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221 - Chapter 230

270 Chapters

제221화 — 목의 자국

운설이 문을 열자 눈 속에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마흔쯤 되었을까. 오른발을 조금 끌었고 왼눈에는 흰 막이 앉아 있었다. 등에 멘 약상자에서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그는 운설의 얼굴보다 먼저 침상 쪽을 보았다."여기 젊은 계집 하나가 왔소?"침상에서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아주 작았으나 운설은 들었다. 선우현도 들었다. 그의 손이 약칼 곁에서 멎었다."환자를 찾습니까?""내 딸을 찾소. 이름은 장채령. 눈길에서 정신을 잃었을 게요."사내는 걱정하는 아비의 낯을 하고 있었다. 입술은 떨렸고 젖은 소매에는 눈 녹은 자국이 얼룩졌다. 다만 약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발이 너무 빨랐다.선우현이 문턱 가운데 섰다."의원이 들이라 하기 전에는 기다리시오."예전 같으면 검 한 자루가 놓였을 자리였다. 지금은 빈 소매와 약칼뿐이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한 걸음 물러났다. 몸이 먼저 기억한 위압이었다.운설은 침상으로 갔다.여자는 눈을 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푸르던 입술이 이번에는 핏기 없이 하얬다. 손가락이 이불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손톱 밑에 붉은 가루가 끼어 있었다.운설이 젖은 머리칼을 걷어 주자 여자는 움찔했다. 손이 목 가까이 가기만 해도 눈을 먼저 감았다. 맞을 것을 기다리는 버릇이었다. 운설은 손을 멈추고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머리칼만 볼게요. 허락할 때까지 목에는 안 댑니다."여자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귀 뒤에도 붉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약을 먹은 흔적이 아니라, 오래 갈고 나른 사람에게 남는 먼지였다.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에는 붓을 쥔 굳은살이 박였고 왼손 손바닥에는 새로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약방에서 일했어요?"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시선이 화로 곁 약재 궤로 갔다. 연도하가 가져온 궤였다. 눈송이 모양의 설로상단 낙인이 찍혀 있었다.그것을 본 순간 여자의 숨이 멎었다가 가쁘게 터졌다."저 상자, 치워 주세요."연도하가 눈썹을 움직였다."내 물건이 무섭소?""그 도장으로 왔어요. 전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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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화 — 아비라는 사람

선우현은 사내를 문 안에 들이지 않았다.약방 처마 아래 세워 놓고 의자를 하나 내주었다. 걱정하는 아비에게 베푸는 예처럼 보였으나, 눈이 쌓인 골목 한복판에서 모두의 눈을 받게 하는 자리였다."딸이 몇 살이오.""스물둘이오.""왼손잡이요, 오른손잡이요."사내의 눈이 문틈으로 움직였다. 침상에서는 여자의 왼손만 이불 밖에 나와 있었다."왼손이지."선우현은 답을 듣자마자 다음을 물었다."어릴 적 부르던 이름은.""채령이라 했소.""그건 지금 이름이오."사내가 입술을 핥았다."겨울에 열이 나면 무엇을 먹소.""죽을 먹지.""무슨 죽.""쌀죽."침상에서 채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운설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았다. 가족은 병날 때 먹인 것의 냄새를 기억한다. 땔나무가 모자라 물처럼 묽었는지, 소금을 못 넣었는지, 아이가 싫어해 꿀을 훔쳐 넣었는지까지.선우현도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딸의 글씨는 어떻소.""계집 글씨가 다 그렇지.""그 아이 손가락에는 붓 굳은살이 있소. 아비라면 한 번쯤 자랑했을 텐데."사내의 흰 눈동자가 가늘어졌다.운설은 약탕관 앞에 앉아 그 문답을 들었다. 선우현은 가족이 아니면 모를 법한 것과, 눈만 밝으면 훔쳐볼 수 있는 것을 번갈아 물었다. 몸의 점, 좋아하는 음식, 돌아가신 어머니가 쓰던 빗의 재료.사내는 쉬운 것만 길게 말했다.모르는 것 앞에서는 딸이 아파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채령의 어깨가 질문마다 굳었다. 마침내 선우현이 물었다."딸이 열 살 때 크게 다친 곳은 어디요.""오른쪽 무릎."침상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났다."그런 적 없어요."사내의 얼굴에서 슬픔이 사라졌다."아픈 아이가 헛소리를 하는 거요.""내 아버지는 제가 열한 살 때 돌아가셨어요."여자가 이불을 걷었다. 다리가 떨렸으나 일어섰다."그리고 저를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은 령이가 아니라 종달이였어요. 새벽마다 장부 읽는 아버지를 깨웠으니까."골목 문들이 하나씩 열렸다. 떡집 노파가 밀대를 든 채 나왔고, 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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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화 — 검은 장부

장채령은 아버지에게 글과 셈을 배웠다.물문 장터의 작은 전당포에서 빚 장부를 쓰던 사람이었다. 그는 빚진 이의 이름 옆에 사정을 한 줄씩 적었다. 아이가 앓음. 봄보리 뒤 갚음. 남편 장례로 한 달 미룸."숫자만 쓰면 사람이 없어지니까요."채령이 말했다.아버지가 죽은 뒤 온생원에서 장부 쓰는 자리를 얻었다. 온생원은 겨울마다 가난한 집에 적온산(積溫散)을 나눴다. 물에 타 마시면 속에서 불이 일어 손발이 따뜻해진다는 약이었다.처음에는 정말 사람을 살렸다.얼어 죽는 노인이 줄었고 눈길을 건너는 짐꾼들이 버텼다. 원주 구담은 약값을 받지 않았다. 부자에게 받은 진료비와 상단의 희사로 메운다고 했다."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았어요. 붉은 가루가 해마다 왜 많아지는지."처음 적온산은 계피와 말린 생강, 부자처럼 몸을 덥히는 약재를 엄격히 달여 만들었다. 채령은 배합표를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흉년이 든 뒤 좋은 약재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 빈자리에 이름 없는 붉은 광석이 들어왔다.가루를 조금 탄 날에는 환자의 볼이 금세 붉어졌다. 두 봉을 먹으면 추운 밤에도 땀이 났다. 사람들은 약효가 세졌다고 기뻐했다."원주가 그랬어요. 가난한 사람은 내일까지 따뜻하면 오늘 값을 묻지 않는다고."운설의 손이 멎었다."그건 의원의 말이 아니에요.""그분도 처음에는 의원이었어요."채령은 그 말이 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지난겨울부터 환자가 달라졌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손이 떨렸다. 헛것을 보며 웃다가 사흘 뒤 죽은 아이도 있었다. 온생원 장부에는 모두 동사나 지병으로 적혔다.채령은 죽은 사람 옆에 검은 먹으로 점을 찍었다.하나, 둘, 열.마흔일곱.그 수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일곱 살 방아꾼 딸, 쉰둘 소금 짐꾼, 아이를 밴 스무 살 아낙. 채령은 기억나는 대로 말했고 선우현은 빈 종이에 받아 적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획이 고르지 않았지만 이름 하나도 재촉하지 않았다.채령이 열두 번째 이름에서 울기 시작했다."제가 약을 나눠 줬어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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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 빈 검집

선우현은 아이들에게 쓰던 먹줄을 처마 밑에 맸다.줄마다 작은 약병과 방울을 달았다. 앞문에는 재를 얇게 뿌리고, 뒷문 곁에는 물동이를 셋 세웠다. 우물 덮개 위에는 찬물을 얇게 부어 살얼음을 만들었다."싸우려고 준비하는 것 같지 않네요."채령이 말했다."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오.""검신이 그 말을 하니 이상하군."연도하가 창살을 살폈다.선우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라면 문 하나와 검 한 자루면 충분했을 것이다. 지금은 앞문에서 뒷문까지 열두 걸음을 세 번 걸은 것만으로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운설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맥이 빨라요.""긴장한 것이오.""당신도 긴장해요?""이제는 칼이 아픈 줄 아니까."그 말이 농담이 아니어서 운설은 손을 놓지 못했다."그럼 하지 마요.""무엇을.""당신 몸을 미끼로 쓰는 것."선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먹줄의 높이를 손가락 두 마디만큼 낮췄다. 쫓는 자는 앞을 보고, 달아나는 자는 발밑을 본다는 옛 버릇 때문이었다.연도하가 그 손놀림을 지켜보았다."검이 없어도 성가신 사람이군.""그대가 칭찬하면 욕처럼 들리오.""욕인데 칭찬으로 들은 모양이지."두 사내 사이에 아주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등을 맡길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소리였다.자정이 지나자 첫 방울이 울렸다.딸랑.앞문이 아니었다. 지붕이었다.검은 그림자 둘이 기와를 타고 내려왔다. 하나가 창을 뜯는 순간 약병이 깨졌다. 매운 겨자와 식초 냄새가 얼굴을 덮었다. 사내가 기침하며 욕을 뱉었다.동시에 뒷문 빗장이 흔들렸다."셋이오."선우현이 말했다.연도하가 장대를 들고 뒷문으로 갔다. 내공 없는 몸이었으나 눈길과 수레 위에서 단련된 힘은 남아 있었다. 문이 벌어지는 순간 장대를 가로질러 첫 사내의 무릎을 꺾었다.운설은 채령을 약장 뒤에 앉히고 침통을 열었다."나오지 마요.""의원은요?""제 집이잖아요."창으로 들어온 자가 짧은 칼을 뽑았다. 선우현이 물동이를 발로 밀었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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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화 — 살아 있는 밤

운설은 선우현의 옆구리를 세 바늘 꿰맸다.상처는 얕았다. 피도 곧 멎었다. 그런데 마지막 매듭을 지을 때까지 그녀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설야.""말하지 마요.""숨은 쉬어야 하오.""당신이요."선우현은 입을 다물었다.연도하는 붙잡은 자를 관아에 넘기러 갔고 채령은 떡집 노파의 방에서 잤다. 약방 안에는 화로 타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만 남았다.붙잡힌 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혀 밑에 온생원 목패와 같은 붉은 점이 새겨져 있었다. 관아에서는 단순한 도둑으로 가두겠다고 했다. 누가 풀어 주러 오는지 보자는 선우현의 말에 연도하가 포졸 셋의 한 달 품삯을 먼저 치렀다."돈으로 사람을 사지 마시오."선우현이 말하자 연도하는 어깨를 으쓱했다."사람이 아니라 깨어 있는 밤을 샀소. 그대가 오늘 밤 쓸 것 같지 않아서."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던 운설이, 문이 닫힌 뒤에야 얼굴을 붉혔다.운설은 피 묻은 물을 버리고 돌아왔다. 선우현이 혼자 저고리를 여미려 애쓰고 있었다. 한 손이 옆구리에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얼굴이 굳었다."놔요."그녀가 매듭을 잡아당겼다. 너무 세게 당겼는지 그가 숨을 삼켰다."아프오.""아픈 줄 알면서 왜 앞에 섰어요?""당신 뒤에 설 수는 없었소.""저는 당신이 지켜야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알고 있소.""그런데요?"선우현은 한참 뒤 대답했다."내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소."검을 잃은 날부터 삼킨 말이었다. 운설은 화를 낼 곳을 잃었다.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말보다 더 약하고, 그래서 더 아픈 고백이었다."당신이 물을 가져오고 약초를 써는 날마다 저를 지켜요. 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치는 것도요. 제가 밤새 환자를 볼 때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도.""그건 누구나 할 수 있소.""당신이 해서 제게 소용 있는 거예요."선우현의 턱이 굳었다. 제 손의 소용을 처음 물었던 무한의 밤이 두 사람 사이에 돌아왔다. 그때 운설은 반쪽만 답했다. 이제는 늦은 나머지를 그의 가슴 위에 놓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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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6화 — 설로의 도장

금이 간 도장은 진짜 설로상단 나무로 만들었다.눈잣나무는 북관 밖에서만 자랐다. 겉의 눈송이는 다섯 갈래로 잘못 팠으나 손잡이 밑에 칼금 일곱이 있었다. 상단 수레가 물목을 지날 때마다 하나씩 늘리는 표식이었다.연도하는 칼금을 엄지로 훑었다."일곱 번째 물목은 노관의 자리요.""믿는 사람입니까?"운설이 묻자 그가 낮게 웃었다."믿었으니 이름이 바로 나오지."노관은 설로상단의 가장 오래된 물목지기였다. 스무 해 전 눈사태로 오른귀 절반을 잃었다. 그날 눈 밑에서 사람 열하나를 끌어냈고, 마지막이 열일곱 살 연도하였다."내가 길을 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목숨을 먼저 샀소."연도하는 언제나 빚을 값으로 말했으나 이번에는 셈이 흐렸다.선우현이 도장 바닥에 얇은 종이를 대고 먹을 문질렀다. 찍힌 문양 가장자리에 작은 점이 두 개 나타났다."가짜인 것을 알아보게 만든 흠이오.""누구에게?""진짜 표식을 아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면 넣을 필요가 없소.""노관이 알리고 싶었다는 뜻이군.""아니면 들켰을 때 제 목숨을 살릴 구멍을 팠거나."연도하가 선우현을 보았다."사람을 아주 좋게 보는군.""그대보다 조금.""그건 욕이오?""칭찬으로 들어도 좋소."전날 밤 둘 사이를 지나갔던 말이 돌아왔다. 운설은 웃지 못했다. 연도하의 오른손 끝이 다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도장을 소매에 넣고 객점 마구간으로 갔다. 한 시진 뒤, 오른귀가 반쯤 없는 사내가 약방으로 들어왔다.노관은 생각보다 작았다. 굽은 등에는 밧줄을 두르고 있었고, 눈을 마주치는 대신 손가락으로 매듭 수를 세었다. 약방 안의 사람을 하나씩 세는 버릇이었다.그는 연도하 앞에 오기 전 운설에게 먼저 절했다. 여섯 마을에서 의원 이야기를 들었다며 말린 산삼 한 뿌리를 약상 위에 놓았다. 진짜 귀한 물건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데 쓰라고 가져온 손과 사람을 죽인 광석을 통과시킨 손이 같았다.채령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노관도 채령의 낯을 처음 본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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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7화 — 붉은 약

백로진에서 물문 장터까지 도보로는 이레였다.그러나 적온산 수레를 앞질러야 했다. 연도하는 검은 말 넷을 골랐고 짐을 절반으로 줄였다. 채령에게는 털을 두 겹 깐 작은 수레를 내주었다.선우현은 제 말 앞에 섰다."옆구리 세 바늘입니다."운설이 말했다."말은 옆구리로 타지 않소.""떨어질 때는요?""안 떨어지면 되오.""검신께서 아주 훌륭한 계책을 내셨군."연도하가 고삐를 건넸다. 말끝에는 웃음이 묻었으나 안장 높이를 선우현이 오르기 좋게 한 치 낮춰 둔 뒤였다.첫날은 눈을 맞으며 달렸다. 둘째 날 선우현의 상처가 다시 배어 나왔다. 운설은 길가 사당에서 일행을 세우고 붕대를 갈았다.상처 가장자리는 붉었으나 곪지는 않았다. 운설은 찬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붕대를 돌렸다. 말에서 내린 연도하가 물주머니를 들고 들어오다 그 광경 앞에서 멈췄다.운설의 뺨은 선우현의 맨살 가까이에 있었고, 선우현의 손은 균형을 잡느라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물은 밖에 두지.""왜요? 들어와요."운설이 아무렇지 않게 부르자 선우현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한 번 굽었다.연도하는 웃으며 물을 내려놓았다."의원은 사람을 살리면서 사람을 시험하는 버릇이 있군.""무슨 시험이요?""모르면 됐소."그가 나간 뒤 선우현이 낮게 말했다."저 사내 앞에서 내 옷을 그렇게 벗기지 마시오.""환자인데 어떡해요.""문이라도 닫으시오.""질투하면 상처가 빨리 나아요?""덜 아픈 듯은 하오."운설이 웃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옷깃을 여몄다."괜찮소.""그 말 한 번에 벌금 두 푼 받을 거예요.""내 약방 돈으로 내면 되겠군.""제 약방이거든요.""우리 약방이라 하지 않았소?"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동안 연도하는 사당 문밖에서 불을 피웠다. 채령은 그에게 약이 든 물주머니를 건넸다."안 보고 싶으세요?""무엇을.""두 분이요."연도하는 불씨를 오래 들여다보았다."보고 싶지 않은 것과 눈을 돌리는 것은 다른 일이지."그날 밤 운설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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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 혀 밑의 겨울

운설은 아이를 빨래터 곁 빈 국밥집으로 옮겼다.불을 세게 피우지 않았다. 땀으로 약 기운을 뺀다는 장터 의원의 말을 막고, 미지근한 물로 입안을 씻었다. 아이가 삼킬 수 있게 된 뒤 녹두와 감초를 묽게 달인 물을 한 숟갈씩 먹였다."해독약입니까?"아이 어미가 물었다."몸이 버티도록 돕는 약이에요. 이미 들어간 돌가루를 한 번에 없애는 약은 없습니다."기적을 약속하지 않자 어미의 얼굴이 무너졌다.운설은 그 낯을 피하지 않았다."대신 지금 멈추면 살 수 있어요. 손을 잡아 주세요. 깨어날 때 아는 손이 있어야 합니다."채령은 문 앞에서 적온산 봉지를 하나씩 뜯었다. 원래 약재 냄새 아래 쇠와 눅은 흙 냄새가 났다. 붉은 가루를 물에 풀자 무거운 입자가 그릇 바닥에 가라앉았다.연도하가 칼끝으로 긁어 보았다."화로 안료로 쓰는 단사 찌꺼기요. 북쪽 폐광에서 버리던 것.""약으로도 아주 조금 쓰기는 해요."운설이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먹이는 건 약이 아닙니다. 몸 안에 쌓이는 독이에요."선우현은 국밥집 밖에 긴 종이를 붙였다.손 떨림, 잇몸 피, 이유 없는 열, 헛것이 보이는 자는 약 봉지를 들고 들어오시오.한 시진 만에 열두 사람이 모였다.국밥집 주인은 겨울 장사를 망친다며 처음에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손 떨리는 짐꾼이 제 친형이라는 것을 알고는 솥을 비웠다. 뜨거운 국 대신 묽은 녹두죽을 끓였다. 짠 장아찌는 치웠고 바닥에 멍석을 더 깔았다.채령은 환자마다 붉은 봉지 수를 적었다. 손이 떨려 먹점이 번지면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버지가 장부에 사정을 한 줄씩 남기던 방식이었다.선우현은 글 모르는 환자의 말을 대신 적었다. 손이 떨려 딸의 머리를 못 땋음. 밤마다 죽은 남편이 문밖에 보임. 증상은 사람의 생활을 빼앗은 모양으로 기록되었다.쉰 살 짐꾼은 젓가락을 잡지 못했다. 임신한 여자는 사흘째 물만 토했다. 열다섯 소녀는 혀가 붉게 부어 말을 제대로 못 했다. 모두 추운 밤을 견디려고 공짜 약을 먹었다.운설은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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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 검신의 이름값

광장에 웃음이 먼저 번졌다."선우현은 얼음강에서 죽었다지 않았소?""저자가 검신이면 나는 무림맹주다.""검도 없는데 무슨 선우현이야."선우현은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예전에는 이름을 대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살아 있는 몸이 제 이름을 증명해야 했다.그는 붕대 감은 옆구리를 펴고 수레 바로 앞에 섰다."검신은 죽었소. 선우현은 약방에서 물을 나르는 중이오."이번에는 웃는 사람이 적었다.누군가 정말 선우현인지 증명해 보라며 나무 막대를 던졌다. 예전 검객이라면 손가락 두 개로 받았을 거리였다. 막대는 그의 어깨를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운설의 얼굴이 굳었다. 선우현은 막대를 주워 옆에 세웠다. 지팡이처럼 짚자 흔들리던 무릎이 바로 섰다."검신이 아니라 했잖소."조롱하던 사내가 눈을 피했다.그 한 번의 실패가 오히려 그의 이름을 증명했다. 죽었다 살아나 검을 잃었다는 소문과 눈앞의 몸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군중 사이에서 정말 그 사람이라는 속삭임이 번졌다.포졸장이 앞으로 나왔다. 콧등에 동상으로 패인 홈이 있었고 말할 때마다 오른쪽 수염을 잡아당겼다."죽었든 살았든 관아의 구휼을 막을 권한은 없소. 비키시오.""구휼품이 사람을 죽인 증거가 있소."채령이 검은 장부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온생원 호위 하나가 곧 외쳤다."도둑이 베낀 가짜 장부요! 저 계집은 원의 은자를 훔쳐 달아났소!"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다.선우현은 채령에게 장부를 받지 않았다. 대신 광장 한복판 빈 탁자에 놓게 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도 혼자 가져갈 수 없는 자리였다."오늘 배급을 하루만 멈추시오. 그동안 장부의 이름을 확인하고 약을 따로 감정합시다. 틀렸다면 내가 온생원 문 앞에서 사죄하리다.""하루 동안 얼어 죽는 사람은?"포졸장이 물었다."내 이름을 담보로 장작을 사겠소.""검 없는 이름이 얼마짜리인데."조롱이 다시 튀었다."값이 없다면 더 좋소. 아무도 손해 보지 않을 테니."선우현은 제 앞에 떨어진 막대를 짚고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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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 상단주의 값

노관은 도망치지 않았다.그는 광장 한복판에서 진짜 도장을 제 손으로 꺼냈다. 허리 안쪽에 늘 차고 다니던 물목 인장이었다. 수레 바닥의 문양과 정확히 맞았다."제가 찍었습니다."사람들이 욕을 뱉었다. 돌 하나가 날아와 노관의 이마를 찢었다. 두 번째 돌은 연도하가 손으로 받았다."아직 값을 정하지 않았소.""사람 마흔일곱을 죽인 값이 돌 하나로 모자라오?"복칠의 어미가 소리쳤다."모자라니 멈추라는 것이오."연도하는 피 묻은 손으로 돌을 내려놓았다."이자를 붙여도 목숨 하나를 못 돌려주오. 그러니 죽이는 값부터 받으면 남은 빚을 받을 사람이 없어지지."그 말은 그가 평생 믿어 온 셈과 닮았으나 방향이 달랐다.설로상단 물목 창고에서 장부가 나왔다. 붉은 광석을 실은 수레 스물세 대, 온생원에서 받은 은 마흔여섯 냥. 그 돈은 노관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다. 삽꾼 품삯, 죽은 말 보상, 여섯 마을 외상 약값으로 흩어졌다.노관은 돈이 쓰인 곳을 모두 기억했다. 어느 말이 눈길에서 다리를 부러뜨렸는지, 어느 삽꾼의 아이가 폐병을 앓았는지까지 말했다. 선한 용처가 이어질수록 광장의 얼굴들은 더 복잡해졌다.복칠의 어미가 물었다."내 아이 값으로 어느 아이 약을 샀소?"노관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모릅니다.""그런데 어찌 길을 살렸다고 말해. 누구 피가 어느 눈 위에 뿌려졌는지도 모르면서."노관은 더는 귀의 상처를 만지지 않았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처음으로 완전히 엎드렸다."그래서 네가 옳아지나?"연도하가 물었다."아닙니다.""훔친 은자가 없으니 배신이 아닌가?""배신입니다.""처음 손 떨린 환자 이야기를 들은 날은."노관이 날짜를 말했다.채령의 검은 장부에서 스물아홉 번째 이름이 죽기 엿새 전이었다. 그는 사람 열여덟이 더 죽는 동안 수레를 보냈다.노관은 왼손으로 오른귀의 잘린 자리를 만졌다."그 길을 닫으면 여섯 마을 아이들이 약 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보지 못한 아이를 죽였군.""예."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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