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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명부 (한겸)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4 15:42:18

한겸은 제 손으로 그린 얼굴이 저잣거리에 붙던 날을 기억했다.

키를 반 자 늘였다. 흉터를 오른뺨으로 옮겼다. 눈매를 사납게, 콧대를 낮게. 화공에게 넘길 인상서를 적는 붓이 밤새 떨렸고, 다 적은 뒤에는 뒷간에서 속엣것을 게웠다. 스물여섯 해를 법이 좋아 산 사람의 생애 첫 죄였다. 촌에서 감찰이 났다고 잔치까지 벌였던 어미가 알면 몸져누울 일이고, 알 리 없는 누이는 지난달에도 서신을 보내왔다. 오라버니, 그 은인을 다시 뵈면 절을 올려 줘. 그때 못다 한 절이 아직 내 몫으로 남아 있어.

침 세 대에 누이의 열이 내리던 밤, 한겸은 마룻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생각했었다. 이 빚은 평생 못 갚는다. 그 생각이 맞았다. 빚은 갚아지는 대신 자라서, 이제 그의 붓을 쥐고 흔들었다.

집법당 안의 공기도 요즘은 낯설었다. 열두 줄이 물 위에서 읽힌 뒤로 늙은 감찰들은 말수가 줄었고, 젊은 축은 둘만 모이면 목소리를 낮췄다. 십팔 년 공훈의 임자들이 하루아침에 도살 장부의 임자가 된 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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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20화 — 우물 아래의 증인

    아홉째 이름은 물을 부을 때마다 달라졌다.연화로 보였다가 연비, 다시 야란으로 번졌다. 혈비는 마지막 두 글자에서 손을 거두었다. 묵할멈이 그 이름을 보자마자 백련제 아래쪽 수뢰를 가리켰다.“그곳은 전부 열었습니다.” 한겸이 말했다.묵할멈은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 아홉 개를 펴고 바닥 밑을 두드렸다. 여덟 수뢰 아래에 하나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사람들은 물이 빠진 중심 고리로 돌아갔다. 연화가 지켜 온 아홉째 피리를 홈에 대자 구멍 하나가 맞지 않았다. 진눈이 자기 피리를 거꾸로 붙였다. 두 피리의 숨구멍이 겹치며 바닥 아래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돌판을 들어 올리자 우물 하나가 드러났다.물은 없었다. 벽을 따라 쇠사슬과 마른 약초가 층층이 걸려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쇠사슬에는 이름패 대신 나이가 매달려 있었다. 여섯, 아홉, 열둘. 가장 큰 수도 열다섯을 넘지 않았다. 혈비가 하나를 만지자 녹슨 패 뒤에서 삭월 왕가의 작은 반달이 나왔다.“죄수 수뢰가 아니었어.”묵할멈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죄수였으면 나았겠느냐는 얼굴이었다.운설은 벽의 약초를 살폈다. 아이의 키를 멈추고 맥만 오래 이어지게 하는 마른 뿌리가 줄마다 섞여 있었다. 황실 월하 약전보다 더 거칠고 오래된 처방이었다.“고윤이 처음 만든 게 아니에요.”한겸이 횃불을 들어 패와 약초를 함께 비췄다. 위에서 기다리던 황실 판관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연화가 돌판 입구를 지켰다.혈비가 먼저 내려가려 했다. 흑요가 앞을 막았다.“왕이기 전에 이곳을 아는 사람입니까?”“모른다.”“그럼 아는 척 앞서지 마십시오.”묵할멈이 첫발을 디뎠다. 운설과 선우현, 한겸이 그 뒤를 따랐다. 혈비는 네 번째로 내려갔다. 누구도 그녀를 위해 길을 비우지 않았다.일곱째 계단에서 혈비의 발이 멎었다. 벽에 어린 손으로 그린 새 한 마리가 있었다. 날개 한쪽이 푸른 돌가루로 칠해져 있었다.“내가 그렸다.”기억이 없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19화 — 여덟 사람의 새 장부

    장부에는 첫 줄이 없었다.누구 이름을 위에 놓을지 정하지 못해 여덟 칸을 둥글게 그렸다. 가운데에는 빈자리를 남겼다. 황실과 삭월이 서로 봉인을 찍으려 했던 자리였다.“비워 두면 나중에 힘센 자가 차지합니다.” 한겸이 말했다.여리가 가운데 칸을 통째로 오려 냈다.“그럼 앉을 자리도 없게 만들지.”종이 한복판에 구멍이 뚫렸다. 사람들은 그 둘레에 이동, 치료, 빌려줌, 넘겨줌의 조건을 적기 시작했다.여리는 자기 침을 다른 의원이 쓸 때 사흘 안에 돌려받겠다고 했다. 진눈은 피리를 불 수 없는 날에도 누구도 대신 숨을 넣지 못하게 했다. 타간의 조각은 석잔촌 우물 밖으로 나가려면 환자 셋과 우물지기 둘의 수결이 필요했다.누리는 자기 손목 속 쇠를 빼는 치료를 받을 수 있으나, 빼낸 조각을 의원이 보관하지 못한다고 적었다. 마르간은 서쪽으로 돌아가며 어디에도 위치를 알리지 않을 권리를 요구했다. 사람들이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는 반문했다.“찾아올 수 있는 자가 지키러만 올까?”결국 정확한 곳은 숨기고, 한 달에 한 번 자신이 고른 증인에게 살아 있다는 표식을 보내기로 했다.표식도 한 가지로 정하지 않았다. 첫달에는 검은 돌, 둘째에는 말린 쑥, 셋째에는 빈 종이를 보내기로 했다. 같은 표식을 오래 쓰면 누군가 가로채 대신 보낼 수 있었다. 마르간은 자신을 믿지 못해 만든 조건이 마음에 든다며 세 물건을 품에 넣었다.더운돌의 아내와 누이는 장갑을 공동으로 지녔다.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자동으로 갖는다는 문장을 지웠다. 그때 다시 가족과 화로지기들이 묻기로 했다.묵할멈은 수결 대신 숯 묻은 손바닥을 찍었다. 글을 읽어 주는 증인을 매번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사람이 같은 거짓을 오래 들려주지 못하게 하려는 조건이었다.흑요의 칸만 오래 비었다. 그녀는 조각 반쪽이 명주에게 남았으니 자기 뜻만으로 정할 수 없다고 했다. 배가 흑수촌에서 돌아올 때까지 양도하지 않고, 칼로 쓰지도 않겠다는 한 줄만 썼다.“명주가 돌아오지 않으면?”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18화 — 하루 한 번의 맥

    해가 서쪽 성벽에 닿자 담우가 웃었다.손목 아래에서 하루를 기다린 맥이 한 번 뛰었다. 명주는 두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누른 채 웃지 못했다.“한 번뿐이잖아.”“어제도 한 번이었어. 이틀이면 둘이다.”“그런 셈이 어디 있어.”“살아 있는 사람 셈에는 있다.”운설은 두 사람 앞에 약주머니 세 개와 얇은 장부를 놓았다. 담우가 백로진에 남으면 더 자주 맥을 살필 수 있었다. 흑수촌으로 가는 길은 열흘이 넘었고, 물길이 무너지면 한 달까지 걸릴 수 있었다.“노칠의 물은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있어요.” 운설이 말했다.담우가 명주를 보았다. 대신 답하지 않았다.명주는 항아리 마개를 손바닥으로 눌렀다.“제가 가고 싶어요. 몸 안에 머문 사람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끝까지 보고 싶어요.”“제가 묻는 건 담우예요.”운설이 시선을 옮겼다.담우는 맥 없는 손목을 문질렀다. 자신이 따라가면 명주가 환자를 돌보느라 노칠과 작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남으면 명주는 아픈 자신을 두고 갔다는 죄책감을 지고 길을 걸을 터였다.“나도 가겠습니다. 다만 제 몸을 명주 짐으로 싣지는 않겠습니다.”그는 약 먹는 때와 쓰러졌을 때 할 일을 직접 적었다. 맥이 이틀 연속 오지 않으면 가까운 의원에게 갈 것. 사흘이면 길을 멈출 것. 명주가 정무에게 몸을 빌려 억지로 자신을 옮기려 하면 거절할 것.명주가 마지막 줄을 지웠다.“왜 마음대로 정해?”“그럼 네 조건을 쓰자.”“제가 먼저 물어본 뒤 정무 님도 동의하면 옮길 수 있다고 해.”담우가 다시 적었다. 둘은 떠나기도 전에 한 줄을 두고 세 번 다퉜다. 운설은 말리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걷는 연습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정무도 조건을 보탰다. 명주의 가슴 안에서 두 번 두드린 뒤 왼손 검지로 글자를 썼다. 자신이 담우 몸을 살리려 명주 몸을 빌릴 때에는, 끝난 뒤 몇 걸음을 썼는지 반드시 기록하겠다고 했다.담우는 열 걸음까지라고 썼고 명주는 다섯 걸음으로 고쳤다. 정무가 손가락을 움직여 일곱을 적었다. 셋은 일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17화 — 찬 밥 한 그릇

    한겸은 문 너머에서 한참 기다렸다.안에서는 천 스치는 소리와 낮은 웃음이 급히 멎었다. 선우현이 문을 손바닥만큼 열었을 때 웃옷 매듭은 한 칸 어긋나 있었다.“급한 일이 아니면 해 뜬 뒤에 오게.”“사람들이 밤새 판결을 냈습니다.”운설이 뒤에서 머리를 묶으며 나왔다. 두 뺨의 열기는 찬물로 씻어도 다 가라앉지 않았다. 한겸은 보지 않은 사람처럼 젖은 장부만 내밀었다.고윤에게 내려진 형은 죽음이 아니었다. 열여덟 그릇의 이름과 지나간 몸을 모두 밝힐 것. 살아 있는 자를 직접 찾아가 자기 손으로 행한 일을 말할 것. 죽은 자의 뼈와 유품이 있는 길을 안내할 것. 어느 약도 만들거나 처방하지 못하며, 의원과 유족이 묻는 말에 빠짐없이 답할 것.마지막 줄에는 길이 끝날 때 다시 묻는다고 적혀 있었다. 기한 없는 용서도, 한 번에 끝내는 죽음도 주지 않은 판결이었다.사형을 주장한 유족 둘은 수결하지 않았다. 판결을 막지는 않되 자기 찬성으로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한겸은 그들의 빈칸도 그대로 두었다. 황실 판관은 죄수를 여러 고을로 데리고 다니는 형은 전례가 없다고 반발했다.“전례대로 묻어 버려서 이 장부가 생겼소.” 연화가 말했다.고윤에게 길 안내를 받은 마을은 그를 재우고 먹일 의무가 없었다. 머물 곳은 감시인들이 마련하고, 끼니는 고윤이 약초를 다듬거나 짐을 나른 품삯으로 사게 했다. 의술은 금했지만 상처 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의원에게 위험을 알릴 수만 있고 손을 대지는 못했다.“살리겠다는 핑계로 다시 몸을 고르지 못하게 하는 조항입니다.”운설이 그 줄을 읽었다. 고윤에게는 칼보다 깊이 박힐 금지였다.“달아나면?” 선우현이 물었다.“한겸과 유족이 고른 감시인 셋이 함께 갑니다. 고윤이 길을 잊으면 장부가, 장부가 거짓이면 길 사람들이 고칠 겁니다.”운설은 명주 이름을 찾았다. 형을 지키는 사람에도, 용서를 청할 사람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명주가 거절했어요?”“아비의 형을 딸에게 지키게 하지 말라고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16화 — 다시 닫힌 문

    문빗장이 내려가자 선우현은 운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낮에 한 말부터 끝내야 했다. 운설은 등잔을 탁자 끝에 옮기고 젖은 겉옷을 벗었다. 선우현이 받아 걸어 주려 하자 그녀가 놓지 않았다.“당신은 자꾸 존중한다는 말 뒤에 숨어요.”“알고 있다.”“제가 위험한 곳에 갈 때 막지는 않으면서 혼자 죽을 자리부터 찾아가고, 연도하와 말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밤에야 질투한다고 하고.”“막으면 네 뜻을 빼앗을까 두려웠다.”“그 두려움 때문에 당신 마음을 제가 짐작해야 했어요.”운설이 옷을 놓았다. 바닥에 젖은 천이 무겁게 떨어졌다.“당신이 무서운 것도, 화난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전부 제가 물어서 꺼내야 해요?”선우현의 턱이 굳었다. 검을 잃은 날보다 더 오래 침묵했다.“널 잃을까 봐 두렵다.”“그건 알아요.”“연도하가 네 손을 잡고 있으면 떼어 놓고 싶다.”운설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건 처음 들었고.”“네가 돌아오리라 믿으면서도, 돌아오기 전에 그가 본 네 얼굴을 내가 모른다는 게 싫다. 네가 혼자 물속에 들어갈 때마다 따라가 붙들고 싶고, 그러지 못한 밤에는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걸 새벽까지 확인하고 싶다.”마지막 말이 방 안의 공기를 바꿨다. 운설은 그제야 젖은 속신이 차갑다는 것을 느꼈다. 선우현의 시선이 얼굴에서 목으로, 물기 어린 쇄골로 내려갔다가 억지로 올라왔다.“왜 억지로 참아요?”“네가 화가 났으니까.”“화난 것과 원하는 건 함께 있을 수 있어요.”운설이 먼저 다가갔다.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따지는 입맞춤이었다. 선우현이 받으려 하자 한 번 물러나 숨을 고르게 했고, 그가 기다리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깊게 파고들었다.“하아…….”억눌린 숨이 둘 사이로 새었다. 선우현의 손이 운설 허리를 감쌌다가 멈췄다.“말해.”“더 가까이.”그 한마디에 팔이 단단히 조여 왔다. 운설의 등이 문에 닿았다. 선우현은 상처 난 어깨로도 그녀를 밀어붙이려다 얼굴을 찡그렸다. 운설이 놓치지 않고 그를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415화 — 검신에게 묻지 않은 판결

    “고윤을 죽일까요?”첫 물음은 일곱 살 아이에게서 나왔다. 아비가 그릇 수레를 끌다 죽었다는 아이였다. 어른들은 아이를 끌어내려 했으나 선우현이 막았다.“네가 묻고 싶은 게 그것뿐이냐?”아이는 한참 입술을 씹었다.“죽이면 우리 아비가 어디 묻혔는지 알 수 있어요?”“모를 수 있다.”“살려 두면요?”“말하게 할 수는 있다. 거짓말할 수도 있고.”“그럼 검신께서 정해 주세요.”아이의 어머니가 달려와 입을 막으려 했다. 선우현은 그녀에게도 물었다.“저 아이가 내린 답을 따르겠소?”여자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아비의 죽음을 갚을 결정을 떠맡길 생각은 없었다.“못 따릅니다.”“그러면 아이의 물음은 들으되 판결의 짐은 어른들이 나눠 져야 하오.”선우현은 아이를 빈 의자에서 내려오게 했다. 아이가 죄인을 살린 아이나 죽인 아이로 평생 불리지 않을 자리로 돌려보냈다.무한 회장 사람들의 시선이 선우현에게 모였다. 칼이 없어진 뒤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같았다. 누구 하나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죽고 살 일을 잘라 주기를 바랐다.선우현은 가운데 의자를 비워 둔 채 그 옆에 섰다.“정하지 않겠다.”곳곳에서 욕설이 터졌다. 책임을 피한다는 말, 제 손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깨끗한 체한다는 말이 날아왔다. 선우현은 받아쳤다.“맞소. 나는 한때 묻지도 않고 정했고, 그 칼 아래 죽은 이들이 있소. 그래서 다시 정하지 않겠다는 말만 하면 편할 줄 알았소.”운설이 회장 뒤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전날 그녀가 한 말이 선우현의 등을 밀었다. 침묵도 때로 자기 몫을 피하는 길이라는 말이었다.그는 빈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형은 내가 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내가 아는 죄는 내 입으로 말하겠소.”선우현은 처음 죽인 사람 이름부터 불렀다. 무한 검당의 명을 받고 목을 벤 도적, 나중에야 굶은 농부였음을 안 사내. 월하에 미쳐 운설을 쫓던 밤 다리를 끊어 물에 빠뜨린 사람들. 이름을 몰랐던 자는 생김새와 장소를 말했다. 한겸이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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