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설야팔부 (雪夜八部): Capítulo 271 - Capítulo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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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 빈 관인

관청의 봉인은 흰 종이보다 빨랐다.백지장 쇠문과 여덟째 문 문설주에 같은 날 붉은 봉인이 붙었다.무호적 인원을 사사로이 숨기거나 부리는 일을 금함.숨기는 것과 살리는 것이 한 줄에 묶여 있었다.아련은 봉인을 뜯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 작은 종이를 붙였다.안에 마흔일곱 명 있음. 숨기지 않음.현승이 다시 와 종이를 떼려 하자 류단이 문 안에 섰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검문을 만나면 죽은 호적을 도용한 죄로 붙잡혔다.“우리를 여기 두면 숨긴 거고, 내보내면 죄인이래요.”류단이 말했다.“법이라는 문은 앞뒤로 다 잠겼네요.”현승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도 사흘째 옛 호적책을 뒤지고 있었다.봉인 때문에 약방에서 보내는 약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운설은 처방마다 환자 이름 대신 허락한 표식을 쓰고, 현승이 보는 앞에서 직접 건넸다.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의 기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백지장 사람들은 봉인 안쪽에서 일을 멈추지 않았다. 종이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가마를 씻고 창문을 넓혔다. 관청이 작업장이라 부르지 못하게 해도, 자기들이 머물 집으로 고치는 일까지 금할 조항은 없었다.유경은 매일 문 앞에 새 수를 붙였다.오늘 살아 있는 사람 마흔일곱.다음 날도 같은 수였다. 법이 세지 않는 동안 자기들이 먼저 세는 일이었다.“살아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게 아니오.”“그럼 무엇을 의심하오?”선우현이 물었다.“이름이 누구 것인지.”죽은 호적 하나를 되살리면 그 이름으로 상속된 땅과 빚, 혼인과 죄까지 함께 돌아왔다. 허담이 한 사람에게 죽은 이름 셋을 붙인 탓에 어느 이름을 살릴지도 정할 수 없었다.“새 이름을 주면 되잖아요.”아련이 말했다.“누가 주지?”현승이 되물었다.“본인이요.”“사람이 제 이름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으면 죄인도 빚진 자도 모두 이름을 바꿀 거다.”“남이 마음대로 바꾸는 건 됐잖아요.”아이의 말에 현승의 손이 봉인 위에서 멎었다.선우현은 관청 서고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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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 사는 사람의 법

첫째 증인은 몸이었다.운설은 마흔일곱 사람을 다시 진찰했다. 백지장 장부에 적힌 오래된 흉과 지금 몸의 자국이 같은지 확인했다. 단, 옷을 벗어야 보이는 흉은 본인이 원할 때만 썼다.한 남자는 등에 매질 자국이 있어도 보이지 않겠다고 했다.“그러면 증언이 약해져요.”유경이 걱정했다.“약해져도 돼요.”운설이 답했다.“살기 위해 또 몸을 내놓으라고 하면 백지장과 다르지 않아요.”남자는 대신 어릴 때 부러진 왼쪽 어금니와 맥의 불규칙함을 허락했다. 몸을 아는 일에도 문이 있었다.다른 여자는 얼굴의 점을 쓰지 말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그 점 때문에 세 번이나 잡혔다고 했다. 운설은 점을 기록한 옛 장부 줄 위에 먹을 덧칠하지 않았다. 덧칠한 흔적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아예 새 장을 열어 여자가 고른 왼손 손금 두 줄만 그렸다.“나중에 이것도 싫어지면요?”“다시 고쳐요.”“호적을 계속 고쳐도 됩니까?”“몸은 계속 달라지잖아요.”운설은 법보다 몸의 쪽을 믿었다.둘째 증인은 생활이었다.함께 일한 사람들이 서로의 잠버릇과 식성을 적었다. 류단은 유경이 죽에 파가 들어가면 끝까지 골라낸다고 썼다. 유경은 류단이 기침을 숨길 때 오른쪽 어깨부터 올라간다고 썼다.정필에게는 증언할 사람이 많았다. 불을 놓은 밤을 본 시장 사람과 백지장에서 풀칠을 함께한 사람이 모두 있었다.“나쁜 일을 적어도 살아 있는 증거가 되오?”그가 물었다.“좋은 일만 한 사람은 더 의심스럽소.”선우현이 답했다.정필의 장부에는 방화와, 불을 끄는 사람에게 지하칸 위치를 알려 준 일이 같은 날 적혔다.셋째 증인은 길이었다.연도하는 설로상단 장부를 내놓았으나 문제가 생겼다. 백지장에 사람을 들인 옛 상단과 지금 증언하는 상단이 같은 이름이었다. 한 집의 잘못을 한 집의 말로 씻는 셈이 될 수 있었다.“내 도장을 빼시오.”연도하가 말했다.“그러면 길 증언이 모자라요.”“내가 넣으면 법이 모자라지.”그는 상단 도장 대신 물목마다 독립된 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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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 증인 셋

남궁완은 가마를 타지 않고 왔다.진흙 묻은 장화를 신고 한겸과 같은 말에서 내렸다. 혼례 뒤에도 왼손 약지의 가락지 자국은 남아 있었고, 부채 대신 관인함을 들었다.“왜 남궁가 도장이 필요해요?”운설이 인사보다 먼저 물었다.“필요 없어요.”남궁완은 관인함을 열었다. 남궁가 인장 자리는 비어 있었고 열두 가문 공동 구휼창의 새 인장만 들어 있었다.“죄를 상속하지 않기로 한 가문들이 이름을 되찾는 비용도 나누기로 했어요. 종이와 먹, 한 해 먹을 곡식까지만.”“사람 이름에 세가 보증을 붙이지 않겠다는 뜻이군.”선우현이 말했다.“한 번 붙인 이름으로 너무 오래 사람을 가졌으니까요.”남궁완은 선우현의 지팡이와 젖은 붕대를 보았다. 걱정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다가가 손대지도 않았다.“검이 없어도 자꾸 다치는군요.”“검이 없어서 이 정도요.”“그 말은 운설에게도 합니까?”“매번 듣고 있어요.”운설이 대신 답했다. 세 사람 사이에 오래전 가락지와 인수의 그림자가 잠깐 왔다가 지나갔다. 누구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남궁완은 운설과 단둘이 손 씻는 방에 들어갔다. 두 여자는 같은 대야에 손을 담그지 않았다. 각자 물을 갈고, 마주 선 채 소매를 걷었다.“그가 아비가 될 뻔했다면서요.”남궁완이 물었다.“열하루짜리였어요.”“잘했을까요?”“달걀 세 개 삶는 데 사흘 걸렸어요.”남궁완이 웃었다. 웃음 뒤에 아주 작은 것이 남았으나 운설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남궁완도 가지지 않은 삶을 운설에게 미안해하라 요구하지 않았다.“지금의 그 사람은 검을 들었을 때보다 어렵군요.”“그래서 더 오래 봐요.”운설은 젖은 손을 닦았다. 두 여자는 한때 같은 남자의 다른 미래였고, 지금은 서로 다른 법판에 제 이름으로 서 있었다.한겸은 쥐가 갉은 수해 조항을 반나절 읽었다.그는 서고지기가 붙여 둔 종이 조각까지 떼어 빛에 비췄다. 조항 아래 지워진 판례 하나가 있었다. 임시 호적을 받은 뒤 본래 가족이 나타나 사람을 재산처럼 데려가려 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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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 백지의 주인

허담의 심리는 종이를 만드는 마당에서 열렸다.그가 평생 가장 깨끗한 자리를 골라 펴던 흰 종이 위에 검은 장부를 놓았다. 허담은 포승을 받지 않았다. 달아나지 않겠다고 해서가 아니라, 마흔일곱 사람이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지붕을 주었소.”허담의 첫 말이었다.“겨울마다 몇이 얼어 죽는지 아시오? 관청 문밖에서 이름이 없다고 쫓긴 사람을 내가 데려왔소.”한겸이 물었다.“데려올 때 물었습니까?”“굶는 사람에게 선택이 어디 있소.”“선택이 없으니 그대 것이 되었소?”허담은 어릴 때 강둑에서 죽어 가던 사람 셋을 보았다고 했다. 관청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시신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처음 백지장을 샀을 때 그런 사람을 데려와 밥을 주었다.첫해에는 문에 빗장이 없었다. 둘째 해 한 사람이 선금을 받고 달아나자 빗장을 달았다. 셋째 해 구매자가 호적을 요구하자 죽은 이름을 샀다. 작은 빗장과 빈 종이가 해마다 하나씩 늘어 마흔일곱 사람의 문이 되었다.“처음부터 사람을 가둘 생각은 없었소.”유경이 물었다.“몇 번째부터는 있었습니까?”허담은 답을 찾지 못했다. 큰 죄가 한날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죄를 작게 만들지 않았다.허담은 검은 왼손을 폈다. 젊은 날 가마가 넘어졌을 때 일꾼을 밀어내고 대신 데어 생긴 손이었다. 그 한 번의 선행을 그는 평생의 소유권처럼 들고 있었다.“나도 이 손을 내놓았소.”류단이 손목의 죽을 사 자를 보였다.“우리는 손뿐 아니라 이름까지 냈어요.”유경은 비용 장부를 읽었다. 한 벌 솜옷이 품삯 석 달, 감기약 한 첩이 반년. 허담이 베푼 모든 것은 이자를 달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빚을 갚을수록 더 오래 그의 것이 되었다.운설은 치료 장부를 내놓았다.허담이 산 약으로 살아난 사람 열둘. 잿물과 종이 가루 때문에 병든 사람 마흔하나. 살린 수와 병들게 한 수를 서로 지우지 않았다.“좋은 일을 했으니 나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가 있으니 살린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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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 마지막 빈칸

마흔여섯 번째 관인이 찍혔다.이름을 되찾은 사람, 새 이름을 고른 사람, 백지장에서 쓰던 별명을 그대로 쓴 사람. 어느 쪽도 본래보다 덜 진짜가 아니었다.마지막 백발의 여자는 붓을 들지 않았다.그녀를 증언할 사람은 충분했다. 백지장에서 함께 산 이들이 잠꼬대와 걸음,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까지 알았다. 운설은 오래된 갈비뼈 골절과 손목 화상을 기록했고, 물목지기는 십이 년 전 강을 건넌 날짜를 기억했다.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묶을 표지를 여자가 아직 원하지 않았다.“관인을 받으려면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현승은 닦아 둔 인장을 내려놓지 못했다.여자는 빈 호적 한가운데 아련이 그려 준 문 모양만 놓았다. 네모 아래 한 치가 비어 있는 그림이었다.“나는 이름을 세 번 가졌소.”첫 이름은 가난한 부모가 지었다. 둘째 이름은 빚쟁이가 붙였다. 셋째 이름은 허담이 죽은 호적에서 떼어 왔다. 세 이름을 부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값을 요구했다.“넷째는 아직 싫소.”“이름 없이 관문을 지날 수는 없습니다.”“그럼 여기 살지.”여자는 담담했다. 그러나 열린 백지장에 스스로 머무는 것과 이름이 없어서 못 나가는 것은 달랐다.선우현은 옛 수해 조항 옆에 붙은 판례를 떠올렸다. 이름은 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름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몸을 가둘 수도 없었다.“관문을 지날 때마다 이 문 그림과 증인 장부를 함께 보이면 되게 하시오.”“매번 설명해야 합니다.”현승이 말했다.“이 사람은 평생 남이 붙인 이름을 설명하며 살았소. 이번에는 관문이 설명을 들을 차례요.”한겸은 임시 통행문을 따로 만들었다. 이름 난을 넓히지 않고 문 그림이 들어갈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한겸은 수해 조항을 다시 읽었다. 조문에는 새 이름이라 쓰지 않고 본인이 알아듣는 표지라 적혀 있었다.“글자가 아니어도 됩니다.”“문 그림을 이름으로 쓰겠다는 거요?”“이 사람이 부르면 돌아보는 표지면 됩니다.”한겸이 여자에게 물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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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 보내는 사람

한겸과 남궁완이 먼저 떠났다.남궁완은 빈 관인함에 백지장 첫 종이 한 장을 넣었다. 가문 문서가 아니라, 새 구휼창 첫 장부의 표지로 쓰겠다고 했다.“다음에는 환자 아닌 손님으로 오세요.”운설이 말했다.“그 말은 믿지 않아요. 당신 문에는 들어오면 모두 환자가 되잖아요.”남궁완은 웃으며 운설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두 여자 사이에 가락지 자국도 옛 정혼도 끼어들지 않았다.한겸은 선우현에게 수해 조항 사본을 건넸다.“법을 또 마음대로 끌어다 쓰면 바로 잡으러 오겠습니다.”“그대가 오는 동안 사람은 먼저 살려 두겠소.”“그러니 제가 계속 와야 하지 않습니까.”한겸은 서툰 절을 했다. 남궁완이 그의 굽은 소매를 펴 주었다. 두 사람의 말이 멀어질 때까지 아련은 손을 흔들었다.연도하는 사흘 뒤에야 떠날 채비를 했다.그는 백지장 새 종이를 싣고, 흑마장으로 보낼 품삯 장부와 마흔일곱 사람의 길표를 챙겼다. 떠날 이유를 늘리면서도 출발은 자꾸 늦췄다.“말이 아픈가 보군.”선우현이 물었다.“주인이 아프오.”“운설에게 진맥받을 핑계인가?”“그대가 먼저 말해 주니 편하군.”운설은 두 사람을 밖에 세워 둔 채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연도하가 따라오려 하자 문턱을 가리켰다.“진료비부터요.”“두 푼을 두 번이나 냈소.”“그건 여덟째 문 외상이고요.”연도하는 회색 목도리 끝에서 작은 종이봉지를 풀었다. 백지장 첫 품삯으로 산 사탕 두 알이었다.“이것이면 되오?”아련이 한 알을 가져갔다.“한 사람 몫만 냈어요.”선우현이 나머지 한 알을 집었다.“이제 됐군.”연도하는 빈손으로 진료대에 앉았다.운설이 오른손 맥을 짚었다. 백지장 수문에서 부은 손목은 가라앉았으나 손끝 떨림은 남았다. 그녀는 침을 세 개 놓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게 했다.“북쪽 가면 열흘은 쉬어요.”“하란주가 들으면 말을 열흘 굶길 거요.”“그럼 여기서 쉬고 가요.”연도하의 눈이 천천히 올라왔다.운설은 자기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 전처럼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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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 한 치도 없는 밤

운설이 먼저 선우현의 손을 잡았다.허리에 머물던 손을 끌어 제 등 뒤로 깊이 감았다. 선우현의 눈이 낮아졌다.“연도하를 오래 봤어요.”“보았소.”“다시 오라고도 했고요.”“들었소.”“화났어요?”“많이.”이번에는 웃음이 났다. 선우현은 웃지 않았다. 운설의 웃는 입술을 엄지로 한 번 눌렀다.“그대는 내가 화났다는 말을 좋아하는군.”“숨기는 것보다요.”“그럼 숨기지 않지.”그의 입술이 닿았다.첫 입맞춤부터 오래 참은 사람의 것이었다. 운설이 숨을 들이킬 틈에 뒷목을 받쳤고, 물러난 만큼 다시 가까워졌다. 힘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도망갈 한 치를 남겨 두지도 않았다.운설은 그의 저고리 매듭을 풀었다. 손가락이 서두르다 매듭 하나를 더 조였다.“안 풀려요.”“그 사내 목도리는 잘 묶더니.”“아직도 그 얘기예요?”“오늘 밤은 오래 할 생각이오.”선우현이 매듭을 끊었다. 칼 없이 손으로 뜯은 실이 바닥에 떨어졌다.운설의 숨이 한 번 흔들렸다.“무릎은요.”“지금 묻지 마시오.”“환자 말을 들어야죠.”“오늘은 의원부터 말을 안 듣고 있소.”그가 운설을 안아 들지 않았다. 대신 한쪽 팔로 허리를 감고 침상까지 함께 걸었다. 다친 몸이 할 수 없는 것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아끼지 않았다.침상 끝에 앉자 운설이 그의 무릎 위로 몸을 돌렸다. 선우현의 손이 허리에서 멎었다.“괜찮아요.”“내 무릎 말고 그대를 묻는 것이오.”운설은 대답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현.”낮게 가라앉은 숨이 목 아래에서 울렸다. 그의 입술이 턱과 목덜미를 따라 내려갈 때 짧은 탄성이 새었다.“아… 잠깐.”선우현은 곧장 멎었다.“아파요?”“아니요.”운설은 숨을 고르고 그의 머리칼을 잡아 다시 끌어당겼다.“계속해요.”허락 뒤의 손길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옷자락이 하나씩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차가운 밤공기와 뜨거운 숨이 번갈아 닿았다.선우현은 운설이 참는 숨을 놓치지 않았다. 어깨가 굳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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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 늦은 달

운설은 날짜를 세지 않는 척했다.약방 벽에 붙은 달력에서 장날만 확인했고, 달거리 날짜에는 눈을 두지 않았다. 환자에게는 하루 늦은 열도 묻는 의원이 자기 몸의 열흘은 피했다.처음에는 백지장 피로라고 생각했다.잿물 냄새를 너무 마셨고 잠도 부족했다. 아침마다 속이 메스꺼운 것은 여름 더위 탓일 수 있었다. 가슴이 묵직하고 졸음이 오는 것도 장맛비 뒤 습기 때문이라고 했다.약재 창고에서 말린 생강 냄새가 올라온 날, 운설은 결국 문밖으로 나가 토했다.토한 뒤에는 기쁨보다 죄가 먼저 떠올랐다. 월하심법은 놓아주었지만 몸에는 삭월의 피가 남아 있었다. 제 안에서 자란 힘 때문에 선우현의 심장이 멎은 날을 잊지 못했다.아이가 온다면 무엇을 물려받을까.왕가의 이름, 멸문된 피, 검신을 만든 가문의 죄. 아직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른들의 장부가 벌써 쌓이는 것 같았다.운설은 찬물로 입을 헹구었다.아이가 오면 그 장부부터 물려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신패도 심법도 가문 인수도 이미 여러 손으로 나누었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이 매일 고르는 생활뿐이었다.아련이 물을 들고 따라왔다.“상한 약 먹었어요?”“아니야.”“병이에요?”“아직 몰라.”“모르는 건 모른다고 써야죠.”아련은 공동 장부에서 배운 말을 돌려주었다.운설은 제 손목을 잡았다.맥은 평소보다 부드럽고 미끄러웠다. 손가락 아래 작은 구슬이 굴러가는 듯했으나, 자기 기대와 두려움이 만든 감각일 수 있었다.월하의 물소리는 오래전에 놓아주었다. 남의 몸보다 제 몸을 특별히 들을 힘도 없었다. 지금 운설은 수많은 의원이 그렇듯, 제 맥 앞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의원이었다.“선우현한테 말할 거예요?”아련이 물었다.“확실해지면.”“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숨기면 화내잖아요.”“이건 숨기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야.”“숨기는 사람도 늘 그렇게 말해요.”아홉 살짜리 장부지기를 이길 말이 없었다.운설은 그래도 하루를 더 기다렸다.그 하루 동안 진료한 환자는 다섯이었다. 손가락을 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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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 두려운 기쁨

선우현은 운설의 배를 만지지 않았다.손을 뻗었다가 무릎 위로 내렸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생명을 자기 기쁨으로 먼저 붙잡지 않으려는 손이었다.“그대는 무엇을 원하오.”그가 다시 물었다.운설은 의원의 답을 찾지 않았다.“무서워요.”“무엇이.”“잃을까 봐. 그리고 정말 오면 제가 없어질까 봐.”“왜 그대가 없어지오.”“사람들이 저를 의원보다 어미로 먼저 볼 테니까.”선우현은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자의 몸에 이름 하나가 생기면 다른 이름을 쉽게 지웠다. 운설은 왕녀가 되었을 때도 의녀 자리를 잃을 뻔했다.“나는 그렇게 보지 않겠다고 약조하오.”“당신만의 일이 아니잖아요.”“그러면 그때마다 같이 싸우지.”“아이가 오지 않은 거면요?”선우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그대가 잘못 들은 것이 되겠지.”“실망할 거예요?”“하겠지.”그는 좋은 사람처럼 거짓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그대 몸에 빚을 묻지는 않을 것이오. 아이가 오지 않아도 우리가 말한 집은 없어지지 않소.”운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기쁨을 숨기지 않으면서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대답이었다.운설이 고개를 들었다.“당신은 좋아요?”선우현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으려는 것과 울지 않으려는 것이 같은 얼굴이었다.“두려울 만큼.”“기쁜지 물었어요.”“미칠 만큼.”그제야 운설이 웃었다. 선우현은 웃는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닿았다.이튿날 묘선이 백로진에서 가장 오래 아기를 받은 방산파를 데려왔다. 방산파는 오른손 손가락이 세 개뿐이었고, 손목을 짚기 전에 운설이 언제 마지막으로 피를 보았는지부터 물었다.아련은 방밖에서 귀를 대고 듣다가 묘선에게 잡혔다.“환자 이야기는 훔쳐듣는 게 아니다.”“공동 장부에 쓸 수도 있잖아요.”“이건 운설 장부다.”묘선은 아이를 마당으로 데리고 갔다. 아련은 서운했지만 문을 다시 열지 않았다. 여덟째 문 장부지기에게도 들어가면 안 되는 문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의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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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 아직 없는 이름

운설의 배는 아직 달라 보이지 않았다.달라진 것은 약방 냄새였다. 선우현은 생강과 기름을 가장 먼 창고로 옮기고, 아침마다 창문을 먼저 열었다. 자신이 끓인 죽을 운설보다 먼저 맛보는 버릇도 생겼다.“독 검사해요?”“간 검사요.”“오늘은요?”“조금 짜오.”“그럼 물 더 넣어요.”두 사람은 아이보다 죽 한 솥을 먼저 의논했다.방산파는 닷새마다 와 맥을 보았다. 확실하다는 말 대신 오늘도 같은 자리라고 했다. 운설은 그 말이면 충분했다.선우현은 밤마다 빈 장부 앞에 앉았다. 아이에게 말을 거는 대신 그날 있었던 일을 한 줄씩 썼다. 운설이 죽을 반 그릇 먹은 일, 두 시진 진료하고 낮잠을 잔 일, 서로 다투지 않은 일과 사소하게 다툰 일.“태교예요?”운설이 물었다.“우리에게 하는 기록이오.”“왜요?”“두려워서 그대를 가둔 날이 생기면 나중에 모른 척하지 않으려고.”운설은 그 줄 아래 자기 기록도 남겼다.걱정한다는 이유로 혼자 견딘 날도 숨기지 않을 것.아직 없는 이름보다 두 사람의 버릇부터 고치는 장부였다.약방 일도 계속했다.독한 약재를 다룰 때는 장채령이 대신 빻았고, 오래 서야 하는 시술에는 의자를 놓았다. 운설은 쉬는 시간을 환자 장부와 같은 먹으로 적었다. 제 몸도 치료해야 할 몸의 수에 넣는 연습이었다.마을 사람들은 금세 알았다.국숫집 주인은 그릇을 두 배로 주었고 왕철은 약방 계단을 뜯어 낮추려 했다. 모르는 할머니가 지나가며 아들을 낳으라고 배를 향해 빌었다.운설은 그 손을 막지 않았으나 웃지도 않았다.“아들인지 딸인지, 아직 아이인지도 다 정하지 마세요.”할머니가 당황해 물러났다.선우현이 대신 절했다.“살기를 빌어 주신 것만 받겠소.”그는 운설을 집 안에 숨기지 않았고, 남의 소원이 그녀 몸을 차지하게 두지도 않았다.아련은 매일 빈 이름 장부를 확인했다.“오늘도 안 써요?”“응.”“태어나면 바로요?”“얼굴 보고.”“얼굴이 마음에 안 들면요?”선우현이 달걀 껍데기를 까다 멈췄다.운설은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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