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11 - Chapter 120

275 Chapters

제111화 — 품는 법

묵할멈을 품는 자리는 약방으로 정해졌다.혈비와 운설 둘만 앉았다. 문밖에는 아무도 세우지 않았다. 노파가 등잔 둘을 들고 약재를 받으러 온 저녁, 운설은 문을 닫고 그 앞에 젖은 얼레빗을 놓았다.노파의 낯이 무너지는 데는 한 호흡이면 족했다."할멈." 혈비가 말했다. 붉은 달의 주인이 아니라, 어릴 적 이 노파의 등에 업혔을 계집아이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케테를 혼자 지게 두었다가 벌판에 눕혔다. 같은 일을 두 번 하면 — 나는 어머니 앞에 설 낯이 없다."노파의 손이 올라왔다. 떨리는 손짓이 등잔 불빛 속에서 한 자 한 자 이어졌다. 여리가 배운 손짓말과 운설이 배운 손짓말과, 혈비가 어릴 적부터 아는 손짓말을 모아 겨우 따라갈 만큼, 노파의 고백은 길었다.그림은 달포 전부터 왔다. 처음에는 등잔을 켜라는 그림뿐이었다. 어겼더니 — 여리의 얼레빗이 젖은 채 돌아왔다. 그다음부터는 어기지 못했다."누구요." 운설이 물었다. "꾸러미를 넣는 손을, 한 번이라도 봤습니까."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젓고 나서, 잠깐 멎었다가, 다른 손짓을 지었다.본 것은 없다. 들은 것이 있다.실어는 귀를 밝게 한다. 새벽 우물가에서, 물 밑에서 함이 올라오기 전에, 암거 쪽에서 이따금 소리가 났다. 물소리에 섞여 아주 낮게 — 피리 소리가."피리." 혈비의 낯이 굳었다.뼈피리. 그 밤의 가락. 사백의 스승이었고 그 뒤로는 불지 않는다는 단희의 피리. 사수가 시험 삼아 불던 그 가락.노파의 손짓이 이어졌다.가락이 아니었다. 가락이 되다 만 소리. 아이가 부는 것처럼 서툰, 같은 마디만 되풀이하는."신호였겠지." 혈비가 말했다. "함을 넣었다는. 한데 — 서툰 피리라."단희는 명인이다. 서툰 피리는 단희가 아니라는 뜻이거나, 단희가 서툰 척을 한다는 뜻이거나. 목록은 또 한 겹 어두워졌다.단희는 그날 밤으로 불려 왔다. 옛 악사는 술 냄새 대신 겁을 묻히고 왔다. 피리 얘기가 나오자 상한 손이 저 혼자 떨렸다."그 가락을 서툴게 부는 자를 압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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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 그믐 전야

월하촌까지는 말로 하루 반. 출발은 그믐 전날 새벽으로 정해졌다.가는 자와 남는 자의 명단이 갈렸다. 가는 쪽은 운설과 묵할멈, 선우현, 혈비, 사백과 우르와 기수 열둘. 그리고 한겸이 제 이름을 보탰다."수결의 임자를 잡는 자리에 법이 없으면, 잡아도 잡은 게 아닙니다."젊은 감찰은 간수문의 봉서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종이가 법이 되는 땅까지 — 라 하셨으니, 그 종이가 어디까지 가는지 이번에 봐야지요."남는 쪽은 흑요와 남궁완이 맡았다. 궁을 지키는 일과, 등잔의 골방을 지켜보는 일. 대월의 눈이 궁 안에 남아 있는 한, 비운 궁이 무사하리라는 법이 없었다.낮 동안 월하촌의 판이 마지막으로 맞춰졌다. 사백과 기수 여섯이 하루 먼저 떠나 마을 둘레에 스몄다. 봉한 우물은 사당 곁, 지난겨울 그들이 절하고 지나온 그 자리였다. 우르는 지붕들을, 기수들은 골목의 어귀들을 나눠 맡았다. 혈비는 그림 지령의 획 하나까지 다시 셈했다."산 채로 — 라는 표기가 마음에 걸린다." 언니가 말했다. "산 채로 원하는 것은 흥정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흥정에는 자리가 필요하고. 저들은 우리를 다 죽이러 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 보여 주러 올 게다."보여 주러.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저녁에 남궁완이 선우현을 찾아왔다. 운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인은 두 사람 앞에 작은 것을 내려놓았다.반지였다."돌려드려요."남궁완의 목소리는 고르게 나왔다."오 년 전 정혼 때 선우가에서 온 거예요. 파혼 서신이 오갔을 때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 셈이 늦었어요. 늦은 셈을 오늘 치릅니다."선우현은 반지를 받지 않고 오래 보았다."그건 이미 소저의 것이오. 가문이 준 것이 아니라 — 그때의 내가 고른 것이니.""알아요. 그래서 더 못 가져요."여인이 반지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쥐여 주는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그때의 당신은 이제 없어요. 먹 묻은 소매를 그냥 두고 웃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죠. 그 사람은 제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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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 그믐

달 없는 밤은 소리부터 달랐다.부엉이도 바람도 숨을 죽인 잿마을에, 별빛만이 소리 대신 내렸다. 그믐은 달이 없는 밤이 아니라 달이 등을 돌린 밤이라고, 언젠가 여리가 제 부족의 말을 옮겨 준 적이 있었다. 등 돌린 달 아래에서 하는 일은 달도 못 본다고.월하촌은 지난겨울 그대로 비어 있었다. 무너진 담과 봉한 사당과, 사당 곁의 우물. 우물 위에 얹힌 넓적한 돌은 십팔 년 치 이끼를 덮어쓴 채였다. 달빛이 없으니 별빛이 사나웠고, 별빛 아래의 잿마을은 뼈처럼 희었다.지난겨울 이 마을을 지날 때 그들은 우물에 절만 하고 갔다. 봉한 것은 열지 않는 법이라고 부수 노인이 일렀기 때문이다. 무엇을 봉했느냐고 물었을 때 노인은 답하지 않았었다. 그 답하지 않음이 오늘 밤 이 자리로 그들을 도로 불러 놓았다.배치는 전날 끝나 있었다.사백과 기수 여섯은 마을 둘레의 어둠에 스몄고, 우르는 사당 지붕 그늘에 엎드렸다. 혈비와 선우현과 한겸은 우물이 보이는 무너진 담 뒤에 앉았다. 그리고 자정이 가까워지자, 운설은 묵할멈과 나란히 마을 어귀에서 걸어 들어갔다.그림 지령 그대로. 지팡이 짚은 노파가, 물결 딛는 여자를 데려오는 그림.묵할멈의 지팡이가 반 박자 느려진 것은 어귀를 지날 때였다. 노파는 걸으며 운설의 소매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 미안하다는 손인지, 붙들고 싶다는 손인지. 운설은 그 굽은 손등에 제 손을 잠깐 포갰다. 할멈 탓이 아니라는 답이었다.우물가까지 쉰 걸음.노파의 지팡이 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운설은 걸으며 들었다. 안의 강은 낮게 흐르고 있었다. 사납지 않게, 그러나 깨어 있게. 소매 속에는 은침과 붉은 실 끈이 있었고, 쉰 걸음 밖의 어둠에는 심장 뛰는 자리가 있었다.우물가에 먼저 와 있는 것이 있었다.등불도 없이, 우물돌에 걸터앉은 사람 하나. 어둠에 눈이 익자 윤곽이 잡혔다. 검은 포의. 뒷짐 진 손. 급류의 물보라 너머에서 일어서던 그 윤곽."왔구나."낮고,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 물 건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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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 열두 줄의 뒤

운백천은 우물돌 곁에 섰다. 죄인의 자리도 증인의 자리도 아닌, 다만 말하는 자의 자리였다."열여덟 해 전 가을에 손님이 왔다."아버지는 그렇게 시작했다."북변의 물목을 트고 싶다는 상인이었다. 청하의 배로 얼음강을 오르내리자는 흥정이었지. 셈이 밝고, 물길에 밝고, 북쪽 사정에 밝은 자였다. 겨우내 그자와 장부를 맞췄다. 봄에는 벗이라 불렀다."그늘 속의 대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남의 제사처럼 듣고 있었다.운설은 그 상인의 그림을 그려 보았다. 셈이 밝고 물길에 밝고 북쪽에 밝은 자. 겨우내 장부를 맞추고 봄에 벗이 되는 자. 사람의 안으로 들어오는 데 계절 하나면 족한 자. 케테에게 서찰이 갔고 세가에 갈대 종이가 갔듯, 아버지에게는 — 벗이 갔던 것이다. 대월의 무기는 처음부터 칼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것. 그것이 이 자의 병법이었다."여름에 그자가 흥정 하나를 더 가져왔다. 장부가 아니라 — 지도였다. 삭월의 정병 삼천이 눈이 얼면 남하한다는. 북변이 먼저 탄다는. 내 성읍이, 내 식솔 삼백이 먼저 탄다는.""침략설." 운설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나왔다. "그 풍문의 출처가—""이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늘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세가들이 갈대 종이의 서신으로 받은 것을, 나는 벗의 입으로 받았다. 그리고 나는 — 믿었다."별빛 아래에서 아버지의 등은 여전히 곧았다. 곧은 채로 말했다."맹은 대군을 말했다. 전면의 토벌을. 나는 그것을 막겠다고 나섰다. 왕정만 도려내면 된다고. 병장기가 모이는 심장만 멎으면 삼천의 발이 묶이고, 큰 싸움은 없다고. 최소한의 피로 끝내는 길이라고 — 내 입으로 그렇게 맹의 마당에서 말했다. 물길을 아는 것은 나뿐이었으니, 길도 내가 잡았다.""얼음여울." 운설의 입안이 말랐다. "일곱째 줄.""내가 열었다. 봉화지기의 교대 시각도, 왕정의 야순 길도 — 벗이 준 것을 내가 맹의 손에 옮겼다.""물길은 어찌 그리 아셨습니까." 운설이 물었다. 묻는 목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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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 언니와 원수

네 어미와, 너였다.그 말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담이 넘어왔다. 혈비가 어둠에서 걸어 나와 우물가의 별빛 속으로 들어섰다. 십팔 년을 걸어온 걸음치고 그 쉰 걸음은 너무 짧았다."그 여인은."언니의 첫마디는 물음이었다. 목소리가 하도 골라서, 그 고름이 이미 칼이었다."그 방의 여인은 — 어찌 되었나."운백천은 혈비를 마주 보았다. 열여덟 해 전 눈밭에서 간수문과 약조를 맺던 그 낯으로, 이번에는 죽은 왕정의 딸 앞에 섰다."여인이 먼저 아이를 내밀었다."아버지가 말했다."문을 연 것이 선봉의 칼이라는 것을 알면서. 도리어 나를 향해 아이를 내밀며 말했다. 데려가라. 데려가서 —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키워라. 이름은 지어 두었다. 눈 내리는 밤에 났으니."설야. 운설의 안에서 무언가가 소리 없이 갈라졌다. 이름을 지은 것은 어머니였고, 이름을 들은 첫 남이 아버지였다."나는 아이를 안고 그 방을 나왔다. 여인은 화로 곁에 남았다. 그 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기서 처음 부서졌다. "모른다. 알려 하지 않았다. 아는 순간,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편리한 무지로군."그늘 속의 대월이 웃었다. 운설은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즐거워하고 있음을 들었다."궁금하지 않으냐, 설야. 그 방의 여인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거든 — 달이 다시 차기를 기다려라."혈비의 검이 소리를 냈다.뽑힌 칼끝이 향한 곳은 그늘이 아니었다. 운백천이었다. 십팔 년의 맹세가 가리키는 자리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얼음여울의 물길을 연 손. 봉화의 그늘을 짚어 준 손. 스물여섯 무덤의 문을 연 손."언니."운설이 그 사이에 섰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였다. 칼끝과 아버지 사이, 반 보."비켜라, 아우야.""못 비킵니다.""찾아 다오, 했다. 네가 찾았다." 언니의 눈은 아우를 지나 그 뒤의 사내에게 박혀 있었다. "그자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 이라 했지. 배신자가 맞았다.""속은 자입니다.""속아서 연 문으로 스물여섯이 죽었다."칼끝은 흔들리지 않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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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 찬 달

우물돌은 네 사람이 붙어서야 밀렸다.십팔 년 치 이끼가 갈라지며 돌이 굴렀고, 열린 아가리에서 갇혔던 밤공기가 올라왔다. 물 냄새. 돌 냄새. 그리고 그 밑의, 아주 오래 고인 것의 냄새.운설은 우물전에 손을 짚고 귀를 열었다."물이 있습니다. 깊이는 세 길쯤. 물 밑에—"폭주의 벼랑에서 들었던 그 물소리가, 이제 고요한 감각 안에서 또렷했다. 열여덟 해를 좁은 돌 안에서 맴돌기만 한 물. 그 물이 품고 도는 것 하나."기다린 것이 있습니다.""열어야 합니까." 한겸이 물었다. 법이 몸에 밴 자의 물음이었다. "봉한 자가 열라 했습니다. 함정일 수도—""함정이면 벌써 터졌다." 혈비가 말했다. "저자는 우리를 여기서 죽일 셈이 없었다. 죽일 셈이었으면 그림을 보여 주다 말고 갔겠지. 저 안에 있는 것도 — 그림의 다음 장이다."보여 주러 왔다던 자가, 가면서도 보여 주고 갔다. 그 셈법이 소름 끼치게 한결같아서, 운설은 우물 아가리가 벌린 입 같았다.사백이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횃불이 우물 벽을 훑으며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밧줄이 두 번 당겨졌고, 올리라는 신호에 우르와 기수들이 줄을 감았다.올라온 것은 거적에 받친 유해였다.물속의 열여덟 해는 뼈만 남겼다. 뼈와, 뼈에 감긴 삭은 옷가지와, 그리고 뼈 곁에 나란히 올라온 것 둘.검 한 자루. 그리고 손바닥만 한 쇠패 하나.검은 물때에 덮이고도 격이 죽지 않았다. 검집의 은입사가 별빛에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패는 사백이 물때를 닦아 혈비에게 건넸다. 패의 낯에 새겨진 것은 초승달이 아니었다.찬 달이었다. 한 점 이지러짐 없는 만월.혈비가 그 패를 받아 든 채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언니는 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때 낀 검집을 쓸어내리는 손이, 어느 결에 떨리고 있었다."아버지."붉은 달의 주인이 말했다. 십팔 년 동안 입에 올리지 않던 부름이었다."아버지의 검이다. 다섯 살에 이 은입사를 만지다 손을 베였다. 왕의 검은 왕만 차는 것이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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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 효월(曉月)

"대월이다."혈비가 끊긴 물음을 제 입으로 맺었다."그 겨울 병풍 뒤에 앉아 삭월의 방비를 제 손으로 허문 것도, 벗의 낯으로 중원에 침략설을 심은 것도, 같은 자다. 학살이 아니라—" 언니는 거기서 잠깐 숨을 골랐다. "학살로 지운 정변이다. 저들의 칼을 빌려, 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왕의 유해는 사당에 모셨다. 봉했던 사당의 문을 열고, 삭은 제단을 닦고, 거적 대신 기수들의 겉옷을 벗어 받쳤다. 격식은 모자랐으나 예는 모자라지 않았다."궁으로 모신다."혈비가 말했다."대전의 위패에 글자가 없는 것은 — 누구의 죽음도 확인하지 못해서였다. 이제 첫 글자를 새긴다."사백은 낮 동안 우물을 한 번 더 내려갔다 왔다. 사냥꾼의 꼼꼼함이었다. 벽감도 바닥도 더 나온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우물 벽의 돌 하나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고 — 손톱 자국 같은 것이. 물속에 던져질 때 왕이 살아 있었는지 죽어 있었는지, 그 자국은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은 물음도 있었다. 운설은 그 말을 혈비에게 옮기지 않기로 했다. 의녀의 장부에도 덮는 갈피는 있었다.밤샘은 자매가 맡았다.사당의 등잔 곁에 두 사람이 앉았다. 뼈가 된 아버지와, 아버지를 모르는 딸과, 아버지를 열여덟 해 만에 되찾자마자 뼈로 받은 딸이."다섯 살에 저 검을 만지다 손을 베였다."혈비가 낮게 말했다. 언니의 목소리에서 처음 듣는 결이었다. 원한도 판도 아닌, 다만 기억의 결."아버지는 나를 나무라는 대신 웃으셨다. 검이 너를 문 게 아니라 네가 검을 문 것이라고. 그 손으로 크면 — 이 검이 언젠가 네 것이 된다고." 언니의 손이 물때 낀 검집 위에 얹혔다. "목마도 태워 주셨다. 왕은 어깨가 넓어야 한다며. 어깨 위에서 보는 궁이 좋아서, 나는 내려오기 싫다고 울었다."울었다. 언니에게도 우는 법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언니."운설은 오래 미뤄 온 것을 물었다."언니의 이름은요. 혈비 말고 —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요."등잔이 흔들렸다. 혈비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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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 술잔

귀로는 하루 반을 꼬박 달렸다. 왕의 유해를 실은 수레가 행렬의 한가운데를 갔고, 아무도 그 곁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갯길에서 궁의 지붕이 보였을 때, 문루의 뿔피리는 내객의 가락 대신 조곡처럼 낮고 길게 울었다. 왕이 돌아온다는 것을, 궁은 뿔피리 소리 하나로 알아들었다.궁은 사흘 만에 다른 궁이 되어 있었다.문루의 파수가 배로 늘었고, 회랑의 말소리는 반으로 줄었다. 단희의 방은 문에 못질이 된 채였다. 남궁완이 제 손으로 박은 못이라 했다."현장은 사람 손이 제일 무섭거든요. 치우고 닦고 — 예를 갖춘다는 손들이 답부터 지워요."여인은 사흘 동안 그 방을 지켰다. 세가의 눈은 서고만 읽는 것이 아니었다.못이 뽑히고, 운설이 먼저 들었다.늙은 악사는 서안 앞에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무너져 있었다. 등의 상처는 보기도 전에 알았다. 케테. 왕. 그리고 단희. 세 번째로 보는 자국이었다."곁에 앉았던 자입니다."검시를 마친 운설이 말했다."선 채로 내려 그은 각이 아닙니다. 나란히 앉았다가 — 일어서며 그었습니다. 술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 일어서는 척하며.""술잔은 하나뿐이었어요."남궁완이 서안을 가리켰다. 단희의 잔만 마르다 만 술을 담은 채 놓여 있었다."한데 술병의 술은 두 잔 몫이 비었죠. 손님 잔은 씻겨서 — 저기, 시렁의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어요. 사람을 죽이고 잔을 씻어 제자리에 놓는 손. 서두른 데가 한 군데도 없어요."침착한 손. 익숙한 손. 운설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시렁 아래, 벽의 빈 못 하나에 눈이 멎었다."피리가 없습니다."뼈피리. 그 밤 이후 불지 않던, 그러나 버리지도 못하던 단희의 피리. 벽의 못에 늘 걸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범인이 가져갔군요." 한겸이 말했다. "어째서.""증거라서가 아니다."혈비가 방 어귀에서 말했다. 언니의 눈은 빈 못에 박혀 있었다."저 피리는 스승의 것이다. 재주 없는 제자가 — 평생 넘지 못한 가락의 임자가 스승이지. 죽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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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 보라고 준 걸음

절뚝이는 걸음은 궁에 둘이었다.온천지기의 무릎과, 산신당지기의 지팡이. 궁에서 가장 오래 산 두 노인이자, 가장 사랑받는 두 노인이었다.흑요는 그 밤으로 두 사람을 가두자 했다. 혈비는 하루를 벌었다."묶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한데 잘못 묶으면 — 궁이 두 쪽 난다."이튿날 운설은 온천 마당으로 갔다. 진맥의 명분도 이제 서로에게 빤했다. 더운돌 영감은 탕가 돌에 앉아 순순히 무릎을 내주었다.무릎은 뜨겁게 부어 있었다. 물일 쉰 해가 관절을 갉아 온 흔적. 하루 이틀에 꾸밀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이 무릎으로는," 운설이 말했다. "밤에 소리 없이 회랑을 다닐 수 없습니다. 절뚝임을 감출 수는 있어도 — 소리는 못 감춥니다. 지팡이 없이는 열 걸음이 고비입니다.""고맙구먼."영감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고는 김 오르는 탕을 오래 보다가, 늘 웃던 낯에서 웃음기를 걷고 덧붙였다."물은 거짓말 안 혀. 사람이 하지. 쉰 해를 물지기로 살았는디 — 내 물길이 칼 든 놈 드나드는 길이 됐다는 게, 그게 젤로 아프네."돌아 나오는 길에 운설은 탕가 어귀에서 한 번 멈췄다. 쉰 해를 이 물과 산 노인이 제 물길을 미워하게 된 하루였다. 의심이 사람을 베는 법을 이 궁은 겨우내 배우는 중이었고, 가르치는 자는 늘 담 밖에 있었다.산신당의 부수는 지팡이를 제 손으로 내밀었다."가두게."노인은 그 말부터 했다."늙은이 하나 가두고 궁이 편하면 싼 값이지. 벌판은 여리가 대신 돌면 돼. 잔돌 고르는 법은 남궁가 처자가 배워 뒀고."가두라는 자와 가둘 수 없는 자들 사이에서, 매듭을 자른 것은 사백이었다."둘 다 아닙니다."사냥꾼은 단희의 방에서 가져온 것을 탁자에 놓았다. 씻겨서 시렁에 돌아가 있던 손님 잔이었다."이 잔을 보십시오. 사람을 죽이고, 잔을 씻고, 물기까지 닦아 제자리에 놓은 손입니다. 서두름이 없고, 흘림이 없고, 자국이 없습니다. 그런 손이 —" 사백의 손끝이 탁자를 짚었다. "나오는 길에 아이 눈에 띄어 줍니까. 등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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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 목숨의 문

암거 어귀에서 걸어 나온 것은 진눈이었다.달도 없는 어둠 속에서 젊은 무사는 물가의 바위를 익숙하게 짚어 내려왔다. 기침을 삼키느라 어깨가 한 번씩 흔들렸다. 물건이 온다는 신호를 받고, 받으러 온 걸음이었다.사백의 살이 발 앞의 돌을 때렸을 때, 진눈은 달아나지 않았다.칼도 뽑지 않았다. 젊은 무사는 그 자리에 선 채 어둠 속의 활과 탕가의 검신과, 그늘에서 일어서는 운설을 차례로 보았다. 그러고는 — 웃었다. 죽음 얘기를 농담으로 받던 그 낯으로."덫이군요."기침이 웃음을 반쯤 삼켰다."제가 놓는 것만 봤지, 걸려 보긴 처음입니다."끌려가는 길에 진눈은 탕가 앞에서 한 번 걸음을 멈췄다. 더운돌 영감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서 있었다. 쉰 해 물지기의 낯을 젊은 무사는 오래 못 보고 고개를 떨궜다."내 물길이었냐."영감이 물었다. 진눈은 답하지 못했다. 그 못 하는 답이 답이었다. 영감은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는데, 돌린 등이 하룻밤 새 십 년은 늙어 있었다.문초는 대전 곁방에서 밤을 새워 이어졌다.진눈은 숨기지 않았다. 숨길 힘이 남지 않은 사람의 말하기였다. 등잔 셋을 켠 것도 저였다. 묵할멈이 궁을 비운 사이, 시킨 대로. 암거의 물건을 받아 나른 것도, 마르간의 장부에 기름 두 독을 지어 넣은 것도."단희는." 혈비가 물었다."제가 아닙니다."젊은 무사는 그 물음에만 정색을 했다."그날 밤 저는 문만 열었습니다. 북쪽 쪽문의 빗장을요. 그리고 골방의 등잔을 셋 켜고 — 시킨 대로 절뚝이며 회랑을 지났습니다. 보라고요. 누가 볼지는 몰랐지만, 보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연지가 본 등이 눈앞에서 제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운설은 소름보다 먼저 아픔이 왔다. 이 사람의 걸음까지 대월의 붓이 그려 준 것이었다."들어온 자는 봤나." 사백이 물었다."못 봤습니다. 보지 말라 했고 —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어째서 이런 짓을."한겸의 물음에 진눈은 한참 기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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