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211 - Chapter 220

270 Chapters

제211화 — 흰 길

스무 걸음 뒤에는 쉰 걸음이 왔다.선우현은 눈이 얕은 길에서는 걸었고, 비탈에서는 수레에 앉았다. 처음에는 앉을 때마다 낯이 굳었다. 사흘째부터는 제 발로 수레에 올라 운설의 약재를 정리했다. 못 걷는 시간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쓸 곳을 찾는 법을 배운 것이다.문제는 연도하였다."오늘은 백 걸음 가겠소."선우현이 말하면 상단주는 말 위에서 대꾸했다."쉰 걸음부터 오른발을 끌었소.""누가 물었소.""의원에게 보고하는 중이지.""내 아내요.""내 의원이고."운설이 두 사람 사이로 말을 몰았다."오늘은 일흔 걸음. 둘 다 입 다물고요."그날부터 길은 선우현의 걸음으로 셌다. 일흔 걸음을 걷고 수레, 저녁 전에 다시 스무 걸음. 연도하는 약재 수를 세듯 걸음을 셌고, 선우현은 틀릴 때마다 바로잡았다. 미워하는 사람들이 제일 꼼꼼한 재활 동료가 되는 이상한 길이었다.열흘째 밤, 세 사람은 오래된 역참에 들었다.방은 둘뿐이었다. 연도하가 열쇠 둘을 받아 하나는 부부에게 건넸고, 하나는 마구간 파수용으로 남겼다."상단주는 방에서 자세요." 운설이 말했다. "상처가 아직 안 붙었습니다.""부부 옆방에서 밤새 기침하는 것보다 말들이 편하오."선우현이 문을 열다 말고 돌아보았다."왜 나를 보시오.""기특해서.""오해 마시오. 그대 편하라고 가는 것 아니니.""알고 있소.""그 표정이 아는 표정이 아닌데."운설이 선우현을 방 안으로 밀었다."그만."문이 닫히자 바깥 웃음소리도 끊겼다.작은 방에는 침상 하나와 화로 하나가 있었다. 운설은 선우현의 젖은 버선을 벗기고 발목을 주물렀다. 종아리 근육이 새 걸음을 배운 값으로 단단히 뭉쳐 있었다."아파요?""괜찮소.""거짓말.""의원이 묻는 말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군."운설이 엄지로 아픈 자리를 누르자 그의 숨이 짧게 새었다. 전에는 칼에 베여도 눈썹 하나 안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픈 것을 숨기지 못했다. 운설은 그 솔직한 몸이 고맙고 서러워 손길을 늦췄다.선우현이 그녀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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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 백로진

백로진은 기억보다 작았다.도망치던 밤에는 끝이 없던 골목이 낮에는 열두 집을 지나면 끝났다. 성문 옆 수배 방은 뜯겨 있었고, 먹빛이 배었던 벽만 사각으로 희었다. 약방으로 가는 돌길에는 새 떡집과 기름집이 들어서 있었다.사람들이 먼저 운설을 알아보았다.약재 수레의 방울 소리에 고개를 내밀던 낯들이 하나씩 굳었다. 물의 마녀. 삭월의 왕녀. 만 명을 살린 의녀. 떠도는 이름들이 입술 위에서 서로 부딪쳤다.그다음 선우현을 알아보았다."검신이—""죽었다더니."소문 속에서 죽은 사내가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알아보는 눈이 늘수록 그의 걸음은 느려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운설이 손을 내밀자 그는 사람들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잡았다.장터의 늙은 칼장수가 길을 막았다."검신께서 정말 검을 잃으셨습니까.""그렇소.""그럼 강호는 누가 지킵니까."선우현은 운설의 손을 놓지 않았다."강호가 제 발로 서야지요.""평생 검을 든 분이 그리 말해도 됩니까.""평생 들었으니 압니다. 한 사람 검에 기대는 세상은 그 한 사람이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진다는 것을."늙은 칼장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선우현은 지팡이로 길을 짚어 그를 지나갔다. 검신이 아닌 첫 귀향이었다.마지막으로 연도하를 보았다.검은 모피의 사내가 약재 수레 고삐를 쥐고 두 사람 반 보 뒤에 있었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시선이 오래 머무는 낯. 백로진의 여인 셋이 장바구니를 든 채 길을 막을 뻔했고, 연도하는 아무것도 안 한 얼굴로 지나갔다."여기서도 저러는군."선우현이 중얼거렸다."무엇을 했는데요?""그러니까 더 마음에 안 드오."약방은 그대로였다.낡은 문짝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처마 밑의 새 둥지는 비어 있었다. 창호지는 반쯤 찢겼다. 운설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문은 밀리지 않았다."안에서 걸렸나 봐요."선우현이 어깨를 대려 하자 운설이 막았다. 연도하도 손을 뻗다 한 치 앞에서 멈췄다."부숴도 되오?""안 돼요. 제 문이에요."운설은 비녀를 뽑아 문틈에 넣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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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 문지방

아이의 어미가 운설을 밀쳤다."만지지 마!"두려움이 먼저 나온 손이었다. 요녀가 아이를 잡는다는 소문을 믿고도, 숨 없는 아이를 약방 앞까지 업고 온 사람의 손.운설은 밀린 자리에 무릎을 짚었다."제가 안 만지면 이 아이는 죽습니다."어미의 손이 허공에서 떨렸다."강도 없잖아. 소문에 그 힘을 다 버렸다던데.""예. 없습니다."운설은 빈손을 폈다."침과 약은 있습니다. 이 아이 어미가 허락하면 쓰겠습니다."아이의 입술이 더 파래졌다.어미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운설은 손목을 짚었다. 맥은 잡히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강을 흘려 몸 안을 한눈에 읽었을 것이다. 이제는 피부의 온도, 눈꺼풀의 빛, 입가의 냄새를 하나씩 확인해야 했다.입에서 쓴 살구씨 냄새가 났다."무엇을 먹었습니까.""산에서 주운 씨를…""선우현, 물."그는 묻지 않고 약방으로 뛰었다. 세 걸음째 지팡이가 미끄러졌으나 벽을 짚고 섰다. 물동이를 들 힘이 없어 바가지를 가득 퍼 오지 못했다. 반 바가지. 운설은 그 반으로 약가루를 풀었다."누가 숯을 가져와요. 곱게 간 것."골목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때 떡집 노파가 먼저 달렸다. 기름집 사내가 화로에서 숯을 꺼냈고, 아이의 어미는 운설이 시키는 대로 턱을 받쳤다.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손 하나씩을 내놓았다.쓴 살구씨 독이었다.운설은 위를 비우고 침으로 숨길을 열었다. 강이 없으니 한 치를 짚는 데 시간이 걸렸다. 손끝이 한 번 흔들렸다.그 위로 다른 손이 포개졌다.선우현이었다."여기 있소."검객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두 떨림이 맞닿자 이상하게 중심이 생겼다.운설은 침을 놓았다.첫 번째 숨은 오지 않았다.두 번째도.골목 사람들이 숨을 참았다. 아이 어미의 울음만 문지방에 낮게 깔렸다.세 번째 침을 돌릴 때, 아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기침과 함께 검은 물이 쏟아졌다. 아이가 숨을 들이켰다. 짧고 거친 소리.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기적."살았어?"어미가 물었다."아직 아픕니다." 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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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 화로

약방을 고치는 데 닷새가 걸렸다.첫날 선우현은 문턱을 낮추지 않았다. 대신 양쪽을 비스듬히 깎아 발이 걸리지 않게 했다. 연습할 것은 남기고, 다치는 것은 줄이는 법이라 했다.둘째 날에는 약장을 세웠다.망치를 든 오른손은 여전히 떨렸다. 못 세 개 중 하나는 휘었고, 하나는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운설이 주우려 하자 그가 먼저 허리를 굽혔다. 일어날 때 벽을 짚었으나 도움을 청하지도, 도움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팔꿈치를 받치자 그대로 기대어 섰다."잘 박혔어요.""비뚤었소.""약장은 안 넘어져요.""검이었다면 부러졌소.""못이잖아요."선우현은 휘어진 못을 오래 보다가 약장 가장자리 깊숙이 박았다."그럼 쓰면 되겠군."검이 아닌 것을 쓰는 손이 하루씩 익어 갔다.셋째 날, 마을 사람들이 화로를 가져왔다.도망치던 밤 운설의 화로는 약방 안에 그대로 있었으나 밑이 깨져 있었다. 떡집 노파가 제 화로를 내놓고, 기름집 사내가 철 받침을 만들었다. 아이 어미는 장작을 한 아름 쌓았다. 사죄한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운설도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같이 불을 피웠다.넷째 날에는 약재가 왔다.설로상단의 표가 찍힌 수레였다. 상단주는 없고 장부만 있었다.백로진 약방 첫 석 달 치. 값은 외상. 의원이 환자들에게 받는 두 푼 중 한 푼씩 갚을 것.장부 끝에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남편의 질투는 이자에서 빼 주겠소.선우현은 그 줄을 세 번 읽고 붓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답을 썼다.이자는 받으러 직접 오시오.운설이 옆에서 보다가 물었다."왜 부릅니까?""빚을 빨리 끝내려고.""정말요?""아니오."그가 너무 솔직해서 운설은 더 묻지 못했다.그날 저녁 백로진의 현감이 찾아왔다.도망치던 밤에는 성문을 닫으라 명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약방 앞에 관아 사람들이 들 만한 큰 현판과 사죄문을 가져왔다."관의 이름으로 억울함을 밝히고 명예를 돌려드리겠습니다."운설은 현판을 보았다. 삭월왕녀 의당(醫堂)이라는 금빛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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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 첫 손님

"설야."선우현의 목소리가 화로 건너에서 왔다."내 소리를 들으시오."운설은 아이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그의 숨을 들었다. 강이 끊겼을 때 찾으라던 심장 소리. 이번에는 제 손을 돌려받기 위해 들었다.하나. 둘.선우현의 고른 숨 사이로 아이의 빠른 맥이 갈라져 나왔다.찾았다."열만이 아니에요."아이는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갈비뼈 아래가 움푹 꺼졌다. 목 안쪽이 부어 공기가 지나갈 길이 좁아진 것이다."언제부터 울음이 이랬습니까.""오늘 새벽부터요.""무엇을 먹였어요?""젖 말고는… 어제 시어머니가 꿀물을 조금."갓난아이에게 이른 꿀. 입술이 마르고 목이 부은 까닭이 그 안에 있었다.운설은 침통을 열었다. 강으로 안을 밀어 고칠 수는 없었다. 붓기를 천천히 내리고 숨길이 닫히지 않게 버텨야 했다."현, 창을 조금만 여세요. 찬 공기가 바로 닿지 않게 천을 걸고요."선우현은 지팡이로 창을 밀었다. 손이 떨려 매듭을 못 묶자 아이 어미가 대신 천을 걸었다."약초꾼에게 달려가 길경과 감초를. 가장 어린 뿌리로.""내가 가겠소.""뛸 수 있어요?"그는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다."오늘 알아보지."운설은 말릴 수 없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의 한계를 재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다.약이 올 때까지 아이를 세워 안고 등을 두드렸다. 숨이 끊길 듯 가늘어질 때마다 작은 침으로 목 아래 혈을 열었다. 한 번에 낫지 않았다. 한 호흡이 조금 넓어지고, 다음 호흡이 다시 좁아졌다.아이 어미가 울었다."고칠 수 있습니까."예전이라면 답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몰랐다."고치는 중입니다."그것이 의녀가 줄 수 있는 전부였다.반 시진 뒤, 골목에서 지팡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선우현이 문으로 들어오다 무릎을 꿇었다. 한 손에는 약재를 쥐고 있었다. 손바닥이 까져 피가 났다."현!""아이부터."운설은 이를 악물고 약재를 받았다.길경을 얇게 썰어 달이고, 감초를 한 점 넣었다. 김을 아이의 코앞에 직접 대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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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 봄의 약방

봄에는 약방 뒤뜰에 우물을 팠다.동네 사내들이 삽을 들고 왔고, 아이 어미들은 흙을 날랐다. 돌을 던졌던 손과 문을 닫았던 손이 우물 벽을 한 단씩 쌓았다. 운설은 물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땅의 습기와 갈대 자라는 방향을 보고 자리를 골랐다.스무 자를 파자 물이 솟았다."강 없이도 찾았네요."여리가 북쪽에서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썼다. 운설은 답장에 한 줄을 보탰다.원래 우물은 눈으로도 찾는 거란다.살구나무는 선우현이 심었다.어머니 무덤 곁의 묘목에서 난 가지를 운백천이 보내왔다. 그는 두 손으로 흙을 덮었다. 이제는 지팡이 없이 마당을 서른 걸음 걸었고, 물동이 반 통을 들 수 있었다. 내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팔과 다리에 평범한 사람의 힘이 조금씩 붙었다."몇 해면 열립니까.""세 해쯤.""길군.""그네는 물푸레나무에 있잖아요.""여기에도 매야지."그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을 다시 셈하기 시작했다.약초밭에는 감초와 길경, 당귀를 심었다. 첫 환자의 아이는 살구나무 아래서 기어 다녔다. 노인은 매일 두 푼을 들고 와 천명 치료를 받았다. 떡집 노파는 약을 먹을 때마다 떡을 놓고 갔다.약방은 사람 냄새가 났다.선우현은 오전에는 약을 썰고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천하의 검신에게 검을 배우러 왔다가 약초 이름을 외우게 된 아이들이 처음에는 실망했다."칼은 언제 가르쳐 줘요?""사람을 안 베는 법부터.""그게 검법이에요?""제일 늦게 배우는 검법이지."그는 아이들에게 칼 대신 붓을 쥐여 주었다. 한 획을 반듯이 긋는 손이 아직 떨렸지만, 아이들은 그 떨림을 흉내 내지 않았다. 선생의 손이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였다.장터에서는 검신이 의녀에게 얹혀산다는 소문도 돌았다.선우현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약재를 두 배로 썰었다. 운설은 모르는 척했고, 저녁에는 뭉친 손가락을 더 오래 주물러 주었다."화나요?""아니오.""그럼 왜 당귀를 원수처럼 봐요.""두께가 안 맞소.""연도하라면 상단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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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 편지들

문밖의 검은 말에는 사람이 없었다.안장에 약재 궤 둘과 편지 꾸러미가 묶여 있었다. 고삐에는 설로상단의 작은 방울이 달렸다.첫 편지는 혈비의 것이었다.여리는 동상을 고치는 첫 시술에 성공했다. 흑요는 전승생 여덟을 하루에 열 번씩 야단친다. 선우가의 노부인은 글자 없는 봉분의 이름을 스물셋 찾아냈다. 어머니 무덤 곁 살구나무에는 꽃눈이 앉았다.마지막 줄만 언니의 글씨가 컸다.잘 지내느냐고 묻지 않는다. 아프면 파발부터 보내라.둘째는 운백천이었다.아버지는 날씨만 적었다. 북쪽 눈이 언제 녹았고, 바람이 어느 날 남풍으로 바뀌었는지. 끝에 작은 글씨로, 어미 묘의 살구 가지를 더 보낼까 묻고 있었다. 사랑을 날씨로 쓰는 사람의 편지였다.셋째는 한겸과 남궁완이 한 장씩 이어 썼다.한겸은 법령을 길게 설명했다. 죄 없는 자손에게 문파 금지령을 내리지 않았고, 몰수 전각 세 곳이 의원으로 바뀌었다. 남궁완은 그 아래 붉은 먹으로 적었다.남편이 혼례 뒤에도 법문만 씁니다. 북쪽 언니, 사람 만드는 약을 보내 주세요.혈비가 답장으로 무엇을 보낼지 생각하니 운설은 웃었다.그 사이에 봉투 하나가 더 있었다.선우현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쓴 첫 편지였다.현아.첫 글자 뒤로 먹이 길게 번져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입으로 못 부른 이름을 붓이 한번 울고 간 자국 같았다.노부인은 선우가의 빈 연무장을 의원 아이들의 놀이터로 내주었다. 아버지의 형은 그대로이며, 매달 한 번 옥에 가서 그가 답하는 말을 직접 적겠다고 했다. 바토에게서는 약칼 두 자루를 주문했다.검을 잃은 손에 칼을 보내는 것이 잔인한지 오래 생각했다. 그러나 네 손이 무엇을 쥘지는 네가 정할 일이다.선우현은 편지를 끝까지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답장 쓸까요?""내가 쓰겠소."그는 붓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 시진을 써서 세 줄을 완성했다.어머니. 살아 있습니다. 약을 썹니다. 봄에 가겠습니다.운설은 글자가 비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평생 쓴 어떤 검보보다 반듯한 편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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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 두 푼

왕철은 여름 끝에 백로진으로 왔다.등에는 이야기 보따리, 손에는 새 책 한 권을 들었다. 표지에는 붉은 글씨로 물장수와 의녀 — 완결편이라 적혀 있었다."완결이 났습니까?"운설이 묻자 늙은 이야기꾼은 수염을 쓸었다."났지. 세 번이나."첫 번째 판에서 검신은 얼음여울에서 죽었다. 두 번째 판에서는 죽었다가 의녀의 입맞춤에 살아났다. 세 번째 판에서는 사실 쌍둥이였다는 결말이었다.선우현은 약칼을 내려놓았다."세 번째를 쓴 자는 누구요.""강남 쪽 신참인데 장사가 잘된다네.""찾아가야겠군.""지팡이 짚고?""이제 없이도 걸을 수 있소."왕철은 그의 걸음을 위아래로 훑었다."살아 있는 본인이 죽은 이야기보다 쌍둥이 이야기에 더 화를 내는군.""죽은 것은 한 번 있었던 일이고, 쌍둥이는 거짓이니까."운설이 끼어들었다."죽은 적 없어요.""한 번 멎었다며.""그건 의원이 죽었다고 하기 전까지 죽은 것 아닙니다.""두 분 말다툼까지 책에 넣어야겠어."왕철이 붓을 꺼내자 부부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왕철은 벌써 한 줄을 적은 뒤였다."검신은 죽지 않았으나 아내 앞에서는 자주 말문이 막혔다.""그 줄은 사실도 아니고 장사도 안 될 것이오.""방금 사실이 되었네."운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으려던 것이었으나 왕철은 그것까지 받아 적었다. 선우현이 손을 뻗어 책을 덮으려 하자 노인은 잽싸게 품 안에 넣었다."검 대신 책을 빼앗으려면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하겠군."선우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약칼을 다시 쥐었다. 예전이라면 손가락 사이에서 한 바퀴 돌았을 작은 칼이 이제는 투박하게 손바닥에 놓였다. 그는 천천히 말린 뿌리의 썩은 끝을 도려냈다. 왕철이 그 손을 잠깐 보았다. 웃음기 없는 눈이었다."살아 있는 이야기는 볼품없는 날을 견뎌야 길어지는 법이지.""오늘은 볼품없었소?""아니. 오늘은 꽤 비싸게 팔리겠어."그날 저녁 약방 앞에 이야기판이 열렸다.백로진 사람들이 작은 의자를 들고 모였다. 돌을 던졌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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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 첫눈의 파수

첫눈을 먼저 본 것은 선우현이었다.축시가 조금 지난 밤, 그는 잠든 운설의 어깨를 흔들었다."설야.""환자예요?""눈."운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창을 보았다. 어둠 속에 흰 점 하나가 지나갔다."한 송이잖아요.""첫눈은 첫 송이부터 첫눈이오.""내일 아침에 말하면 되는데.""내기였소."운설은 이불을 뒤집어썼다."당신이 졌어요.""내가 먼저 봤소.""지는 쪽이 이긴다면서요."선우현이 한참 셈하다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찬 손이 허리를 찾아 감겼다."그럼 같이 진 것으로 하지."두 사람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창밖의 눈이 늘어나는 동안 이불 속에서 체온을 나눴다. 선우현은 이제 운설을 안고 방 안을 열 걸음 걸을 만큼 힘을 되찾았지만, 밤에는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뜨거움과 다치지 않는 법을 함께 배운 사람의 손이었다.새벽이 오기 전, 처마 밑 방울이 울렸다.딸랑.약방 방울과 다른 소리였다. 길 위에서 오래 흔들린 설로상단의 방울.선우현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운설은 그의 옷깃을 여며 주고 문으로 갔다.눈길 끝에 검은 말들이 서 있었다.맨 앞의 사내가 모피 모자를 벗었다. 반년 사이 머리가 조금 길었고, 눈가에는 먼 길의 피로가 얹혀 있었다. 그 피로까지 사람을 더 위험하게 보이게 하는 낯이었다.연도하가 웃었다."문이 열려 있군.""지금은 닫혀 있어요.""그러니 열어 줬잖소."그의 시선이 운설의 풀린 머리와 그 뒤 선우현의 덜 여민 옷깃을 차례로 보았다. 웃음이 반 치 줄었다."밤길이 길었나 보오."선우현이 말했다."밤이 긴 집도 있군."운설은 물가에서 제 몸이 무너졌을 때 선우현과 자신을 한꺼번에 붙잡았던 그의 팔을 떠올렸다.연도하의 시선도 잠깐 그녀의 맨발에 닿았다."신은.""당신이 깨운 게 아니잖아요.""그래도 추운 줄 모르는 버릇은 여전하군."선우현이 문 옆에 세워 둔 신을 발끝으로 밀어 주었다. 운설이 신을 신는 동안 두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어서 오히려 서로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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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 눈 내리는 밤

눈 오는 밤, 약방 문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이야기의 첫날과 같은 그림이었다.다른 것은 문이 이미 열려 있다는 것. 운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쓰러진 사람이 유언 대신 다음 숨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화로 가까이. 젖은 옷은 벗기되 팔다리를 문지르지 마세요."선우현이 침상에 모포를 폈다. 연도하는 환자를 눕히고 젖은 장갑을 벗겼다. 두 사내는 서로에게 묻지 않아도 움직일 자리를 알았다.운설은 손목을 잡았다.맥이 없었다.예전처럼 강을 흘릴 수는 없었다. 손끝으로 피부 아래를 더듬었다. 한 번. 두 번. 팔목 안쪽보다 팔꿈치 가까이.툭.아주 먼 곳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있어요."연도하가 숨을 내쉬었다."내 빈 맥에도 안 들렸소.""당신은 환자예요?""오늘은 길잡이지.""그럼 제 말을 들어요. 더운돌을 두 겹. 뜨거운 물 말고 미지근한 물."선우현이 물을 가져왔다. 이제는 가득 찬 동이를 혼자 들 수 있었다. 운설은 젖은 천을 갈고, 동상 난 발을 천천히 감쌌다. 연도하는 밖으로 나가 눈 속에서 마른 장작을 더 가져왔다.한 시진 뒤에도 환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두 시진 뒤 입술의 푸른빛이 조금 빠졌다.닭이 울 무렵 기침이 터졌다.환자의 눈이 열렸다. 스무 살 남짓한 여자였다. 겁에 질린 눈이 낯선 천장을 훑었다."여기가 어디예요.""백로진 약방입니다.""나는—"여자는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목에 오래된 멍 자국이 있었다. 쫓기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운설은 더 묻지 않았다."이름은 나중에요. 지금은 숨부터."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첫날의 노인은 죽으며 물건과 업을 남겼다. 오늘의 여자는 살아서 이름을 숨겼다. 운설은 그 차이가 좋았다. 이야기가 다시 시작돼도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었다.날이 밝자 백로진 사람들이 약방으로 왔다.떡집 노파는 죽을 놓고 갔고, 아이 어미는 마른 옷을 가져왔다. 왕철의 이야기에서 약방 위치를 들은 행상도 약초 한 줌을 보탰다. 이름 없는 환자 곁에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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