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91 - Chapter 200

270 Chapters

제191화 — 얼음여울의 자락

이야기는 아침의 눈빛에서 시작해, 한 걸음씩 그 하루를 걸었다."덫인 줄 알고 들어갔습니다. 사백이 앞에 서고, 그이는 제 반 보 뒤에 — 늘 있던 자리에 있었어요."수레가 비어 있던 것.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불던 것. 비탈의 눈이 부옇게 일어서던 것. 그녀는 하나도 건너뛰지 않았다. 건너뛰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서. 세상의 반이 지워지던 순간에 닿자 목소리가 흔들렸고, 흔들리는 채로 계속했다."물이 일어섰습니다. 제 강이 — 제가 못 듣는 사이에 — 골짜기의 강을 통째로 세웠어요."얼음 밑의 물이 무겁게 출렁이기 시작했다."그이가 달려왔습니다. 오지 말라고 소리쳤는데, 나오는지도 모를 소리였고 — 그이는 어차피 들어도 왔을 사람이라."물의 벽. 밀리고 나아가고 물리면서 나아가던 걸음. 닿던 두 팔. 읽히던 입모양. 입술. 그리고 —"등으로 받았습니다. 전부."개울이 일어섰다.얼음장이 깨지며 물이 새벽 어둠 속에 검게 솟았다. 무거운 물이었다. 반년 치의 문장을 먹은 물. 임자를 겨누고 — 겨누다 — 부들부들 떠는 물. 운설은 달아나지 않고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끝까지 지나가 보기로 한 하루였다."그리고 물소리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일어선 물을 올려다보며,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을 놓았다. 반년 동안 한 번도 소리 내지 못한 조각을."제일 먼저 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너였다 — 였습니다. 네가 망가뜨렸다. 내 강이. 내 것이. 나의 — 나가."물이 크게 흔들렸다. 임자의 미움을 정통으로 받은 물이 마지막으로 몸을 세웠다. 칠 것인가. 칠 수 있는가. 벌을 원하는 임자와 벌하지 못하는 물이 어둠 속에서 마주 서 있었다.한데 그 하루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걸어온 입이 — 이야기의 법대로, 멈추지 못하고 — 다음 문장을 냈다."한데 오늘 그 하루를 다시 걸어 보니."일어선 물이 귀를 기울였다."강은 그날 — 부탁을 들었습니다."멎어라. 돌아온 귀로 온 존재로 외친 그 한마디에, 골짜기 하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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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 다섯 번째 침

선우현은 눈을 뜨고도 사흘 동안 말보다 잠을 더 많이 잤다.첫날에는 이름 하나. 둘째 날에는 물 한 글자. 셋째 날 아침에야 문장다운 문장이 나왔다."얼마나."운설은 그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백열하루요."그는 오른손을 들려 했다. 팔은 이불 위에서 반 치도 오르지 않았다."검은.""산 아래 있어요. 단전은 부서졌고 남은 내력은 심맥을 붙들고 있어요. 검으로 돌리면 죽어요."그는 물그릇 하나 못 들 손을 오래 보았다."검신은 죽었군.""선우현은 살아 있어요.""둘이 다른지 모르겠소.""그럼 같이 배워요. 나도 검이 아닌 날의 당신을 배울 테니까.""장모님은."운설은 그의 손을 제 뺨에 댔다."당신이 돌아온 것까지 보고 가셨어요. 달아나면 쫓아가라고 하셨고."그의 손가락이 눈물 위에 겨우 머물렀다."그대에게 또 빚졌군.""빚 아니에요. 평생 치예요."운설이 몸을 받치자 그의 이마가 어깨에 내려앉았다."무겁습니까.""살아 있는 건 다 무거워요. 그래서 좋아요."선우현은 날마다 잃은 것을 확인했다.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두 걸음 만에 무릎이 꺾였다. 나흘째 물그릇이 깨지자 처음 성을 냈다."나가시오. 그대 앞에서 이 꼴로—""어떤 꼴인데요."운설은 칼을 쥐던 손을 펴 제 가슴 위에 올렸다."느껴져요?""예.""나는 이 손이 검을 드는 것보다 내 심장을 아는 게 더 좋아요."선우현은 포개진 손에 이마를 댔다. 운설은 검신의 애도를 재촉하지 않고 그 정수리를 쓸었다.봄은 설산에도 왔다. 눈이 안 녹는 산이라더니, 볕 드는 바위의 남쪽 낯만은 하루 한 뼘씩 젖어 갔다.강이 죄인의 옷을 벗고 선우현이 눈을 뜬 뒤 밤이 무섭지 않게 되었다. 운설은 아침마다 개울가에서 강과 하루를 열었다. 이야기도 사는 말이 되었다. 오늘 눈이 밝습니다. 언니가 국을 태웠어요. 현이 세 걸음 걸었습니다.그 봄의 어느 아침, 휘월이 그녀 앞에 소매를 걷고 앉았다."놓아 보아라."운설은 노인의 낯을 보았다. 어린 눈이 고요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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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화 — 기별

올라온 것은 진눈이었다.종이에 못 싣는 기별이라 젊은 무사는 상한 폐로 설산을 올랐다. 눈집에 들자 반 시진을 기침했고, 운설의 잔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서른 넘게 사는 내기 중입니다."기침이 가라앉고서야 진눈은 방 한편의 사내를 제대로 보았다.선우현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걷는 데 쓰고 남은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야윈 낯도 내려앉은 어깨도 예전 검신과 달랐다. 한데 눈은 같았다.진눈의 입이 벌어졌다."살아—""그 말을 백열이틀째 듣고 있소."퉁명스러움은 온전했다. 진눈은 웃다가 울었다. 선우현이 떨리는 팔로 밀어 준 물을 두 손으로 받았다."물장수 솜씨는 그대로군요.""값은 두 푼이오."기별은 두 갈래였다.궁은 무사했다. 부수의 폐가 반은 돌아왔고 여리가 파발을 썼다. 언덕의 살구나무 두 그루도 모두 싹을 냈다."나쁜 소식은.""남쪽입니다."진눈의 낯이 어두워졌다.재판은 이기고 있었다. 한겸의 법정이 열두 가문의 죄를 차례로 앉히는 중이었다. 한데 종이가 이기는 속도보다 — 불이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원한이 임자를 찾았습니다. 단죄 전에 무리가 가문들의 담을 넘습니다. 곳간과 사당, 지난달에는 사람도 탔습니다. 불은 죄를 안 가립니다.""법은.""법이 느립니다. 지금 제일 큰 불이 모이는 데가 선우가입니다."선우가.그 두 글자에 눈집이 조용해졌다.공훈록 첫 줄의 가문. 열두 줄의 머리. 죄로 치면 선고를 피할 수 없는 집. 한데 그 집은 — 그의 집이었다. 열아홉 금의 검집이 자란 집. 데인 흉이 새겨진 집. 물으면 집안이 조용해지던, 그가 평생 등에 지고 다닌 집."가주는 이미 옥에 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고요. 한데 무리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저택에 남은 것은 늙은이들과 아녀자들과 종들뿐인데 — 담 밖에 횃불이 밤마다 늘어납니다. 한겸 당주가 감찰 여섯을 보내 지키게 했는데 여섯으로 될 수가 없고, 남궁 아씨가 세가의 격으로 무리를 눌러 보려다 — 격이 안 먹히는 무리라는 것만 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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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 내려가는 길

산을 내려가는 데 열흘, 남쪽까지 다시 스무 날의 길이었다.내려갈수록 계절이 앞서 달렸다. 관도에는 보리가 패어 있었다. 무진은 보리 냄새와 수레 소리를 아이처럼 구경했다.선우현은 오전에는 수레를 타고 오후에는 걸었다. 스무 걸음이 넘으면 부부가 길에서 싸웠다."오늘 몫은 끝났어요.""한 걸음 남았소.""검객의 셈.""검객 아니잖아요."둘 다 멈췄다가 그가 먼저 지팡이를 짚었다."그럼 선우현의 셈으로 한 걸음."운설은 대답 대신 그의 팔을 제 어깨에 둘렀다. 둘이 같이 딛는 것으로 마지막 한 걸음을 셌다.세상은 정말 달라져 있었다.고을마다 격문이 있던 자리에 재판의 방이 붙었다. 열두 가문의 죄목과 선고 일정. 가는눈의 붓이 쓴 방들이 북쪽까지 올라와 있었다.그리고 주막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의녀가 어쨌느냐!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 물을 제 손으로 떠 마셨다 이 말이야. 요녀가 풀었다는 그 독물을!"어느 주막에서 운설은 왕철의 자락을 남의 입으로 들었다. 이야기 속 물장수는 실제보다 말이 많고 의녀는 더 침착했으나, 뼈대는 맞았다."물장수가 마지막에 어찌 됐는지 아는가." 이야기꾼이 목청을 낮췄다. "북쪽 얼음 골짜기에서 — 제 아내의 강을 제 몸으로 받았다네. 그래서 북쪽 사람들은 겨울 강물 소리가 유난한 밤이면 그런다지. 물장수가 물을 지고 가는 소리라고."주막이 조용해졌다가, 누군가 잔을 비우는 소리로 깨졌다.구석자리에서 국밥을 먹던 선우현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행인 옷에 갓을 깊이 눌러쓴 탓에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죽었군."운설이 눈을 흘겼다. "웃음이 나요?""내 죽음인데 너무 길지 않소.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저렇게 오래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제가 고쳐 줄까요?""두시오. 죽은 검신보다 산 환자가 다니기 편하오."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의 손은 탁자 아래서 운설의 손을 찾았다. 운설은 손가락을 얽고, 살아 있는 맥을 엄지로 한 번 눌렀다.문을 나설 때 강이 깊은 데서 굽이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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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 담 앞의 불

담 앞은 불과 소리의 바다였다.횃불 백여 자루가 정문 앞 마당을 메우고 있었다. 낫과 도끼와 몽둥이 — 살림살이들이 무기가 되어 있었다. 원한은 늘 살림살이부터 드는 법이었다. 담 안쪽에는 감찰 여섯이 창백한 낯으로 문을 등지고 섰고, 담 위로 저택의 늙은 종들이 물 양동이를 나르는 것이 보였다. 이길 수 없는 셈을 하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이었다."열두 줄의 첫 줄이 이 담 안에 있다!"무리의 앞에서 목청 하나가 불을 부채질했다."법이 느리면 불이 빠르다! 십팔 년을 기다렸다 — 하루를 더 못 기다린다!"함성이 마당을 흔들었다. 첫 횃불이 담을 향해 치켜들렸다.일행의 배치는 이미 끝나 있었다. 사백과 사수는 맞은편 지붕에 — 시위를 얹되 살촉에 천을 감고. 사람 무리에 겨눌 활이 아니라, 날아드는 횃불을 떨어뜨릴 활이었다. 우르와 진눈은 무리의 뒤쪽 어귀에. 혈비는 담 모퉁이의 어둠에. 휘월과 무진은 언덕에 남았다. "늙은이 둘은 구경이 소임이다. — 급하면 부르고." 눈먼 노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지팡이의 방울을 미리 손에 감아쥐고 있었다.그때 무리의 등 뒤에서, 여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무명옷에 약 봇짐. 등에 아무것도 지지 않은 빈 손. 여자는 무리를 헤치지 않고 가장자리를 돌아, 담과 무리의 사이 — 횃불의 사거리 한가운데 — 섰다.그녀의 반 보 뒤에는 갓을 깊이 눌러쓴 사내가 있었다. 검은 없고 지팡이만 있었다. 여자의 어깨를 빌리지 않고 서는 데 온 힘을 쓰는지, 지팡이를 쥔 손등이 가늘게 떨렸다. 그럼에도 자리는 정확히 반 보 뒤였다."비켜라! 뉘냐!""의원입니다."여자가 답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 마당의 소리가 이상하게 잦아들었다."불 앞이라 왔습니다. 불이 나면 다치는 사람이 있고 — 다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제 소임이라.""저 담 안 것들 편이냐!""저는 저 담이 세운 세상에 제일 크게 진 사람입니다."여자가 두건을 벗었다.앞줄부터 술렁임이 번졌다. 물을 고치는 손. 이야기 속의 그 의녀. 그리고 — 더 오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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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 물의 일

불이 초가에 혀를 대기 전에 — 운설은 이미 부탁을 놓고 있었다.저택의 연못에게. 우물 둘에게. 행랑 뒤의 실개천에게. 설산에서 배운 결대로, 세우지 않고, 조르지 않고 — 물의 일을 청했다.물이 응답했다.연못이 통째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밤물이 낮은 담을 넘어 행랑 지붕 위로 — 이불을 펴듯 — 넓게, 고요히 덮였다. 떨어진 횃불이 첫 연기를 올리다 그 밑에서 소리 없이 꺼졌다. 우물 두 개의 물이 두레박도 없이 솟아 지붕의 결을 타고 흘렀다. 기와가 젖고, 초가가 젖고, 담장의 마른 덩굴까지 젖었다.불이 붙을 자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을 — 백여 자루의 횃불이 지켜보았다.재앙이라 했다. 물의 마녀라 했고, 강이 일어서면 세상이 끝난다 했다. 그 힘이 지금 눈앞에서 하는 일은 — 남의 집 지붕을 적시는 일이었다. 밤하늘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안개에 횃불 빛이 번져 마당이 온통 붉고 부옇게 어른거렸다."물은 이 집 편도, 여러분 편도 아닙니다."운설이 물안개 속에서 말했다."물은 타는 것을 못 견딜 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그녀의 반 보 뒤에서 지팡이가 한 번 땅을 짚었다.갓 쓴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한 걸음에 숨을 고르고, 또 한 걸음. 운설이 팔을 잡으려 하자 그가 손끝으로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괜찮지 않은 낯으로.마당 한가운데에서 선우현은 갓을 벗었다.물안개가 걷힌 자리로 그 낯이 드러났다. 소문으로 죽은 검신. 천하의 칼들이 먼저 길을 비키던 사람. 한데 지금 허리에는 검이 없고, 지팡이 없이는 서지도 못하는 사내.무리의 숨이 한꺼번에 멎었다."살아—""살았소."선우현은 짧게 답했다."선우가가 지은 죄를 덮으러 온 것이 아니오. 내 아버지도 법정에 있고, 죄가 있다면 내 이름의 몫까지 받게 할 것이오. 다만 이 담 안의 죄 없는 사람을 태우려거든—"그는 빈 오른손을 보았다. 예전이라면 검병이 있었을 자리."나부터 밀고 가시오.""검도 없는 자가 뭘 막는다고!"뒷줄에서 누군가 외쳤다.선우현은 대답 대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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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 그 방

"어머니."선우현이 그 말을 한 뒤, 모자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노부인은 아들의 낯을 보고도 손을 뻗지 못했다. 소문으로 죽었다던 아들이 물안개 속에 서 있었다. 살아 있으나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검이 있어야 할 허리는 비었고, 지팡이를 쥔 손은 떨렸다."정말 너냐.""예.""걸어 보아라."선우현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어머니는 평생 아들에게 칼을 보여 보라 했고 보법을 펼쳐 보라 했다. 오늘 처음으로 사람이 걷는 것을 보여 달라 하고 있었다.그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른발이 땅을 짚고 왼쪽 무릎이 흔들렸다. 운설이 한 치 뒤에서 손을 펴고 기다렸다. 두 번째 걸음. 세 번째에서 몸이 기울었다.노부인이 먼저 아들을 받았다.지팡이를 놓친 어미와 지팡이 없이는 못 서는 아들이 서로를 붙들었다. 노부인의 손이 살아 있는 뼈를 세듯 아들의 등을 더듬었다."너였구나."노부인이 중얼거렸다."어릴 적부터 무거웠지. 업어 주지도 못하게.""그때는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오늘은 업혀라.""싫습니다."오랜만에 만난 모자의 첫 다툼이 그 말이었다.운설은 울면서 웃었다. 노부인의 눈이 그제야 그녀에게 왔다."네가 현이의 사람이냐.""예. 그이의 안사람입니다.""고맙다는 말부터 하면 네가 싫어하겠지.""아닙니다.""그럼 고맙다."노부인은 운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들의 맥을 백열이틀 붙들었던 손이었다."살려 데려와 줘서."선우가의 안은 크고 조용했다. 격식이 소리를 다 삼킨 집. 연무장의 검집 걸이들. 물으면 조용해지던 집의 조용함이 서른 해 치 먼지처럼 마루마다 앉아 있었다.연무장을 지날 때 선우현이 걸음을 멈췄다.나무 기둥에는 목검 자국이 켜켜이 남아 있었다. 어린 키부터 자란 키까지, 한 아이의 평생이 벤 자국들. 그는 한참 그 자국을 보다가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들어가 쉴까요."운설이 물었다."아니오."그는 지팡이 끝으로 제일 낮은 자국을 짚었다."저것이 일곱 살."조금 위."저것은 여덟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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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 북으로 가는 사람들

북행길에 사람이 늘었다.선우가의 노부인이 가마도 시비도 물리고 말수레에 올랐다. 공훈의 궤가 그 곁에 실렸다. 서른 해 잠겼던 것이 처음으로 볕을 받으며 북으로 가는 것이다. 저택은 늙은 종들과 감찰들에게 맡겨졌다. 재판은 재판의 길을 갈 것이고, 지붕은 젖은 채로 겨울을 나면 될 일이었다.선우현도 같은 수레에 올랐다. 운설이 오늘은 열다섯 걸음뿐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노부인은 며느리 말에 순순히 앉는 아들을 보고 웃었다."어릴 때는 내 말도 저렇게 들은 적이 없는데.""의원의 명입니다.""아내의 명이겠지."선우현은 창밖만 보았다. 귀 끝이 붉어지는 것은 아직 예전 그대로였다.떠나는 고을 어귀에서 석삼의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봇짐 하나를 지고 있었다."북쪽 벌판에 — 이야기를 놓으러 가겠소. 아우 것을."혈비가 말을 세우고 사내를 오래 보았다."벌판에 못 지고 드는 짐이 하나 있다." 붉은 달의 주인이 말했다. "미움이다. 봇짐에 그것뿐이면 — 오지 마라.""미움은 담 앞에서 다 부렸소." 사내가 봇짐을 고쳐 멨다. "남은 짐은 이야기 하나요. 무거워서 혼자는 못 지겠어서 — 같이 가자는 거요.""타라." 언니가 말수레를 턱으로 가리켰다. 속은 자들의 벌판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한 사람만큼 넓어졌다.길 위에서 노부인과 운설은 조금씩 말을 텄다. 노부인은 아들의 어린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아홉 살까지의 이야기들. 밥을 태우고도 불 조절 탓을 하던 것, 그네를 무서워해서 한 번도 안 탄 것."그네를요?""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홉 살까지는."수레 맞은편의 선우현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안 무서웠습니다.""그넷줄을 붙들고 울었잖느냐.""줄이 낡아서 점검한 겁니다."운설은 웃다가 남편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선우현이 못마땅한 낯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쳤다. 힘없는 팔이었으나 받치는 자리는 정확했다.아홉 살 뒤의 이야기는 노부인에게 적었다. 조용한 집에는 이야기가 잘 자라지 않는 법이라. 그 뒤의 이야기는 운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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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 벌판의 이야기들

벌판에는 이튿날 아침에 다 함께 올랐다.서리 앉은 봉분들이 아침 볕에 희게 빛났다. 스물일곱의 무덤과 왕의 무덤과, 그 곁에 새로 자리 잡은 어머니의 무덤.노부인은 스물일곱 봉분 앞에서부터 걸음마다 절을 했다.지팡이를 부수 노인에게 맡기고, 선우가의 백발이 언 땅에 무릎을 꿇는 것을 — 유민들이 봉분들 사이에 말없이 서서 지켜보았다. 말리는 사람도 거드는 사람도 없었다. 서른 해 늦은 절은 서른 해 치의 무게로 하게 두는 것이 벌판의 예의였다.공훈의 궤가 열리고, 물건들이 임자를 찾아갔다.뼈피리는 단희의 무덤가에 놓였다. 나전 빗 반쪽은 어머니의 무덤에 — 방에 남아 있던 반쪽과 나란히. 핏빛 실 매듭이 나오자 흑요가 태우자고 했다. 저들의 표식이니 불에 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혈비는 고개를 젓고 그것을 제 소매에 감았다. "태우면 없던 일이 되지. 이건 — 차고 다닐 빚이다." 그리고 아이의 신 한 짝은, 운설이 잿마을 아이들의 봉분에 묻었다. 언 흙을 제 손으로 파고, 제 손으로 덮었다. 서른 해 만에 돌아온 신발이 흙 속에서 제 짝의 이야기와 만났다.석삼의 형은 벌판의 어귀에 무릎을 꿇고 아우의 이야기를 놓았다.돌쇠 삼 형제의 셋째. 속은 채로도 제 소임을 다한 자. 속은 자들의 벌판으로 천천히 되어 가는 이 땅에, 중원 병졸의 이름이 처음으로 놓이는 것을 — 부수 노인이 말없이 잔돌 하나를 얹는 것으로 받았다.바토는 노부인의 곁에 오래 서 있었다.아들을 잃은 아비와, 아들을 잃었다가 다른 모습으로 되찾은 어미가 나란히 선 그림. 외눈의 대장장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드님이 내 숫돌에 검을 갈러 왔었소. 좋은 손이었소. 함부로 벼리지 않는." 노부인이 그 말을 받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고운 울음이었다. 서른 해 조용한 집에서 못 운 것까지 몰아서.바토는 조금 떨어져 지팡이를 짚고 선 선우현도 보았다."검은 끝났소?""예.""그럼 손은."선우현은 제 오른손을 폈다. 떨림이 아직 남아 있었다."남았습니다."외눈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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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화 — 그네

그네는 궁 마당의 늙은 물푸레나무에 매달았다.살구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리자니 여러 해가 남았다."기다리면 되잖아요."운설이 말했으나 선우현은 그림을 들고 물푸레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내가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자라오.""당신은 오늘 스무 걸음 다 걸었어요.""그네는 손으로 매지.""그 손도 환자 손이에요.""그러니 의원이 옆에서 보시오."살아 돌아온 뒤 그의 고집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다만 예전에는 혼자 해 버렸고, 이제는 곁을 허락한다는 것이 달랐다.줄은 그림대로 매었다.가지 굵은 쪽으로. 앉을 판은 바토가 대장간에서 다듬어 왔다. 외눈의 대장장이는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그넷줄 고리를 두드려 냈다."백 년은 갈 거요."백 년 치 셈을 받아 든 물건이 겨울 마당에 걸렸다.선우현의 손은 굵은 밧줄을 끝까지 당길 힘이 없었다. 한 번 힘을 주고, 숨을 쉬고, 다시 한 번. 매듭이 자꾸 느슨해졌다."주세요.""내가 그린 것이오.""같이 해요."운설은 그의 등 뒤에 서서 두 팔을 뻗었다. 제 손을 그의 손등 위에 포갰다. 가슴이 등에 닿고,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선우현의 손이 잠깐 멎었다."집중하세요.""하고 있소.""매듭에요.""그건 어렵군."운설이 웃으며 그의 손과 함께 밧줄을 당겼다. 두 사람의 힘이 한 매듭에 들었다. 검보처럼 반듯하면서도 의녀의 붕대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이었다.죽음의 문 앞을 돌아온 사람이 처음 만든 봄의 살림. 혼자 못 묶던 것을 둘이 묶는 손이 설산의 값이었다.첫 시승은 여리였다."누가 타느냐"의 답이 그렇게 밝혀졌다. 아이들. 여리가 앉고, 연지가 다음 차례를 다투고, 궁의 어린것들이 물푸레나무 밑에 줄을 섰다.미는 자리는 앞이었다.그림대로 선우현은 그네 앞에 섰다. 그네가 다가올 때마다 두 줄을 받아 다시 밀었다. 힘이 모자라 높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웃는 낯이 갔다가 반드시 돌아왔다."더 높이요!""오늘은 여기까지.""검신님은 이것밖에 못 해요?"여리의 못된 물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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