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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식은 차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4 15:42:45

간수문은 김이 다 가라앉은 차를 그제야 한 모금 마셨다.

"앉아라. 서서 듣기에는 긴 이야기다."

차 따르는 소리 하나 없는 방이었다. 늙은이는 새 잔에 차를 부어 그녀 앞에 밀어 놓고, 김이 오르는 것을 잠자코 두었다. 마시라는 말도 없었다. 식기를 기다려 마시는 제 법을 손님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다만 잔 하나로 이 자리의 시간을 정해 두는 것이다. 이 차가 식는 동안만 이야기한다는 듯이.

운설은 앉았다. 등을 돌렸다는 늙은이의 말을 그녀는 나중에 몇 번이고 뒤집어 보게 된다. 서른둘의 감찰이 등을 돌린 값으로 아이 하나가 살았고, 그 감찰은 마흔 해를 법 안에서 늙어 당주가 되었다. 후회하는 낯도 자랑하는 낯도 없이, 장부에 적어 두고 이자를 세어 온 낯. 지금 그녀 앞의 낯이 그것이었다.

등 뒤의 문밖에 한겸이 서 있고, 담 밖에 남궁가의 가마가 서 있다는 것을 늙은이도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그것이 이 자리의 법도였다. 서로의 패를 상 위에 반쯤만 올려놓는 법도.

"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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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20화 — 목숨의 문

    암거 어귀에서 걸어 나온 것은 진눈이었다.달도 없는 어둠 속에서 젊은 무사는 물가의 바위를 익숙하게 짚어 내려왔다. 기침을 삼키느라 어깨가 한 번씩 흔들렸다. 물건이 온다는 신호를 받고, 받으러 온 걸음이었다.사백의 살이 발 앞의 돌을 때렸을 때, 진눈은 달아나지 않았다.칼도 뽑지 않았다. 젊은 무사는 그 자리에 선 채 어둠 속의 활과 탕가의 검신과, 그늘에서 일어서는 운설을 차례로 보았다. 그러고는 — 웃었다. 죽음 얘기를 농담으로 받던 그 낯으로."덫이군요."기침이 웃음을 반쯤 삼켰다."제가 놓는 것만 봤지, 걸려 보긴 처음입니다."끌려가는 길에 진눈은 탕가 앞에서 한 번 걸음을 멈췄다. 더운돌 영감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서 있었다. 쉰 해 물지기의 낯을 젊은 무사는 오래 못 보고 고개를 떨궜다."내 물길이었냐."영감이 물었다. 진눈은 답하지 못했다. 그 못 하는 답이 답이었다. 영감은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는데, 돌린 등이 하룻밤 새 십 년은 늙어 있었다.문초는 대전 곁방에서 밤을 새워 이어졌다.진눈은 숨기지 않았다. 숨길 힘이 남지 않은 사람의 말하기였다. 등잔 셋을 켠 것도 저였다. 묵할멈이 궁을 비운 사이, 시킨 대로. 암거의 물건을 받아 나른 것도, 마르간의 장부에 기름 두 독을 지어 넣은 것도."단희는." 혈비가 물었다."제가 아닙니다."젊은 무사는 그 물음에만 정색을 했다."그날 밤 저는 문만 열었습니다. 북쪽 쪽문의 빗장을요. 그리고 골방의 등잔을 셋 켜고 — 시킨 대로 절뚝이며 회랑을 지났습니다. 보라고요. 누가 볼지는 몰랐지만, 보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연지가 본 등이 눈앞에서 제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운설은 소름보다 먼저 아픔이 왔다. 이 사람의 걸음까지 대월의 붓이 그려 준 것이었다."들어온 자는 봤나." 사백이 물었다."못 봤습니다. 보지 말라 했고 —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어째서 이런 짓을."한겸의 물음에 진눈은 한참 기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19화 — 보라고 준 걸음

    절뚝이는 걸음은 궁에 둘이었다.온천지기의 무릎과, 산신당지기의 지팡이. 궁에서 가장 오래 산 두 노인이자, 가장 사랑받는 두 노인이었다.흑요는 그 밤으로 두 사람을 가두자 했다. 혈비는 하루를 벌었다."묶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한데 잘못 묶으면 — 궁이 두 쪽 난다."이튿날 운설은 온천 마당으로 갔다. 진맥의 명분도 이제 서로에게 빤했다. 더운돌 영감은 탕가 돌에 앉아 순순히 무릎을 내주었다.무릎은 뜨겁게 부어 있었다. 물일 쉰 해가 관절을 갉아 온 흔적. 하루 이틀에 꾸밀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이 무릎으로는," 운설이 말했다. "밤에 소리 없이 회랑을 다닐 수 없습니다. 절뚝임을 감출 수는 있어도 — 소리는 못 감춥니다. 지팡이 없이는 열 걸음이 고비입니다.""고맙구먼."영감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고는 김 오르는 탕을 오래 보다가, 늘 웃던 낯에서 웃음기를 걷고 덧붙였다."물은 거짓말 안 혀. 사람이 하지. 쉰 해를 물지기로 살았는디 — 내 물길이 칼 든 놈 드나드는 길이 됐다는 게, 그게 젤로 아프네."돌아 나오는 길에 운설은 탕가 어귀에서 한 번 멈췄다. 쉰 해를 이 물과 산 노인이 제 물길을 미워하게 된 하루였다. 의심이 사람을 베는 법을 이 궁은 겨우내 배우는 중이었고, 가르치는 자는 늘 담 밖에 있었다.산신당의 부수는 지팡이를 제 손으로 내밀었다."가두게."노인은 그 말부터 했다."늙은이 하나 가두고 궁이 편하면 싼 값이지. 벌판은 여리가 대신 돌면 돼. 잔돌 고르는 법은 남궁가 처자가 배워 뒀고."가두라는 자와 가둘 수 없는 자들 사이에서, 매듭을 자른 것은 사백이었다."둘 다 아닙니다."사냥꾼은 단희의 방에서 가져온 것을 탁자에 놓았다. 씻겨서 시렁에 돌아가 있던 손님 잔이었다."이 잔을 보십시오. 사람을 죽이고, 잔을 씻고, 물기까지 닦아 제자리에 놓은 손입니다. 서두름이 없고, 흘림이 없고, 자국이 없습니다. 그런 손이 —" 사백의 손끝이 탁자를 짚었다. "나오는 길에 아이 눈에 띄어 줍니까. 등을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18화 — 술잔

    귀로는 하루 반을 꼬박 달렸다. 왕의 유해를 실은 수레가 행렬의 한가운데를 갔고, 아무도 그 곁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고갯길에서 궁의 지붕이 보였을 때, 문루의 뿔피리는 내객의 가락 대신 조곡처럼 낮고 길게 울었다. 왕이 돌아온다는 것을, 궁은 뿔피리 소리 하나로 알아들었다.궁은 사흘 만에 다른 궁이 되어 있었다.문루의 파수가 배로 늘었고, 회랑의 말소리는 반으로 줄었다. 단희의 방은 문에 못질이 된 채였다. 남궁완이 제 손으로 박은 못이라 했다."현장은 사람 손이 제일 무섭거든요. 치우고 닦고 — 예를 갖춘다는 손들이 답부터 지워요."여인은 사흘 동안 그 방을 지켰다. 세가의 눈은 서고만 읽는 것이 아니었다.못이 뽑히고, 운설이 먼저 들었다.늙은 악사는 서안 앞에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무너져 있었다. 등의 상처는 보기도 전에 알았다. 케테. 왕. 그리고 단희. 세 번째로 보는 자국이었다."곁에 앉았던 자입니다."검시를 마친 운설이 말했다."선 채로 내려 그은 각이 아닙니다. 나란히 앉았다가 — 일어서며 그었습니다. 술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 일어서는 척하며.""술잔은 하나뿐이었어요."남궁완이 서안을 가리켰다. 단희의 잔만 마르다 만 술을 담은 채 놓여 있었다."한데 술병의 술은 두 잔 몫이 비었죠. 손님 잔은 씻겨서 — 저기, 시렁의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어요. 사람을 죽이고 잔을 씻어 제자리에 놓는 손. 서두른 데가 한 군데도 없어요."침착한 손. 익숙한 손. 운설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시렁 아래, 벽의 빈 못 하나에 눈이 멎었다."피리가 없습니다."뼈피리. 그 밤 이후 불지 않던, 그러나 버리지도 못하던 단희의 피리. 벽의 못에 늘 걸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범인이 가져갔군요." 한겸이 말했다. "어째서.""증거라서가 아니다."혈비가 방 어귀에서 말했다. 언니의 눈은 빈 못에 박혀 있었다."저 피리는 스승의 것이다. 재주 없는 제자가 — 평생 넘지 못한 가락의 임자가 스승이지. 죽이고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17화 — 효월(曉月)

    "대월이다."혈비가 끊긴 물음을 제 입으로 맺었다."그 겨울 병풍 뒤에 앉아 삭월의 방비를 제 손으로 허문 것도, 벗의 낯으로 중원에 침략설을 심은 것도, 같은 자다. 학살이 아니라—" 언니는 거기서 잠깐 숨을 골랐다. "학살로 지운 정변이다. 저들의 칼을 빌려, 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왕의 유해는 사당에 모셨다. 봉했던 사당의 문을 열고, 삭은 제단을 닦고, 거적 대신 기수들의 겉옷을 벗어 받쳤다. 격식은 모자랐으나 예는 모자라지 않았다."궁으로 모신다."혈비가 말했다."대전의 위패에 글자가 없는 것은 — 누구의 죽음도 확인하지 못해서였다. 이제 첫 글자를 새긴다."사백은 낮 동안 우물을 한 번 더 내려갔다 왔다. 사냥꾼의 꼼꼼함이었다. 벽감도 바닥도 더 나온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우물 벽의 돌 하나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고 — 손톱 자국 같은 것이. 물속에 던져질 때 왕이 살아 있었는지 죽어 있었는지, 그 자국은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은 물음도 있었다. 운설은 그 말을 혈비에게 옮기지 않기로 했다. 의녀의 장부에도 덮는 갈피는 있었다.밤샘은 자매가 맡았다.사당의 등잔 곁에 두 사람이 앉았다. 뼈가 된 아버지와, 아버지를 모르는 딸과, 아버지를 열여덟 해 만에 되찾자마자 뼈로 받은 딸이."다섯 살에 저 검을 만지다 손을 베였다."혈비가 낮게 말했다. 언니의 목소리에서 처음 듣는 결이었다. 원한도 판도 아닌, 다만 기억의 결."아버지는 나를 나무라는 대신 웃으셨다. 검이 너를 문 게 아니라 네가 검을 문 것이라고. 그 손으로 크면 — 이 검이 언젠가 네 것이 된다고." 언니의 손이 물때 낀 검집 위에 얹혔다. "목마도 태워 주셨다. 왕은 어깨가 넓어야 한다며. 어깨 위에서 보는 궁이 좋아서, 나는 내려오기 싫다고 울었다."울었다. 언니에게도 우는 법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언니."운설은 오래 미뤄 온 것을 물었다."언니의 이름은요. 혈비 말고 —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요."등잔이 흔들렸다. 혈비는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16화 — 찬 달

    우물돌은 네 사람이 붙어서야 밀렸다.십팔 년 치 이끼가 갈라지며 돌이 굴렀고, 열린 아가리에서 갇혔던 밤공기가 올라왔다. 물 냄새. 돌 냄새. 그리고 그 밑의, 아주 오래 고인 것의 냄새.운설은 우물전에 손을 짚고 귀를 열었다."물이 있습니다. 깊이는 세 길쯤. 물 밑에—"폭주의 벼랑에서 들었던 그 물소리가, 이제 고요한 감각 안에서 또렷했다. 열여덟 해를 좁은 돌 안에서 맴돌기만 한 물. 그 물이 품고 도는 것 하나."기다린 것이 있습니다.""열어야 합니까." 한겸이 물었다. 법이 몸에 밴 자의 물음이었다. "봉한 자가 열라 했습니다. 함정일 수도—""함정이면 벌써 터졌다." 혈비가 말했다. "저자는 우리를 여기서 죽일 셈이 없었다. 죽일 셈이었으면 그림을 보여 주다 말고 갔겠지. 저 안에 있는 것도 — 그림의 다음 장이다."보여 주러 왔다던 자가, 가면서도 보여 주고 갔다. 그 셈법이 소름 끼치게 한결같아서, 운설은 우물 아가리가 벌린 입 같았다.사백이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횃불이 우물 벽을 훑으며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밧줄이 두 번 당겨졌고, 올리라는 신호에 우르와 기수들이 줄을 감았다.올라온 것은 거적에 받친 유해였다.물속의 열여덟 해는 뼈만 남겼다. 뼈와, 뼈에 감긴 삭은 옷가지와, 그리고 뼈 곁에 나란히 올라온 것 둘.검 한 자루. 그리고 손바닥만 한 쇠패 하나.검은 물때에 덮이고도 격이 죽지 않았다. 검집의 은입사가 별빛에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패는 사백이 물때를 닦아 혈비에게 건넸다. 패의 낯에 새겨진 것은 초승달이 아니었다.찬 달이었다. 한 점 이지러짐 없는 만월.혈비가 그 패를 받아 든 채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언니는 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물때 낀 검집을 쓸어내리는 손이, 어느 결에 떨리고 있었다."아버지."붉은 달의 주인이 말했다. 십팔 년 동안 입에 올리지 않던 부름이었다."아버지의 검이다. 다섯 살에 이 은입사를 만지다 손을 베였다. 왕의 검은 왕만 차는 것이라고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15화 — 언니와 원수

    네 어미와, 너였다.그 말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담이 넘어왔다. 혈비가 어둠에서 걸어 나와 우물가의 별빛 속으로 들어섰다. 십팔 년을 걸어온 걸음치고 그 쉰 걸음은 너무 짧았다."그 여인은."언니의 첫마디는 물음이었다. 목소리가 하도 골라서, 그 고름이 이미 칼이었다."그 방의 여인은 — 어찌 되었나."운백천은 혈비를 마주 보았다. 열여덟 해 전 눈밭에서 간수문과 약조를 맺던 그 낯으로, 이번에는 죽은 왕정의 딸 앞에 섰다."여인이 먼저 아이를 내밀었다."아버지가 말했다."문을 연 것이 선봉의 칼이라는 것을 알면서. 도리어 나를 향해 아이를 내밀며 말했다. 데려가라. 데려가서 —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키워라. 이름은 지어 두었다. 눈 내리는 밤에 났으니."설야. 운설의 안에서 무언가가 소리 없이 갈라졌다. 이름을 지은 것은 어머니였고, 이름을 들은 첫 남이 아버지였다."나는 아이를 안고 그 방을 나왔다. 여인은 화로 곁에 남았다. 그 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기서 처음 부서졌다. "모른다. 알려 하지 않았다. 아는 순간,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편리한 무지로군."그늘 속의 대월이 웃었다. 운설은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즐거워하고 있음을 들었다."궁금하지 않으냐, 설야. 그 방의 여인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거든 — 달이 다시 차기를 기다려라."혈비의 검이 소리를 냈다.뽑힌 칼끝이 향한 곳은 그늘이 아니었다. 운백천이었다. 십팔 년의 맹세가 가리키는 자리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얼음여울의 물길을 연 손. 봉화의 그늘을 짚어 준 손. 스물여섯 무덤의 문을 연 손."언니."운설이 그 사이에 섰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였다. 칼끝과 아버지 사이, 반 보."비켜라, 아우야.""못 비킵니다.""찾아 다오, 했다. 네가 찾았다." 언니의 눈은 아우를 지나 그 뒤의 사내에게 박혀 있었다. "그자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 이라 했지. 배신자가 맞았다.""속은 자입니다.""속아서 연 문으로 스물여섯이 죽었다."칼끝은 흔들리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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