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81 - Chapter 190

275 Chapters

제181화 — 마지막 숙제

어머니는 선우현을 안채에 눕히게 했다.제 이부자리를 내주었다. 사양하는 손들을 실낱의 목소리가 눌렀다. 사위가 언 몸으로 왔는데 장모의 자리가 아니면 어디에 눕히느냐고. 그리고 어머니는 묵할멈의 부축으로 그 곁에 앉아, 잠든 낯을 오래 들여다보았다."곱기도 하지." 어머니가 말했다. "살아 돌아온 아이 낯이구나."운설은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개 마루에서부터 준비해 온 말들이 — 사죄와 경위와 셈들이 —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딸의 손을 찾아 잡았다."네 탓을 하고 있구나.""제 강이었습니다.""네 강이었지. 한데 설야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실낱인데, 실낱이 철사였다. "열여덟 해 전 어미가 너를 눈밭에 내밀 때 그것은 어미의 손이었다. 손은 제가 한 일을 평생 지고 산다. 지고 사는 것과 제 손을 미워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어미는 이 손을 미워하는 데 여덟 해를 썼다. 아깝더구나. 그 여덟 해가 평생 제일 아까워."어머니는 딸의 손을 제 무릎 위에 폈다. 침 쥐는 자리의 굳은살을 엄지로 오래 쓸었다."마지막 숙제를 주마.""예.""이 손을 미워하지 마라."운설의 눈이 병상으로 갔다. 고른 듯하다가 한순간씩 얕아지는 숨.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할 몸. 살아 있으니 안도해야 하는데, 살려 냈으니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제 마음이 더 미웠다."그이는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었습니다.""모든 것?""검을."어머니가 작게 혀를 찼다."저 아이가 검이냐."운설은 대답하지 못했다."사람에게서 가장 큰 것 하나가 부서졌다고 사람 전부가 부서지는 것은 아니다. 그 셈을 네가 먼저 틀리면, 깨어난 저 아이는 평생 저를 반쪽으로 여길 게다.""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묻지 마라. 기다려라." 어머니가 말했다. "고치는 손은 자꾸 먼저 답을 주려 하지. 한데 사람이 잃은 것을 애도하는 데에도 제 시간이 있다. 울거든 울게 두고, 성내거든 듣고, 네게서 달아나거든—"어머니가 잠깐 웃었다."쫓아가거라. 저 아이는 네가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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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 한 무덤과 한 숨

장례는 사흘 뒤에 치렀다.곡과 잔치가 한 계절에 있어야 산 사람이 산다던 사람의 장례였다. 잔치는 아직 못 하더라도 산 사람의 숨을 장례 뒤에 두어야 한다고, 흑요가 법도를 세웠다. 안채 병상의 등불은 장례 내내 꺼뜨리지 않았다.어머니의 자리는 왕의 곁이었다.열여덟 해를 기다린 자리가 벌판 위쪽에 열렸다. 부수 노인이 가쁜 숨으로 자리를 짚었고, 휘월이 언 땅을 제 심법으로 열었다. 궁을 지은 손이 형수의 무덤을 파는 것으로 값의 한 줄을 더 치렀다.곡은 삭월의 법대로 이야기를 놓는 것으로 했다.흑요는 예복 이야기를, 묵할멈은 하루 종일 손짓말을 놓았다. 여리는 땋음머리 이야기를 하다 울어서 연지가 뒷말을 이었다. 혈비는 벽장의 이틀 이야기를 놓았다. 열두 살이 벽장에서 나와 열여덟 해를 돌아 어머니의 무릎에 닿기까지, 언니는 그 이야기를 끝까지 울지 않고 놓았다. 우는 것은 듣는 사람들 몫이었다.운설은 맨 마지막에 섰다."마지막 숙제를 받았습니다."눈발이 말과 말 사이에 내렸다."제 손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자꾸 틀리면 꿈에 와서 잔소리해 주세요. 숙제는 미뤄도 버리지는 않겠습니다."그녀는 무덤 앞에 달무리 수에서 풀어 둔 실 한 올을 놓았다. 어머니는 물건보다 이야기를 좋아했으나, 딸은 그날만큼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표식을 남기고 싶었다.그리고 곡이 끝나기 전에 궁으로 돌아왔다.장례를 다 지키지 못했다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산 사람의 숨을 장례 뒤에 둔다는 법도를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사람이 그녀였으므로.병상 곁에는 연도하가 앉아 있었다. 그는 선우현의 손목에 두 손가락을 댄 채 창밖의 곡소리를 듣고 있었다. 운설이 들어서자 바로 자리를 내주었다."어땠어요.""열일곱 번 흔들렸고 열일곱 번 돌아왔소.""열일곱 번이나?""그대가 없어서 심심했나 보지."농을 하는 입술과 달리 눈 아래가 짙게 꺼져 있었다. 운설은 선우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박동은 약했으나 어제보다 조금 고르게 이어졌다."고마워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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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 도사린 강

강은 사흘에 한 번꼴로 몸을 뒤척였다.낮에는 견딜 만했다. 손이 바쁜 동안 물은 낮게 흘렀다. 문제는 밤이었다. 궁의 살림이 잠들고 병상의 숨소리만 남으면, 얼음여울의 검은 벽이 눈꺼풀 안에서 다시 일어났다.우물이 터진 밤이 있었다. 빨래터의 얼음이 창처럼 일어선 새벽이 있었다. 그때마다 선우현의 맥도 같이 흐트러졌다. 살리려고 건넨 강이 임자의 죄책감을 먹고 환자를 다시 해치는 꼴이었다."물가 금지령을 다시 겁니다."운설이 스스로 청했다. 언젠가 혈비가 족쇄로 채웠던 금지를 이번에는 제 손으로. 온천도 우물도 빨래터도 그녀가 가까이하지 않는 것으로 궁의 물들이 반나절은 순해졌다.궁 사람들은 금지령을 저희 식으로 받았다. 여리가 아침마다 물을 길어 병상 앞에 놓았다. 이제 제가 물장수라고, 두 푼이라고, 아이는 울지도 않고 말했다. 더운돌 영감은 탕물을 통에 받아 날랐고, 타간은 국의 간을 물어보러 오는 척 환자의 낯을 보러 왔다.물가에 못 가는 사람에게 물이 걸어오는 궁이었다."금지는 다스림이 아니다." 휘월이 고개를 저었다. "가둔 것은 벽을 배우지. 네 강이 지금 그렇다. 누르면 누른 만큼 벽 뒤에서 자란다.""그럼 무슨 수로 다스립니까.""다스리는 게 아니다. 놓아주는 것이지. 한데 그 법은 나도 모른다. 나는 평생 가두는 법만 팠으니."혈비가 등잔 너머로 병상을 보았다."무진에게 간다.""저 사람을 두고는 못 갑니다.""데려간다."운설이 언니를 돌아보았다."눈 비탈에서 폭주하면요.""그래서 데려가는 거다." 혈비가 말했다. "네가 없으면 저 맥은 이레를 못 버티고, 여기 두면 네 강이 궁 전체를 배운다. 사람 없는 산에서 방법을 찾는다. 셋이 안 되면 넷이 하는 거다."반대는 사백에게서 나왔다."의식 없는 환자를 싣고 설산을 오른다고? 폭주하는 임자까지? 눈 비탈이 통째로 물의 사촌이오.""그래서 길이 필요하오."문밖에서 연도하가 들어왔다.그는 궁에 들어온 뒤로 나흘 동안 외전에서 잤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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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 산문(山門)

설산은 문이 없는 산이었다. 어디서부터가 산이고 어디까지가 세상인지 — 눈이 그 경계를 다 지워 두었다.사흘을 올랐다. 겨울 궁이 발아래 손바닥만 해지고,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닷새째부터는 나무가 사라졌다. 흰 비탈과 검은 바위와 하늘뿐인 세상을, 네 사람은 한 줄로 갔다. 앞에 휘월. 썰매 끈을 나누어 멘 운설과 혈비. 그리고 털가죽 아래 깊이 잠든 선우현.언 강의 노인은 이 높이가 편하다고 했다. "얼음의 나라라 — 내 강이 처음으로 남들과 같군." 농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놓으며, 노인은 지팡이로 눈 밑의 크레바스를 하나하나 짚어 냈다.오르는 동안 운설은 반 보 뒤를 돌아보며 걷는 법을 배웠다.평생 몰랐고 한 해 만에 익은 자리가 이제 썰매 위에 누워 있었다. 걸음마다 그 숨이 등에 닿았다. 선우현의 목에는 온기 목도리가 감겨 있었다. 냄새는 하루하루 옅어지고 화덕과 약초 냄새가 대신 배었다. 운설은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천을 헤치고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툭, 툭. 느리고 고집스러운 맥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도사린 강은 산에서 더 위험했다.눈 쌓인 비탈은 통째로 물의 사촌이었다. 그녀의 강이 밤에 몸을 뒤척이면 비탈의 눈이 낮게 울었다. 협곡의 눈사태에 묻혀 본 몸은 그 소리의 뜻을 알았다. 야영지는 매일 밤 바위 그늘로만 골라졌고, 그래도 이레째 새벽에는 — 건너편 비탈 하나가 통째로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비탈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이 운이었다."찾는 자에게는 안 보인다 했지." 아흐레째, 혈비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찾고 있다. — 그래서 안 보이는 건가.""찾기를 그만두는 재주가 사람한테 있나." 휘월이 답했다. "여덟 해를 얼음 속에서 나도 못 배운 재주다. 잊고 싶다고 잊어지더냐. 놓고 싶다고 놓아지더냐. — 그 재주가 있었으면 세상이 이 꼴이 아니지."언 강의 노인과 실낱의 강이 그렇게 주고받는 것을, 죄인의 옷을 입은 강의 임자는 가운데서 들으며 걸었다. 세 강이 다 제 얘기를 하고 있었다.찾기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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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 무진

노인의 집은 바위 골 안쪽의 눈집이었다.눈을 벽돌처럼 쌓아 지은 둥근 집. 안은 뜻밖에 넓고 따뜻했다. 화덕 하나, 약탕관 하나, 찻그릇 넷과 밥그릇 하나. 스무 해 넘게 혼자 산 살림에 그릇이 다섯인 까닭을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노인이 먼저 답했다."올 줄 알았지. 수는 몰랐고 — 그래서 넷이다. 밥그릇은 저 잠든 손님 약그릇으로 쓰면 되겠군."노인은 작고 말랐다. 나이를 셈할 수 없는 낯이었다. 예순 같기도 백 같기도 했다. 감은 눈두덩에 흉은 없었다. 태어나 눈먼 것인지 살다 먼 것인지 — 그것도 셈이 안 됐다. 다만 움직임에 눈먼 자의 더듬음이 없었다. 눈집 안에서 노인은 세상에서 제일 밝은 사람처럼 다녔다.눈먼 노인은 손님들의 낯을 보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보았다.제일 먼저 본 것은 썰매 위의 소리였다. 무진은 선우현의 가슴에 손도 대지 않고 머리맡에 앉았다. 감은 눈이 한참 동안 그 숨의 들고 나는 자리를 따라갔다."검 하나가 제 칼날을 다 녹여 심장을 둘렀군.""살릴 수 있습니까.""이미 살려 왔잖으냐.""깨어날 수 있느냐고요.""그건 저 사람이 할 일이지. 네가 할 일은 돌아올 자리가 무너지지 않게 두는 것이고.""언 강이 하나." 휘월 쪽으로 감은 눈이 돌았다. "여덟 해를 얼음 속에서 저를 벼린 강이군. 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 늦게 녹는 얼음이 물맛이 좋지.""실낱이 하나." 혈비 쪽으로. "열두 살의 발소리가 서른이 되어 왔구나, 효월아. 그때는 쿵쿵 걷더니 — 지금은 강처럼 걷는군. 미움 밑으로 흐르는 강은 없다더니, 너는 무엇 밑으로 흐르는 물이 되었느냐."혈비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것이 답인 것을 노인은 아는 낯이었다."그리고—"감은 눈이 마지막으로 운설에게 왔다. 노인은 오래 말이 없었다. 눈먼 낯이 소리를 보는 동안, 눈집 안이 화덕 소리만 남았다."큰 강이 하나. 한데 — 이상하군. 강이 죄인의 옷을 입었어."운설의 숨이 멎었다."물이 검은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다. 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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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 눈집의 살림

수행은 살림이었다.새벽에 눈을 치우고, 얼음을 깨서 물을 긷고, 마른 이끼와 약초를 갈무리하고, 선우현의 몸을 두 시진마다 돌려 눕히고, 저녁을 짓고, 잤다. 심법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사흘째에 혈비가 참지 못하고 물으니, 눈먼 노인은 태연했다."하는 중이다. 너희가 못 알아볼 뿐.""눈 치우는 게 수행인가.""눈은 치워도 또 온다. 치우는 사람이 그걸 알면서 치우면 — 수행이지. 오늘 몫만 치우고 내일 몫은 내일에 주는 법. 너희 어머니가 잘하던 것이다. 하루 몫의 심지만 태우는 법."어머니를 아는 말이었다. 물으니 노인은 젊어서 달무리 부인의 물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만 했다. 좋은 강이었다고. 놓아주는 법의 임자였다고. "그 사람은 스승 없이 배웠지. 슬픔이 스승이었을 게다. 슬픔은 — 월사금이 비싼 스승이라."운설의 밤은 눈집에서도 위험했다.이레째 밤, 강이 크게 뒤척였다. 눈집의 벽이 안에서 우는 소리를 냈다. 혈비가 몸을 일으키는데 — 무진이 먼저 손을 들어 막았다. 노인은 일어나지도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도사린 것에게 말을 걸었다."손님. 밤이 늦었네."강에게 하는 말이었다. 미친 수작 같은데 — 뒤척이던 것이 반 호흡 멎었다."자네 임자가 고단하이. 낮에 눈을 세 자나 치웠거든. 소란은 내일 낮에 부리고 — 오늘은 이 늙은이 낯을 봐서 재워 주게."물이 낮아졌다. 천천히, 낮아져서, 흘렀다. 그냥 — 밤 강물 소리로.그 순간 병상에서 숨이 한 번 크게 들렸다. 운설은 선우현의 곁으로 기어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불안하게 떨던 심맥이 강과 같이 고요해져 있었다."저 사람이 제 강을 듣는 겁니까.""서로 듣겠지. 한 이불 아래 천 번 밤을 보냈다면 몸이 귀보다 먼저 아는 법이야.""어떻게—" 운설이 어둠 속에서 물었다."눈먼 자의 재주다. 나는 폭주가 안 보여. 안 보이니 안 무섭고, 안 무서우니 — 손님으로 보이지." 노인의 목소리에 웃음이 얹혔다. "네 강은 평생 두 가지 대접만 받았다. 그릇이라 불리며 탐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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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 첫 자락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는 얼음 개울가로 정했다.눈집 아래 골짜기의 개울. 겨울이라 얼음 밑으로만 흐르는 물가에 그녀는 아침마다 앉았다. 선우현의 병상은 문 가까이 옮겨 두었다. 눈집 문을 반 뼘 열면 바람 사이로 목소리가 안까지 닿았다. 무진의 법대로 도구도 격식도 없이, 다만 앉아서, 소리 내어.첫 자락은 눈 오는 밤이었다."눈이 많이 오는 밤이었습니다."제 강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처음에는 우스웠다. 한데 손님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니 곧 자리가 잡혔다."약방 문을 닫는데 문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어요. 노인이었고 — 그 이야기는 알지요. 당신이 저한테 온 이야기니까. 오늘 할 이야기는 그다음 날 새벽 이야기입니다. 발자국 소리가 났어요. 눈 밟는 소리 중에 제일 조용한 소리였는데, 이상하게 제일 크게 들렸습니다."얼음 밑의 물은 처음에 무겁게만 흘렀다."문을 여니 사내가 서 있었어요. 눈을 어깨에 얹은 채로. 첫마디가 — 그 손에 있던 걸 당신이 가졌군, 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첫마디였다고 본인도 나중에 인정했어요."하루 한 자락씩,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갔다.은침을 돌려주러 온 벌판의 이야기. 반 치의 검과 죽지 마시오. 손바닥의 매듭. 산신당의 흉터. 눈굴의 한 뼘. 처음 이름을 부르던 눈사태 속. 더운 물의 밤 — 그 자락에서 그녀는 반나절을 쉬었다가 마저 했다.우스운 자락도 있었다. 남남 연습 이야기에서는 이야기하는 저가 먼저 웃었다. 두 푼이오, 부인 — 틀렸습니다 — 두 푼이오, 의원. 물지게 이야기, 밥 태우던 이야기, 그네 줄 매는 법을 검보 논하듯 하던 이야기. 웃긴 자락을 들려주는 날은 얼음 밑 물소리가 종일 가벼웠다. 슬픈 자락을 들려준 날은 물이 깊게 흘렀다 — 무거움과는 다른 깊이로. 그 둘이 다른 것임을 그녀는 물소리로 배워 갔다."어째서 소리 내어 하라 하셨습니까." 어느 저녁 그녀가 물었다. "속으로 해도 강은 들을 텐데요.""속엣말은 생각이고 소리 낸 말은 이야기다." 무진이 답했다. "생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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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 아침 여울 (혈비)

아우가 개울가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혈비는 위쪽 얼음 구멍에서 물을 길었다.물 긷는 소리에 아우의 목소리가 섞여 올라왔다. 눈굴이 어떻고, 온천의 김이 어떻고. 깊이 잠든 사내에게 산 날들을 되짚어 주는 목소리가 하루하루 순해지는 것을, 언니는 두레박 소리 사이로 들었다.그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병상의 손가락도 하루에 한 번쯤 움직였다. 혈비는 아우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하루 종일 그 손만 보고 앉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손이 움직인 날은 약탕에 꿀을 반 숟갈 더 넣었다. 쓰지 않은 것이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낫지 싶어서.저에게도 문 닫은 방이 있다는 것을, 혈비는 알고 있었다.하나가 아니었다. 복도 하나가 통째로 방이었다. 벽장의 이틀이 든 방. 눈 속의 등이 든 방. 열두 살부터 서른까지의 열여덟 해가 든 방들. 그리고 제일 안쪽 —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방 하나.휘월은 그 무렵 눈집 뒤편의 바위에서 제 수행을 했다. 여덟 해 치 일기를 — 벽에서 갈아 내고 가슴에 옮겨 둔 그것을 — 하루 한 줄씩 소리 내어 외는 일이었다. 그 아이 목소리를 잊은 것을 알았다. 그 한 줄을 외는 날은 노인의 언 강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녹는 소리인지 우는 소리인지 — 아마 둘 다였다.그 방에는 여섯 살의 저녁이 들어 있었다.어머니가 갓난것을 재우며 자장가를 부르던 저녁. 여섯 살의 효월은 문틈으로 그것을 보았다. 제가 다섯 해를 독차지한 무릎에 다른 것이 누워 있는 것을. 그 저녁 여섯 살은 아우가 미웠다. 딱 하루치의, 아이다운, 곧 잊을 미움이었다.한데 그 겨울에 세상이 끝났다.어머니는 갓난것을 눈밭에 내밀었고, 저는 벽장에 넣어졌다. 살아남은 열두 살은 그 뒤로 평생 셈을 했다. 미움의 값을. 딱 하루치 미워한 값으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아서 — 미친 셈인 줄 알면서 못 멈추는 셈을. 붉은 달의 십팔 년이 그 셈 위에 서 있었다. 미움 밑으로 강은 흐르지 않는다던 스승의 말이 미웠던 것은 — 제 강이 멎은 까닭을 정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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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 그네

미뤄 둔 자락이 하나 있었다.이야기는 순서대로 갔다. 폐사의 언덕에서 겨울 궁으로, 무한에서 혼례로, 혼례에서 남행으로. 강은 하루 한 자락씩 그 사람을 알아 갔다. 한데 사냥막의 밤 — 마지막 밤의 자락 앞에서, 그녀는 사흘을 멈춰 있었다."오늘도 그 앞이냐." 무진이 물었다."예.""무엇이 들었길래.""그네요."침 함 바닥의 종이는 설산까지 따라와 있었다. 가지 굵은 쪽. 미는 자리는 앞. 구석의 낙관 같은 한 글자 — 봄. 그녀는 그 종이를 꺼내지도 못하고 사흘을 보냈다. 꺼내면 쏟아질 것이었다. 다른 자락들과는 무게가 다른 것이 그 안에 있었다. 지나간 일들은 이야기가 되는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일들은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살구나무와 우물과 그네와, 그 그네를 밀 두 손. 선우현이 눈을 뜨지 않으면 오지 않을 봄. 눈을 떠도 그 손에 다시 힘이 돌아오지 않으면 달라질 봄.사흘 동안 그녀는 종이의 둘레만 돌았다. 침 함을 열었다 닫고, 열었다 닫고. 한 번은 종이 귀퉁이를 잡기까지 했다가 — 손이 데인 듯 놓았다. 혈비는 그 사흘을 아무 말 없이 지켰다. 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저녁마다 아우의 몫까지 두 사람 치 물을 길어 두는 것뿐이었고, 그것을 아우도 알았다.나흘째 아침, 그녀는 개울가에 앉아 종이를 폈다."사냥막의 밤 이야기입니다."목소리가 첫 줄부터 흔들렸다."그이가 봄 이야기를 했어요. 우물을 파고 — 살구나무를 심고 — 살구가 열리면 약값 대신 받자고. 그리고 그네요. 우물가 살구나무에 그네를 매겠다고. 미는 자리는 앞이 좋다고 했습니다. 미는 사람이 낯을 볼 수 있게."얼음 밑의 물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누가 타느냐고 물었는데 답을 안 했어요. 웃기만 하고. 저도 안 물었습니다. 물으면 그 대답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좋은 것은 아껴 두는 버릇이 있어서. 아껴 두면—"거기서 무너졌다.아껴 둔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눈밭에서도 울지 않던 아이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도 울지 않던 여자가 설산의 얼음 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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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 무명업화

"자락이 하나 남았지."봄이 멀지 않은 어느 아침, 무진이 말했다. 눈 치우는 삽을 든 채였다."다 들려드렸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끝이 빠졌다." 노인의 감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얼음여울의 자락. 네 이야기는 사냥막의 밤에서 궁으로 건너뛰더구나. 그 사이의 하루 — 그 하루만 강이 아직 못 들었다."운설의 손에서 삽이 멎었다.그 하루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되려면 말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하루의 것들은 말이 되기를 거부했다. 물의 벽. 소리 없는 유리창. 등을 타고 전해지던 충격의 셈. 멎던 소리. — 그것을 소리 내어 강에게 들려준다는 것은."못 합니다.""어째서.""그 이야기의 끝에서 강이 —" 그녀는 말을 골랐다. 고르다가, 고르지 못한 채로 나왔다. "제 강이 그이를 부쉈으니까요."말해 놓고 그녀는 제 말에 베였다. 반년을 안에서만 돌던 문장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얼음 개울가의 아침 공기 속에, 그 문장이 칼처럼 놓였다.무진은 오래 말이 없었다. 이윽고 삽을 눈에 꽂고, 노인은 세상에서 제일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 강을 벌하는 중이냐, 너를 벌하는 중이냐.""…무슨 말씀이신지.""네 폭주 말이다." 노인이 말했다. "슬픔이 무거워 일어서는 물인 줄 알았는데 — 곁에서 들을수록 이상했다. 네 강이 일어설 때마다 겨누는 자리가 있어. 세상이 아니다. 임자다. 물이 벽처럼 서서 — 제 임자를 치려다, 치려다, 못 치고 내려앉는다. 몇 번이고."운설은 개울의 얼음을 내려다보았다."강은 임자의 것을 다 듣는다 했지. 네가 반년 동안 안에서 그 문장을 돌리는 것을 — 내 강이 그를 부쉈다, 살아도 예전으로는 못 돌린다, 나를 벌해야 한다 — 강이 다 들었다. 착한 물건이라, 임자가 미워하는 것을 저도 미워하지. 임자가 저를 미워하니 저도 저를 미워하고, 임자가 벌을 원하니—" 노인은 거기서 숨을 골랐다. "벌하는 시늉을 하는 게다. 차마 못 하면서. 그것이 네 폭주의 정체다, 아이야."무명업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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