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381 - Chapter 390

442 Chapters

제381화 — 누리가 고른 문

포승이 풀리자 누리 손목 안에서 푸른 못 하나가 움직였다.살 아래 박힌 달 걸쇠가 손등을 향해 밀려왔다. 피가 맺힌 틈으로 쇠끝이 보이자 담우가 누리 팔을 붙들었다.“뽑아야 해.”“놓으십시오.”누리는 팔을 빼려 했으나 명주 쪽으로 손이 끌렸다. 명주의 세 맥도 같은 때 손목으로 몰렸다.운설이 두 사람 사이에 물통을 엎었다. 흐르는 물이 돌바닥을 가르자 걸쇠 움직임이 잠깐 멎었다. 그녀는 누리 손목을 누르지 않고 팔꿈치 위에 넓은 천을 감아 피가 한곳으로 쏠리지 않게 했다.“언제 넣었어?”“제가 넣은 것이 아닙니다. 수뢰에서 물문을 열 때마다 조금씩 살로 들어왔습니다.”처음에는 가시가 박힌 줄 알았다고 했다. 사흘째부터 물문 앞에 서면 손목이 먼저 울렸고, 열흘째에는 자는 동안에도 손이 북쪽을 가리켰다. 관졸은 몸이 일을 익히는 증거라며 웃었다. 누리가 쇠를 빼 달라고 했을 때에는 빼면 고향으로 가는 약길도 함께 끊긴다고 겁을 주었다.“그래서 참았습니까?”“그래서가 아니라, 그때는 그 말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누리는 두 말을 굳이 갈랐다. 두려워서 한 선택과 속아서 한 선택이 같은 자리에 적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뺄 수 있다는 말은 들었고?”누리가 웃었다.“한 달이 끝나면 저절로 나온다고 했습니다.”그 한 달은 이미 지났다. 관졸들은 누리가 약조를 어겼다고 했다. 처음 한 달 뒤 약 쉰 첩을 더 받고 스스로 남았으니 기한도 다시 시작됐다는 말이었다.“약은 실제로 갔습니까?”연도하가 물었다.누리는 품에서 고향 장부를 꺼냈다. 약을 받은 집마다 손가락이나 도장을 찍었다. 죽은 사람 이름 둘에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약이 늦었지만 거짓 짐은 아니었다.“저는 이걸 받고 몸을 내주었습니다.”“몸을 한 달 빌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어?”운설의 물음에 누리는 잠시 침묵했다.“물문을 찾고, 열이 오르면 관에 누워 달 조각 소리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 몸에 제 기억이 갈 수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그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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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화 — 전리품의 법

옛 칙령은 물에 젖어도 글자가 번지지 않았다.기름 먹인 비단 위에 북방 토벌에서 얻은 물건을 적은 문서였다. 삭월 왕인의 조각, 달을 새긴 쇠붙이, 사람 몸에 남은 기운까지 황실 창고에 들인다고 쓰여 있었다.수뢰 관원이 마지막 줄을 읽었다.“전리에서 나온 기운이 사람 몸에 붙었을 때는 그 몸과 함께 거두어 보관한다.”뒤이어 읽힌 조항에는 보관하는 몸에게 하루 두 끼를 주고, 겨울에는 짚을 한 단 더 내린다고 적혀 있었다. 오래 썩지 않는 약재를 다루는 듯한 문장이었다. 담우는 제 손등의 식은 살을 내려다보다가 빈 쇠창살 칸으로 걸어갔다. 문턱 높이와 어깨 너비를 손으로 재더니 돌아왔다.“누우면 발이 밖으로 나옵니다.”“죄인이 편히 자라고 만든 곳이 아니다.”관원의 말에 담우가 물었다.“전리품입니까, 죄인입니까?”관원은 어느 쪽도 고르지 못했다. 고르면 다른 쪽 법을 어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표정이었다.누리가 웃었다.“사람을 창고 어디에 둡니까?”관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회장 한쪽에는 쇠창살이 달린 빈 자리가 다섯 개 있었다.운설은 칙령의 연호를 보았다. 삭월이 무너진 해보다 한 해 앞이었다. 전쟁에서 빼앗았다는 물건을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적어 둔 셈이었다.“먼저 가져가고 나중에 전리라고 불렀군요.”한겸이 문서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비단 속에서 붉은 실 한 올이 나왔다. 황실 창고 문서에 쓰는 노란 실이 아니었다.“북방 진군 전에 만든 임시 칙지요. 병부 창고에서 정식으로 베낀 적이 없소.”“그렇다면 효력이 없다.” 관원이 급히 끼어들었다.“효력이 없는데 이 사람들을 왜 가뒀지?”한겸이 묻자 회장에 있던 수문장 둘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따랐던 것은 황제의 뜻이라기보다 황제의 뜻처럼 보이게 만든 오래된 비단 한 장이었다.“황실의 큰일을 의심하지 마시오.”“날짜가 의심하게 합니다.”관원이 다른 문서를 내놓았다. 운설이 삭월 왕가의 둘째 공주임을 인정하면 옛 왕가 물건을 돌려달라 청할 수 있다는 글이었다. 수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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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3화 — 언니의 왕명

붉은 깃발보다 혈비의 맨손이 먼저 회장에 들어왔다.기병도 갑옷도 문밖에 두었다. 곁에는 사백과 묵할멈, 왕인 상자를 든 무사 셋뿐이었다. 황실 관졸들이 칼을 잡았으나 수뢰 안에서 피를 흘릴 배짱은 없었다.혈비는 운설을 안지 않았다. 명주와 누리의 손목, 담우의 젖은 소매부터 보았다.“늦었다.”“누가 부른 적 없어요.”“그래서 더 늦었지.”혈비의 눈 아래에는 사흘을 말 위에서 보낸 그늘이 있었다. 화령도에서 날아온 서신을 받은 뒤 역참 말을 두 번이나 갈아탔다고 했다. 그러나 운설은 그 먼 길을 고마워할 수 없었다. 혈비가 가져온 문서의 첫 줄에는 사람 이름 대신 삭월 왕가의 소유가 적혀 있었다.사백은 둘 사이를 보고 입을 열지 않았다. 겨울 궁에서라면 누구보다 먼저 혈비 뜻을 받들었을 자가, 지금은 왕인 상자에서 두 걸음 떨어져 섰다. 그 거리만큼 북방 안에서도 답이 갈린 모양이었다.아전이 붉은 공문을 펼쳤다. 월하와 그 조각은 삭월 왕가의 신물이며, 황실이 사람 몸째 거둔 행위는 왕묘를 파헤친 것과 같다고 쓰여 있었다.수뢰 관원이 비웃었다.“망한 왕조가 어느 땅의 법을 세운다는 말이오?”“내 군세가 닿는 땅.”혈비의 짧은 대답에 회장 공기가 굳었다. 기병을 밖에 두고도 그녀 말 뒤에는 북방의 말발굽이 들렸다.운설이 공문을 받아 읽었다.“이 사람들 이름이 없네요.”“왕가 신물을 먼저 돌려받아야 사람도 빼낼 수 있다.”“빼낸 뒤에는요?”“삭월이 지킨다.”“황실이 우리를 내놓지 않으면요?” 담우가 물었다.“물문 밖에 기마 이천이 있다.”혈비가 숨기지 않았다.수뢰 관원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운설은 담우 얼굴이 더 굳는 것을 보았다. 그는 피를 흘리지 않는 몸 때문에 늘 싸움의 까닭으로 불렸다. 이번에도 자기 손목 하나 때문에 이천 기병과 황실 수군이 강을 붉게 만들 수 있었다.“저를 빼내려고 싸우지는 마십시오.”“너 하나 때문이 아니다.”“그러면 더 싫습니다. 모두 때문이라는 말 속에서는 제가 싫다고 해도 멈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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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화 — 세 목소리의 물그릇

첫 물그릇에서는 쓴 약 냄새가 났다.둘째에는 젖은 흙, 셋째에는 녹슨 쇠 냄새가 떠올랐다. 운설은 명주의 피를 한 방울씩 나누고 세 그릇 사이를 빈 사발로 갈랐다.“한꺼번에 말하지 마세요.”명주가 그릇 앞에 앉았다.“제 입을 쓰지 말고, 고를 수 있는 쪽으로 가세요.”이 법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없었다. 물그릇에 떨어진 피가 누구 목소리를 먼저 끌어내는지, 말하지 못한 침묵이 거절인지 두려움인지 운설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릇 뒤에 사람을 하나씩 세웠다. 서련 앞에는 약 냄새를 기억하는 담우가, 노칠 앞에는 일곱째 수레를 기억하는 연도하가, 정무 앞에는 수문장 걸음을 읽을 선우현이 섰다.“제가 잘못 들으면 멈춰 주세요.”운설이 명주에게 말했다.“제가 멈추라고 하지 못하면요?”“그때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요.”명주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한 번 굽혔다. 네 사람 모두 그것을 멈춤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서련은 첫 그릇에서 기침으로 답했다. 노칠의 손톱 긁는 소리는 둘째 물 아래서 났고, 정무는 셋째 사발 가장자리를 일정하게 두드렸다.운설이 첫 그릇에 물었다.“서련, 명주 몸에서 나가고 싶습니까?”수면이 세 번 흔들렸다.“나가면 어디로 가고 싶어요?”“없어지고 싶다.”목소리는 분명했다. 복례를 깨우는 동안 기억이 닳은 서련은 더 오래 남을수록 고명주의 혀와 피를 갉아먹는다고 했다.명주의 손이 무릎을 움켜쥐었다.“당신이 나가면 제 빠른 맥도 없어질 수 있어요.”“그래도 내 이름까지 네 맥으로 만들지 마.”서련의 목소리가 끊긴 뒤 첫 그릇에 가느다란 흰 거품이 돌았다. 명주는 울지 않았다. 대신 빈 사발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없어지는 것 말고 다른 길을 찾으면 기다려 주시겠습니까?”긴 기침이 두 번 났다.“그게 예입니까?”“두 밤.”서련은 자기 소멸을 늦출 값을 정했다. 명주가 살고 싶다는 까닭만으로 영원히 붙들리지는 않겠으나, 이틀 동안은 서로에게 덜 잔인한 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운설은 그 기한을 그릇 옆 젖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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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5화 — 비어 있지 않은 관

관 하나의 무게가 명부와 맞지 않았다.한겸은 무한 관부에서 가져온 저울추를 물바닥에 놓았다. 그는 백도겸 금패를 거슬러 올라오다 두 달 전부터 무한에 머물고 있었다. 고윤의 이름에 닿은 뒤에는 수뢰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살아 있었군.”선우현이 말하자 한겸이 코웃음을 쳤다.“내가 할 말이오. 장례 치르러 간 사람들이 왜 더 늘어서 돌아오지?”한겸은 웃고 있었으나 왼쪽 장화에는 마른 피가 붙어 있었다. 무한에 숨어든 첫날 관부 서고에서 들켜 창문으로 뛰었고, 둘째 날에는 뱃사공으로 가장해 수뢰 식량을 날랐다. 셋째 날부터는 잡혀 온 문서장이로 지하에 묶였다. 발목의 쇠고리를 장부 철사로 끊는 데 스무 날이 들었다.“고윤은 아직 못 보았소. 얼굴을 본 자들은 모두 북쪽 관실로 옮겨졌으니까.”“살아 돌아온 사람은?”운설이 묻자 한겸은 장부를 두드렸다.“글씨만 돌아왔지.”그는 반가운 인사 대신 젖은 장부 세 권을 내밀었다.첫 권에는 죄수, 둘째에는 빚진 약사, 셋째에는 징발된 수문장이 적혀 있었다. 서로 다른 명부의 같은 세 줄에 서련·노칠·정무의 몸 자국이 남아 있었다.“자원했다고 쓰여 있어요.”운설이 읽었다.“뒤에 덧먹한 글이오.”한겸이 종이를 빛에 비췄다. 본래 먹은 누렇게 바랬으나 자원 두 글자만 검었다. 붓끝은 수뢰 안에서 쓰는 짧은 붓과 닮았다.선우현은 자기 옛 인장을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장부를 코 가까이 가져갔다.“덧먹에는 쇠기름 냄새가 있소. 물문 옆에서 썼군.”“검신 인장으로 증언하면 더 빨리 믿을 텐데.”“그 이름을 믿어서 생긴 장부가 이미 많소.”그는 자기가 직접 본 냄새와 획, 종이 눌린 방향만 말하게 했다.한겸은 잠시 선우현을 보다가 금패를 도로 품에 넣었다. 한때라면 저 사내 인장 하나가 무한 관부 문을 모두 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인장이 없어 문 하나를 여는 데 다섯 사람이 서로 다른 증거를 보태야 했다. 느리고 성가셨으나, 누구 하나 쓰러져도 나머지 말이 남았다.“이제야 조사관 흉내를 내는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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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6화 — 관 속의 밥상

죽 냄새가 관 뚜껑보다 먼저 올라왔다.마지막 못을 뽑자 나무판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들렸다. 그 틈에서 더운 김과 삭은 생강 냄새가 새어 나왔다. 한겸이 천을 감은 손으로 뚜껑을 밀었다.관 속에는 마른 사내가 누워 있었다.눈은 감겼고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 손톱만 물이 들고 날 때마다 관 벽을 긁었다. 손목에서 뻗은 가느다란 줄이 관 밑 물레에 감겨 있었다. 흐르는 물이 죽은 팔을 움직여 스무 해 동안 같은 소리를 내게 한 것이다.“노칠.”명주의 입에서 낮은 울음이 터졌다. 둘째 물그릇이 기울며 진흙이 시신 쪽으로 흘렀다. 담우가 자루를 벌렸으나 명주는 손가락을 펴 보였다. 아직 깨지 말라는 뜻이었다.연도하가 시신 발목에 묶인 나무패를 뒤집었다. 약방 일꾼, 이름 없음. 노칠은 제 몸을 찾았지만 그 몸에서는 이름부터 지워져 있었다.“배가 고프겠구나.”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위층에서 내려왔다.회장 난간에 고윤이 서 있었다. 비단 관복도 칼도 없이 잿빛 베옷을 입었고, 센 머리를 한 가닥도 감추지 않았다. 손에는 나무 쟁반을 들었다. 그가 난간 옆 물문을 열자 관실 바닥에서 돌계단이 솟았다.“아버지.”명주의 세 맥이 한꺼번에 멎었다가 돌아왔다.고윤은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표정도,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만 쟁반 위 죽그릇이 흔들리지 않게 양손으로 받쳤다.“먼 길을 왔으니 먹고 이야기하자.”혈비가 칼을 뽑으려 하자 명주가 앞을 막았다.“제가 먼저 가겠습니다.”“저자가 달아나면?”“그러면 제가 보고 고르겠습니다.”고윤이 차린 방에는 여덟 자리가 있었다. 가장 안쪽 높은 자리도, 묶는 쇠고리도 없었다. 둥근 밥상 가운데에는 흰죽이 놓였고 둘레에는 생강 절임, 마른 고기, 쓴 나물, 소금에 삭힌 무가 따로 담겼다.고윤은 맞은편 자리를 빼 주며 말했다.“명주는 죽에 생강이 들어가면 골라냈지. 서련은 약을 먹은 뒤 쓴 나물을 씹어야 속이 가라앉았고, 정무는 밤샘 뒤 짠 고기를 찾았다.”그의 손이 마지막 접시 앞에서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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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7화 — 묻지 않은 목숨

고윤은 딸이 생강 한 점을 골라내던 버릇부터 말했다.명주가 아홉 살 되던 겨울, 열병으로 사흘을 앓고 숨이 끊겼다고 했다. 의원 일곱이 돌아간 뒤에도 고윤은 딸 손을 놓지 못했다. 새벽녘 손목 안에서 아주 가는 물소리를 들었고, 북방 전장에 버려진 월하 그릇을 찾아 죽은 맥에 대었다.첫째 그릇은 명주 심장을 하루 움직였다가 깨졌다. 그 안에 있던 아이 이름은 고윤도 몰랐다. 둘째는 사흘, 셋째는 열흘을 버텼다. 사람들은 고윤의 의술이 딸을 살렸다고 했지만, 명주 몸에는 그때마다 낯선 잠버릇과 말투가 하나씩 남았다.“서련이 들어온 것은 네가 열두 살 때다. 노칠은 열넷, 정무는 열일곱.”“그 사이에도 있었습니까?”명주의 물음에 고윤이 침묵했다.죽은 맥을 거쳐 간 이름 모를 조각이 더 있었다. 머문 지 반나절 만에 사라진 자도, 명주의 눈을 뜨게 하고 제 목소리를 잃은 자도 있었다. 고윤은 기억나는 이름과 버릇을 모두 약첩 뒷면에 적었다고 했다.“이름을 기억하면 빼앗은 것이 없어집니까?”명주는 첫째 그릇을 상 위로 올렸다. 서련에게 그 이름들을 아는지 물었다. 두 이름에는 기침 한 번, 한 이름에는 긴 침묵이 돌아왔다. 노칠은 이름 모를 아이의 특징을 듣자 보름달 노래라고 중얼거렸다. 고윤의 약전에는 없던 말이었다.“아버지가 기억한 것 밖에도 저분들 삶이 있어요.”“그래서 모두 적으려 했다.”“적는 사람만 아는 삶으로 만들었잖아요. 서로 물었다면 저 아이 노래도 남았을 텐데.”고윤의 손이 약첩 뒷면을 더듬었다. 빼곡한 글씨 사이에 비어 있는 자리가 갑자기 커 보였다.“잊는 것보다는 낫다.”“아버지는 늘 둘 중 덜 나쁜 것을 골랐군요.”“네가 죽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었다.”명주는 빈 숟가락으로 죽을 저었다. 한 숟갈도 입에 대지 않았다.“제게는 물어보셨습니까?”“아홉 살 아이에게 죽을지 묻는 아비가 어디 있느냐.”“열두 살에는요? 열넷에는? 열일곱에는?”고윤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딸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뒤에도 처음의 다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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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8화 — 실패한 약전

실패한 약전에는 성공한 처방보다 이름이 많았다.고윤이 내놓은 책은 모두 열두 권이었다. 첫 권에는 명주 몸을 거쳐 간 스물세 사람의 이름이 적혔다. 이름을 모르는 넷은 상처와 말버릇으로 구별했다. 왼뺨에 점이 있던 아이, 잠들기 전 북쪽 노래를 부른 여인.둘째 권부터는 맥을 갈라 놓으려다 죽은 사람, 몸을 되찾고도 제 기억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 조각만 사라지고 병든 몸에 홀로 남은 사람의 기록이 이어졌다. 성공이라 붉게 둘러친 줄은 하나도 없었다.“이걸 왜 이제 내놓습니까?” 한겸이 물었다.“황실이 가져가면 태운다.”“그대 손에 있으면 사람을 더 눕히고.”고윤은 책을 덮지 않았다. 그 비난까지 기록 곁에 남겨 두려는 듯했다.그가 제안한 것은 백련제 수문을 이용한 한밤의 분리였다. 해마다 달이 가장 낮아지는 밤, 세 강의 물이 잠깐 서로 등을 진다. 그 틈에 명주의 네 맥을 각기 다른 물그릇으로 이끌면 하룻밤 동안 몸 밖에서도 목소리가 버틸 수 있다고 했다.“하룻밤 뒤에는?” 명주가 물었다.“각자 돌아갈 몸이 있으면 간다. 없으면 물에 닳거나, 다시 네게 돌아온다.”“돌아오지 않겠다고 고르면요?”“그릇을 닫으면 된다.”“그릇 안에서는 얼마나 버팁니까?”“달이 지기 전까지.”명주는 세 물그릇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한밤뿐이었고, 몸이 없는 자에게는 사라짐과 되돌아감밖에 없었다. 길이 둘 있다고 해서 어느 쪽도 강요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새 몸을 찾는 길은요?”“그날 밤에는 없다.”“그럼 없는 길도 적어 주세요. 마치 둘이면 충분한 것처럼 말하지 말고.”고윤은 약전 가장자리에 딸의 말을 받아 적었다.서련에게는 없어질 길이 될 수 있었다. 노칠에게는 관 속 몸으로 돌아갈 길, 정무에게는 명주 곁에 남을지 다시 고를 길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고윤이 장담할 수 없었다.운설은 약전 여섯째 권을 펼쳤다. 같은 분리법을 쓴 흔적이 있었고 결과 칸은 비어 있었다.“비어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도망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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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9화 — 죽을 자리

빈 관 안에는 사람 대신 따뜻한 물이 차 있었다.선우현과 연도하는 고윤이 사라진 틈에 북쪽 관실로 내려갔다. 계단은 일곱째 관 아래에서 시작되어 물문 톱니 뒤로 이어졌다. 선우현은 벽에 밴 기름 냄새로 길을 찾았고, 연도하는 설로상단 수레못 자국으로 갈림길을 골랐다.막다른 방 한가운데 새 관이 놓여 있었다. 겉면에는 고윤의 생년과 관직, 딸 이름까지 적혔다. 죽은 날만 비어 있었다.관 속 물에 손을 넣자 사람 체온만큼 따뜻했다. 바닥에는 여덟 줄의 은실이 박혀 있었고, 모두 관 가장자리에서 심장 자리로 모였다.“자기가 받으려는 거군.”연도하가 왼손으로 은실 하나를 당겼다. 수뢰 전체에서 쇠울림이 났다.고윤의 약전은 명주 몸에서 세 목소리만 떼는 처방이 아니었다. 흩어진 월하의 흐름을 모두 자기 몸에 받아 넣고, 빈 관과 함께 가장 깊은 물문으로 가라앉으려는 순서였다. 딸에게서 낯선 목소리를 빼고 자신도 죽으면, 그가 저지른 일을 자기 몸 하나로 갚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관 머리맡에는 마른 생강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명주가 어릴 적 골라내던 것을 고윤이 몰래 모아 두었다는 듯 오래 말라 있었다. 연도하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죽기 전까지 아비 노릇을 하려는 모양이오.”“딸이 원하는 아비 노릇인지는 묻지 않았지.”은실 아래 작은 글씨에는 고명주는 깨어날 것이라 적혀 있었다. 서련과 노칠과 정무가 어떻게 되는지는 없었다. 고윤은 마지막까지 딸의 생사만 성공과 실패의 자로 삼았다.“명주에게 알려야 하오.” 선우현이 말했다.“지금 알리면 저 늙은이가 사라질 거요.”연도하는 관 뒤 벽을 살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갈 좁은 물길이 이미 열려 있었다.“먼저 퇴로를 막아야 하오. 산 사람 붙든 다음에 딸을 부릅시다.”“또 누군가 모르는 동안 일을 끝내자는 말이오?”연도하의 턱이 굳었다.“알고 있소. 그래서 이번에는 살리려고 하는 거요.”“그대가 일곱째 수레를 보내던 밤에도 스물두 수레를 살린다고 했지.”말이 차갑게 부딪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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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0화 — 다섯 갈래 발자국

포승이 끊어질 때 누리 손목의 쇠도 함께 울었다.명주는 담우의 짧은 칼을 빌려 매듭부터 잘랐다. 관졸 둘이 달려왔으나 혈비가 문턱을 막았다. 기병을 부르지도, 왕명을 내리지도 않았다. 칼집째 든 검으로 두 사람 발만 걸어 넘어뜨렸다.“어디로 가려는 것이냐.”혈비의 물음에 명주가 잘린 포승을 바닥에 놓았다.“아버지가 죽을 자리로요.”선우현에게서 빈 관 이야기를 들은 뒤 명주는 울지도 고윤을 찾지도 않았다. 먼저 누리를 풀었다. 고윤이 여덟 흐름을 자기 몸에 받으려면 누리 손목의 조각도 필요했다. 누리를 감옥에 둔 채 백련제로 가면, 결국 누군가 그를 끌고 올 터였다.“나는 안 갈 수도 있습니다.” 누리가 말했다.“알아요.”“그럼 왜 풉니까?”“안 가는 것도 밖에서 골라야 하니까요.”누리는 손목에 감았던 천을 천천히 풀었다. 푸른 쇠끝이 피딱지 아래에서 북쪽을 향했다. 그는 그것을 뽑지 않고 새 천으로 단단히 감았다.“갑니다. 조각을 주러 가는 건 아닙니다.”“저도 아버지를 살리러 가는 건 아닙니다.”“죽게 두겠다는 말입니까?”“그것도 아직 고르지 않았습니다.”명주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용서할지, 살려 둘지, 다시 볼지 어느 하나도 지금 정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죽게 두어야 하고 사랑하면 살려야 한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길에서 마음이 바뀌면 서로 말합시다.”“먼저 묻고요.”두 사람은 손을 맞잡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이 빨라지면 다른 사람이 걸음을 늦췄다.둘의 말은 차가웠으나 나란히 문을 나섰다.고윤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주는 그의 곁을 지나쳤다. 고윤이 딸 어깨를 잡으려 하자 서련의 기침이 먼저 터졌고, 정무가 명주 발을 멈춰 세웠다. 명주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굽혔다.세 목소리가 물러난 뒤 그녀는 스스로 돌아보았다.“제 뒤를 따라오세요.”“명주야.”“앞에서 끌고 가지도 말고, 몰래 먼저 가 있지도 마세요.”고윤은 뻗었던 손을 내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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