서 만나는지, 쉰 해 물지기의 손은 지도장이보다 정확했다. 그리다 말고 영감은 붓을 놓고 한참 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이 물길을 아는 놈이면," 영감이 말했다. 늘 웃던 낯에서 웃음이 걷혀 있었다. "궁 물을 먹고 자란 놈이여. 물은 거짓말 안 혀. 한데 물길은 — 물길은 아는 놈만 쓰는 거짓말이지."궁 안으로 드는 물길은 온천에서 갈라져 나온 암거(暗渠)였다. 사람은 못 지나도 팔뚝만 한 꾸러미는 지나가는 길. 십팔 년 동안 아무도 셈에 넣지 않은 길이었다."꾸러미는.""두었습니다. 건드리면 판이 접히니." 사냥꾼은 거기서 잠깐 멈췄다. "다만 — 한 번 열어 보고 도로 쌌습니다. 안에 든 것이, 글이 아닙니다."탁자에 사백이 옮겨 그려 온 것이 펼쳐졌다.그림이었다.붓으로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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