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21 - Chapter 130

275 Chapters

제121화 — 지워진 이름

진눈의 처분은 아침 대전에서 갈렸다."세작의 끝은 하나입니다."흑요가 말했다. 왕의 유해가 돌아온 뒤로 노파의 서슬은 더 곧아져 있었다."케테 때 저울을 굽혔고, 그 저울이 단희를 눕혔습니다. 두 번 굽히면 — 다음에 눕는 것이 누구겠습니까."틀린 셈이 아니어서 방이 무거웠다. 혈비는 오래 말이 없다가, 물었다."진눈이 잡힌 것을 저들이 아느냐.""모릅니다." 사백이 답했다. "덫은 소리 없이 접혔습니다. 목격은 우리뿐입니다.""그럼 잡히지 않은 것으로 한다."언니의 저울은 이번에도 규율의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다만 케테 때와 같은 기울기가 아니었다."등잔도, 암거도, 진눈의 손도 — 그대로 살려 둔다. 이제 그 통로로 흐르는 것은 전부 우리가 골라 넣은 것뿐이다. 저들의 귀를 우리가 쥔 것이다. 처분은 그 귀의 쓸모가 다한 날 다시 저울에 올린다."흑요는 승복하지 않은 낯으로 승복했다. 노파가 물러나며 남긴 한마디가 문지방에 오래 남았다."마님의 저울이 자꾸 사람 쪽으로 기웁니다. 그게 — 옛날 어른의 저울입니다."옛날 어른. 왕의 저울. 그 말이 꾸지람인지 그리움인지는 노파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운설은 처분이 끝난 뒤 제 몫의 선언을 했다."치료는 계속합니다."진눈이 갇힌 곳간에서, 그녀는 침통을 꺼내며 말했다. 젊은 무사는 어리둥절한 낯이었다."저를 — 왜요.""당신 병이 저들의 미끼였으니까요."침이 등의 혈을 짚었다. 물소리를 듣고, 흘리고, 거두는 손이 병든 폐의 어둠 속을 오래 더듬었다."월하의 물의 임자가 누군지, 그자가 정해 준다기에 — 저는 제 물로 답하려고요. 이 물은 사람을 사는 물이 아니라 살리는 물이라고. 당신 서른의 봄을, 그자의 약속 말고 제 침으로 한번 겨뤄 보겠습니다."진눈은 한참 말이 없었다. 이윽고 젊은 무사가 웃었는데, 늘 웃던 그 웃음과 결이 달랐다. 농담이 한 톨도 안 섞인 웃음이었다."지는 쪽이 벌주 마시는 겁니까.""당신이 지면 서른 넘게 삽니다. 제가 지면—" 운설은 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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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 작은 어른

이름이 지워진 자를, 노인들은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불렀다. 작은 어른.구술은 사흘 밤에 나눠 이루어졌다. 한 번에 다 말하기에는 늙은 몸들이 버거워하는 이야기였다. 부수가 말하고, 더운돌이 보태고, 흑요가 바로잡고, 묵할멈이 손짓으로 채웠다. 한겸이 그 모든 것을 받아 적었다. 지워진 이름의 자리에 젊은 감찰은 빈 네모를 그렸다.작은 어른은 형보다 세 살 아래였다.형이 활과 말을 받는 동안 아우는 붓과 자(尺)를 받았다. 겨울 궁의 회랑과 온천의 물길과 우물의 깊이가 다 그 붓에서 나왔다. 그리고 — 월하심법이 그에게 갔다."심법은 장자의 것이 아니오." 부수가 말했다. "물소리를 듣는 귀가 밝은 아이에게 가는 법이지. 그 대의 귀는 아우였소. 형은 서운해하기는커녕 기뻐했지. 저는 지키는 사람, 아우는 고치는 사람 — 그리 갈라 맡자고."지키는 형과 고치는 아우. 왕의 검과 아우의 붓. 그 시절의 겨울 궁은 그렇게 돌아갔다고 했다."딸이 하나 있었소."더운돌이 받았다. 탕가의 김 같은 목소리가 그 대목에서 낮아졌다."눈이 크고, 잘 웃고, 물가에서 살다시피 하던 아이였는디. 여덟 살 나던 해 겨울에 — 얼음이 꺼졌소. 온천 아래 찬물 웅덩이였지. 건졌을 때는 벌써."방 안의 등잔이 흔들렸다."작은 어른이 심법으로 아이를 붙들었소. 밤낮 사흘을. 멎은 것을 도로 흐르게 하겠다고. 한데 마님들도 알 것이오 — 월하의 금이 뭔지."죽은 것은 못 살린다.운설은 제 입안에서 그 금이 얼음처럼 굴렀다. 언니의 입에서 처음 들었던 법. 이 물의 임자라면 언젠가 이 금 앞에 무릎 꿇는 날이 온다던."사흘째에 왕이 아우의 손을 아이에게서 떼어 냈소. 심법이 산 사람을 잡아먹기 전에. 작은 어른은 그날로 다른 사람이 됐지. 금이 틀렸다고 했소. 물이 모자란 게 아니라 그릇이 모자란 거라고. 더 큰 그릇이면 — 죽음도 물길처럼 돌릴 수 있다고."그때부터였다고 했다. 작은 어른의 방에서 밤마다 이상한 물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앓다 죽은 짐승들이 물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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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 보름 편지

보름달이 뜬 밤, 우물의 두레박에 꾸러미가 올라왔다.이제 그 통로는 이쪽의 것이었다. 진눈은 여느 때처럼 받으러 가는 시늉을 했고, 꾸러미는 뜯기기 전에 대전 곁방의 탁자에 먼저 올랐다. 기름 먹인 가죽 안에서 나온 것은, 이번에는 편지였다. 처음으로 — 글을 아는 자들에게 보내는. 갈대 종이에, 수결의 획으로, 길게.받는 이의 이름이 겉면에 적혀 있었다. 두 개였다.효월. 설야.지워진 이름의 임자가, 지워지지 않은 두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고 있었다. 혈비의 낯이 그 겉면 앞에서 잠깐 굳었다. 십팔 년 만에 남의 붓에서 제 본명을 보는 낯이었다.편지는 혈비가 소리 내어 읽었다. 읽기 전에 언니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운설, 선우현, 사백, 남궁완, 한겸, 흑요. 숨길 수 있는 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조카들에게.달이 찼으니 약조대로 어미의 이야기를 한다.너희 어미는 살아 있다.방 안의 공기가 한 번에 얼었다. 혈비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다음 줄로 갔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흔들리는 것보다 무서웠다.그 밤 나는 형수에게 셈 하나를 내밀었다. 함께 가면 딸들이 산다. 남으면 — 물이 어디로 넘칠지 나도 모른다. 형수는 셈이 빠른 사람이라,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큰 딸은 벽장에 숨기고, 작은 딸은 선봉의 품에 안기고, 저는 내 곁으로 왔다. 열여덟 해 전 일이다.그 열여덟 해 동안 형수가 내 곁에서 무엇이었는지는 — 너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볼모라 부르면 형수가 웃을 것이고, 손님이라 부르면 내가 웃을 것이다.혈비의 목소리가 거기서 처음 멎었다. 언니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호흡을 골랐다. 그 밤 벽장 안에서 열두 살이 본 마지막 그림 — 어머니가 제 발로 걸어가던 등 — 이 저 두 줄 사이 어딘가에 접혀 있을 것이었다. 언니가 열여덟 해 봉해 온 그림이.읽기는 계속되었다.보고 싶으냐.보고 싶거든 오라. 왕정의 폐허로. 다음 그믐에.선우현의 손이 탁자 아래에서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쥐는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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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 벽장 안의 열두 살

그 밤 이야기를, 혈비는 아우에게만 했다.대전도 곁방도 아닌, 온천 마당의 바위에 나란히 앉아서였다. 더운돌 영감이 말없이 등롱 하나를 걸어 주고 절뚝이며 물러갔다. 김 오르는 물소리가 남의 귀를 대신 막아 주는 자리였다."편지의 그 두 줄 말이다. 벽장과 강보."언니는 김 너머 어둠을 보며 시작했다."벽장에 숨은 것은 맞다. 한데 편지가 안 쓴 것이 있다. 나는 — 벽장 문틈으로 다 보았다."운설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언니가 이 문을 여는 데 십팔 년이 걸렸다. 문을 여는 사람의 속도를 듣는 사람이 정하는 법이 아니었다. 의녀의 일과 같았다. 상처를 씻을 때는 상처의 결을 따라간다.열두 살의 밤이 십팔 년 만에 열렸다."자정께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 하셨다. 벽장에 넣고, 이불을 덮고, 문틈만 한 뼘 남기고 — 그러고는 아기를 쌌다. 강보에. 수놓던 천을 반으로 잘라 함께 넣으시더라. 가위가 없어서 — 수틀 곁의 작은 칼로."칼로 자른 자리. 월하촌의 함에서 나온 그 천의 잘린 가장자리가, 언니의 기억 속에서 지금 잘리고 있었다."그리고 문이 열렸다. 두드림도 없이. 나는 칼든 자들인 줄 알고 숨을 삼켰는데 — 들어온 것은 하나였다. 검은 포의. 낯은 문틈 밖이라 못 봤다. 목소리만 들었지."함께 가면 딸들이 산다."어머니는 반 각도 아니었다. 숨 몇 번이었다. 아기를 안고 일어서서 — 딱 한 번 벽장 쪽을 보셨다. 문틈의 내 눈과, 어머니의 눈이 마주쳤다."혈비의 목소리는 평평하게 갔다. 평평한 것이 언니가 우는 법이라는 것을, 운설은 이제 알았다."어머니는 고개를 아주 조금 저으셨다. 나오지 마라. 소리 내지 마라. 그리고 — 입 모양으로만 말씀하셨다. 살아라."살아라. 새벽달로 태어난 열두 살에게 남겨진 마지막 말."그러고는 그자를 따라 걸어 나가셨다. 제 발로.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이 닫히고 — 나는 벽장에서 아침까지 나오지 못했다. 나온 아침에는 세상이 없어져 있었지."김이 두 사람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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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 딸들만

딸들만 오라는 조건은, 예상대로 마당을 둘로 갈랐다."안 되오."선우현의 목소리가 회의 첫머리를 잘랐다. 늘 반 보 물러서 말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반 보 앞에서 말했다."물마당에서, 물목에서, 우물가에서 — 저들의 판에 들 때마다 값을 치렀소. 이번 판은 왕정의 폐허요. 저자가 지은 성의 심장이오. 문이라는 문은 다 저자의 붓에서 나온 땅에, 검 하나 없이 두 사람만 보내라?""보내는 게 아니라 가는 겁니다."운설이 받았다. 두 사람의 눈이 탁자 위에서 부딪쳤다. 처음으로 물러설 자리가 서로에게 없는 눈이었다."어머니가 거기 있습니다.""함정이 거기 있소.""둘 다 있지." 혈비가 갈라선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셈을 하자. 저자가 딸들만 부른 까닭이 무엇이냐."사백이 사냥꾼의 답을 놓았다."죽일 셈이면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산 채로 — 는 처음부터 저들의 표기였고요. 저자는 마님들을 상하게 할 셈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날은.""그럼 무엇 때문에.""보여 주려고요." 운설이 말했다. 말하면서 확신이 앉았다. "그자는 늘 보여 줬습니다. 아버지의 정체를, 왕의 유해를, 지워진 이름을. 저울에 올릴 것을 하나씩 보여 주고 — 우리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봅니다. 이번에 보여 줄 것이 어머니고요. 검이나 활이 곁에 있으면, 그 저울이 흐려진다는 거지요.""저울이라니. 무슨 저울 말이오."선우현의 물음에 운설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짚이는 것이 있는데 입에 올리기 무서운 저울이었다. 심법의 족보. 빌려 쓰는 것. 그릇. 덜 익었다던 말. — 그자가 재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였다."저요." 그녀가 말했다. "그자의 저울에 올라 있는 건 저입니다. 죽은 딸을 못 살린 물의 — 다음 임자로서요."방 안이 조용해졌다. 대월이 산 채로, 흠 없이 원해 온 것의 셈이 그 한 줄로 맞았다.남궁완이 마지막으로 제 몫을 얹었다."가시기 전에 하나만요. 그자의 저울에 오르실 거면 — 저울이 뭘 재는지 아는 게 무기예요. 그자는 그릇을 잽니다. 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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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 북행

왕정의 폐허까지는 궁에서 이틀 길이었다.검은바위산의 등을 넘어, 얼음강의 최상류를 끼고 북으로. 지도에는 길이 없었다. 십팔 년 동안 아무도 가지 않아 길이 지워진 땅이었다. 부수 노인이 기억으로 그린 약도 한 장이 지도를 대신했다.그믐 이틀 전 새벽, 자매는 궁문을 나섰다.맨몸이라는 조건은 지켜졌다. 검도 활도 없이, 말 두 필과 이틀 치 양식과 — 운설의 소매에 은침 한 통. 침은 의녀의 손이지 병기가 아니니, 이 셈만은 저들도 못 깎는다고 혈비가 정리했다.배웅은 문루 아래에서 짧게 끝났다. 긴 배웅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다들 말을 아꼈다. 여리만이 참지 못하고 묵할멈의 치마폭에 낯을 묻었고, 우르는 괜히 활시위만 퉁겼고, 남궁완은 부채를 폈다 접었다 했다.선우현은 배웅하지 않았다.그는 전날 밤에 이미 궁을 나가고 없었다. 그림자 뒤에서 가겠다던 말대로, 어느 그늘을 잡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운설의 봇짐 맨 밑에 짧은 무명실 토막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가보(家寶)를, 그가 처음으로 제 몸에서 떼어 놓고 간 것이다.항구. 실토막이 봇짐 밑에서 어젯밤의 그 말을 대신했다.첫 밤은 바위 그늘에서 났다. 불을 피우고, 마른 육포를 씹고, 번을 갈랐다. 잠들기 전에 혈비가 문득 말했다."이 길을 — 열여덟 해 전에는 거꾸로 갔다. 업혀서. 눈 속을." 언니는 불씨를 뒤적였다. "업어 준 등이 누구 것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그게 요즘 자꾸 걸린다. 그 밤 나를 업고 눈을 건넌 등이 있는데 — 낯이 없어."벽장에서 나온 열두 살을 누가 업어 궁까지 데려갔는가. 아무도 셈해 본 적 없는 자리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낯이 없는 등. 운설은 그 말을 봇짐의 실토막 곁에 챙겨 두었다. 구멍은 언제나 나중에 값이 됐다.북으로 갈수록 땅이 변했다.나무가 줄고, 바위가 늘고, 바람이 이빨을 세웠다. 초여름의 남쪽과 달리 이 땅의 계절은 아직 이른 봄의 등이었다. 이틀째 오후, 두 사람은 능선 하나를 넘다가 말을 세웠다.눈앞에 왕정이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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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 달맞이 탑

탑 안은 팔각의 빈 방이었다.돌벽을 따라 나선 계단이 위로 감겨 올라갔고, 등잔 셋이 벽감에서 타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낮은 탁자 하나. 탁자 위에 차 석 잔. 김이 오르는 잔이 둘, 식어 가는 잔이 하나.그리고 탁자 건너에, 그 사람이 앉아 있었다.그늘이 아니었다. 등잔 빛 아래,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난 낯이었다.예순 줄의 노인이었다. 반백의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검은 포의를 입고, 등을 꼿꼿이 세운. 낯의 골은 깊었으나 눈만은 깊지 않았다 — 눈은 이상하리만큼 맑고 어렸다. 여덟 살 딸을 잃던 날에서 한 발도 나오지 못한 눈이었다.그리고 운설은, 그 낯을 알았다.숨이 멎었다. 아는 얼굴이라던 아버지의 글이 눈앞에서 살이 되었다. 어디서 본 낯인지 기억이 미친 듯이 뒤로 달렸다 — 겨울 궁이 아니다. 무한이 아니다. 더 전에. 더 처음에.백로진.눈 오는 밤의 약방. 화로 곁. 언 손을 내밀던 —"손가락이 안 펴진다던 노파를 기억하느냐."노인이 말했다. 낮고,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로. 그 목소리에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갈라진, 늙은 여자의 목소리. 의원, 이 손가락이 안 펴져."굽은 손가락에 침을 놓고, 화로에 손을 데워 주고 — 약값 대신 곶감을 받았지. 눈이 밝고 손이 야무진 의원이었다. 나는 그날 네 손을 보러 갔다. 물의 임자가 될 손인지. 열여덟 해를 기다린 그릇이 어찌 여물었는지."곁의 혈비가 탁자를 짚었다. 언니는 백로진의 약방을 모른다. 한데 언니가 굳은 것은 다른 자리였다."철마다." 혈비의 목소리가 낮게 갈렸다. "열여덟 해를 철마다 — 남쪽을 드나들었다고. 붉은 달이 강호의 그늘이란 그늘을 다 뒤지는 동안, 너는 사철 지팡이를 짚고 그 그늘 사이를 —""지나다녔지." 노인이 순순히 받았다. "네 기수와 주막에서 겸상도 했다. 좋은 아이들이더구나. 어미 이야기를 하며 울던 아이도 있었지."케테.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잔인했다.첫 화의 밤. 이야기가 시작되던 그 밤의 첫 손님.운설의 등줄기로 열여덟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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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 반 술

많이 컸구나.그 한마디에 열여덟 해가 담기는 법을, 운설은 그 순간 배웠다.혈비가 먼저 움직였다. 붉은 달의 주인이, 열두 살처럼 계단 아래로 두 걸음을 달려가다 — 멈췄다. 멈춘 자리에서 언니는 어머니를 보았다. 다가가지 못하는 두 걸음이 열여덟 해였다."어머니.""효월아."부인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어머니의 입이 살아서 불렀다. 그것으로 언니의 두 걸음이 마저 무너졌다. 혈비는 어머니의 앞에 닿아, 안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부인의 손이 딸의 흰머리 섞인 머리를 쓸었다."미워했느냐.""미워했습니다." 언니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열여덟 해를. 그 등을. 뒤도 안 돌아보던—""잘했다." 부인이 말했다. "미움이 너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그 미움이 효자다."그리고 부인의 눈이 운설에게 왔다.수를 놓다 만 사람의 눈. 화로 곁에서 문을 여는 자를 보던 눈. 울지 않는 아이를 낳은, 울지 않는 눈. 그 눈이 강보에 싸 보낸 것의 다 자란 낯을 처음으로 보았다."설야."어머니가 지은 이름을, 어머니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운설은 울지 않았다. 우는 법을 배운 몸인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큰 것은 몸이 받는 데 시간이 걸렸다. 대신 그녀는 의녀가 하는 법으로 했다. 다가가서, 어머니의 두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쌌다.차가웠다.열여덟 해 전 눈밭의 온도가 아직 거기 있는 것처럼."손이 차십니다." 그것이 딸이 어머니에게 한 첫마디였다. 약방의 첫 손님에게 하던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하고 나서 알았다."네가 데워 주면 되겠구나." 부인이 웃었다. 웃는 낯의 눈매가 운설 저와 같아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차는 다시 데워졌다. 탁자에 넷이 앉았다. 열여덟 해 만의 모녀와, 그 열여덟 해를 그린 자가 한 상에.어머니는 딸들에게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큰딸에게는 궁의 사람들을 — 흑요가 여태 그 성미냐, 더운돌 영감 무릎은, 묵할멈은. 이름 하나하나에 열여덟 해 치 그리움이 얹혔다. 작은딸에게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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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 저울의 눈금

새 닻.그 두 글자가 탑 안의 공기를 통째로 바꾸었다. 등잔 세 개의 불꽃마저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열여덟 해 만의 상봉이 깔려 있던 자리에, 흥정의 상이 차려진 것이다."싫다면."운설이 물었다. 목소리를 고르게 내는 데 온 힘이 들었다."싫다면 할 수 없지." 대월은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억지로 앉히는 법을 모른다. 문만 안다. 케테에게는 어미가 문이었고, 진눈에게는 목숨이 문이었고 — 네게는."노인의 눈이 어머니에게 갔다가, 돌아왔다."이 사람이 문이겠지."어머니를 볼모로 걸겠다는 말을, 이 사람은 이렇게 했다. 협박의 낯을 한 문장이 하나도 없는데 방 전체가 협박이었다."닻이 낡으면 배가 날뛴다. 형수의 손이 다하는 날 — 내 안의 것이 무엇을 할지 나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두렵고, 두려운 것은 정직한 것이다. 네가 곁에 앉으면 형수는 놓여난다. 열여덟 해 만에. 딸들 곁으로 — 남쪽으로."어머니를 살리려면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라.혈비의 손이 탁자 밑에서 주먹이 되는 것을 운설은 보았다. 검이 없는 자리라는 조건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검이 있었으면 언니는 이미 뽑았을 것이고, 뽑는 순간 이 탑에서 살아 나가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저울의 방에 칼을 못 들이게 한 것까지 — 전부 설계였다.저울이 마침내 눈금을 보였다. 산 채로, 흠 없이. 그림 지령의 세로줄 하나. 물결 딛는 여자. 열여덟 해 치 설계의 끝이 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안 된다."혈비가 잘랐다."운설아, 이건 흥정이 아니다. 갈아 끼우는 것이다. 어머니의 열여덟 해를 네 남은 평생과—""압니다.""알면—""한데 언니. 저 사람 말 중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운설은 저울을 정면으로 보았다. "닻이 낡으면 배가 날뛴다. 저 안의 것이 풀리면 — 겨울 궁도, 무한도, 남쪽의 성읍들도. 물은 임자를 가리지 않으니까요."운설은 말을 하며 제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서운 것은 저 사람의 협박이 아니었다. 제 안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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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 달무리

그 밤 탑의 이 층에는 등잔 하나만 켜졌다.어머니와 두 딸. 셋이 눕기에 방은 좁았고, 좁은 것이 좋았다. 열여덟 해 치 온기를 하룻밤에 나누기에는 좁을수록 나았다.어머니는 먼저 딸들의 머리를 땋았다."삭월 계집은 어미가 머리를 땋아 줘야 어른이 되는 법이다."서른 살 붉은 달의 주인이 어미 무릎 앞에 등을 대고 앉았다. 여리가 재잘대며 흉내 내던 그 땋음을, 임자의 손이 했다. 혈비는 땋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등이 조금씩 낮아지더니 나중에는 열두 살의 등이 되어 있었다.운설의 차례에 어머니의 손끝이 잠깐 멎었다."머릿결이 나를 닮았구나.""눈매도 닮았다고 들었습니다.""고집은 누굴 닮았는지 보자꾸나." 어머니가 웃으며 땋기 시작했다. "그 검객 말이다. 도련님이 다 일러 주더라. 강이 그 사람 곁에서 순해진다지."운설의 귀가 붉어졌다. 어머니 손에 머리를 잡힌 채라 도망갈 데도 없었다."그럼 됐다." 어머니는 그 말만 했다. "물이 저 갈 곳을 알면 — 어미가 더 바랄 게 없다."자리에 눕기 전에 어머니는 혈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오래, 물소리를 듣는 손으로."멎은 게 아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미움 밑에 눌린 것뿐이야. 눌린 물은 — 누르는 것이 걷히면 도로 흐른다. 그날이 오면 겁내지 마라. 열여덟 해 만에 흐르는 물은 한 번은 크게 우니까."혈비는 그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온천의 접촉 사고 이후 처음으로, 언니가 제 안의 물 이야기를 피하지 않았다.밤이 깊어 딸들이 눕자, 어머니는 등잔 곁에 앉아 반짇고리를 열었다.낡은 천이 나왔다. 이지러진 달 아래 아이 둘 — 딸들이 반쪽씩 지녀 온 그 수의, 어머니 몫의 원본이 거기 있었다. 열여덟 해 동안 끝을 안 낸 수.바늘이 천을 지나는 소리를 들으며 운설은 잠들었다. 끝을 내면 정이 끝난다고 안 놓는 분이라던 언니의 말을, 잠결이라 셈에 넣지 못했다.새벽에 눈을 떴을 때, 수는 끝나 있었다.달 아래 아이 둘의 위로 어머니가 밤새 놓은 것은 — 달무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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