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운설은 날짜를 세지 않는 척했다.약방 벽에 붙은 달력에서 장날만 확인했고, 달거리 날짜에는 눈을 두지 않았다. 환자에게는 하루 늦은 열도 묻는 의원이 자기 몸의 열흘은 피했다.처음에는 백지장 피로라고 생각했다.잿물 냄새를 너무 마셨고 잠도 부족했다. 아침마다 속이 메스꺼운 것은 여름 더위 탓일 수 있었다. 가슴이 묵직하고 졸음이 오는 것도 장맛비 뒤 습기 때문이라고 했다.약재 창고에서 말린 생강 냄새가 올라온 날, 운설은 결국 문밖으로 나가 토했다.토한 뒤에는 기쁨보다 죄가 먼저 떠올랐다. 월하심법은 놓아주었지만 몸에는 삭월의 피가 남아 있었다. 제 안에서 자란 힘 때문에 선우현의 심장이 멎은 날을 잊지 못했다.아이가 온다면 무엇을 물려받을까.왕가의 이름, 멸문된 피, 검신을 만든 가문의 죄. 아직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른들의 장부가 벌써 쌓이는 것 같았다.운설은 찬물로 입을 헹구었다.아이가 오면 그 장부부터 물려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신패도 심법도 가문 인수도 이미 여러 손으로 나누었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이 매일 고르는 생활뿐이었다.아련이 물을 들고 따라왔다.“상한 약 먹었어요?”“아니야.”“병이에요?”“아직 몰라.”“모르는 건 모른다고 써야죠.”아련은 공동 장부에서 배운 말을 돌려주었다.운설은 제 손목을 잡았다.맥은 평소보다 부드럽고 미끄러웠다. 손가락 아래 작은 구슬이 굴러가는 듯했으나, 자기 기대와 두려움이 만든 감각일 수 있었다.월하의 물소리는 오래전에 놓아주었다. 남의 몸보다 제 몸을 특별히 들을 힘도 없었다. 지금 운설은 수많은 의원이 그렇듯, 제 맥 앞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의원이었다.“선우현한테 말할 거예요?”아련이 물었다.“확실해지면.”“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숨기면 화내잖아요.”“이건 숨기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야.”“숨기는 사람도 늘 그렇게 말해요.”아홉 살짜리 장부지기를 이길 말이 없었다.운설은 그래도 하루를 더 기다렸다.그 하루 동안 진료한 환자는 다섯이었다. 손가락을 벤
운설이 먼저 선우현의 손을 잡았다.허리에 머물던 손을 끌어 제 등 뒤로 깊이 감았다. 선우현의 눈이 낮아졌다.“연도하를 오래 봤어요.”“보았소.”“다시 오라고도 했고요.”“들었소.”“화났어요?”“많이.”이번에는 웃음이 났다. 선우현은 웃지 않았다. 운설의 웃는 입술을 엄지로 한 번 눌렀다.“그대는 내가 화났다는 말을 좋아하는군.”“숨기는 것보다요.”“그럼 숨기지 않지.”그의 입술이 닿았다.첫 입맞춤부터 오래 참은 사람의 것이었다. 운설이 숨을 들이킬 틈에 뒷목을 받쳤고, 물러난 만큼 다시 가까워졌다. 힘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도망갈 한 치를 남겨 두지도 않았다.운설은 그의 저고리 매듭을 풀었다. 손가락이 서두르다 매듭 하나를 더 조였다.“안 풀려요.”“그 사내 목도리는 잘 묶더니.”“아직도 그 얘기예요?”“오늘 밤은 오래 할 생각이오.”선우현이 매듭을 끊었다. 칼 없이 손으로 뜯은 실이 바닥에 떨어졌다.운설의 숨이 한 번 흔들렸다.“무릎은요.”“지금 묻지 마시오.”“환자 말을 들어야죠.”“오늘은 의원부터 말을 안 듣고 있소.”그가 운설을 안아 들지 않았다. 대신 한쪽 팔로 허리를 감고 침상까지 함께 걸었다. 다친 몸이 할 수 없는 것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아끼지 않았다.침상 끝에 앉자 운설이 그의 무릎 위로 몸을 돌렸다. 선우현의 손이 허리에서 멎었다.“괜찮아요.”“내 무릎 말고 그대를 묻는 것이오.”운설은 대답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현.”낮게 가라앉은 숨이 목 아래에서 울렸다. 그의 입술이 턱과 목덜미를 따라 내려갈 때 짧은 탄성이 새었다.“아… 잠깐.”선우현은 곧장 멎었다.“아파요?”“아니요.”운설은 숨을 고르고 그의 머리칼을 잡아 다시 끌어당겼다.“계속해요.”허락 뒤의 손길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옷자락이 하나씩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차가운 밤공기와 뜨거운 숨이 번갈아 닿았다.선우현은 운설이 참는 숨을 놓치지 않았다. 어깨가 굳으면
한겸과 남궁완이 먼저 떠났다.남궁완은 빈 관인함에 백지장 첫 종이 한 장을 넣었다. 가문 문서가 아니라, 새 구휼창 첫 장부의 표지로 쓰겠다고 했다.“다음에는 환자 아닌 손님으로 오세요.”운설이 말했다.“그 말은 믿지 않아요. 당신 문에는 들어오면 모두 환자가 되잖아요.”남궁완은 웃으며 운설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두 여자 사이에 가락지 자국도 옛 정혼도 끼어들지 않았다.한겸은 선우현에게 수해 조항 사본을 건넸다.“법을 또 마음대로 끌어다 쓰면 바로 잡으러 오겠습니다.”“그대가 오는 동안 사람은 먼저 살려 두겠소.”“그러니 제가 계속 와야 하지 않습니까.”한겸은 서툰 절을 했다. 남궁완이 그의 굽은 소매를 펴 주었다. 두 사람의 말이 멀어질 때까지 아련은 손을 흔들었다.연도하는 사흘 뒤에야 떠날 채비를 했다.그는 백지장 새 종이를 싣고, 흑마장으로 보낼 품삯 장부와 마흔일곱 사람의 길표를 챙겼다. 떠날 이유를 늘리면서도 출발은 자꾸 늦췄다.“말이 아픈가 보군.”선우현이 물었다.“주인이 아프오.”“운설에게 진맥받을 핑계인가?”“그대가 먼저 말해 주니 편하군.”운설은 두 사람을 밖에 세워 둔 채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연도하가 따라오려 하자 문턱을 가리켰다.“진료비부터요.”“두 푼을 두 번이나 냈소.”“그건 여덟째 문 외상이고요.”연도하는 회색 목도리 끝에서 작은 종이봉지를 풀었다. 백지장 첫 품삯으로 산 사탕 두 알이었다.“이것이면 되오?”아련이 한 알을 가져갔다.“한 사람 몫만 냈어요.”선우현이 나머지 한 알을 집었다.“이제 됐군.”연도하는 빈손으로 진료대에 앉았다.운설이 오른손 맥을 짚었다. 백지장 수문에서 부은 손목은 가라앉았으나 손끝 떨림은 남았다. 그녀는 침을 세 개 놓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게 했다.“북쪽 가면 열흘은 쉬어요.”“하란주가 들으면 말을 열흘 굶길 거요.”“그럼 여기서 쉬고 가요.”연도하의 눈이 천천히 올라왔다.운설은 자기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 전처럼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이지
마흔여섯 번째 관인이 찍혔다.이름을 되찾은 사람, 새 이름을 고른 사람, 백지장에서 쓰던 별명을 그대로 쓴 사람. 어느 쪽도 본래보다 덜 진짜가 아니었다.마지막 백발의 여자는 붓을 들지 않았다.그녀를 증언할 사람은 충분했다. 백지장에서 함께 산 이들이 잠꼬대와 걸음,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까지 알았다. 운설은 오래된 갈비뼈 골절과 손목 화상을 기록했고, 물목지기는 십이 년 전 강을 건넌 날짜를 기억했다.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묶을 표지를 여자가 아직 원하지 않았다.“관인을 받으려면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현승은 닦아 둔 인장을 내려놓지 못했다.여자는 빈 호적 한가운데 아련이 그려 준 문 모양만 놓았다. 네모 아래 한 치가 비어 있는 그림이었다.“나는 이름을 세 번 가졌소.”첫 이름은 가난한 부모가 지었다. 둘째 이름은 빚쟁이가 붙였다. 셋째 이름은 허담이 죽은 호적에서 떼어 왔다. 세 이름을 부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값을 요구했다.“넷째는 아직 싫소.”“이름 없이 관문을 지날 수는 없습니다.”“그럼 여기 살지.”여자는 담담했다. 그러나 열린 백지장에 스스로 머무는 것과 이름이 없어서 못 나가는 것은 달랐다.선우현은 옛 수해 조항 옆에 붙은 판례를 떠올렸다. 이름은 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름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몸을 가둘 수도 없었다.“관문을 지날 때마다 이 문 그림과 증인 장부를 함께 보이면 되게 하시오.”“매번 설명해야 합니다.”현승이 말했다.“이 사람은 평생 남이 붙인 이름을 설명하며 살았소. 이번에는 관문이 설명을 들을 차례요.”한겸은 임시 통행문을 따로 만들었다. 이름 난을 넓히지 않고 문 그림이 들어갈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한겸은 수해 조항을 다시 읽었다. 조문에는 새 이름이라 쓰지 않고 본인이 알아듣는 표지라 적혀 있었다.“글자가 아니어도 됩니다.”“문 그림을 이름으로 쓰겠다는 거요?”“이 사람이 부르면 돌아보는 표지면 됩니다.”한겸이 여자에게 물었다.“이
허담의 심리는 종이를 만드는 마당에서 열렸다.그가 평생 가장 깨끗한 자리를 골라 펴던 흰 종이 위에 검은 장부를 놓았다. 허담은 포승을 받지 않았다. 달아나지 않겠다고 해서가 아니라, 마흔일곱 사람이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내가 지붕을 주었소.”허담의 첫 말이었다.“겨울마다 몇이 얼어 죽는지 아시오? 관청 문밖에서 이름이 없다고 쫓긴 사람을 내가 데려왔소.”한겸이 물었다.“데려올 때 물었습니까?”“굶는 사람에게 선택이 어디 있소.”“선택이 없으니 그대 것이 되었소?”허담은 어릴 때 강둑에서 죽어 가던 사람 셋을 보았다고 했다. 관청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시신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처음 백지장을 샀을 때 그런 사람을 데려와 밥을 주었다.첫해에는 문에 빗장이 없었다. 둘째 해 한 사람이 선금을 받고 달아나자 빗장을 달았다. 셋째 해 구매자가 호적을 요구하자 죽은 이름을 샀다. 작은 빗장과 빈 종이가 해마다 하나씩 늘어 마흔일곱 사람의 문이 되었다.“처음부터 사람을 가둘 생각은 없었소.”유경이 물었다.“몇 번째부터는 있었습니까?”허담은 답을 찾지 못했다. 큰 죄가 한날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죄를 작게 만들지 않았다.허담은 검은 왼손을 폈다. 젊은 날 가마가 넘어졌을 때 일꾼을 밀어내고 대신 데어 생긴 손이었다. 그 한 번의 선행을 그는 평생의 소유권처럼 들고 있었다.“나도 이 손을 내놓았소.”류단이 손목의 죽을 사 자를 보였다.“우리는 손뿐 아니라 이름까지 냈어요.”유경은 비용 장부를 읽었다. 한 벌 솜옷이 품삯 석 달, 감기약 한 첩이 반년. 허담이 베푼 모든 것은 이자를 달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빚을 갚을수록 더 오래 그의 것이 되었다.운설은 치료 장부를 내놓았다.허담이 산 약으로 살아난 사람 열둘. 잿물과 종이 가루 때문에 병든 사람 마흔하나. 살린 수와 병들게 한 수를 서로 지우지 않았다.“좋은 일을 했으니 나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죄가 있으니 살린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에요.”
남궁완은 가마를 타지 않고 왔다.진흙 묻은 장화를 신고 한겸과 같은 말에서 내렸다. 혼례 뒤에도 왼손 약지의 가락지 자국은 남아 있었고, 부채 대신 관인함을 들었다.“왜 남궁가 도장이 필요해요?”운설이 인사보다 먼저 물었다.“필요 없어요.”남궁완은 관인함을 열었다. 남궁가 인장 자리는 비어 있었고 열두 가문 공동 구휼창의 새 인장만 들어 있었다.“죄를 상속하지 않기로 한 가문들이 이름을 되찾는 비용도 나누기로 했어요. 종이와 먹, 한 해 먹을 곡식까지만.”“사람 이름에 세가 보증을 붙이지 않겠다는 뜻이군.”선우현이 말했다.“한 번 붙인 이름으로 너무 오래 사람을 가졌으니까요.”남궁완은 선우현의 지팡이와 젖은 붕대를 보았다. 걱정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다가가 손대지도 않았다.“검이 없어도 자꾸 다치는군요.”“검이 없어서 이 정도요.”“그 말은 운설에게도 합니까?”“매번 듣고 있어요.”운설이 대신 답했다. 세 사람 사이에 오래전 가락지와 인수의 그림자가 잠깐 왔다가 지나갔다. 누구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남궁완은 운설과 단둘이 손 씻는 방에 들어갔다. 두 여자는 같은 대야에 손을 담그지 않았다. 각자 물을 갈고, 마주 선 채 소매를 걷었다.“그가 아비가 될 뻔했다면서요.”남궁완이 물었다.“열하루짜리였어요.”“잘했을까요?”“달걀 세 개 삶는 데 사흘 걸렸어요.”남궁완이 웃었다. 웃음 뒤에 아주 작은 것이 남았으나 운설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남궁완도 가지지 않은 삶을 운설에게 미안해하라 요구하지 않았다.“지금의 그 사람은 검을 들었을 때보다 어렵군요.”“그래서 더 오래 봐요.”운설은 젖은 손을 닦았다. 두 여자는 한때 같은 남자의 다른 미래였고, 지금은 서로 다른 법판에 제 이름으로 서 있었다.한겸은 쥐가 갉은 수해 조항을 반나절 읽었다.그는 서고지기가 붙여 둔 종이 조각까지 떼어 빛에 비췄다. 조항 아래 지워진 판례 하나가 있었다. 임시 호적을 받은 뒤 본래 가족이 나타나 사람을 재산처럼 데려가려 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