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81 - Chapter 90

270 Chapters

81. 단(壇)

밤새 그에게서는 아무 전갈이 없었다.흰 등롱을 따라 골목을 사라지던 등이 마지막이었다. 운설은 새벽까지 폐가의 문소리에 귀를 세웠고, 문은 끝내 그의 소식으로 열리지 않았다. 동트기 전에 노새가 저자로 나갔다가 돌아와 전한 말이 전부였다. 검신은 새벽에 숙소로 돌아왔고, 아침에는 여느 날처럼 의관을 갖추고 나섰다고. 늙은 당주와 밤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숙소의 담도 저자의 귀도 알지 못한다고.멀쩡하다는 말이 도리어 걸렸다. 밤새 불려 갔다 온 사람이 아무 일 없는 낯으로 아침을 맞는 경우는 둘뿐이었다. 정말 아무 일이 없었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했거나."운설." 혈비가 불렀다. "이리 와 앉아라."폐가의 안방에는 언니와 그녀 둘뿐이었다. 혈비는 마지막 패의 내용을 그 자리에서 일렀다. 길지 않았다. 판이 어그러지면 — 낭독이 막히거나, 그이가 무너지거나, 아버지의 목에 칼이 먼저 닿거든 — 운설이 인파를 가르고 단 아래로 걸어 나간다. 두건을 벗고, 제 낯으로, 제 이름으로."저들이 온 강호 앞에 약조를 걸었다. 재앙의 씨가 제 발로 단 아래 서면 아비는 단을 내려온다고." 혈비의 목소리는 판 위의 돌을 놓듯 고르게 나아갔다. "간수문이 그 말을 무를 수는 있다. 하나 만인 앞에서는 못 무른다. 늙은이의 힘은 법에서 나오니, 법의 낯을 만인 앞에서 제 손으로 찢지는 못해. 네가 나서는 순간 모든 눈이 너에게 쏠린다. 그 눈들이 아비의 목숨을 잡아 주는 동안 — 나머지는 내가 움직인다."미끼. 언니는 그 말을 쓰지 않았으나 운설은 알아들었다. 저들이 짜 놓은 효(孝)의 그물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되, 걸리는 순간을 이쪽이 고르는 것. 물가에 서지 말라던 사람이 골라 둔, 물에 젖지 않는 마지막 자리였다."무섭냐." 혈비가 물었다."무섭습니다." 운설은 숨기지 않았다. "한데 그 자리가 저 말고는 안 되는 자리라, 덜 무섭습니다."혈비는 그 답을 오래 보다가, 손을 뻗어 아우의 두건을 고쳐 씌워 주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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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열두 줄

봉인이 갈라지는 소리가 물 위까지 들렸다.십팔 년 묵은 밀랍이었다. 선우현은 함에서 책을 꺼내 들고, 단의 한가운데에 섰다. 부교의 차일 아래 앉은 구파일방의 거두들도, 강안의 수만 인파도, 물 위의 구경 배들도 일제히 조용해져서, 불은 봄물이 뱃전을 치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컸다."영웅첩 공훈록." 그가 읽기 시작했다. "십팔 년 전 동짓달 그믐, 삭월 토벌의 기(記)."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높지 않은 채로 물을 건너 퍼졌다. 열두 줄은 길지 않았다. 한 줄에 이름 하나와 공(功) 하나. 낭독은 향 한 대 탈 사이면 끝날 것이었고, 처음에 사람들은 옛 영웅담을 듣는 낯으로 목을 뺐다."일(一). 선우가의 검이 달을 베어 길을 열었다."제 집안의 줄을 그는 한 호흡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읽었다. 다만 책장을 쥔 왼손, 데인 흉이 있는 그 손목에 힘줄이 한 번 섰다가 가라앉는 것을, 강안의 운설 하나만 보았다.운설의 곁에서 혈비는 미동도 없이 단을 향해 있었다. 십팔 년을 기다린 낭독이었다. 언니의 낯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두건 아래로 나온 손만이 소매 끝을 아주 천천히 감아쥐었다. 저 열두 줄이 언니에게는 글이 아니었다. 한 줄 한 줄이 그 밤의 소리이고 냄새일 것이었다.줄이 이어질수록 인파의 낯이 달라져 갔다. 공훈록의 글은 영웅담의 글이 아니었다. 잠든 진채에 들었다. 물길을 얼려 퇴로를 끊었다. 봉화지기를 먼저 지웠다. 낭독하는 목소리가 담담할수록 글자들이 제 몸을 드러냈고, 술렁임이 물결처럼 인파를 훑었다. 곁의 떡장수가 옆 사람에게 묻는 소리가 운설의 귀에 들어왔다. 그 밤에 싸움이 있긴 했던 거요. 이건 그냥…… 옆 사람은 대답하지 못했다."사(四). 청하 운백천이 선봉에 섰다."운설은 숨을 멈췄다. 단 위의 죄인은 눈을 감지 않았다. 제 이름이 물 위로 퍼지는 동안 운백천은 낭독하는 젊은이를 똑바로 보았고, 그 낯에는 변명하려는 기색도 피하려는 기색도 없었다."칠(七). 운백천이 얼음여울의 물길을 열어 대군을 건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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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첫발

두 번째 화살은 사람을 노렸다.단 위의 죄인을. 그러나 살이 닿기 전에 다른 살이 허공에서 그것을 쳐 냈다. 곡루 지붕 위였다. 사백의 활이 물 건너에서 답한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화살이 서로를 찾아 엇갈리는 사이, 강안의 수만 인파가 마침내 제가 구경하던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비명이 물결처럼 번졌다. 인파가 일제히 물을 등지고 밀리기 시작했다. 넘어지는 자, 밟는 자, 아이를 치켜든 자. 불은 강은 도망칠 자리를 주지 않았고, 돌계단은 삽시간에 아우성으로 미어졌다.동편에서 우르의 배가 먼저 움직였다. 허풍쟁이의 활이 이번에는 허풍이 아니어서, 부교로 붙으려던 거룻배 하나가 사공을 잃고 물살에 밀려 돌았다. 곡루의 사백과 물 위의 우르가 활로 길을 트고 막는 사이, 인파에 흩어져 있던 기수들이 하나둘 물가 쪽으로 거슬러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서른 기의 판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물 위에서는 검은 배들이 나타났다. 구경 배들 틈에 섞여 있던 거룻배 예닐곱이 일제히 삿대를 박차고 부교를 향해 몰려들었다. 낯을 검게 칠한 자들이 뱃머리에 서 있었다. 진창의 밤에, 물마당의 밤에 본 그 이름 없는 손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책도 낭독자도 아니었다.포승에 묶인 죄인이었다."죄인을 지켜라!" 간수문의 외침이 물 위로 갈라졌다. 늙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았다. "흰 옷은 들으라! 단 위의 죄인에게 칼을 대는 자는 맹의 적이다!"운설은 그 외침의 뜻을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저들은 아버지를 지우러 왔다. 마지막 장의 수결이 끊긴 자리에서, 그 수결을 아는 산 입을 마저 끊으러. 죽여서 얻는 자와 살려서 얻는 자와 살리고 싶은 자들이 한 단을 향해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었다.차일 아래의 거두들은 갈라졌다. 검을 뽑아 단 쪽으로 달려가는 자가 있었고, 제자들을 감싸며 물러나는 자가 있었고, 이 난장이 누구의 것인지 재느라 칼자루만 쥔 채 굳은 자가 있었다. 십팔 년 전의 젊은 검들은 늙어서도 빨랐다. 다만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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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아버지

물은 발밑에서 내내 그녀를 따라왔다.첫 배에서 둘째 배로, 둘째에서 셋째로. 잇댄 뱃전이 물결에 어긋날 때마다 발밑의 검은 물이 틈으로 올려다보았고, 그때마다 안의 강이 마중을 나가려 들었다. 운설은 걸으면서 들었다. 겨울 궁의 밤마다 병자의 몸에서 물소리를 듣던 법으로, 제 안의 물소리를 들었다. 듣기만 하고 흘리지 않는 것. 마중 나가려는 것을 나무라지 않고, 다만 아직 아니라고 이르는 것. 한 발마다 그 일을 새로 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발밑에서는 불은 강이 나란히 그녀와 함께 걸었다.싸움이 그녀를 비켜 갔다.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다. 우연이 세 번 겹치자 까닭이 보였다. 낯 검은 자들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물을 세우는 계집. 물마당에서 배 두 척을 삼킨 그릇. 칼을 든 손들이 그녀 앞에서 반 박자씩 늦었고, 그 반 박자마다 곡루와 동편에서 살이 날아와 길을 마저 열었다. 두려움이 방패가 되는 것을 그녀는 물 위에서 처음 배웠다.부교의 마지막 이음에서 흰 무복 둘이 창을 엇질렀다가, 뒤에서 갈라진 늙은 외침에 물러났다. 간수문이었다. 단 곁에서, 늙은 당주는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난장의 한복판에서 그 눈만이 소란하지 않았다. 오너라. 그 눈이 말했다. 십팔 년을 기다린 것이 겨우 오는구나.걸음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도 발밑의 강이 순해졌다. 마중 나가려던 뒤척임이 잦아들고, 물소리가 낮아졌다. 까닭을 짚을 겨를은 없었으나 몸은 알았다. 단 어귀에 선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사람 곁에서는 강이 늘 순해졌다.단에 오르자 세상의 소리가 한 겹 멀어졌다.선우현이 단의 어귀를 막고 서 있었다. 화살 한 대는 어느새 빼앗은 검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발치에 낯 검은 자 셋이 포개져 있었다. 스치는 찰나에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그의 눈이 그녀의 발밑을 — 물 위를 딛고 온 그 발을 — 한 번 내려다보고 돌아왔다. 말은 없었다. 맹세를 품은 눈이 무겁게 흔들리다가, 길을 비켰다.간수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 곁의 제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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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표류

물살이 무대를 통째로 삼켜 갔다.단을 얹은 배 여남은 척은 밧줄이 끊긴 채 한 덩어리로 묶여, 커다란 뗏목이 되어 떠내려갔다. 불은 강이 그것을 물목 밖으로 밀어내며 낮게 으르렁댔고, 강안의 소란은 벌써 딴 세상의 소리처럼 멀었다. 그리고 낯 검은 거룻배 둘이, 헤엄치는 짐승처럼 그 뗏목의 옆구리에 바짝 붙었다.갈고리가 뱃전을 물었다."숙여."경어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온 말. 그 말과 함께 선우현의 팔이 운설의 허리를 감아 당겼고, 두 사람은 쓰러진 함거 뒤로 함께 굴렀다. 방금까지 그녀의 목이 있던 자리를 쇠뇌 살이 지나가 단의 기둥에 박혔다. 물보라에 젖은 그의 가슴이 등에 닿아 있었다. 심장 소리가 옷 두 겹을 건너왔다. 협곡의 눈사태 이래 두 번째로 듣는, 우레 같은 박동이었다. 정중하던 사람의 몸속에서 뛰는 것이 이렇게 사나운 것인 줄을, 운설은 함거 뒤의 반 뼘 어둠 속에서 새로 배웠다."두 번은," 그가 그녀의 귓가에서 낮게 말했다.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대가 물에 잡히는 걸 보는 일은, 두 번은 못 하오."돌아보니 그의 낯이 한 뼘 앞에 있었다. 물보라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었고, 늘 고요하던 눈이 고요하지 않았다. 그 눈이 그녀의 낯을 — 눈썹을, 뺨을, 입술을 — 확인하듯 훑고 지나갔다. 다친 데를 찾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오래 머물렀고, 머문 자리마다 열이 남았다. 함거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나무를 두드리는데, 반 뼘 어둠 속의 숨 두 개가 잠깐 같은 박자가 되었다.물마당의 밤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듣기도 전에 그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갈고리 줄을 타고 넘어오는 첫 자의 손목을 검이 지나갔고, 둘째 자는 제 동무의 몸에 걸려 물로 떨어졌다. 운설은 함거 뒤에서 제 목덜미를 손으로 눌렀다. 숨이 닿았던 자리가 강물보다 뜨거웠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저를 나무라면서도, 나무라는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젖은 옷이 무겁게 몸에 감겼다. 뛰고 구르는 사이 어디서 터졌는지 그의 왼 소매에 가늘게 피가 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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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급류

큰 배는 서두르지 않았다.물살이 뗏목을 저절로 데려다주는 판이었다. 사수가 뱃머리에서 갈고리 사슬을 늘어뜨려 쥐었고, 낯 검은 거룻배들은 양옆에서 뗏목의 퇴로를 눌렀다. 돛대 그늘에서 일어선 사람은 난간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늘의 가장자리에 선 채로, 검은 포의 자락과 뒷짐 진 손의 윤곽만이 강빛에 겨우 잡혔다."어른께서 말씀하신다." 사수가 그늘의 침묵을 받아 옮겼다. "책과 그릇을 넘겨라. 나머지는 물에서 건져 주마."그릇. 그 말이 저를 가리킨다는 것을 운설은 알았다. 함거 그늘의 운백천이 책을 품은 팔에 힘을 넣는 것이 보였고, 간수문의 늙은 눈이 처음으로 그늘의 사람에게 박혀 움직이지 않는 것도 보였다. 아는 자를 보는 눈인지, 알아내려는 눈인지 — 그 눈은 읽히지 않았다."싫다면?" 선우현이 물었다. 빼앗은 검의 물기를 털며, 그는 이미 답을 아는 사람처럼 물었다."물이 대답할 거야." 사수가 웃었다. "불은 봄물에 뗏목이 통째로 뒤집히면, 책은 젖고 그릇은 건지면 그만이거든. 나머지는 — 물살에 물어봐."쇠뇌들이 일제히 방아쇠에 얹혔다. 남은 거리는 화살 두어 대. 운설은 그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세지 않았다. 세는 대신 무릎을 꿇고, 젖은 갑판에 손바닥을 붙였다.물을 세우면 진다. 물마당에서 배운 것이었다. 일으킨 물은 임자를 가리지 않고, 여기는 모두가 한 뗏목 위다. 그러나 겨울 궁의 밤들이 가르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물은 세우는 것만이 아니다. 듣고, 흘리고 — 함께 가는 것이다."손을." 그녀가 말했다. 선우현이 물음 없이 곁에 무릎을 꿇고, 제 손을 그녀의 손등에 포갰다. 젖고 뜨거운 손이었다. 그 온기가 닿는 순간 안의 강이 사나움을 반쯤 벗었다. 순해진 강에 대고 운설은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일어서지 마라. 다만 달려라.강이 들었다.뗏목 밑의 물살이 등을 굽혔다가 폈다. 여남은 척의 배 덩어리가 활시위를 떠난 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겨눈 화살들이 일제히 빗나가 물을 때렸고, 큰 배의 옆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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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촛불

눈을 뜨자 초 하나가 타고 있었다.무두장이 폐가의 작은 방이었다. 머리맡에 코피에 쓰는 마른 약초가 헝겊에 싸여 놓여 있었고, 그 곁에 언니의 글씨로 쪽지 한 장. 아비는 잔다. 책은 내가 가졌다. 오늘 밤은 아무도 너를 부르지 않는다. 늙은이는 강가에서 제 발로 갈라섰다는 말은 노새에게 나중에 들었다. 대회는 끝났고 판은 깨졌으니 오늘은 죄인도 없네, 하고는 젖은 관복 그대로 어둠 속을 걸어갔다고.몸을 일으키자 세상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강을 달래 쓴 값이었다. 그 값을 셈하다가, 운설은 아직 치르지 않은 다른 셈 하나를 떠올렸다. 왼 소매에 배어들던 피. 뗏목 위에서 저 혼자 걸어 둔 약조.그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젖은 옷은 갈아입었으나 왼팔은 그대로였다. 남 앞에 상처를 내놓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상처를 봐 줄 한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로."소매를 걷으세요." 운설이 말했다. "들어와서요."방으로 들어온 그가 순순히 소매를 걷었다. 걷다가, 상처가 소매 위쪽이라 걷는 것으로는 모자라자, 잠깐 망설이고는 웃옷의 고름을 풀었다. 촛불 아래 어깨와 팔이 드러났다. 베인 자리는 길지 않았으나 얕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둘레로, 눈굴의 새벽에 그녀가 손끝으로 읽었던 흉터의 지도가 다시 펼쳐져 있었다. 그때는 환자의 몸이었다. 지금은 — 지금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름을 미뤘다."뗏목에서 물으려던 것이 있소." 상처를 씻는 동안 그가 말했다. "물살을 달랠 때 — 내 손이 소용에 닿았소?""닿았습니다." 운설은 짧게 답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라서 짧아진 답이었다. 당신 곁에서는 강이 순해진다고, 그 말까지는 오늘 밤에 못 할 것 같았다. 말하면 그다음 말들이 줄줄이 딸려 나올 것이었다. 그는 더 캐지 않고, 다만 오른손을 폈다가 가만히 쥐었다. 제 손에 든 소용의 정체를 짚어 보는 사람처럼.의녀의 손은 제 일을 알았다. 씻고, 여미고, 촛불에 지진 바늘이 살을 여섯 번 지나는 동안 그는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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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가락지 자국

무두장이 골목에 남색 가마는 눈밭의 모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가마꾼 넷은 골목 어귀에 떨어져 있었고, 여인은 혼자 폐가의 마당에 서 있었다. 물빛 배자에 흐트러진 데 하나 없는 매무새. 지붕 위에서 사백의 활이 소리 없이 그녀를 겨누고 있었고, 마루 끝의 혈비는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여인은 제게 겨눠진 것들을 다 아는 낯으로 태연히 마당 한가운데를 골라 서 있었다.운설은 그의 방 쪽문에서 나왔다. 젖은 머리를 미처 올리지 못한 채였다. 여인의 눈이 그녀에게 왔다. 쪽문과, 머리와, 새벽 기운이 가시지 않은 낯을 차례로 지나는 동안 그 눈은 아무 표정도 만들지 않았다. 표정을 만들지 않는 것이 표정이었다.선우현이 마당으로 내려섰다."남궁 소저." 그가 말했다. 목소리에 반가움은 없었으나, 낯섦도 없었다. 그 낯섦 없음이 운설의 어딘가를 가늘게 긁었다."오 년 만이에요, 현—" 여인은 거기서 말을 접고, 부채를 폈다. "선우 공자."접힌 호칭이 마당에 오래 남았다. 이름을 반 자만 부르다 만 입과, 그 반 자를 못 들은 척하는 남자와, 다 들은 두 여자가 한 마당에 있었다.여인의 눈이 다시 운설에게 왔다. 이번에는 지나가지 않고 머물렀다. "물 위를 걸었다는 분이군요." 남궁완이 말했다. 구경거리를 보는 말투도, 겁내는 말투도 아니었다. 값을 매기기 전에 물건을 정면으로 보는, 세가에서 나고 자란 눈이었다. "강안에서 봤어요. 수만이 도망치는데 혼자 물로 내려가는 걸. 간밤에 공자의 상처를 돌본 손도 그쪽인가요. 남궁가가 사례하지요."사례. 의원의 품삯이라는 뜻이었다. 운설은 그 말이 고른 자리를 알았다. 고르고 고른 자리였다. "상처는 값을 받고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만큼만 답했다. 그 이상을 답하면 지는 자리라는 것쯤은, 마당에 선 두 여자가 똑같이 알고 있었다."여길 어떻게." 혈비가 물었다. 물음이 아닌 물음이었다."찾은 게 아니라 따라왔어요." 남궁완은 숨기지 않았다. "맹의 눈이 이 골목을 이틀째 보고 있어요. 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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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객경(客卿)

"공자가 남궁가에 드세요."남궁완은 조건을 길게 꾸미지 않았다. "객경(客卿)으로요. 필적을 다 대조할 때까지. 세가의 우산 아래 있어야 재감정도 격이 서고, 실성 문서를 지우는 동안 공자 신변도 삽니다. 그리고 —" 부채 끝이 마당의 공기를 한 번 짚었다. "수장고의 서신들은 별저 밖으로 못 나가요. 조부님의 필적도, 십팔 년 전 세가들 사이에 오간 문서들도 다요. 대조하려면 눈이 종이가 있는 곳으로 와야지요.""눈이라니." 혈비가 말을 받았다."수결을 본 눈이요." 남궁완의 시선이 선우현에게 갔다. "화살이 닿기 전에, 공자는 그 종이를 보고 있었어요. 강안에서 제 눈으로 봤습니다. 물 위의 누구보다 오래, 마지막 장을 들여다보고 있던 걸."혈비가 방에서 책을 가져오게 했다. 공훈록이 마루 위에 펼쳐졌다. 낯 검은 화살이 뚫고 지나간 자리는 하나였는데, 그 하나가 정확했다. 마지막 장, 명(命)의 끝 — 수결이 앉았던 자리가 엄지 굵기로 뜯겨 나가 있었다. 앞뒤 장들은 멀쩡했다. 사람을 노렸다면 빗나간 화살이, 종이를 노렸다면 백발백중이었다."사수." 사백이 낮게 말했다. 아우의 솜씨를 알아보는 목소리였다.물었어야 할 것을 운설이 물었다. "보셨습니까. 수결을.""끝까지는 못 봤소." 선우현은 뚫린 자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다만 획이 눈에 남았소. 붓을 대는 첫 자리와, 꺾는 버릇과, 마지막 획이 종이를 누르며 끝나는 모양. 이름으로 읽어 내진 못했으나 — 같은 손이 쓴 글씨를 곁에 놓으면, 알아볼 자신은 있소."마당이 조용해졌다. 물증은 뜯겨 나갔고, 남은 것은 한 사람의 눈 안에 든 획 몇 개였다. 그 눈을 남궁가의 수장고 앞까지 데려가겠다는 것이 여인의 조건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조건이었다. 흠잡을 데 없어서, 운설은 흠을 잡는 제 속을 들키지 않으려 시선을 책에 두었다.언니 쪽의 셈도 그 사이에 끝나 있었다. 책과 아버지는 혈비가 지킨다. 서른 기는 케테와 그 어미의 자취를 마저 쫓고, 어른의 배가 강을 쥔 동안 북행 물길 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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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담 안

남궁가의 별저는 담부터 달랐다.무두장이 골목의 흙담이 아니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회벽이 물길을 낀 후원까지 둘렀고, 문마다 창을 든 가병이 섰다. 객경은 정당 곁의 상방에 들었다. 객의는 후원 행랑채, 약방 곁의 골방이었다. 짐을 푸는 데는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골방의 창으로는 상방의 처마 끝이 겨우 보였다."의원님은 이쪽이래요." 안내하던 시비가 말했다. 왼눈이 살짝 바깥을 보는, 호기심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이였다. "저는 연지예요. 아씨 시중을 들어요. 저기, 의원님 — 침으로 사람을 재운다는 게 참말이에요?""재우는 게 아니라 아픈 걸 멎게 하는 겁니다.""물 위를 걸었다는 것도요?"운설은 대답 대신 짐을 마저 풀었다. 연지는 쫓겨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아이처럼 문지방에 앉아 한참을 재잘대다 갔다. 담 안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궁금해하는 눈이 사시 낀 시비 하나라는 사실이, 우습고 조금 시렸다.오후에는 별저의 약방을 안내받았다. 남궁가의 객의라는 신분은 종이 한 장이었으나, 약방만은 진짜였다. 마른 약재가 벽을 채우고, 저울과 절구가 손 닿는 자리에 있었다. 낯선 담 안에서 처음으로 숨이 놓이는 자리였다. 운설은 당귀 한 뿌리를 집어 손끝으로 부러뜨렸다. 똑, 하고 마른 것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백로진의 약방에서 눈 오는 밤마다 듣던 소리. 세상이 몇 번을 뒤집혀도 잘 마른 약재는 같은 소리로 울었다.저녁상은 따로 나왔다. 객경의 상은 정당에, 객의의 상은 행랑에. 법도에 흠잡을 데가 없어서 흠을 잡을 수도 없었다.상을 물리고 후원을 지나다, 운설은 정당의 열린 문 안쪽을 보았다. 남궁완이 찻상 앞에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만으로 물 온도를 아는, 자라면서 몸에 밴 손놀림. 맞은편의 선우현이 무어라 짧게 답하자 여인이 웃었다."오라버니는 그때도 우전(雨前)만 드셨지요. 곡우 지난 잎은 입에 대지도 않고.""소저의 기억이 밝소.""제사가 그해 곡우 다음이었으니까요. 백부님이 오라버니더러 검보(劍譜)를 외워 보라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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