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281 - Chapter 290

442 Chapters

제281화 — 붉은 방

검신 선우현을 죽이는 자, 그 검과 이름을 잇는다.붉은 종이가 약방 문 한가운데 붙어 있었다.풀은 마르지도 않았다. 새벽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멀찍이 서서 글을 읽었다. 글을 모르는 이는 인수부터 알아봤다. 무림맹이 사라진 뒤 관청 창고에 봉해졌던 검은 인장이었다.아련이 종이를 떼려 하자 선우현이 손목을 잡았다.“그대로 두어라.”“왜요? 보기 흉해요.”“붙인 자가 어디서 보는지 아직 모르니까.”두 해 전이었다면 아이는 그의 손을 뿌리쳤을 것이다. 열한 살이 된 아련은 종이 가장자리의 풀과 문짝에 밴 흙부터 살폈다.“왼손으로 발랐어요.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고.”문 아래에는 말발굽 반쪽이 찍혀 있었다. 밤비를 밟고 온 흔적은 약방 앞에서 한 번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운설은 안쪽 진료대에서 환자의 손을 꿰매고 있었다. 바늘을 세 번 통과시키고 매듭을 지은 뒤에야 붉은 종이를 보았다.“언제 붙었어요?”“닭 울기 전이오.”“봤어요?”“등을 보았소. 젊고 오른쪽 어깨가 낮았소.”“쫓지 않았고요.”선우현은 대답 대신 문밖의 지팡이를 들었다. 걷는 데 익숙해져 절뚝임은 줄었으나 비 오는 날이면 왼쪽 무릎이 먼저 굳었다. 검을 잃은 지 오래였고, 내공은 돌아오지 않았다.그 사이 겨울 한 번과 봄 두 번이 지나갔다.운설은 첫해 해빙 무렵 딸을 낳았다. 피와 물과 긴 밤이 있었고 방산파가 받았다. 선우현은 문 안에 있었으며, 누구도 그 일을 왕가의 경사나 검신의 후계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아침빛을 보고 단이라 부른 아이는 이제 묘선의 치마폭을 붙들고 마당을 걷다가 자주 넘어졌다.오늘도 단은 붉은 종이보다 떨어진 대추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두 해 동안 백로진도 조금 달라졌다. 여덟째 문에는 밤마다 한 사람씩 당번이 섰고, 백지장에서 만든 종이는 관아 장부에도 들어갔다. 선우현은 아침이면 약재 짐을 나르고 낮에는 아련에게 글과 길 보는 법을 가르쳤다. 한때 그를 보려고 담을 넘던 무사들은 끊겼다. 사람들은 그가 검신이었다는 사실보다 달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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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 빈 칼집의 여자

빈 칼집이 먼저 문턱을 넘었다.그것을 내민 여자는 스무 살을 조금 넘겨 보였다. 눈바람도 없는데 입술이 갈라져 있었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는 칼을 오래 쥔 사람처럼 단단했다. 허리에는 검이 없었다.“선우현.”존칭도 별호도 붙이지 않았다.선우현은 약방 안에서 지팡이 끝의 진흙을 닦았다.“누구요.”“하문령.”“모르는 이름이오.”“내 아비는 알 겁니다.”여자는 칼집을 진료대 위에 놓았다. 검은 가죽은 손때가 먹어 반질거렸고, 입구 한쪽이 비스듬히 패여 있었다. 선우현이 발도할 때 상대 칼을 눌러 생기는 흠과 닮았다.운설은 여자의 손등을 보았다. 새 상처 위에 마른 핏자국이 겹쳤다. 약방까지 오는 동안 세 번쯤 칼을 잡았고, 한 번은 깊이 베었다.“먼저 앉아요.”“치료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바닥에 피 떨어뜨리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하문령은 운설을 훑어보았다. 전설 속 삭월 공주나 월하의 주인을 찾는 눈이 아니었다. 바늘과 약솜을 든 손이 쓸 만한지 재는 눈이었다.그녀의 옷은 먼 길을 견딘 모양이었지만 가난한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소매 안쪽에 남쪽 비단을 덧댔고, 장화 바닥에는 북관의 말굽못 가루가 박혀 있었다. 한 방향으로 곧장 온 것이 아니라 여러 길을 돌아다녔다. 칼을 빼앗긴 뒤에도 빈 칼집을 버리지 않은 까닭은 복수보다 증표가 필요해서일 수 있었다.아련이 문 옆에서 물었다.“밥은 먹었어요?”“필요 없습니다.”“필요 없는 사람은 없던데.”하문령은 아이를 노려보다 배에서 난 소리를 들켰다. 묘선이 찬 보리밥과 장아찌를 내놓았다. 여자는 앉지 않고 세 숟갈을 삼켰다. 네 번째부터는 속도를 늦췄다. 굶은 티를 감추는 법도 배운 사람이었다.“당신이 운설 의원입니까.”“손 줘요.”여자는 주지 않았다.선우현이 칼집을 돌려 바닥의 글자를 확인했다.하진악.그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칼집을 쥔 손가락 사이가 희어졌다.“십이 년 전 흑수곡.”하문령이 말했다.“당신이 내 아비를 베었죠.”“그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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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 검신을 죽이는 값

“목 하나 값이 너무 큽니다.”한겸이 은패를 내려놓았다.남쪽에서 밤새 달려온 그의 관복에는 먼지가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서툰 절을 하던 젊은 감찰은 이제 지방 형안을 맡는 사람이 되었으나, 긴장하면 오른쪽 어깨부터 숙이는 버릇은 그대로였다.“그래서 목이 목적이 아니란 말이군요.”운설이 물었다.“새 맹주 자리만 적었다면 허풍으로 끝났을 겁니다.”한겸은 붉은 방 아래 붙은 세부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북관 이남 열두 나루의 통행세. 옛 무림맹 무기고 셋. 문파 사이 분쟁을 판결할 권리. 북방으로 가는 약재와 말의 우선 징발권.사람 하나를 죽인 자에게 길과 곡식과 법을 한꺼번에 주겠다는 문서였다.“누가 허락했죠?”“관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관아가 막지도 않았습니다.”“왜요.”“맹이 무너진 뒤 길마다 사병이 통행세를 걷고 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상단 열일곱이 털렸고 관군 둘이 죽었습니다. 누군가 정리해 준다면 인수가 진짜인지 묻지 않겠다는 관리가 많습니다.”아련은 문서 가장자리에 작은 점을 찍었다.“나쁜 사람이 길을 깨끗하게 만들면 좋은 사람이에요?”한겸은 아이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았다.“깨끗해진 길에서 누구를 못 걷게 하는지 봐야겠지.”하문령은 창가에 기대 앉아 실밥 맨 손을 내려다보았다. 승검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 북쪽 객주에서 붉은 방을 봤고, 아비의 칼집을 내면 심판에게 갈 수 있다는 말만 들었다.“누가 말했소.”선우현이 물었다.“흰 수염 난 검객.”“이름.”“스승입니다.”“스승에게 이름이 없소?”“나한테는 없어요.”하문령은 입을 닫았다. 아비의 죽음을 묻겠다면서 스승의 이름은 지키고 있었다. 선우현은 더 캐지 않았다.장터에서는 벌써 값이 움직였다.대장간이 창끝 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낯선 무사들이 숫돌을 빼앗았다. 객주는 방값을 세 배로 올렸고, 국숫집에는 칼을 찬 손님만 여섯이 앉았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척하면서 약방 문이 열릴 때마다 같은 쪽을 보았다.그 틈에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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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 열세 번째 이름

칼 세 자루가 서로를 막았다.약방으로 달려든 사내의 칼끝은 수레바퀴에 끼었고, 여덟째 문 쪽 사내는 국숫집에서 쏟아진 뜨거운 면수 때문에 발을 비틀었다. 객주로 향하던 자는 하문령의 빈 칼집에 손목을 맞았다.누구도 선우현에게 닿지 못했다.그는 지팡이로 첫 사내의 무릎 뒤를 밀었을 뿐이었다. 사내가 넘어지며 두 번째 칼을 막았다. 세 사람은 협공을 약속하고도 서로의 보폭을 몰랐다.하문령은 쓰러진 자의 칼을 빼앗아 선우현 목에 댔다.“지금이면 되겠네요.”“그대 칼이 아니오.”“사람 죽이는 데 주인 허락도 필요합니까?”“그대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닐 텐데.”칼날이 목의 오래된 흉터에 닿았다. 운설은 달려가지 않았다. 하문령이 선우현을 보는 눈과 칼끝의 떨림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하문령은 칼을 내렸다.“아비는 왜 못 피했죠?”“내게 베였다면 피하지 못했을 것이오.”“또 그 말.”“기록을 찾자.”한겸이 쓰러진 자들을 관아에 넘기는 동안, 아련은 흑수곡 집행 장부를 펼쳤다. 선우현이 기억한 스물한 이름 옆에 관원이 확인한 시체 수가 적혀 있었다.붙잡힌 세 사람은 서로 이름도 몰랐다. 승검회 객점에서 붉은 패를 하나씩 받았고, 선우현 몸에서 피 한 방울만 가져오면 북관까지 말과 숙식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객주로 향한 사내는 사람보다 장부가 목적이었다고 했다. 선우현이 다친 증인과 옛 기록 가운데 무엇을 먼저 지키는지 시험하라는 지시였다.운설은 그를 한 번 때렸다.손바닥 소리가 관아 마루에 울렸다. 사내도 선우현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사람을 베고 장부만 노렸다는 말로 가벼워질 것 같아요?”사내가 입술의 피를 핥았다.“의원은 사람을 살리는 줄 알았는데.”“살려 두고 때릴 수도 있어요.”운설은 돌아섰다. 선우현이 뒤따라와 손바닥에 약을 바르려 하자 손을 빼지 않았다. 화가 난 사람을 성녀로 만들지 않는 그의 침묵이 오늘은 편했다.스물둘.“하나가 더 많아요.”아련이 말했다.마지막 칸은 이름 없이 검은 옷,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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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 돌아온 붉은 고삐

“말부터 세우시오.”연도하의 목소리가 골목 끝에서 들렸다.그는 피 묻은 수레를 직접 밀고 있었다. 오른쪽 바퀴가 빠져 수레 한쪽이 땅을 긁었다. 옷자락은 찢어졌고 관자놀이에서 흐른 피가 턱까지 말라붙었다. 그래도 입가에는 위험할 때마다 나오는 낮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하란주가 뒤에서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왼손 약지가 없는 손으로 고삐를 감았고, 눈은 연도하보다 쓰러진 검은 말을 먼저 찾았다.“사람은 걸어왔으니 살았고, 말은 누웠으니 급해.”운설은 연도하에게 달려가려던 발을 말 쪽으로 틀었다. 하란주와 함께 안장을 풀고 다리의 열을 살폈다. 칼에 베인 곳은 없었다. 숨이 차도록 달려 근육이 굳은 것이었다.“물을 한꺼번에 먹이지 마요.”하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연도하는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두 해 만에 돌아왔는데 말한테 졌군.”“말은 말이 없잖아요.”운설이 답했다.“나는 말이 많아서 뒤요?”“당신은 피 흘리면서 농담부터 해서요.”선우현은 수레 손잡이를 받쳤다. 두 남자의 손이 같은 나무 위에 겹쳤다.“어디서 당했소.”“반나절 남쪽.”“몇.”“처음에는 일곱. 끝에는 열셋.”“죽인 사람은.”“없소. 그대 흉내를 내느라 힘들었지.”연도하는 웃으며 말했지만 오른손 끝이 떨렸다. 운설이 그 손목을 잡자 열이 손바닥까지 올라와 있었다.선우현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에 머물렀다.“진료실로 가요.”“그대 남편이 싫어할 텐데.”“아픈 사람이 골라 앓을 수는 없어요.”“그 말이 여전히 좋소.”선우현이 수레를 놓았다.“걸을 수 있으면 직접 가시오.”“질투도 여전하고.”연도하는 두 걸음 가다 무릎을 꿇었다. 운설과 선우현이 동시에 팔을 잡았다. 서로 반대쪽을 잡은 채 누구도 먼저 놓지 않았다.진료대에서 옷을 벗기자 옆구리에 밧줄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수레가 절벽으로 끌려갈 때 몸에 감아 막았다고 했다. 칼상보다 넓고 둔한 멍이었다.운설이 젖은 천으로 피를 닦자 연도하의 웃음이 잠깐 사라졌다. 갈비 아래를 누를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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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 가장 가까운 적

연도하의 이름 아래 찍힌 수결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획이 지나치게 반듯했다. 연도하는 빚문서를 쓸 때 마지막 갈고리를 길게 뺐고, 위험한 계약일수록 먹을 적게 묻혔다. 명단의 글씨는 그 버릇을 아는 사람이 서툴게 흉내 낸 것이었다.“상단 안쪽 사람이군.”선우현이 말했다.“내 수결을 본 사람은 백이 넘소.”“산 채 데려오라는 말을 들을 사람은.”“그대에게 원한 있는 자만큼 많지는 않겠지.”연도하는 침상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 열은 내리지 않았고 오른손 떨림은 더 심해졌다. 그래도 그는 명단을 무릎에 펴고 참가자들의 물목을 값처럼 읽었다.검신의 피를 원하는 자 열일곱, 목을 원하는 자 아홉, 산 채 데려오겠다고 쓴 자 하나.“나를 안으로 부르려는 초청이오.”“함정인 줄 알면서 가겠다고요?”운설이 물었다.“함정은 밖에서 보면 입구뿐이오. 들어가야 누가 줄을 쥐었는지 알지.”“이번에는 수레도 사람도 잃었어요.”“그래서 가야 하오.”“잃어서 가는 것과 되찾으려고 가는 건 달라요.”연도하의 웃음이 엷어졌다. 운설이 어떤 답을 원하는지 찾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내 길을 남의 검상으로 열게 둘 수 없소. 그대 남편을 데려가는 값으로 약길을 준다면, 그 길은 첫날부터 사람 목을 먹을 테니까.”선우현이 벽에 기대 있던 지팡이를 세웠다.“좋은 명분이오.”“명분 말고 다른 것도 듣고 싶소?”“묻지 않아도 말할 얼굴이군.”연도하는 운설을 보았다.“그대 아내 곁에 남을 구실이 생긴 것도 마음에 드오.”선우현이 웃지 않았다. 방 안 공기가 칼보다 얇아졌다.“상처가 덜 아픈 모양이오.”“아프니 참지 않는 것이오. 다음번에는 말할 입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운설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약그릇을 탁자에 놓았다. 탁 소리에 연도하 손의 명단이 흔들렸다.“내가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마요.”두 남자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승검회에 갈 거예요. 당신 목도, 연도하의 길도 내가 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 처방과 이름을 흉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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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 도망가지 않는 이름

첫 시험 대상은 나루꾼이었다.어제 선우현이 죽어 길이 안전해진다면 밧줄을 잡겠다고 말한 사람. 누군가는 그 말을 들었고, 새 종이 아래 그의 이름을 적었다.나루꾼은 새벽부터 약방 앞에 와 있었다. 도망갈 짐도 싸지 않았다. 젖은 밧줄 한 타래만 어깨에 둘렀다.“내가 한 말이 있으니 감당하겠소.”“누구에게요?”운설이 물었다.“검신을 죽이면 다리가 편해질 거라 했소.”“그 말이 당신 목을 승검회에 준 건 아니에요.”“그래도 저 사람들이 나를 고른 데는 까닭이 있지 않겠소.”선우현이 나루꾼 앞에 섰다. 한때라면 사과부터 했을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고, 밧줄의 젖은 끝을 집었다.한겸은 나루꾼 이름을 지우려 붓을 들었다가 멈췄다. 관아 장부에서 지우면 승검회 쪽에는 겁먹고 숨었다는 구실이 되고, 남겨 두면 관졸이 그를 감시한다는 표시가 됐다.“어느 쪽을 원하십니까.”나루꾼은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이름은 두시오. 내가 한 말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소. 대신 집 주소는 지워 주시오. 늙은 어미가 있소.”한겸은 주소만 먹으로 덮었다. 좋은 선택인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날 오후 관졸 하나가 어미 집 앞을 지켰고, 이웃들은 보호인지 감시인지 몰라 문을 닫았다.“이 매듭은 어디에 쓰오.”“강 한가운데서 배 둘을 붙일 때.”“풀리는 데 얼마나 걸리오.”“젖으면 반 각.”“그럼 오늘은 약방 지붕과 푸줏간 기둥을 잇소. 그대가 시험 대상이 아니라 길을 막는 사람이 되면 되오.”나루꾼은 당황했다.“나를 믿소?”“아니오. 그대가 자기 밧줄을 아는 것을 믿소.”장터 사람들은 나루꾼 지시에 따라 수레를 옮겼다. 묘선은 환자를 남쪽 문으로 보냈고 왕철은 국숫집 화덕을 껐다. 싸움이 시작되면 끓는 솥이 누구 편도 되지 않도록 했다.하문령은 이 모든 준비를 비겁하다고 했다.“칼 한 번 부딪치면 끝날 일을 온 동네가 겁먹고 있잖아요.”“칼 한 번에 끝나는 쪽은 칼 든 사람뿐이오.”선우현이 답했다.“당신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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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 검 없는 첫 승부

국수 그릇이 공중에서 깨졌다.날아온 칼이 그릇을 꿰뚫고 기둥에 박혔다. 뜨거운 면수가 바닥에 쏟아졌고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두 번째 칼은 보이지 않았다.선우현이 의자에서 몸을 비튼 순간 소매가 길게 갈라졌다. 칼끝은 살을 스치지 못했지만 옛날보다 반 박자 늦었다. 왼쪽 무릎이 비를 기억하고 있었다.“검신도 늙는군.”회색 옷의 도전자가 지붕에서 내려왔다. 혀가 짧아 발음이 새었고, 웃을 때 왼쪽 눈꺼풀이 떨렸다. 허리에는 같은 길이의 칼 두 자루가 있었다.“피 한 종지만 주시오. 목은 북관에서 받지.”“남의 가게에서 그릇부터 깼소.”“값은 내겠소.”국숫집 주인이 화덕 옆에서 국자를 들었다.“내가 안 팔아.”도전자가 동전을 던졌다. 주인은 받지 않았고, 동전은 쏟아진 면수에 떨어졌다.선우현은 지팡이를 바닥에 눕혔다. 무기처럼 쥐지 않았다. 손을 비운 채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밖으로 나가시오.”“도망갈 길을 고르는가?”“그대 뒤에 아이가 있소.”도전자가 돌아보는 순간 선우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 틈인 줄 알았던 사내가 다시 웃었다.“검을 잃더니 마음도 무뎌졌군.”첫 칼이 가슴으로 왔다.선우현은 식탁을 차지 않았다. 식탁 다리 하나를 발로 밀어 칼이 들어올 너비만 줄였다. 칼끝이 나무에 박히자 사내는 둘째 칼을 뽑았다. 그 칼은 아래에서 올라왔다.쏟아진 면수를 밟은 오른발이 반 치 미끄러졌다.선우현의 손이 사내 팔꿈치에 닿았다. 밀지도 꺾지도 않고 미끄러진 방향을 그대로 보냈다. 둘째 칼이 첫 칼의 손잡이를 쳤다. 쇳소리와 함께 두 칼이 엉켰다.사내가 어깨로 선우현을 들이받았다.선우현은 피하지 못하고 기둥에 부딪혔다. 숨이 빠졌다. 도전자의 손이 그의 목을 잡았다.운설은 침통을 들었으나 던지지 않았다. 하문령도 빼앗은 검을 반쯤 뽑은 채 멎었다.“왜 안 도와줘요?”아련이 속삭였다.“아직 그가 정한 자리가 아니니까.”선우현은 목을 잡힌 채 발뒤꿈치로 수레 고임목을 걷어찼다.빈 수레가 비탈을 따라 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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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 떠나는 집

단은 선우현의 지팡이를 놓아주지 않았다.걷기 시작한 뒤부터 그 지팡이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말이자 배였다. 바닥에 눕혀 놓고 올라타면 아련이 끌어 주었다. 오늘은 선우현이 길을 떠나려고 손을 내밀어도 두 팔로 끌어안았다.“빌려 주겠느냐.”“내.”“내 것이란 뜻이오?”“내.”묘선이 웃으며 아이 손에서 지팡이를 빼냈다. 단은 울지 않고 선우현의 빈손을 물었다. 손가락에 작은 이 자국이 남았다.그것이 작별의 전부였다.운설은 오래 안고 있거나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반복하지 않았다. 보름 뒤 소식을 보내겠다고 묘선에게 말했고, 늦어지면 한겸을 통해 알리기로 했다. 단에게는 다녀오겠다고 한 번 말했다. 아이가 알아듣지 못해도 같은 말을 두 번 해서 맹세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아련은 남겠다고 했다.“장부를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해요.”“겁나지 않니?”운설이 물었다.“나요. 그래도 글씨는 안 도망가요.”아련은 승검회와 관련된 장부를 이미 네 곳에 나눠 두었다. 한 곳이 불타면 다음 사람이 다음 장을 들고 오도록 순서도 정했다. 선우현이 가르친 길 읽기를 아이는 종이에 사용했다.하란주는 빼앗기지 않은 말 여섯을 골랐다. 연도하는 아직 오래 앉아 있지 못해 바닥이 넓은 약수레에 자리를 만들었다. 그가 누울 곳 옆에는 운설의 약갑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선우현이 앉을 좁은 판자가 있었다.“우리 셋이 한 수레요?”연도하가 물었다.“싫으면 걸어요.”운설이 답했다.“나는 좋소. 묻는 사람은 그대 남편 쪽이오.”선우현은 지팡이로 수레바퀴를 두드렸다.“축이 약하오.”“대답도 여전히 비싸군.”그는 하란주와 함께 축을 갈았다. 연도하는 누운 채 매듭 순서를 지시하다가 두 번 쫓겨났다.출발 직전 왕철이 활 하나를 가져왔다. 선우현은 받지 않았다. 하문령이 쓰던 빼앗은 검도 약방 벽에 기대 있었다. 정작 하문령은 새벽부터 보이지 않았다.운설은 마지막으로 침실 문을 닫다가 선우현과 마주쳤다. 두 해 동안 같은 방에서 보낸 밤들의 냄새가 아직 이불에 남아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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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 첫 번째 죽은 검신

네 번째 쇳소리 뒤에는 사람 목소리가 없었다.선우현은 숲으로 뛰지 않았다. 말이 사라진 자리의 눌린 풀과 흰 돌 사이 간격을 살폈다. 누군가 하문령의 목소리를 흉내 내 그를 곧장 들이려 했다면, 가장 넓은 길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왼쪽이오.”그는 오히려 가시덤불 쪽으로 들어갔다.운설이 뒤따랐고 하란주가 수레를 세웠다. 연도하는 일어나려다 옆구리를 누르고 다시 앉았다.“나는 환자라 길도 못 고르는군.”“살아 있으면 다음 길 골라요.”운설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덤불 너머 작은 공터에 칼 넷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그 아래 하문령이 입을 막힌 채 손목이 묶여 있었다.선우현이 다가가자 그녀가 발로 땅을 두 번 찼다.멈추라는 신호였다.낙엽 밑으로 가는 밧줄이 지나갔다. 선우현은 지팡이로 밧줄을 따라갔다. 끝은 나무 위 석궁 세 대와 이어져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더 가면 공터 한가운데로 화살이 쏟아질 장치였다.운설이 뒤로 물러나 다른 줄을 찾았다. 하문령은 눈으로 오른쪽 바위를 가리켰다. 그곳에 흰 수염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그가 칼을 뽑는 순간 하란주의 화살이 먼저 소매를 꿰뚫었다. 사람보다 말에게 낮게 말하던 여자는 활을 잡으면 숨소리도 없었다.사내는 소매를 찢고 달아났다.선우현은 쫓지 않고 석궁 줄을 지팡이에 감았다. 운설이 하문령 입의 천을 풀었다.“스승 아니에요.”첫마디였다.“얼굴 봤소?”“수염이 붙인 거였어요. 내 검을 가지고 있었고.”하문령의 손목에는 얕은 베인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죽이려 한 상처가 아니라 피를 조금씩 받은 흔적이었다.“승검첩에 바를 피가 필요했대요.”그녀는 분해서 손을 떨었다. 싸움에서 진 것보다 아비의 검을 알아보지 못한 일이 더 아픈 얼굴이었다.공터 뒤에는 새로 판 흙이 있었다.왕철에게 받은 작은 삽으로 파자 사람 손이 먼저 나왔다. 손톱 밑에 먹을 채웠고 손등에는 검신의 오래된 흉터를 흉내 낸 칼자국이 있었다.시체는 선우현과 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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