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팔부 (雪夜八部)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30 챕터

21. 강

부러진 칼끝이 눈 속에서 나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기억에는 먼저 소리가 있었다. 쇠가 우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고, 너무 높은 소리. 그다음에 우두머리의 몸이 산문 돌계단까지 밀려나 부딪었고, 부러진 칼날 반 토막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저만치 눈에 꽂혔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운설은 말할 수 없었다. 열린 손바닥이 칼날에 닿았다는 감촉조차 없었다. 물살에 씻긴 돌처럼, 닿은 것들이 그냥 떠내려갔다."형님!"두 아우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정이 시킨 무모함이었을 것이다. 왼쪽에서 창이, 오른쪽에서 도끼가 왔다. 강은 그 둘을 거의 심심하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몸이 반 바퀴 돌았고, 손등이 창대를 스쳤고, 팔꿈치가 어딘가에 닿았다. 그것뿐이었다.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사내가 손목을 안고 무너졌다. 오른쪽 사내는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반 장을 날아가 처박혔다.요골. 그리고 빗장뼈.들리는 순간 알았다. 의녀의 귀는 뼈 부러지는 소리를 종류별로 안다. 수없이 이어 붙인 뼈들이었다. 부목을 대고, 붓기를 짚고, 아물 때까지 달포를 함께 견디던 뼈들. 그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지금 제 몸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고 있었다.왼쪽 사내는 부러진 손목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눈 위를 기어 물러났다. 오른쪽 사내는 일어나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짐승 같은 신음만 뱉었다. 둘 다 무기를 찾지 않았다. 그들 평생의 사냥이 가르쳐 준 대로, 이길 수 없는 것 앞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그만. 이제 그만.강은 듣지 않았다. 물은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는 듯이, 더 깊은 데서 더 큰 물이 밀려 올라왔다. 눈에 비치는 세상이 이상하리만치 환했다. 눈송이 하나하나의 결이 보이고, 쓰러진 자들의 숨이 흰 김으로 오르는 것이 보이고, 그 숨줄기가 어디서 얕아지고 어디서 끊기는지까지 보였다. 아름다웠다. 소름 끼치게 아름다워서, 운설은 그 환함 속에서 비로소 겁이 났다. 이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에 사람이 익숙해지면 어찌 되는가. 겁이 나는데도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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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돌부처

사내의 눈이 그녀를 살렸다.내려가는 손바닥 아래서, 그 눈은 끝까지 감기지 않았다. 빌지도 피하지도 않고 다만 마주 보는 사람의 눈. 강물은 돌멩이 위로 덮쳐 지나가려 했으나, 그 아래 있는 것은 눈을 뜬 산 사람이었다. 그 낯익음이 — 숨이 오르내리고 눈이 깜빡이지 않는, 지겹도록 들여다본 산 사람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 흐름 한가운데 아주 잠깐, 바늘귀만 한 틈을 냈다.그 틈으로 왼손이 움직였다.은침이 제 허벅지에 꽂힌 것과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골짜기를 나서기 전, 그녀는 제 두 손을 눈에 묻어 씻었다. 오른손과 왼손. 부순 손과 감은 손.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두 손은 똑같이 생겨서, 어느 쪽이 한 일인지 손금은 말해 주지 않았다.무릎 위 두 치, 큰 물길이 좁아지는 자리. 남에게는 평생 놓아 본 적 없는 깊이까지 침이 들어갔다. 강이 비명 같은 것을 질렀다. 지르고는, 썰물이 빠지듯 순식간에 저 아래로 물러났다.환하던 세상이 꺼졌다. 눈송이의 결이 사라지고, 숨줄기들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냥 눈 내리는 어스름의 골짜기였다. 그리고 아픔이 왔다. 미뤄 두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 물어뜯은 입술, 언 발, 이레 치의 피로가 빚쟁이처럼 몰려들었다. 운설은 사내 곁에 무릎부터 무너졌다.한동안 눈 오는 소리만 있었다."……어째서." 사내가 물었다. 갈비를 움켜쥔 채, 숨을 반씩 끊어 쉬면서. "손을 거뒀나."대답 대신 운설은 그 손을 뻗어 사내의 옷섶을 열었다. 사내가 움찔했으나 뿌리칠 힘이 없었다. 손끝이 부러진 자리를 짚어 나갔다. 다섯째 갈비, 여섯째 갈비. 뼈끝이 숨주머니 한 뼘 앞에 멎어 있었다."움직이면 죽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숨은 얕게. 말은 짧게.""지금 나를…… 고치는 건가.""숨이 위태로우니까."사내가 웃으려다 기침을 했고, 기침 끝에 신음을 삼켰다. 운설은 제 치맛단을 찢어 사내의 가슴을 감았다. 손이 떨렸다. 뼈를 짚는 손이 떨리기는 의녀가 되고 처음이었다. 방금 이 가슴을 부순 것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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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화톳불

"맨손이었다니까. 맨손."소금 짐꾼이 젖은 짚신을 불에 말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방 앞마당의 화톳불에는 하룻밤 길이 묶인 사람이 여덟이나 둘러앉아 있었다. 눈이 재를 넘는 길을 막은 밤이었다.운설은 그 목소리를 등 뒤 반쯤에 두고 앉아 있었다.이 마당에 앉기까지 반나절을 망설였다. 재 넘는 길이 눈에 막혀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참에, 한데서 밤을 나면 얼어 죽기 알맞은 날씨였다. 침통은 봇짐 밑바닥에 묻은 지 오래였다. 방이 붙은 뒤로 의술은 밥벌이에서 표적으로 바뀌었고, 잇꽃 물은 눈길 사흘에 바닥났다. 남은 것은 낯을 가리는 두건 한 장과, 불가 맨 바깥 자리 하나. 그늘과 불빛의 경계에 앉아 그녀는 되도록 숨을 작게 쉬었다."쇠뇌 살을 날아오는 채로 받아 쥐고, 박도를 손바닥으로 분질렀다는군. 왕가네 사냥꾼 삼 형제라면 이 근동에서 범 잡는 이들인데, 셋이 한꺼번에 당했어.""에이, 살을 무슨 수로 손에 받나.""그러니까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짐꾼이 목소리를 낮추자 불가의 고개들이 절로 모여들었다. "북막 요녀야. 죽은 삭월 것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씨라잖나. 눈보라를 치마폭에 감고 다니고, 밤마다 달에 절을 하고, 절할 때마다 힘이 는다더군."언 주먹밥을 녹이며, 운설은 제 이야기가 남의 입에서 도는 것을 사흘째 듣고 있었다. 들을 때마다 이야기 속의 여자는 자라 있었다. 어제는 칼을 꺾었고, 오늘은 눈보라를 부렸다. 내일은 무엇을 하게 될까.잘못 전해진 대목을 바로잡아 줄 수도, 참인 대목을 부인해 줄 수도 없는 자리였다. 소문 속의 여자와 불가의 여자 중 어느 쪽이 더 그녀인지, 이제는 그녀 스스로도 이따금 헷갈렸다."한데 말이야." 마방 심부름꾼 아이가 끼어들었다. "그 요녀가 부순 사냥꾼을 도로 고쳐 줬다는 얘기는 왜 다들 빼먹소? 우리 마방에 왕가 막내가 들렀는데, 제 형 갈비를 그 여자가 감아 줬다고 —""고쳐 주긴." 늙은 마부가 코웃음을 쳤다. "잡아먹을 것을 아껴 둔 게지. 거미도 제 줄에 걸린 놈을 당장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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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기척

"동상입니다." 운설은 두 손을 볼에 대며 말했다. "언 살은 불을 바로 쬐면 상합니다. 그래서 뒤에 앉았고, 낯이 늦게 익는 겁니다."의술의 말은 거짓말에 쓰여도 의술의 무게를 냈다. 마부는 못마땅한 얼굴로 무어라 우물거리다가 새 장작에 눈을 돌렸고, 얼굴들은 하나둘 불로 돌아갔다. 다만 다 돌아가지는 않았다. 두엇의 곁눈이 밤이 깊도록 이따금 그녀의 자리를 더듬었다. 운설은 닭이 울기 전에 마방을 나섰다. 눈은 그쳐 있었고, 재 넘는 길에는 아직 아무 발자국도 없었다.길 위의 세상은 그사이 또 한 겹 좁아져 있었다. 고갯마루 주막은 문에 널을 대었고, 어느 마을은 다리목에 장정을 세워 낯선 여자를 아예 들이지 않았다. 소문이 지나간 자리마다 문이 하나씩 잠겼다. 왕가 사냥꾼이 약조한 사흘은 진작 지났고, 살을 손으로 받는 여자의 이야기는 이제 그녀보다 빨리 북으로 가고 있었다.기척을 처음 안 것은 그날 해 질 녘이었다.뒷목에 앉는 무게 같은 것이었다. 소리도 그림자도 없이. 돌아보면 늘 빈 능선이고 빈 골짜기인데, 걷기 시작하면 다시 등에 얹혔다. 처음에는 지친 몸이 지어내는 헛것이라 여겼다. 이튿날도 얹혔다. 사흘째도.운설은 배운 것을 다 썼다. 얼음 여울을 골라 건넜고, 바위가 드러난 등성이로만 반나절을 갔고, 제 발자국을 되밟아 왔던 길을 한 마장 되돌아가 보기도 했다. 개도 못 따를 길이었다. 기척은 다음 날이면 같은 간격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마치 간격 그 자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듯이.사냥꾼들의 몰이는 그물을 좁히며 조여들었다. 이것은 좁히지 않았다. 서두르는 법이 없다는 것 — 그것이 이 기척의 가장 무서운 대목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것은 놓칠 걱정이 없는 것이다.나흘째 아침, 그녀는 버려진 봉수대 그늘에서 얼어붙은 육포를 씹으며 처음으로 그 생각을 입 밖에 내 보았다."당신입니까."물음은 흰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골목에서 길을 비켜서던 사람. 북으로 가시오, 하던 목소리. 그리고 화톳불 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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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검 (선우현)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 검을 배우기 전에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선우현은 폐사 마당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이 하는 말을 읽었다. 산문 기둥에 박힌 쇠뇌 살은 깃까지 얼어 있었다. 사흘 전. 살이 박힌 깊이와 각도를 눈으로 재고, 그는 살이 날아왔을 자리를 돌아보았다. 외길 어귀. 거기서 법당 계단까지 스무 걸음. 그 스무 걸음 사이에 장정 셋이 쓰러졌던 자국이 눈 밑에 아직 남아 있었다.피는 없었다.그는 그 사실을 두 번 확인했다. 왕가 삼 형제라면 그도 이름을 들었다. 범을 맨 창으로 받는 자들이다. 그 셋을 스무 걸음 안에서 꺾으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하는 손속이란, 맹의 장로들 중에도 몇 없다. 그런데 그 손속의 임자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의녀라 했다.마당 구석에는 액막이 소금이 뿌려져 있었다. 왕가 막내의 짓일 것이다. 소금 알갱이들이 눈과 섞여 반짝였다. 요녀의 자리라고 소금을 치고 간 그 손들을, 그 요녀가 며칠 전 부목으로 감아 주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어느 대목을 삼키고 어느 대목을 뱉는지, 그는 장터 벽에 붙는 방(榜)을 만드는 자리에 있어 봐서 알았다.계단 아래 눈을 걷어 내자 찢긴 무명 조각이 나왔다. 치맛단이었다. 부목을 동인 매듭 방식은 북변 의원들의 것. 부수고, 그 자리에서 감았다. 같은 손으로.선우현은 오래 그 매듭 자국을 내려다보았다.일어서려다, 그는 계단 틈에서 가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은침 한 대. 끝에 마른 피가 한 점 얼어붙어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부러진 뼈들 곁에 피가 없었으니, 이 피는 침의 임자가 저에게 쓴 것이다. 제 몸에 침을 놓아 가면서까지 눌러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 눈은 거기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그는 은침을 집어 소매에 넣었다. 넣고 나서, 제가 방금 한 일이 증좌의 수습인지 다른 무엇인지 잠깐 생각했고, 생각을 거기서 끊었다.맹을 떠나던 날의 문답이 눈길 위로 되돌아왔다.수장의 인(印)을 내리며 집법당주는 웃고 있었다. 노인의 웃음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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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대면

내려가지 않는 길은 없었다.언덕 위에서 운설은 그것을 한눈에 헤아렸다. 벌판을 가로지르지 않고 북으로 가는 길은 없고, 벌판 가운데는 그 사람이 있었다. 어둠을 기다려 볼까 하는 생각은 떠오르기도 전에 부질없어졌다. 나흘 동안 간격을 지키던 기척이다. 밤이 그의 눈을 가려 줄 리 없었다.그녀는 언덕을 내려갔다.거리가 줄어드는 동안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무 걸음쯤에 이르렀을 때에야 운설은 걸음을 멈추었다. 눈 그친 벌판에는 바람 소리조차 없어서, 두 사람 사이의 스무 걸음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거리처럼 고요했다.골목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곁을 스치던 낮은 목소리, 눈발 속에 비켜서던 어깨. 다만 그때 그의 등 뒤에는 무너지는 그녀의 집이 있었고, 지금 그의 등 뒤에는 그녀가 가야 할 북쪽 하늘이 있었다.가까이서 보는 그는 골목의 기억보다 젊고, 기억보다 고요했다. 눈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데도 그의 둘레만 바람이 비켜 가는 듯했다. 화톳불 가의 장사치들이 왜 그 이름 앞에서 숙연해졌는지,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알 것 같았다. 격이라는 것은 소문으로 듣는 것과 마주 서는 것이 이렇게 달랐다."열나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멀리 왔소.""길을 일러 준 이가 있어서."그 말에 그의 눈매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 부르기에는 모자라고, 아니라 하기에는 남는 것이었다."무림맹 토벌 수장 선우현이오." 그가 말했다. 화톳불 가에서 주워들은 이름이 눈 벌판 위에서 임자를 찾았다. "그대를 베라는 명을 받고 왔소.""끌어오라는 명이 아니고요.""베라 하였소."숨길 것도 에두를 것도 없다는 말투였다. 이상하게도 그 서슬이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먼저, 목덜미의 그 서늘함이 왔다. 나흘 내 등에 얹혀 있던 것과 같은 서늘함이 이제 정면에서 불어오고 있었다.운설은 소매 속 신패의 모서리를 옷 위로 가만히 눌렀다. 도망칠 수 없다면 숨길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은 폐사의 눈밭에서 그녀의 사흘을 다 읽어 낸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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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검끝

뽑힌 검은 그러나 그녀를 겨누지 않았다. 검끝은 눈밭을 향해 낮게 늘어진 채였고,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어깨 너머 언덕 쪽을 스쳤다."언덕 뒤에 둘."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말이었다. "집법당의 눈이오. 사흘째 나를 밟고 있소."운설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수장이 계집과 마주 서서 문답만 하다 보냈다고 올라가면, 다음에 오는 것은 나 하나가 아니오." 그는 여전히 그녀만 들을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 검이 그대를 죽이려 들 것이오."숨 한 번의 사이를 두고, 그가 덧붙였다."죽지 마시오."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몸이 먼저 알았다. 머리가 따라잡기도 전에 목덜미의 서늘함이 등줄기까지 내리꽂혔고 — 검이 왔다.베는 검이었다. 봐주는 검이 흉내 낼 수 없는, 정확하게 목숨을 물러 오는 검. 언 땅이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이 귓전을 스쳤고, 운설의 몸이 뒤로 물러난 것은 그녀의 뜻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저 깊은 데서 눈을 뜬 강이었다. 물소리가 삽시간에 차올랐다. 세상이 다시 환해지기 시작했다. 눈송이의 결, 검이 그리는 길, 그 길이 반 치 비켜 갈 자리.첫 합에서 그녀가 배운 것은 검신이라는 이름의 뜻이었다. 장정들의 창칼은 소리부터 왔고, 사냥꾼의 쇠뇌는 살기부터 왔다. 이 검은 아무것도 앞세우지 않고 왔다. 강이 아니었다면 첫 합에 끝났을 것이다. 강이 있어도, 검이 그리는 길들은 매번 물살보다 반 호흡 빨랐다. 다만 그 빠른 길들이 하나같이 급소의 반 치 곁을 지났다.반 치. 그 반 치가 보이는 순간 운설은 알았다. 이 사람은 지금 베면서 빌고 있다. 검은 죽이려 들되, 검을 쥔 사람은 그 반 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감찰의 눈이 닿지 못하는, 검신(劍神)만이 다룰 수 있는 반 치였다.그러나 강은 그 반 치를 몰랐다.세 합째였는지 네 합째였는지, 그녀의 오른손이 저 혼자 올라가 검날을 잡았다. 맨손이 쇠를 무는 소리가 벌판에 울렸다. 손바닥이 타는 듯했지만 아픔은 멀리 있었다.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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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매듭

검이 손안에서 눕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날이 비틀리며 손아귀를 미끄러져 나갔다. 물고기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 같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회수였다. 강이 주춤한 그 한순간을 그는 놓치지 않았고,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하지 않는 각도로만 검을 물렸다. 반 치의 사람이 반 치로 물러난 셈이었다.물러난 검이 검집에 잠기는 소리가 났다.강물은 소리를 낮추며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침이 없이도 내려갔다. 눈을 마주친 탓인지, 검이 물러난 탓인지, 두 번째라 물이 덜 불었던 탓인지 — 알 수 없었으나 내려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서, 운설은 그 자리에 선 채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눈송이가 다시 눈송이로 돌아왔다.고요가 벌판에 되돌아오자, 방금 지나간 것들의 크기가 뒤늦게 몸으로 왔다. 무릎이 가늘게 떨렸다. 검신의 검을 맨손으로 물고, 강호에서 가장 빠르다는 검객을 물가로 끌어당기고 — 소문 속의 여자가 한 일들을 이 몸이 했다. 그런데도 이 몸의 임자는 그 일들을 구경한 기억밖에 없었다. 힘을 얻는다는 것이 이렇게 저를 잃는 일이라면, 강이 다 차오르는 날 이 자리에 남는 것은 누구인가."언덕 뒤의 둘." 선우현이 벌판이 울리도록 소리를 높인 것은 그때였다. "보았느냐."한참 만에 언덕 너머에서 젊은 무사 둘이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낯들이 멀리서도 희었다."가서 본 대로 고하라. 계집의 힘은 소문을 웃돌며, 정면으로 베려면 맹의 검 수십이 꺾인다. 하여 수장은 곁을 떠나지 않고 힘의 근원을 캐며 기회를 기다리겠다 — 한 자도 보태지 말고, 한 자도 빼지 말고."두 사람은 도망치듯 남쪽으로 사라졌다. 눈 벌판에 다시 둘만 남았다."기회를 기다린다." 운설이 그 말을 되뇌었다. "그 보고는 참입니까.""한 자도 보태지 않았소." 그는 태연했다. "기회가 무엇의 기회인지를 말하지 않았을 뿐."손바닥이 그제야 아파 왔다. 검날을 물었던 오른손을 펴자 살이 갈라진 자리로 피가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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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산신당

눈보라는 밤이 되며 이빨을 세웠다.동행 이틀째까지 두 사람이 나눈 말은 길 이름과 초소 위치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앞서 걷지 않았다. 늘 반 장 비낀 곳에서 같은 속도로 걸었고, 갈림길에서만 먼저 방향을 잡았다. 밥은 따로 먹었다. 그녀가 언 주먹밥을 꺼내면 그는 말없이 등을 돌리고 육포를 씹었다. 베어야 할 사람과 겸상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다른 무엇인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무너진 산신당을 찾아낸 것은 그였다. 지붕 반쪽이 내려앉고 산신 그림은 빛이 바래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것이 되어 있었으나, 성한 반쪽 아래는 바람이 들지 않았다. 불은 피우지 못했다. 눈보라 속에서도 연기 냄새는 십 리를 간다고 그가 말했고, 그 말이 옳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산신께는 미안한 일이오." 자리를 잡으며 그가 말했다. 농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어조여서, 운설은 어둠 속에서 잠깐 그의 얼굴을 살폈다. 빛바랜 호랑이 아래 앉은 검신이라니, 미안할 쪽이 어느 쪽인지 모를 일이기는 했다."젖은 옷은 벗어서 짜야 합니다." 운설이 말했다. "고뿔은 약으로 잡아도 얼어 죽는 건 약이 없습니다.""나는 되었소.""환자가 의원 말을 안 들으면 —""환자가 아니오.""오늘 밤 안으로 됩니다."그가 이쪽을 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낯을 검신의 격으로 지으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겉옷을 벗어 물기를 짜서 벽에 걸었다. 의녀의 말은 검보다 무르되 검만큼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배워 가는 중이었다.당(堂) 안의 어둠에 눈이 익자 서로의 윤곽만 남았다. 반 장의 간격을 두고 벽에 기대앉아, 두 사람은 눈보라가 문풍지 대신 우는 소리를 들었다."물어도 되겠습니까." 운설이 먼저 침묵을 걷었다. "검은 어쩌다 잡으셨습니까.""집안의 아이들은 다섯에 목검을 잡소. 나는 넷에 잡았다 하오." 어둠 속의 목소리는 낮고 고르았다. "기억에도 없는 나이요. 검을 잡은 기억이 없으니, 잡지 않은 나를 알지 못하오.""잡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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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눈마당

"안에 있으시오." 그가 말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무슨 소리가 나도."그는 달빛 마당을 가로질러 숲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 그대로, 밤 마실이라도 가는 사람처럼.운설은 문설주를 붙들고 어둠에 귀를 세웠다. 낮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먼저 왔다. 계집을 내놓으면 검신 나리의 이름에는 흠이 안 가게 해 주겠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 여럿이었다. 대여섯은 되었다. 그다음에 들린 것은 답이 아니라 쇳소리 한 번, 눈 떨어지는 소리 두어 번. 나무 위에서 눈덩이가 제풀에 미끄러지는, 겨울 숲의 흔한 소리 같은 것들.그리고 아주 오랜 정적.강물 소리가 가슴 안에서 반 뼘쯤 차올랐다가, 도로 내려앉았다. 나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물도 아는 모양이었다.그가 돌아온 것은 차 한 잔 식을 참이 지나서였다. 어깨에 눈이 앉아 있었고, 검은 이미 검집 속이었고, 걸음은 나갈 때와 같았다. 다른 것은 하나, 왼팔 소매가 어둠 속에서도 표 나게 무거워 보인다는 것뿐이었다."죽였습니까.""보냈소." 그가 말했다. "혀는 성하게 두었으니, 가서 소문을 낼 것이오. 검신이 계집을 독차지하려 든다고." 그는 그 말이 우스운지 우습지 않은지 알 수 없는 낯으로 잠깐 사이를 두었다. "맹에 올라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소문이오. 수장이 먹이를 곁에 두고 지킨다는 소문보다는.""왼팔." 운설이 말했다."스쳤소.""환자가 의원 말을 —""환자가 아니오."같은 문답이 두 번째였다. 두 번째라는 사실이 어쩐지 방 안의 공기를 반 뼘 데웠다. 그는 이번에도 결국 소매를 걷었다. 팔뚝 바깥쪽으로 두 치, 얕지만 깨끗하지 못한 상처였다. 낭인의 칼은 이가 나가 있었을 것이다. 운설은 남은 지혈초를 개어 바르고 무명을 감았다. 사람의 살을 만지는 동안만은 손끝에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그 없음이 좋아서, 그녀는 필요한 것보다 조금 천천히 감았는지도 모른다.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시선 둘 곳을 못 찾는 사람처럼 빛바랜 산신 그림만 보고 있었다. 좌중을 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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