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391 - Chapter 400

442 Chapters

제391화 — 거절도 답이다

첫 답은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 거절이었다.진눈의 전서에는 세 줄뿐이었다.나는 백련제로 가지 않는다.내 숨을 다시 물에 맡기지 않는다.거절한 나를 비겁하다 쓰지 마라.운설은 마지막 줄 아래에 수결했다. 고치지도 설득하는 말을 보태지도 않았다. 고윤은 여덟 흐름 가운데 하나가 빠지면 분리 의식을 열 수 없다고 했으나, 운설은 진눈의 자리를 빈 채로 두었다.고윤은 진눈이 머무는 골짜기까지 말을 보내겠다고 했다. 혈비도 왕가 전령이라면 해 뜨기 전 데려올 수 있다고 거들었다. 운설은 두 사람의 말을 진눈 전서 뒤에 그대로 적었다.“왜 적느냐?” 혈비가 물었다.“이 사람이 거절한 뒤에도 누가 데려오려 했는지 보여 주려고요.”혈비는 입을 다물었다. 왕명을 내리기도 전에 그 뜻이 한 사람의 거절 옆에 기록되었다. 고윤은 전령을 부르던 손을 내렸다.“오지 않는 자 몫까지 위험해진다.” 고윤이 말했다.“그래서 거절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어요.”“딸이 죽어도 같은 말을 하겠느냐.”명주가 아버지를 돌아보았다.“제 목숨으로 저분을 겁주지 마세요.”둘째 답은 석잔촌에서 온 젖은 종이였다. 타간은 공동 우물의 열병 환자 셋이 아직 물을 받아야 하므로 떠날 수 없다고 썼다. 대신 고장 난 걸쇠를 녹인 날의 우물물 한 항아리를 보냈다. 운설이 사흘 동안 함께 맞춘 약 냄새가 물에 남아 있었다.항아리를 메고 온 소녀는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의 누이였다. 타간이 마을을 떠나도 좋으냐 묻자 세 집이 서로 다른 답을 했다고 전했다. 한 집은 백련제로 가라 했고, 한 집은 우물 곁을 지켜 달라 했으며, 마지막 집은 타간이 직접 고르라 했다.“그래서 무엇을 골랐대?” 누리가 물었다.“오늘 물을 길었습니다. 내일은 아직 모르겠대요.”타간의 답은 영원한 거절도 충성도 아니었다. 하루치 물을 다 길은 사람의 오늘뿐이었다.더운돌의 답에는 값이 적혔다. 금도 약도 아니었다.살아 돌아오면 내 식솔 앞에서 내가 겁먹었다고 말해 주시오.그는 백련제 물길을 안다고 큰소리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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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 오지 않은 이들의 자리

백련제에 놓인 자리 절반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고윤은 수문 둘레에 그은 여덟 고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여리와 마르간과 누리만 제 몸으로 왔다. 운설은 넷째 고리에 타간의 우물물 항아리를 놓고, 다섯째에는 묵할멈의 젖은 종이를 펼쳤다.각 고리에는 사람 하나의 맥을 재도록 은침이 세워져 있었다. 몸이 없는 고리의 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윤은 그 모습을 보이며 대리물이 실패하면 명주 심장이 먼저 찢어진다고 경고했다.“멈출 때는 언제입니까?” 선우현이 물었다.“셋째 종 전이다.”“그 뒤에는?”“흐름이 스스로 길을 찾는다.”운설은 셋째 종을 맡을 사람으로 고윤을 두지 않았다. 명주에게 북채를 주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면 담우가 대신 치되, 명주가 눈을 한 번 감으면 즉시 멈추기로 했다.“사람 몸과 물건은 다르다.”“저 물건을 누가 어떤 뜻으로 보냈는지가 남아 있어요.”“수문은 뜻으로 돌지 않는다.”“그럼 먼저 돌려 보고 말하세요.”운설은 진눈의 빈 고리 앞에 섰다. 전서만으로는 물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내려와 짧은 뼈피리를 떨어뜨렸다. 진눈이 월하의 숨을 처음 토해 냈던 날 물었던 피리였다.피리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나는 가지 않는다. 내 숨이 갔던 자리만 보낸다.고윤이 피리를 집으려 하자 명주가 먼저 손으로 막았다.“그분이 보내지 않은 몸까지 부르지 마세요.”운설은 피리를 물그릇 위에 걸쳤다. 불지 않았는데도 물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낮은 숨소리가 났다.고윤은 숨소리의 길이를 재려 피리 구멍 하나를 손가락으로 막았다. 소리가 높아지자 여리가 낫등으로 그의 손을 쳤다.“진눈이 보내지 않은 숨을 만들지 마.”“길이를 맞춰야 한다.”“맞지 않는다는 답을 들고 온 거다.”진눈의 은침은 끝내 서지 않았다. 대신 옆 고리의 물이 그 빈 박자마다 잠깐 쉬었다. 빠진 숨이 다른 흐름을 늦춰, 오히려 서로 부딪치지 않게 했다.더운돌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아내와 누이가 낡은 장갑 한 짝을 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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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 흑요가 겨눈 사람

흑요의 칼끝은 담우 목 한 치 앞에서 멎었다.노파는 비어 있던 여덟째 고리의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옷은 강물에 젖지 않았고, 쥔 칼에는 녹슨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담우가 고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으므로 칼이 명주에게 가려면 그의 목부터 지나야 했다.“비켜라.”“싫습니다.”“네 몸에는 피도 흐르지 않는다.”“그래서 덜 아플 거라 생각하십니까?”담우의 목울대가 칼끝에 닿았다.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을 몸이었지만 살은 갈라지고 아픔은 남았다. 흑요는 그 사실을 아는 듯 더 밀지 않았다.“내가 당신을 막을 몸으로 보입니까?”담우가 물었다.“부러뜨리기 쉬운 몸으로 보인다.”“다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 몸에 무엇을 넣고 뺄지 저보다 먼저 골랐죠.”그는 맥을 끊던 날 제 손으로 누른 혈자리들을 짚었다. 살기 위해 한 선택이었지만, 이후 사람들은 그를 이미 죽은 것처럼 다뤘다. 명주가 제 안의 세 사람과 함께 살지 떠날지를 묻는 동안만큼은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둘 수 없었다.“제가 명주를 아껴서만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저 아이가 묻지도 못하고 죽으면, 다음에는 제 차례가 다시 옵니다.”명주가 담우의 등을 보았다. 구해 주겠다는 말보다 함께 위험해질 까닭을 솔직히 밝힌 말이 더 단단했다.“저 아이가 살아 있으면 걸쇠가 닫힌다.”흑요가 명주를 턱으로 가리켰다. 명주 안의 네 맥이 백련제 중심에 모이면 흩어진 달 조각이 서로를 찾는다. 황실도 삭월도 그 힘을 다시 차지하려 할 것이며, 결국 조각을 품은 사람들은 또 사냥당한다는 말이었다.“그래서 명주를 죽이면 끝납니까?” 운설이 물었다.“걸쇠 하나는 부서진다.”“사람 하나도요.”“나는 그 값을 안다.”혈비가 한 걸음 나섰다. 흑요의 칼이 담우를 베는 순간 목을 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담우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비키지 않았는데 대신 베지 마십시오.”“네 목이 잘린 뒤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잘리기 전에 했습니다.”혈비는 이를 악물고 멈췄다. 왕명을 벗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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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 소금길의 값

통행패 뒷면에는 설로상단의 소금길이 새겨져 있었다.연도하가 백련제 문지기에게 내민 동패는 고윤의 것과 한 쌍이었다. 그것이 있어야 노칠의 관과 세 물그릇을 안쪽 물길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상단 우두머리 셋이 패의 뒷면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저 길을 넘겼습니까?”가장 늙은 수레꾼이 물었다.연도하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일곱째 수레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윤 상인들에게 북쪽 소금길 절반을 넘겼다. 길만 준다고 적었지만 그 길에는 역참 열둘, 창고 여섯, 겨울마다 소금을 나르는 식솔 백여 명의 밥줄이 붙어 있었다.“언제 말하려 했습니까?”“백련제가 끝난 뒤.”“그때는 이미 우리 수레에 다른 깃발이 달리겠군요.”소금길 역참을 맡은 자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왔다. 첫째 역참의 노인은 고윤 쪽 상인이 벌써 창고 자물쇠를 바꿨다고 했다. 넷째 역참의 자매는 길세를 두 배로 내라는 문서를 받았다. 여섯째 창고에서는 설로 사람 셋이 쫓겨나 강변에서 밤을 지냈다.연도하는 양도문이 백련제 뒤에나 쓰일 줄 알았다. 고윤 상인들은 먹이 냄새를 맡은 겨울 늑대처럼 먼저 길에 들어와 있었다.“내 이름으로 보낸 명이 있으면 따르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그러려면 우리한테 길을 넘겼다고 먼저 말했어야죠.”젊은 수레꾼이 허리에서 상단패를 풀어 땅에 놓았다. 그 하나를 따라 패가 다섯 개 더 놓였다.연도하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굽은 채 떨렸다. 그는 왼손으로 패를 더 세게 쥐었다.“이걸 얻지 못하면 관을 옮길 수 없었소.”“그래서 우리 길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옮겼습니까?”“되찾을 생각이었소.”“일곱째 수레도 되찾을 생각이었겠지요.”수레꾼의 말이 연도하를 찔렀다. 그가 스물두 수레를 지킨 밤에도, 남은 사람은 나중에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번에는 소금길 사람들을 잃을 셈이 없었다. 그러나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먼저 남의 것을 내주었다.고윤은 다툼을 기다리지 못하고 동패를 달라 손을 내밀었다.“문이 닫히기 전에 써야 한다.”운설이 그 손을 막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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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 왕이 벗어 둔 깃발

붉은 깃발 아래의 논두렁이 먼저 잠겼다.노광이 바깥 수문 하나를 닫자 백련제 아래 마을로 물이 역류했다. 삭월 기병이 둑을 타고 공격하면 황실 수군을 밀어낼 수 있었으나, 말발굽이 둑을 무너뜨리는 순간 겨울 보리밭과 집 서른 채가 물에 들 터였다.혈비는 언덕 위에서 수군 진을 내려다보았다. 기병 이천이 그녀 손짓 하나를 기다렸다. 황실 쪽 활은 이미 당겨져 있었다.“전하, 지금 치면 해 지기 전에 물문을 얻습니다.”사백이 말했으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둑 아래에서 백성들이 물동이와 삽을 들고 무너진 논두렁을 막고 있었다. 어느 나라 깃발도 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기다리면 백련제 문이 닫힙니다.”“치면 저 집들이 닫힌다.”혈비는 말에서 내렸다. 붉은 왕포 자락이 진흙에 잠겼다. 기병들이 술렁였다. 왕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물러남으로 읽힐 수 있었다.혈비는 허리에 찬 왕인을 풀어 사백에게 던졌다.“이천은 여기 남아 둑을 막는다.”“전하는요?”“스무 명만 데리고 들어간다.”“황실 진 안에 왕인이 없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왕으로 들어가지 않겠다.”사백의 얼굴이 굳었다. 왕인이 없는 혈비가 붙잡히면 삭월은 황실에 항의할 이름조차 잃는다. 반대로 왕인을 들고 들어가면 백련제 안의 모든 선택이 두 나라 싸움으로 바뀐다.“저에게 왕명을 내리십시오.”“왕명 없이도 둑을 막을 수 있느냐?”“할 수 있습니다.”“그럼 해라.”혈비는 붉은 깃발까지 뽑아 사백 발 앞에 놓았다. 스무 명에게도 창과 활을 두고 짧은 칼만 품게 했다.황실 수군이 다가왔다. 지휘관은 혈비를 알아보고 무릎을 꿇어야 할지 활을 쏘아야 할지 머뭇거렸다.“삭월왕이 황실 수문을 범하러 왔는가?”“혈비라는 사람이 동생을 만나러 왔다.”“뒤의 무사들은?”“길에서 나와 함께 젖은 자들이다.”“왕인이 없으면 그 말을 누가 보증하지?”혈비가 빈 허리를 보였다.“보증 없이 들여보내라. 못 믿겠으면 나만 묶어라.”지휘관은 실제로 밧줄을 가져왔다. 혈비는 두 손을 내밀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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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 서로 다른 박자

백련제의 쇠톱니가 서로 다른 여덟 박동을 씹었다.첫째 고리의 여리는 두 번 빠르고 한 번 늦게 낫등을 울렸다. 마르간의 물그릇은 빌린 만큼만 내어 주겠다는 듯 한 치를 넘지 않았다. 누리 손목의 걸쇠는 물로 들어가려 할 때마다 그가 천을 조여 막았다.몸 없이 도착한 답들은 더 제멋대로였다. 진눈의 피리는 세 숨마다 한 번 쉬었고, 타간의 항아리에서는 환자 셋을 알리는 돌이 굴렀다. 더운돌의 장갑은 물을 먹을수록 무거워졌다. 묵할멈의 젖은 종이와 흑요의 칼은 어느 박자에도 맞지 않았다.“이래서는 가운데 물문이 깨진다.” 고윤이 외쳤다.“맞추지 마세요.” 명주가 북채를 들었다.“네 몸이 먼저 견디지 못한다.”“제가 치는 종에만 멈추세요.”명주는 첫 종을 울렸다. 세 물그릇에서 목소리가 동시에 솟으려 하자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굽혔다. 서련이 먼저 기침을 거두고, 정무가 뒤따랐다. 노칠은 관 쪽으로 물살을 밀었으나 연도하가 일곱째 수레패를 관 위에 얹자 잠깐 길을 늦췄다.운설은 중심 고리로 들어갔다. 맨발이 물에 닿자 여덟 흐름이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 흩어진 조각들은 오래전 몸을 기억했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백련제의 어긋난 박자를 한숨에 맞출 수 있었다.왼쪽 발목에는 마르간의 빌린 물이 감겼고 오른쪽 무릎에는 더운돌의 떨림이 닿았다. 진눈의 빈 숨이 목을 조일 때마다 타간의 돌 셋이 물레를 한 칸 늦췄다. 물건만 온 답도 운설 살에 닿으면 사람의 버릇을 되찾았다.고윤은 중심 고리 밖에 쇳가루를 뿌려 경계를 만들었다.“그 선을 넘으면 네 몸이 그들을 부른다.”“이미 부르고 있어요.”“그러니 한 발도 움직이지 마라.”“그 말은 내가 고를게요.”운설은 일부러 뒤꿈치를 반 치 물렸다. 여덟 흐름이 따라오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녀가 움직임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을 물에도 먼저 가르쳤다.여리의 낫이 바로 앞에 놓였다.“손을 펴면 자른다.”“알아.”“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무서우면 멈춰 달라고 할게.”여리가 낫자루를 더 세게 쥐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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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 아버지의 관

빈 관 빗장이 안에서 걸렸다.고윤이 가슴 위 동패를 누르자 여덟 은실 가운데 넷이 솟았다. 첫째는 서련의 그릇, 둘째는 노칠의 관, 셋째는 정무의 그릇, 넷째는 명주의 본래 맥으로 이어졌다.“아버지, 열어 주세요.”명주가 관을 두드렸다.“나가 있거라.”“제 몸에 손대면서 저더러 나가라고요?”고윤은 답하지 않았다. 관 안의 물이 붉어지고 명주의 무릎이 꺾였다. 서련의 기침이 고윤 가슴으로 옮겨 가고, 노칠의 손톱 소리가 그의 오른손에서 났다. 정무의 오래된 칼상처가 옆구리에 검게 벌어졌다.명주가 손에 쥔 북채를 놓쳤다. 두 번째 종 뒤 멈춤을 알릴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담우가 북채를 주워 대신 치려 하자 명주가 손목을 붙잡았다.“아직 치지 마세요.”“저러다 당신 맥까지 가져갑니다.”“그래서 제가 고를 겁니다.”선우현은 지팡이 끝을 관 틈에 넣었다. 두 손으로 눌렀으나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전의 힘이 있었다면 한 번에 갈랐을 쇠테였다. 손바닥 굳은살이 터져 나무가 붉게 물들었다.연도하가 상단 쇠돈을 틈에 박았고 한겸은 관 밑 물레축을 거꾸로 돌렸다. 묵할멈은 노칠 시신의 굽은 손가락을 은실 가까이에 대어 물살을 다른 쪽으로 흔들었다. 누구의 손도 관 하나를 열 만큼 강하지 않았으나, 고윤이 당기는 속도를 조금씩 늦췄다.“쓸데없는 짓이다.”관 안에서 고윤이 말했다.“쓸모는 우리가 정하오.”선우현이 피 묻은 지팡이를 다시 밀었다. 쇠테 한쪽에서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명주가 아버지의 젖은 눈을 보았다.혈비가 칼을 빼 들었다.“비켜라. 내가 가른다.”“은실까지 베이면 안 되오.”“그럼 저자를 죽게 둘 셈이냐?”선우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관 안의 사내를 살리려면 딸 몸으로 가는 흐름을 다시 잇거나, 네 맥을 어디로 보낼지 먼저 골라야 했다.“명주에게 묻읍시다.”운설의 말에 혈비가 돌아섰다.“저 아이가 지금 제대로 고를 수 있다고 보느냐?”“제대로 고른다는 게 뭔데요?”“아비가 눈앞에서 죽고 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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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 죽어 주지 마세요

명주가 관을 두드린 것은 한 번뿐이었다.“내 허락 없이 죽어 주지 말아요.”끊어진 넷째 은실이 물속에서 뱀처럼 휘었다. 고윤은 관 안에서 동패를 거듭 눌렀으나 명주의 본래 맥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서련과 노칠과 정무의 세 줄이 그의 가슴을 조였다.“이것이 너를 살리는 길이다.”“누가 그렇게 정했습니까?”“네 몸은 네 사람을 오래 견디지 못해.”“알아요.”“오늘 놓치면 다시는 분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그것도 들었습니다.”“들었다면 왜—”“아버지는 늘 끝까지만 말합니다. 죽는다, 산다, 다시는 못 한다. 그 사이에 제가 견딜 하루와 저분들이 고를 한밤은 말하지 않아요.”명주는 물 위에 뜬 약전 한 장을 집었다. 고윤이 실패라 적은 이름 옆에 작은 글이 남아 있었다. 분리 뒤 사흘 동안 혼자 밥을 먹었다, 닷새째 누이를 찾았다, 여드레째 강을 건넜다는 기록이었다.“실패한 사람도 그 뒤를 살았어요.”“결국 죽었다.”“결국은 모두 죽습니다. 그 말로 가운데 날들을 지우지 마세요.”고윤이 더는 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명주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뜻은 흐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모르는 것을 숨기지 못하도록 하나씩 되짚었다. 서련이 사라진 뒤 자기 빠른 맥이 멎을 수 있다는 것, 노칠이 죽은 몸으로 돌아가면 함께 썩을 수 있다는 것, 정무가 남으면 자기가 잠든 동안 다시 몸을 빌릴 수 있다는 것.“그런데도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냐?”“오늘 밤은요.”서련의 그릇이 거칠게 흔들렸다.“나를 붙잡지 마.”명주는 그릇 쪽으로 돌아섰다.“붙잡지 않을게요. 당신이 없어진 뒤 제 몸이 어떻게 되는지 두려워서, 아버지 방식으로 급히 밀어내지 않겠다는 거예요.”“내게 남은 두 밤이 끝났다.”“알아요. 지금 나가겠다면 그 길을 열겠습니다. 아버지 몸으로는 보내지 않고요.”명주는 서련의 물그릇을 중심 고리 바깥에 놓았다. 그릇이 깨지면 물은 강으로 흘러가고 목소리는 닳을 터였다. 서련은 한참 기침하다가 오늘은 깨지 않겠다고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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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 한 사람의 명령

노광은 물 높이를 손가락 마디로 세었다.첫 마디에는 아랫마을 논이 잠기고, 둘째에는 수뢰 지붕이 닿았다. 셋째 마디가 차면 백련제 안의 열여덟 관이 모두 떠올라 황도 수로로 흘러갔다.“문을 열어라!” 혈비가 누각을 향해 외쳤다.“삭월왕의 명은 황실 물문에 닿지 않는다.”“나는 왕인을 두고 왔다.”“그러니 더 들을 까닭이 없지.”노광의 왼쪽 귀는 뿌리부터 잘려 있었다. 스무 해 전 전쟁 때 삭월 군은 북쪽 수문을 닫으라 했고, 황실 군은 남쪽을 열라 했다. 무한 관부는 논을 지키라 했으며, 노광의 아비는 집부터 구하자고 했다.젊은 수문장이던 노광은 네 명을 모두 들었다. 북쪽을 반쯤 닫고 남쪽을 반쯤 열었다. 물은 가운데 마을로 몰렸다. 그의 아비와 아내, 형제 둘이 지붕 위에서 손을 흔들다 사라졌다.그 뒤 네 곳에서는 모두 노광 탓이 아니라고 했다. 삭월 군은 황실 명을 섞은 탓이라 했고, 황실은 왕조 잔당의 말을 들은 탓이라 했다. 관부는 수문장이 제 판단을 보탰다고 했으며, 살아남은 친족들은 너무 많은 말을 듣느라 늦었다고 했다.용서처럼 보이는 말들이 한데 모여 노광 한 사람에게 모든 잘못을 남겼다. 그는 차라리 죽인 자의 이름이 뚜렷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미워할 곳도, 벌할 곳도 생긴다고 믿었다.“그날 명령이 하나였다면 우리 집은 잠기지 않았다.”한겸이 누각 아래 장부를 펼쳤다.“어느 명이었으면 살았다는 말이오?”노광의 손이 물레 위에서 멎었다.“무엇?”“삭월 명대로 북문을 닫으면 위 감옥이 잠겼소. 황실 명대로 남문을 열면 아래 논이 떠내려갔지. 관부 말대로 논을 지키면 그대 집이 잠겼고. 하나만 따르면 누가 살았소?”“적어도 누가 죽였는지는 분명했을 것이다.”노광이 원한 것은 모두를 살리는 명령보다 실패했을 때 책임질 이름 하나였다. 그는 그 이름이 없어서 스무 해 동안 자기만 탓했고, 이제는 어떤 강도 한 사람 뜻 밖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려 했다.한겸은 젖은 장부를 누각 계단에 펼쳤다. 그날 죽은 집 이름 옆에는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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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 강이 돌아선 밤

세 강이 바다를 등지고 돌아섰다.백련제 밖의 물이 둑을 거슬러 올라왔다. 기병들이 쌓은 돌무더기가 안쪽으로 무너지고, 황실 수군의 배는 뱃머리부터 뒤집혔다. 장터에 세운 소금길 양도문이 물에 젖어도 사람들은 떼지 않았다. 문짝째 높은 나무로 옮겼다.안에서는 열여덟 물기둥이 운설을 향해 휘었다.진눈의 뼈피리가 먼저 중심 고리로 날아왔다. 여리가 낫자루로 쳐 냈으나 붉은 실 한 올이 운설 손목에 감겼다. 타간의 항아리는 깨지지 않은 채 물 위를 미끄러졌다. 돌 셋이 항아리 안에서 미친 듯 부딪혔다.“받아들이면 멎는다!” 고윤이 외쳤다.운설도 알고 있었다. 손바닥을 한 번 펴면 흩어진 흐름은 익숙한 몸으로 돌아왔다. 물문은 박자를 찾고 명주의 세 맥도, 누리 손목의 걸쇠도 잠잠해질 터였다.여리가 운설 앞에서 낫을 들었다.“손 펴지 마.”“내가 안 받으면 다칠 사람이 생겨.”“받아도 다칠 사람이 있어.”피리가 운설 어깨를 때렸다. 진눈의 숨이 목 안으로 파고들려 하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실을 풀었다. 피리를 빈 고리 쪽으로 던졌다. 오지 않겠다는 사람의 숨은 돌아갈 몸을 찾아서는 안 되었다.마르간은 자기 물그릇을 안고 출구로 걸었다. 셋째 종 전에 떠나겠다는 조건은 지났지만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쇠문이 닫힌 것을 본 그는 그릇을 깨려 했다.“잠깐!” 연도하가 수레 받침목을 문 아래 끼웠다. “몸을 빌리진 않겠소. 나갈 틈만 함께 만듭시다.”마르간은 그를 믿지 않았으나 받침목 반대편을 발로 눌렀다. 누리와 담우가 어깨를 보태자 문이 손바닥 너비만큼 들렸다. 마르간은 먼저 빠져나가지 않고 누리를 보았다.“네가 먼저 가라.”“제 손목이 문에 걸립니다.”누리의 푸른 쇠가 뼈만큼 솟아 있었다. 담우가 자르자 했으나 누리는 고개를 저었다.“손목은 자르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그럼 쇠를 부러뜨리자.”흑요가 고리 안에 놓았던 칼을 집었다. 누리 허락을 기다린 뒤 칼등으로 푸른 못을 내리쳤다. 첫 번에는 금만 갔고, 둘째에 쇠끝이 반으로 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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