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1 - Chapitre 20

20

11. 첫 밤

숨이 먼저 바닥났다.운설은 늙은 소나무 아래 멈추어 서서, 제 숨이 흰 짐승처럼 어둠 속으로 풀려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뒤돌아보면 성읍의 불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 덮인 능선만이 달빛을 받아 길게 누워 있었다.바람이 잦아들자 들판은 소리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눈 위에 선 것은 그녀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켜진 것은 달 하나였다. 열여덟 해를 산 성읍이 하룻밤 사이에 지도에서 지워진 듯했다.발이 시렸다. 신 안으로 들어온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어는 모양이었다. 운설은 그 감각을 붙들었다. 시린 발, 마른 목, 뛰느라 흐트러진 옷섶. 몸의 일들은 정직해서, 하나씩 짚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가라, 설아.그 목소리는 그러나 몸보다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운설은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지러진 달이 새겨진 쇠 패가 손끝에 닿았다. 한나절 품에서 데워졌던 쇠붙이는 어느새 밤의 온도로 식어 있었다. 패 곁에는 늘 지니고 다니던 침통이 하나. 은침 여남은 대와 가위, 마른 지혈초 한 줌. 열여덟 해의 삶에서 그녀가 챙겨 나온 전부가 소매 한 짝에 다 들어 있었다.의녀의 소매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일러 보았다. 언제든 불려 나가고, 언제든 떠나는 자리. 그러나 불려 나간 밤에는 돌아갈 문이 있었다. 문 안에는 화로가 있었고, 화로 위에는 약탕관이 있었다. 지금쯤 그 약은 다 졸아붙어 빈 그릇 바닥이 타고 있을 것이었다. 내일 아침 약을 받으러 올 노인의 기침 소리도, 이제 그녀와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 되어 있었다.아버지의 등이 자꾸 눈앞에 어렸다. 흰 무복들 한가운데 홀로 섰던 산맥. 그 산맥이 지금 어찌 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검이 우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담을 넘은 딸에게, 그것을 알아볼 방도는 남아 있지 않았다.설아, 라고 그는 불렀다. 운설도 아니고 아가도 아닌, 처음 듣는 것처럼 낯설고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한 이름. 눈[雪]의 아이. 그 이름이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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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울

개들은 영리했다. 눈이 발자국을 삼키는 속도보다 개들의 코가 빨랐다.운설은 구릉을 내려서며 방향을 버렸다. 북으로 곧게 난 길은 이제 그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손가락에서 벗어나 골짜기 쪽으로 꺾었다. 관솔불들이 능선 위로 올라서는 것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불빛은 아직 멀었으나, 개 짖는 소리는 이미 가까웠다.물을 찾아야 했다. 짐승에 물린 사냥꾼을 꿰매 주던 밤, 그가 들려준 말이 있었다. 쫓기는 짐승이 영리하면 여울을 탄다고. 냄새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그때는 남의 세상 이야기로 들었던 말이, 지금 그녀의 유일한 의술이 되어 있었다.골짜기 바닥에서 물소리가 났다. 얼음 밑을 흐르는, 가늘고 검은 여울이었다. 운설은 신을 벗어 품에 안고 물로 들어섰다.찬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여겨 왔다. 그 자신이 한 걸음 만에 부서졌다. 발목을 문 물은 차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뼈에 대고 줄질을 하는 것 같았다. 이가 저절로 부딪쳐서, 운설은 소매를 물어 소리를 죽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그녀는 수를 셌다. 환자에게 침을 놓을 때 세던 수였다. 백을 세면 끝난다고, 몸에게 거짓말을 했다. 백을 세고도 물은 끝나지 않았다.물굽이가 꺾이는 곳에 늙은 물레방아가 서 있었다. 겨울이라 바퀴는 얼어붙은 채였고, 바퀴 밑으로 물이 드나드는 어두운 틈이 있었다. 운설은 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얼음과 이끼 낀 나무 사이,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어둠이었다.물레방아의 어둠은 관 속 같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소리마저 개들이 맡을 것 같았다.관솔불들이 골짜기로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였다.불빛이 얼음 위를 훑고 지나갔다. 사람의 다리들이 여울가에 늘어섰다. 개들이 물가에서 코를 박고 맴돌더니, 성이 나서 짖어 댔다. 냄새가 끊긴 것이다. 위로 갔겠는가 아래로 갔는가, 계집 걸음이 얼마나 갔겠는가, 하는 말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들었다. 흰 무복은 보이지 않았다. 낡은 가죽옷에 창칼을 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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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잿불

"길 잃은 아낙이 이 밤에," 사내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등잔불에 드러난 흰 낯이 무엇을 흔들어 놓았는지, 호미 자루를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가 다시 감겼다.안쪽에서 노파가 내다보았다. "뉘요.""친정에 가다 길이 끊겼습니다." 지어 온 거짓이 이번에는 부서지지 않고 나왔다. "하룻밤 부엌 귀퉁이면 됩니다. 삯은 침으로 갚겠습니다. 의녀입니다."의녀라는 말에 노파의 눈이 사내의 등을 밀었다. 겨우내 기침으로 밤을 새우는 늙은이의 귀에 그 말은 등잔불보다 밝았다. 사내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비켜섰다. 비켜서면서도 그 눈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왔다.봉당의 잿불이 그녀를 살렸다. 운설은 언 발을 미지근한 재 곁에 두고, 시키는 대로 천천히 녹였다. 감각이 돌아오는 일은 잃는 일보다 아팠다. 바늘 천 개가 발끝에서 피어나는 동안,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부지깽이를 쥐었다. 노파가 곁에서 좁쌀죽을 쑤었다. 죽 끓는 소리, 재 무너지는 소리, 늙은이의 기침 소리. 하루 전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흔했던 소리들이, 이제는 훔쳐 듣는 남의 살림처럼 귀했다.죽을 비우고 그녀는 노파의 등에 침을 놓았다. 폐수혈 언저리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침이 들어가자 노파가 아이고, 하고 낮게 울었다. 굳은 것이 풀릴 때 나는 소리를, 의녀는 가려듣는다. 시술하는 동안만은 손이 떨리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 있든, 남의 몸을 고치는 동안만은 그녀는 아직 그녀였다.침을 놓는 그녀의 손을, 노파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운 손이 고생을 하는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이 집이 그녀에게 내어 준 가장 큰 자리라는 것을, 운설은 알았다.사내는 건넌방 문턱에 앉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요 아래 성읍에," 이윽고 그가 입을 뗐다. "재앙의 씨가 났다더군. 계집이라던데. 맹에서 사람값을 후하게 쳐 준다고.""세상이 흉흉합니다." 운설은 침을 거두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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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살얼음

벼랑은 곧게 떨어지다가, 아래 삼분지 일쯤에서 눈 쌓인 비탈로 흘렀다. 그 비탈 끝에 강이 있었다. 언 강이 버텨 줄지는 강만이 알았다.등 뒤의 발소리들이 부챗살을 오므렸다. 계집이다, 벼랑이다, 잡았다 — 숨찬 목소리들이 저희끼리 값을 나누기 시작했다. 운설은 그 목소리들을 등으로 들으며,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지는 제 속을 들여다보았다. 두려움이 어느 선을 넘으면 사람은 도리어 맑아진다는 것을, 죽어 가는 환자들 곁에서 여러 번 보았다. 그 맑음이 지금 제 것이 되어 있었다.살고자 하면 길이 없고, 버리고자 하면 비탈이 있었다.운설은 몸을 던졌다.처음 몇 길은 허공이었다. 그다음은 눈이었다. 세상이 흰 소용돌이로 뒤집히고, 하늘과 비탈이 자리를 바꾸며 그녀를 굴렸다. 소매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공처럼 말았다. 낙상한 환자를 살릴 때마다 속으로 외던 말 — 뼈는 펴진 데서 부러진다 — 이 그녀를 말아 쥐고 있었다. 눈보라가 그치듯 구름이 멎었을 때, 그녀는 강 위에 있었다.얼음이 등 밑에서 낮게 울었다.수면 깊은 곳에서 우우, 하고 겨울 강이 대답하는 소리. 금 가는 소리가 발밑에서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운설은 숨을 죽이고, 배운 적 없는 몸짓으로 몸을 폈다. 무게를 넓게 눕히는 것. 살얼음 위의 이치는 세상의 이치와 반대여서, 일어서려는 자가 먼저 빠졌다.벼랑 위에서 사내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뛰어내리는 자는 없었다. 저 얼음이 여럿의 무게를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다. 욕설 몇 마디가 눈송이처럼 힘없이 떨어졌고, 부챗살은 강을 우회하러 흩어졌다. 그들이 다리목까지 도는 반나절이, 그녀가 번 전부였다.운설은 엎드린 채로 강을 건넜다. 한 자 옮기고 얼음의 대답을 듣고, 또 한 자 옮기고. 강 한가운데서 잠깐, 얼음 밑을 흐르는 검은 물이 발밑에 보였다. 흐르는 것은 얼지 않는다. 언 것은 흐르지 않는다. 그 사이 한 치의 살얼음 위에 지금 제 목숨이 엎드려 있었다.건너편 기슭의 갈대숲에 몸을 부렸을 때에야, 그녀는 제 손이 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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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먹빛

달아나면 안 된다.풀비가 종이를 다 바르기도 전에, 운설의 몸이 먼저 그 이치를 알았다. 파장하는 장터에서 등을 보이며 뛰는 자는, 방에 무엇이 적혔든 방이 가리키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침통을 개키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땀 한 땀, 어제와 같은 속도로 은침을 닦아 꽂았다. 손끝의 일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 — 그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부동심이었다.사람들이 방 아래로 모여들었다. 글을 아는 목소리 하나가 이윽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북막 삭월부의 남은 핏줄로서, 강호에 재앙을 끼칠 씨인 바 —"장터의 소음이 한 겹 걷혔다. 국밥 김 너머로, 지게 너머로, 사람들의 귀가 일제히 그 목소리를 향해 열렸다."— 나이는 열여덟. 낯이 심히 희어 추위에도 붉어지지 아니하고, 머리는 옻같이 검다. 의술에 능하여 침과 약초로 행세할 것인즉 —"닦던 침이 손끝에서 잠깐 멎었다.의술로 행세할 것인즉. 그 한 줄이 그녀의 하루를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 해 질 녘까지 이 나무 그늘에서 침을 놓은 손님이 몇이었나. 얼굴을 보인 눈이 몇이었나. 방은 종이 한 장으로 그녀의 밥벌이와 그녀의 이름을 한 줄에 묶어 버렸다. 살기 위해 하는 일이 그대로 그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도록.읽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지러진 달을 새긴 쇠 패를 지녔을 것이니, 패를 함께 거두는 자는 상을 배로 하리라."소매 속에서 신패가 문득 무거워졌다. 쇠붙이가 무게를 바꿀 리 없으니, 무거워진 것은 그것을 감춘 팔이었다. 배로 하리라. 맹이 원하는 것이 사람인지 패인지, 그 한 줄이 스스로 답하고 있었다."— 산 채로 맹에 넘기는 자에게는 황금 쉰 냥을 상으로 내린다."쉰 냥, 하고 누군가 낮게 되뇌었다. 그 두 글자가 장터를 지나가는 소리를 운설은 들었다. 쉰 냥이면 소가 몇 마리인가, 밭이 몇 마지기인가. 저녁거리를 사 들고 섰던 손들이 저마다의 셈을 시작하는 소리. 사람의 눈빛이 값을 매기는 눈빛으로 바뀌는 데는 숨 한 번이면 족했다.그리고 얼굴이 있었다.방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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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약초꾼

노파는 그녀의 소매를 잡지 않았다. 다만 스쳐 지나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흘렸다. "지혈초가 더 있으면 뒤꼍으로 오시게."약재전 뒤꼍은 처마가 낮고 어두웠다. 마른 약초 두름이 발처럼 드리워, 골목의 눈들로부터 한 뼘의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운설이 들어서자 노파는 새끼줄로 약초 단을 묶으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낮에 자네가 판 지혈초, 볕에 말린 게 아니라 그늘에 말린 것이더군. 성한 의원에서 배운 손이야." 새끼줄이 매듭지어졌다. "방(榜)의 그림은 코가 글렀어. 허나 눈은 옳게 그렸데."부인할 길을 그녀는 찾지 않았다. 이 뒤꼍에 불러들인 것부터가 이미 답이었다. 노파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늙은 눈이 그녀의 얼굴을 오래, 값을 매기는 법 없이 들여다보았다."세상이 재앙이라 부르는 것치고," 노파가 말했다. "아픈 데를 종일 눌러 주고 다니는 재앙은 내 평생 처음일세."노파는 좌판 밑에서 낡은 봇짐 하나를 꺼내 왔다. 약초 두름과 마른 뿌리들이 삐죽 나온, 어느 산이든 어울릴 행상의 짐이었다. "약초꾼은 침통을 져도, 흰 낯을 해도, 산길을 밤에 타도 이상할 게 없지. 의녀는 못 감춰도 약초꾼은 감춰지네."봇짐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미숫가루 주머니와 부시, 기름 먹인 밀랍 초 두 자루가 약초 밑에 눌러 담겨 있었다. 하루 이틀에 꾸린 짐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 짐이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렸는지, 노파의 세월 어디에 이런 짐을 꾸리게 된 사연이 있는지 — 물으면 안 되는 것들만 자꾸 늘어났다."어찌 나를 —" 운설은 말을 맺지 못했다."묻지 마시게. 나도 안 물을 테니." 노파가 봇짐을 그녀의 등에 지웠다. 지우고 나서, 끈을 고쳐 매 주며 지나가듯 덧붙였다. "그보다 급한 소문이 있네. 오늘 방을 바른 관원들이 주막에서 하는 말을 들었어. 맹이 토벌 수장을 세웠다더군."봇짐 끈이 어깨를 조였다."젊은 검객이라데. 이름이 높아. 검신(劍神)이라고들 부른다지." 노파의 손이 매듭을 지었다. "선우현. 그 사람이 자네를 잡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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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풍문

흰 무복의 손이 두건 자락을 걷었다.등불이 얼굴에 닿았다. 운설은 눈을 내리깐 채 견뎠다. 볼이 화끈거렸다. 골목을 돌기 전, 봇짐 속 마른 잇꽃을 침으로 개어 볼과 콧등에 문질러 두었다. 연지의 원료가 되는 꽃이었다. 의녀의 손은 화장을 배운 적 없으나 약초의 성질은 알았다. 추위에도 붉어지지 않는 낯 — 방이 적어 놓은 그 한 줄을, 꽃물 한 겹이 지우고 있었다.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필요한 것보다 오래였다. 값을 매기는 눈길과 다른,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듯한 머묾이었다. 운설은 저자에서 배운 대로 낯을 무덤덤하게 두었다. 함지 인 아낙들의 얼굴. 익숙해진 수모의 얼굴."약초꾼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눈 그치기 전에 재를 넘어야 합니다."곁의 무사가 봇짐을 창끝으로 헤집었다. 마른 당귀 냄새가 눈발 속에 퍼졌다. "약초다." 그가 말했다. "낯이 붉잖나. 방의 계집은 흰 낯이라 했다." 두건을 쥔 손이 미적지근하게 풀렸다. 눈보라가 등불을 흔들었고, 저녁은 짧았고, 줄 뒤에는 아직 아낙이 여럿이었다."가라."쪽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운설은 이십 걸음을 걷고 나서야 숨을 바꿔 쉬었다. 마을의 불빛이 눈발에 뭉개질 즈음, 볼의 꽃물을 눈으로 씻어 냈다. 언 뺨이 다시 희어졌다. 제 낯을 지우고 남의 낯을 그려야 지나갈 수 있는 문. 그런 문이 앞으로 몇이나 남았는지 그녀는 세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은 재 너머 주막 헛간에서 났다. 봇짐을 진 몸은 봉놋방 대신 헛간 검불 위가 편했다. 헛간은 소와 나귀의 온기로 미지근했다. 나귀가 낯선 사람 냄새에 두어 번 코를 불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짐승은 방을 읽지 못한다. 값을 매기지 않는 눈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등이 조금 풀렸다.벽 하나 너머 봉놋방에서 보부상들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사치의 밤은 소문으로 길었다. 어느 관문이 매워졌는지, 어느 다리가 끊겼는지 — 그리고."청하 운씨 말인데."검불을 여미던 손이 멎었다."가주가 갇혔다더군. 제 집에, 제 식솔들 손으로." 목소리가 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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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달

이튿날 그녀는 하루 종일 남쪽으로 걷는 저를 발견했다.깨달은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갈림길 돌무더기 앞에서 발이 멎었을 때, 그림자가 가리키는 쪽이 어제까지의 방향과 반대였다. 몸이 마음보다 먼저 셈을 끝내고, 임자 몰래 저울 위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 발로 맹 앞에 서면 가주는 살려 준다고.운설은 돌무더기 곁에 오래 서 있었다.남쪽 하늘은 무거웠다.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갇힌 집이 있고, 화로가 있고, 목이 아직 붙었다더군, 하는 소문 속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그녀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면 열린다는 문이 있었다. 문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다. 맹의 법이 재앙의 씨에게 어떤 그릇을 준비해 두었을지,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죽는 것이 두려워 발이 멎은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멎게 한 것은 노인의 손이었다. 문 앞에 쓰러졌던 밤, 죽어 가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던 마른 손. 삭월의 마지막, 이라고 그 손은 말했다. 잊으라고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저울 위로 올라가 버리면, 그 밤에 넘겨받은 것들은 임자를 잃는다. 멸문당한 부족의 마지막 물음이, 답을 듣지 못한 채 맹의 창고에서 녹슨다. 아버지가 열여덟 해를 감춘 것도, 노인이 목숨으로 넘긴 것도, 흰 무복이 골목에서 비켜서며 북으로 가시오, 하던 것도 — 모두 헛것이 된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제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모르는 채로 죽으러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효도 아니고 속죄도 아니고, 다만 셈이 빠른 자들에게 셈을 넘겨주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살릴 길이 정말 그 저울 위에만 있는지, 저울을 만든 손을 알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진실이 북에 있다면 — 아버지를 옭아맨 열여덟 해 전의 매듭도 북에 있을 것이었다. 매듭은 푸는 것이지, 목을 거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죄책은 분노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어 노인을 들인 밤부터, 청하 운씨의 마당은 기울기 시작했다. 삼백 식솔. 어제까지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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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외길

새벽에 물소리는 그쳐 있었다.꿈이라 하기에는 귓바퀴에 물기가 남은 듯했고, 생시라 하기에는 벌판이 너무 말라 있었다. 운설은 언 손으로 제 맥을 짚어 보았다. 고르고, 느리고, 열은 없었다. 병자의 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강은 어디를 흐르다 그쳤는가. 의술은 이 물음에 줄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답 없는 물음을 봇짐처럼 지고 길을 나섰다. 지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들이 하나씩 늘고 있었다.산길은 오를수록 좁아졌다. 한나절을 걷고 마루턱에서 숨을 고르던 때, 운설은 문득 산이 조용하다는 것을 알았다.새소리가 없었다.아침 내 곁을 따라오던 박새 소리, 마른 가지 터는 소리가 어느 결에 끊겨 있었다. 짐승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 산의 고요였다. 의원 문간에서 배운 것과 산길에서 배운 것이 같은 말을 했다. 아픈 데는 소리부터 달라진다.그녀는 걸음을 바꾸지 않은 채 귀만 열었다. 바람 아래쪽, 왼편 비탈 저 밑에서 눈 밟는 소리가 하나. 박자가 그녀와 같았다. 그녀가 서면 서고, 걸으면 걸었다. 등 뒤 먼 곳에 또 하나. 이쪽은 서두르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장정들의 몰이와 달랐다. 호각도 없고 고함도 없이, 소리 죽인 그물이 산 하나를 통째로 두르고 있었다.세 번째 기척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것이 제일 무서웠다.운설은 마루턱에서 사잇길로 꺾었다. 나무꾼들이 겨울에만 쓰는, 눈에 반쯤 지워진 길이었다. 꺾고 나서 알았다. 왼편의 기척이 기다렸다는 듯 따라 꺾이는 것을. 그들은 그녀를 몰고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고른 줄 알았던 길이, 처음부터 그들이 열어 둔 길이었다.쉰 냥짜리 그물에도 격이 있었다. 장정들은 소문에 들떠 몰려다녔고, 이들은 값을 버는 법을 아는 자들이었다. 겨울마다 범과 곰을 지고 내려와 관에 값을 받아 온 손들. 그 손들에게 그녀는 이 겨울 산에 든, 가장 값나가는 짐승이었다.멈추면 그물이 좁혀들 뿐이었다. 그녀는 모는 대로 몰리며, 몰리는 동안 셈을 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 나무꾼의 길은 물가나 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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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해빙

시위 소리보다 강이 먼저 왔다.물은 등뼈를 타고 올라와 정수리에서 터졌다. 귀가 열렸다. 세상의 소리가 갑자기 낱낱이 굵어져서, 운설은 눈을 뜬 채로 어둠 속에 든 사람처럼 잠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대신 들렸다. 지붕에 얹힌 눈의 무게가 서까래를 누르는 소리. 세 사내의 심장이 제각기 다른 박자로 뛰는 소리. 그리고 시위를 떠난 살 두 대가 눈발을 가르며 우는, 가늘고 긴 휘파람.느렸다.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느렸다.살이 오는 길이 눈에 보였다. 길이 보이니 비켜설 자리도 보였다. 몸은 이미 그 자리에 가 있었다.정신이 들었을 때 운설은 법당 계단 아래, 처음 섰던 곳에서 세 걸음 비낀 자리에 서 있었다. 쇠뇌 살 한 대는 산문 기둥에 박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또 한 대는 — 그녀의 오른손에 쥐여 있었다. 살깃까지 성한 채로, 날아오던 것을 허공에서 붙든 모양새 그대로.눈이 내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요술이다." 젊은 사냥꾼의 목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막내가 쇠뇌를 떨어뜨렸다. 쇠붙이가 돌계단에 부딪는 소리가 골짜기에 오래 울렸다. 셋째가 뒷걸음질을 치다 눈에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형님, 저거, 북막 것들 이야기 못 들었소.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달의 힘을 마신다고, 그래서 맹이 씨를 말렸다고 —""닥쳐라."우두머리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 눈이 그녀의 손에 들린 화살과 그녀의 낯을 오갔다. 놀람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서는 것을 운설은 보았다. 사냥꾼이 값을 다시 매기는 눈. 범인 줄 알고 쫓았더니 그보다 큰 것이 나왔을 때, 달아나는 자와 그물을 새로 짜는 자가 갈린다. 이 사내는 뒤쪽이었다.운설은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다섯 개가 화살대를 감아쥐고 있는데, 그 손이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도무지 기억에 없었다. 손바닥 안에서 화살은 아직 파닥거렸다, 잡힌 새처럼. 심장이 두 방망이질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건너온 세 걸음이 너무 멀었다.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겨를을 강은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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