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71 - Chapter 180

275 Chapters

제171화 — 증인석 (한겸)

형틀에서 보는 법정은 낮았다.한겸은 반년 만의 햇빛에 눈이 시렸다. 시린 눈으로 단 위의 의녀를 보았다. 향로 곁에 선 등이 곧았다. 저 향로가 무엇인지 이 물가에서 아는 사람은 열이 못 될 것이다. 그 열에 제가 든다는 것이 — 옥살이 반년의 몇 안 되는 소출이었다.곁 칸의 어른은 형틀에서도 반듯했다. 처분 전날 밤 창살 너머로 그 어른이 딱 한마디를 건넸었다. 젊은 법.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 끝까지 적게. 붓이 없어도 눈으로 적게. 한겸은 그 말대로 지금 눈으로 적는 중이었다. 단의 도면. 병졸의 수. 향합이 나온 소매. 적는 동안은 무섭지 않았다. 그것도 옥에서 배운 것이었다.세 번째 형틀의 옛 짝은 여전히 낯을 들지 않았다.가는눈. 감찰 시절 둘이 한 조였다. 저보다 눈이 밝고 저보다 붓이 발랐다. 수배 인상서를 뭉개던 밤, 저 눈이 곁에 있었다면 제 첫 죄는 첫 밤에 끝났을 것이다 — 그리 생각해 온 세월이 길었다.한데 물장수의 인상서를 옥에서 전해 들은 날, 한겸은 이상한 것을 짚었다.서툰 그림이라 했다. 가는눈의 붓은 서툰 붓이 아니다. 낯을 한 번 본 자의 귀 모양까지 옮기는 붓이다. 그 붓이 어깨와 걸음만 그리고 낯을 비웠다면 — 그것은 못 그린 것인가, 안 그린 것인가.안 그린 것이라면, 그 그림은 그물 노릇을 버린 종이다. 물지게를 접어라 — 그렇게만 이르는.반 시진을 창살 밖에 서 있다 간 것도 그랬다. 물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물으면 안 되는 것뿐이라서였는지도 모른다. 감찰의 침묵은 원래 두 가지다. 모르는 침묵과 — 아는 침묵.거기까지 셈하고 한겸은 셈을 접었다. 형틀 위에서 남의 속을 다 읽으려 드는 것은 감찰의 병이고, 저는 이제 감찰이 아니었다.옥의 반년 동안 그는 목록을 만들며 살았다. 옥리들의 입에서 주운 것들의 목록. 향선의 수. 물지기의 교대. 그리고 — 다리 위 상석의 가마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제 시선이 반 호흡 길었던 것을 알고 거두었다. 무사하다는 답은 옥에서 이미 받았다.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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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 부싯돌

향합이 열리고, 마른 풀빛 가루가 재 위로 기울었다.그 반 호흡 사이에 물가에서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났다.첫째, 지붕 위의 사백이 시위를 놓았다. 살촉에 기름솜을 감은 살이 — 언제 불을 붙였는지 — 낮게 날아 향로의 아가리에 정확히 꽂혔다. 둘째, 물가의 지게꾼이 빈 지게를 버리며 단의 발치로 내달았다. 셋째, 왕철의 좌판 쪽에서 늙은 목청이 터졌다."불이다! 물맞이 불놀이다! 다들 화로를 열어라!"향로가 폭 하고 일어섰다.숯불 위에 겨우 앉으려던 가루가 기름불을 뒤집어쓰고 통째로 타올랐다. 삭은 풀내는 지워지고 그냥 탄내가 — 무해한, 다만 매캐한 탄내가 — 단 위로 치솟았다. 여덟 해 얼음 속에서 벼려진 것은 불 앞에서 힘을 못 썼다. 천적이 천적을 잡아먹는 냄새를, 운설은 향로의 곁에서 맡았다. 제 귀가 성한 채라는 것을 — 물소리가 흐린 채로나마 곁에 있다는 것을 — 확인하면서."법정에서 활을 들었다!" 인두의 잿빛이 처음으로 갈라졌다. "전원 포박하라!""법정에서 독을 들었으니 셈이 맞소!"모용 가주의 대부가 땅을 때렸다. 만군 증인단 백스물이 일제히 물가의 안쪽으로 돌아섰다. 창은 없었다. 한데 창 없이 서 있는 만군의 등이 병졸들에게는 창보다 넓었다.병졸 여섯이 그래도 단으로 올랐다. 증인을 끌어내리라는 명이었다.지게꾼이 그 여섯 앞에 섰다.운설은 향로의 불길 곁에서 그 등을 보았다. 검을 성 밖에 두고 온 등이었다. 십 년을 한 몸이던 것을 두 겹 천에 싸서 두고, 물지게를 지고, 인상서에 쫓기고 — 그 모든 값을 치른 등이 지금 작대기 하나로 창 여섯 앞에 서 있었다. 물러서라는 말이 목까지 왔다가, 그의 발의 자리를 보고 도로 내려갔다. 그 발은 물러설 줄 아는 발이었다. 물러서지 않기로 정한 발이었을 뿐.검이 없는 검신의 손에는 지게 작대기 하나였다. 첫 합 — 앞선 둘의 창끝이 좌우에서 왔다. 그는 반 보 물러서며 작대기 끝으로 왼쪽 창대를 눌러 오른쪽 창의 길을 막았다. 두 창이 서로 엉키는 반 호흡에 작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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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 여섯 척

여섯 척이 물살을 갈랐다. 노 대신 삿대로, 좁은 수로를 빠르게.저 배들이 단에 닿아 뱃바닥의 것을 태우든 쏟든 — 만 명의 물가는 한 사람에게 재앙의 도가니가 된다. 저들이 처음부터 그린 그림이 그것이었다. 법정이 무너지면 법정째 태우는 그림."배는 물에서 잡는다." 혈비가 삿갓을 벗었다. "물목을 막아라!"첫째 배는 우르가 받았다.거한은 다리 난간에서 그대로 뛰어 뱃머리에 앉았다. 배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 무게를 그대로 빌려 뱃전을 밟아 뒤집었다. 물보라 속에서 우르가 웃는 소리가 났다. 둘째와 셋째는 불화살이 받았다. 사백과 사수 — 두 자매의 활이 지붕 두 곳에서 같은 박자로 울었다. 기름솜의 살이 돛과 뱃바닥에 꽂히고, 배 두 척이 물 위에서 화톳불이 되었다. 실린 것이 통째로 탔다. 삭은 풀내 대신 탄내가 물 위로 번졌다. 여덟 해 치 독이 반 시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드는 냄새였다.넷째 배는 왕철의 사람들이 받았다. 거룻배 다섯이 수로를 가로질러 뱃길을 막고, 낮에 거름틀을 짜던 손들이 갈고리로 뱃전을 잡아챘다. 다섯째 배는 스스로 멎었다. 사공이 삿대를 놓고 물로 뛰어든 것이다. 명을 받드는 것과 만 명 앞에서 재앙이 되는 것 사이에서, 이름 없는 사공 하나가 제 셈을 했다.여섯째 배가 문제였다.그 배는 불을 피하는 길을 알았다. 좁은 수로를 버리고 넓은 물목을 크게 돌아, 화살의 사거리 바깥으로 — 단의 등 뒤로 붙었다. 뱃전에 물지기들이 도끼를 들고 섰다. 저들의 셈은 불이 못 잡는 쪽에 있었다. 뱃바닥의 독을 — 생가루 그대로 — 물에 쏟는 것. 물의 도시의 물 전체에."저건 활로 못 잡아." 혈비의 목소리가 조여들었다. "불이 붙으면 저들이 쏟는다. 안 붙이면 저들이 닿는다."운설은 단 위에서 그 배를 보았다.흐린 귀로도 물이 보였다. 배의 밑을 받친 겨울 물. 낮게, 무겁게 흐르는 강. 강을 패에서 뺐다 — 그 셈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데 지금 이 물가에서 그 패를 도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저 하나뿐이었다.그녀는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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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 잿빛

물목 밖 추격은 반나절 만에 빈손으로 돌아왔다.일곱째 배는 있었다. 어귀 갈대밭의 후미진 물굽이에, 닻줄만 끊긴 채. 인두는 거기서 배를 버리고 뭍길로 올랐다. 사백이 자국을 이틀 치까지 읽었다. 북서쪽. 관도를 피한 샛길. 발은 셋 — 심복 둘이 미리 말을 대 놓고 기다린 자국이었다."질 셈까지 셈해 둔 자다." 가는눈이 말했다. 포승이 풀린 손목을 주무르지도 않고, 그는 감찰의 목소리로 보고부터 했다. "배에 실렸던 예비 독이 전부 사라졌소. 가루로 두 섬 — 향으로 치면 골짜기 하나를 채울 양이오."가는눈의 장부가 그날로 법정의 종이가 되었다.감찰의 버릇으로 그는 다 적어 두고 있었다. 가루의 물목. 향선의 뱃바닥 도면. 우물 주머니를 박으라는 지시와 봉인을 찍으라는 지시. 인두의 수결이 앉은 영(令) 서른두 장의 등본. 제 손으로 받든 명을 제 손으로 적어 둔 까닭을 묻자, 그는 처음으로 감찰이 아닌 낯을 했다."옛 짝이 있소. 저보다 붓이 무딘데 — 죄를 셋이나 제 발로 진 사람이오. 그 사람이 지는 것을 곁에서 보다가, 나도 언젠가 질 죄를 하나 골라 두고 싶었소. 명을 적는 죄를 골랐지. 형당에서 그것은 — 죽을죄요."한겸은 그 말을 세 걸음 밖에서 들었다. 듣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두 감찰은 서로 낯을 안 보는 채로 한참 나란히 서 있었고, 그것이 두 사람 몫의 회포였다.법정은 그날 안으로 다시 섰다.이번에는 단 위에 형틀이 없었다. 젊은 감찰이 — 죄인의 옷 그대로 — 단에 올라 종이들을 차례로 읽었다. 가는눈의 장부. 만군의 수결. 휘월의 자백. 진눈의 증언. 그리고 열두 줄의 전말. 낭독이 끝나자 간수문이 단 아래에서 소리를 얹었다."법의 이름으로 — 처분을 무효로 하고, 죄 없는 자를 방면하며, 격문 네 판을 전부 거둔다. 이 판결의 임자는 내가 아니다." 노인이 단 위를 가리켰다. "저기, 종이를 끝까지 놓지 않은 젊은 법이다."물가가 응답했다. 만 개의 목청으로.낭독이 끝난 종이들은 서기 여섯의 손으로 밤새 베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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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 첫눈의 파발

첫눈은 초경에 왔다.물의 도시의 첫눈은 물 위로 내렸다. 수로마다 눈발이 닿는 자리에서 소리 없이 녹고, 지붕과 다리 난간에만 얇게 앉았다. 팥죽 솥의 김과 눈발이 섞이는 물가를, 사람들은 잔치의 끝자락 삼아 오래 서성였다.운설은 폐가의 문지방에서 그 눈을 보았다.첫눈이 머지않았다던 어머니의 서리 굵던 아침이, 눈발 사이로 지나갔다. 무한에 눈이 오면 북쪽은 벌써 쌓였을 것이다. 창가의 어머니가 — 심지를 아껴 태우던 등잔이 — 이 눈을 보셨을까. 내기의 셈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을까.어미도 사실은 첫눈이 보고 싶거든. 그 작아지던 목소리가 눈발 속에서 자꾸 돌아왔다. 기다려 보마 — 약조는 못 한다던 사람의, 약조보다 무거운 그 말이."보셨을 거요."곁의 그가 말했다. 묻지 않은 물음에 답하는 것이 부부의 오랜 버릇이었다."북쪽 눈이 먼저니까. 파수의 셈으로는 — 사나흘은 먼저요."사나흘 먼저. 그러면 어머니는 첫눈을 보신 것이다. 내기에서 지신 것이다. 지는 게 이기는 내기라 했으니 — 운설은 그 셈의 끝을 오늘도 미뤘다. 미루는 버릇이 어느새 살림이 되어 있었다.이튿날부터 도시는 뒷정리로 바빴다.우물마다 사수가 내려가 가죽 주머니를 걷었다. 걷힌 주머니 서른일곱 개가 물가에 쌓이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 불에 들어갔다. 타는 것을 보겠다고 몰린 사람들이 우물가 시연 때보다 많았다. 물지기 조직은 그날로 풀렸고, 물지기였던 자들 몇이 제 발로 거름틀 짜는 일에 붙었다. 두려움을 팔던 손이 숯을 굽는 그림을 두고, 왕철이 벌써 이야기 한 자락을 지어 팔았다.법의 뒷정리는 더 컸다. 한겸이 임시로 집법당의 인을 맡았다. 젊은 법은 첫 영으로 재조사 청원의 접수를 전부 되살렸고, 둘째 영으로 인두의 수배를 강호 전역에 띄웠다. 수배 방의 인상서는 가는눈이 그렸다. 이번에는 — 낯까지, 무섭게 정확한 붓으로."북서쪽이오." 사백이 지도를 짚었다. "자국이 그쪽인 것이, 마음에 걸리오. 북서로 곧장 가면 — 옛 삭월 땅이오."가루 두 섬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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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 북행

서둘러 오너라 — 그 두 줄이 행렬의 채찍이 되었다.북행조는 이렇게 섰다. 운설과 선우현. 혈비. 사백과 사수. 우르와 기수 여섯. 진눈. 휘월. 그리고 운백천 — 아버지는 갈림길에서 남는 대신 북을 골랐다. 갚을 곳이 북쪽에 있다고 했다. 간수문과 한겸은 남쪽 법의 살림을 맡았고, 남궁완의 연통이 뒤를 받쳤다.겨울 길은 눈과의 셈이었다.첫눈 위에 둘째 눈이 얹히고, 관도의 수레바퀴 자국이 하루가 다르게 얕아졌다. 사백이 앞서 길을 읽고, 사수가 물길을 읽었다. 뭍길이 막히면 언 강가의 강길로 — 북방의 겨울이 여는 길은 해마다 그 길뿐이었다.남행이 가을을 거슬러 내려간 길이었다면, 북행은 겨울을 마중 나가는 길이었다. 하루 오를 때마다 눈이 한 치씩 깊어졌다. 진눈은 추위에 기침이 도졌는데, 도진 채로 제일 부지런히 장작을 팼다. 우르는 밤마다 곰 사냥 이야기를 지어냈고, 지어낸 것이 들통나도 꿋꿋했다. 휘월과 사수는 말없이 나란히 걷는 날이 늘었다. 주운 아비와 주워진 딸의 거리가 눈길 위에서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사백이 멀찍이서 지켰다.그리고 닷새째, 사백이 눈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자국이오."말발굽 아홉. 사람 발 셋. 그리고 바퀴 둘 — 짐이 무거운 수레의, 눈을 깊게 문 자국이었다."사흘 앞섰소. 짐수레가 무거워 하루에 팔십 리를 못 가오. 짐은—" 사냥꾼이 자국의 깊이를 손가락으로 쟀다. "두 섬쯤 되겠소."가루 두 섬. 잿빛의 자국이었다. 눈길 위의 자국은 정직해서, 쫓기는 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한 곳으로 가는 자의,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는 자국이었다.인두가 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길을, 사흘 먼저."어째서 북이지." 우르가 도끼자루를 고쳐 쥐었다. "패한 자가 숨을 데는 남쪽에도 많은데.""숨으러 가는 게 아니다." 휘월이 말했다. 노인은 자국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십팔 년 전 저와 같은 셈을 하는 자의 자국을 읽는 낯이었다. "그자는 격식의 사람이다. 격식의 사람이 판에서 지면 — 마지막 격식을 차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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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 온기

덫인 여울에는 밝을 때 들기로 했다. 마지막 밤이 통째로 남았다.강길 어귀의 사냥막은 반이 무너졌으나 화덕은 성했다. 셋째 눈이 소리를 덮었다.불침번 표에서 부부의 이름을 지운 것은 연도하였다. "내일 치 값은 내일 받소. 오늘 밤 빚은 내가 지지." 선우현은 빚진 적 없다고 했고, 연도하는 그러면 선물이라 했다. 사백이 두 사람을 새벽 몫에만 놓았다. 밤을 통째로 겹쳐 준 셈이었다.그가 눈 녹인 물로 차를 우렸다. 무한의 저자에서 물값 대신 받은 찻잎이었다. 두 푼짜리 찻잔이 두 손을 오갔다."봄 이야기 마저 합시다. 우물 다음은 그네요.""살구나무 심었고요.""그네요?""살구나무 굵은 가지에 매겠소. 미는 자리는 앞이 좋소. 낯을 볼 수 있게.""누가 탑니까, 그 그네는."그는 잔 너머로 웃었다. 운설도 뜻을 묻지 않고 웃었다.사람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오르고, 무너진 벽으로 눈발이 들었다. 세상이 이 방 한 칸만 하게 줄어든 밤이었다.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오래 하고 싶던 셈 하나를 했다."처음 만난 눈밤에 그러셨죠. 그 손에 있던 걸 당신이 가졌군.""그랬소.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첫마디였지.""한데 맞는 말이었어요." 그녀는 그의 굳은살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날부터 자꾸 가졌으니까요. 은침도, 이름도, 밤도. 당신 것을.""셈이 틀렸소." 그가 그녀의 손을 마주 쥐었다. "가진 게 아니라 맡긴 거요. 처음부터 — 그대한테 가라고 있던 것들이오."화덕의 장작이 무너졌다. 장작을 얹고 돌아온 그가 그녀의 낯을 오래 보았다. 보는 이의 다음 행동을 잊게 하는 낯을, 세상에서 제일 오래 본 사람이었다."설야.""예.""내일 여울에서 무슨 일이 있든," 그가 말했다. 전야마다 하던 그 말을 — 한데 이번에는 끝이 달랐다. "그대는 살아서 궁에 가시오. 어머님이 기다리시니. 그 약조 하나만 받아 두겠소.""둘이 가는 겁니다.""둘이 가지." 그는 순순히 답했다. 순순한 것이 마음에 걸릴 만큼 순순히. "둘이 가되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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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 강 (선우현)

여울로 드는 걸음마다, 선우현은 숙제를 생각했다.장모의 머리맡에서 받은 평생 치 숙제. 때가 되면 알게 된다던 그 말은 반은 틀렸다. 받은 그 자리에서 이미 알았으니까. 다만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내에게도, 저 자신에게도.설야가 너 없이 살아야 하는 날이 오거든 — 그 아이가 살게 해 다오.장모는 그렇게 말했다. 실낱같은 목소리로, 실낱 같지 않게. 사위는 어째서 그런 숙제를 주시느냐 묻지 못했다. 물으면 답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열여덟 해 닻 노릇을 한 사람의 눈은 닻의 끝을 보는 눈이라서 — 그 눈이 사위의 평생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묻지 않는 쪽을 골랐다.대신 파수를 섰다. 새벽마다 하늘을 보는 파수. 첫눈의 파수라고 아내에게는 반만 말했다. 나머지 반은 — 날들의 파수였다. 주어진 날들이 하루씩 오는 것을 제일 먼저 확인하고, 하루씩 온전히 쓰는 파수.오늘도 하루가 왔다. 여울의 하루가.연도하를 싫어하는 데는 아흐레면 충분했다.그 사내는 아내를 왕녀도 요녀도 의녀도 아닌 여자로 보았다. 감추지 않았다.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손을 뻗을 때마다 한 치 앞에서 허락을 물었다는 점이었다. 나쁜 자라면 베면 그만이었다. 거리를 아는 사내는 벨 구실이 없었다.선우현은 끝내 검을 뽑지 않았다. 연도하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설야를 믿었다. 제 마음보다 더 오래, 더 깊이.폐사의 언덕에서 그녀를 처음 보던 날, 검병에 땀이 났었다. 평생 마르던 손이었다. 그 땀의 뜻을 몰라 반년을 헤맸고, 알고 나서는 평생이 정해졌다. 소매의 은침을 수습하던 손이, 이제 그 임자의 평생을 수습하는 손이 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곧은 길이었다. 검의 길보다 곧았다.골짜기는 흰 침묵이었다.얼음여울은 반쯤 얼어 있었다. 여울목의 급한 물살만 검게 살아 흐르고, 나머지는 눈 덮인 얼음이었다. 십팔 년 전 개들이 짖지 않던 그 물가. 지난봄 만군이 돌아선 그 언덕. 세상이 두 번 갈린 자리를, 행렬은 셋째로 지나는 중이었다.사백이 앞에서 손을 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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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 한 번의 맥

세상은 완전한 침묵이었다.나루의 끊김은 반쪽이었다. 이것은 전부였다. 물소리가 있던 자리가 지워지고, 자리의 기억까지 지워지는 — 골짜기 하나 치의 바람이 가져온 침묵. 운설은 그 침묵의 밑바닥에 혼자 서 있었다.그리고 침묵의 바깥에서, 세상이 부서지고 있었다.얼음여울의 겨울 강이 하늘로 서 있었다. 검은 물의 벽. 깨진 얼음장들이 그 안에서 맷돌처럼 돌았다. 사람들이 흩어져 달리는 것이 보였다. 입을 벌려 외치는 언니가 보였다. 눈밭에 무릎을 꿇고 길을 놓는 휘월의 손이 보였다.모두 소리가 없었다.제 강이 세상을 부수는 것을, 임자는 소리 없는 유리창 너머로 보고만 있었다.달려라. 어디로든. 강에서 멀리, 사람들에게서 멀리. 다리에 명을 내리는데 다리가 듣지 않았다. 폭주는 몸까지 삼키고 있었다. 물의 벽이 골짜기를 천천히 쓸며 이쪽으로 왔다. 임자를 찾는 것이다. 못 듣는 임자를, 저를 놓아 버린 세상을.그때 물의 벽 앞에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검은 물을 등지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안 돼.소리가 나오는지도 알 수 없는 목으로 그녀는 외쳤다. 오지 마세요. 달아나요. 언니에게 한 맹세를 지켜요. 한데 그는 맹세를 어기는 걸음으로 달렸다. 그믐의 우물가에서처럼. 온몸으로.첫 물살이 그의 어깨를 쳤다. 그는 반 보 밀리고 나아갔다. 얼음 조각이 옆구리를 갈랐다. 부서진 물살이 산 짐승처럼 그를 물었고, 검 없는 검신의 마지막 보법은 앞으로만 있었다.마침내 그가 닿았다.두 팔이 그녀를 감쌌다. 젖은 품. 얼음보다 찬 옷자락 밑에서 심장 뛰는 자리가 그녀의 뺨에 닿았다.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데 닿았다. 그가 그녀의 낯을 두 손으로 받쳤다. 물의 벽이 두 사람의 위로 그림자를 세웠다.입술이 움직였다. 그녀는 평생 그 입모양을 읽어 온 사람이라 읽었다.설야.입술이 닿았다.멎으라고 닿은 입술이 아니었다. 들리지 않는 강은 멎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알고도 닿은 입술이었다. 마지막까지 곁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뜻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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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 돌아가는 맥

심장은 돌아왔으나 선우현은 돌아오지 않았다.그의 몸은 눈밭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숨은 세 번에 한 번씩 길을 잃었고, 맥은 손가락 밑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운설은 무릎 아래가 얼어붙는 것도 모르고 그의 심맥에 가느다란 강을 대고 있었다."더 흘리면 그대가 먼저 무너지오."연도하가 말했다."입 다물어요.""그럼 들으시오. 지금 필요한 것은 큰 강이 아니라 작은 그릇이오."운설의 눈이 들렸다. 사내는 선우현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였다. 평소의 느슨한 웃음도, 사람을 값처럼 헤아리는 눈도 없었다. 제 안이 텅 비어 있어 타인의 맥을 더 또렷이 듣는 사람의 낯뿐이었다."한 번에 한 방울. 박동이 오기 전에 넣으면 밀어 죽이고, 지나간 뒤 넣으면 못 받소. 올 때 같이.""당신이 가르치지 않아도—""알면 하시오. 지금은 화낼 시간이 없으니."미운 말이었다. 미워할 틈이 없어서 운설은 따랐다.연도하가 맥을 세었다. "지금."강 한 방울이 들었다."멎고. 기다려."눈 한 송이가 선우현의 속눈썹에 앉았다 녹았다."지금."또 한 방울.둘은 그렇게 한 사람의 목숨을 사이에 두고 처음으로 같은 박자를 탔다. 손목에서 듣는 자와 가슴으로 흘리는 자.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끊어질 실낱을, 서로를 싫어할 겨를도 없이 이어 붙였다.혈비와 휘월이 닿았을 때는 박동이 열둘까지 이어진 뒤였다."살았느냐."언니의 물음에 운설은 대답하지 못했다. 살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맥이 놀라 달아날까 무서웠다.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휘월이 부서진 등과 단전을 짚었다. 어린 낯의 노인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검은.""그런 것 묻지 마세요.""묻는 것이 아니다." 휘월이 낮게 말했다. "값을 세는 게다. 이 아이 안에서 검은 끝났다. 남은 내력도 모두 심맥을 받치는 데 써야 한다. 다시 칼을 들겠다고 한 줌이라도 돌리면 — 그날이 끝이다."운설은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검을 못 들어도 됐다. 걷지 못해도 됐다. 저를 몰라봐도 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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