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401 - Chapter 410

442 Chapters

제401화 — 받지 않는 원류

강물은 운설의 발등을 덮고도 멈추지 않았다.첫 계단, 둘째 계단을 거슬러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열여덟 물기둥은 등과 어깨를 두드리며 오래 비운 자리를 찾아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만 펴면 끝날 일이었다.운설은 오른손을 가슴에 붙였다.물은 손가락 틈마다 오래 잊은 장면을 밀어 넣었다. 여리가 처음 침을 놓던 겨울, 진눈이 숨을 토하던 밤, 타간이 형편없는 국을 내놓고 눈치를 보던 부엌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조각을 되받으면 힘뿐 아니라 그들이 힘을 품고 살아온 날까지 자기 기억처럼 뒤섞일 터였다.명주가 운설의 소매를 붙잡았다.“제가 아버지와 다를 게 없어질까 봐 무섭습니까?”“나도 그래.”“그럼 서로 보고 있읍시다.”운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하는 사람과 치료받는 사람의 자리를 정하지 않고, 먼저 같은 물속에 선 두 사람으로 약조했다.“여리,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야?”여리는 낫을 회수해 붉은 실 한 가닥을 가리켰다.“한 줄은 끊을 수 있어. 두 줄째에는 낫이 부러져.”“한 줄만 해.”“그다음은?”“그다음 사람에게 물을게.”여리의 낫이 진눈의 피리에 감긴 실을 잘랐다. 피리는 중심 고리에서 튕겨 나가 빈 수로로 떨어졌다. 물을 삼키면서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마르간은 출구 밖에서 물그릇을 안고 있었다. 떠나겠다고 골랐으나, 문틈에 몸을 반쯤 돌려 물었다.“내 그릇 하나만 어디에 놓으면 되오?”“가장 낮은 홈을 찾아 주세요. 내려가는 물만 받게.”그는 돌아오지 않고 바깥 둑을 따라 달렸다. 자기 몸까지 빌리지 않아도 물목을 셀 수 있었다.누리는 손목에서 부러진 쇠끝을 천으로 감쌌다.“저는 나왔습니다. 다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들어오지 마.”“밖에서 할 일은요?”“네가 정해.”누리는 한겸에게 도끼를 빌렸다. 잠긴 쇠문을 부수는 대신 물이 빠져나갈 장터 돌담을 허물기 시작했다. 제 몸을 내놓지 않고도 다른 몸이 나갈 틈을 만들었다.돌담 너머 집주인이 달려와 도끼 자루를 붙잡았다. 그 벽은 죽은 남편과 스무 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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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화 — 검 없는 수문

“남문을 열면 우리 집이 잠겨!”사공 셋이 같은 물레를 붙들고 서로 다른 쪽으로 당겼다. 북문 죄수들은 감옥 물부터 빼라 했고, 관졸은 황실 곡식 창고를 지켜야 한다며 칼을 뽑았다. 노광의 한 명령이 무너진 자리에 수십 목소리가 한꺼번에 솟았다.남문 사공의 집에는 늙은 어머니가, 북문 죄수의 배에는 여섯 달 품삯이 실려 있었다. 관졸도 곡식 자루 밑에 제 누이 혼수감을 숨겨 두었다. 누구도 문 하나만 말하지 않았다. 물길마다 밥과 사람과 오래 감춘 부끄러움이 달려 나왔다.칼을 든 관졸이 죄수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선우현은 칼날을 맨손으로 막지 않았다. 빈 칼집을 두 사람 발 사이에 던졌다. 걸려 넘어진 관졸의 손에서 칼이 빠졌고, 죄수는 그것을 주워 들었다가 물레 옆에 내려놓았다.“지금 싸우면 내 배부터 잠긴다.”그 한마디에 셋이 같은 물레에서 손을 뗐다.선우현은 높은 단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가장 낮은 수문 앞 진흙에 서서 빈 칼집을 내려놓았다.“그 전쟁 때 나는 북쪽 물길을 잘못 읽었소.”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이 그를 보았다. 검신이라는 이름을 알아본 자도 있었으나 그는 그 이름을 받지 않았다.“그때 나는 빠른 길 하나를 골라 사람들을 몰았고, 늦게 걷는 수레 셋을 버렸소. 오늘 어느 문이 옳다고 말할 자격이 없소.”“그러면 왜 앞에 섰소?” 늙은 사공이 물었다.“내가 틀렸던 물길부터 보여 주려고.”그는 지팡이로 바닥 물때를 가리켰다. 가장 깨끗해 보이는 남문은 두 해 전 보수한 돌이 속에서 갈라져 있었다. 한꺼번에 열면 아랫마을로 문짝이 쓸려 갔다.“북문은?”“감옥 물을 빼지만 강 가운데 배를 삼킬 거요.”“동문은 곡식 창고로 간다.”“그 창고를 비울지 지킬지는 내 몫이 아니오.”선우현은 각 문이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잠기게 하는지만 말했다. 사공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으나 이제 서로의 집과 배 이름을 물었다.운설이 그의 터진 손바닥을 잡아 물문 그늘로 끌었다.“또 혼자 들어가려고 했죠.”“아직 안 들어갔소.”“얼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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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3화 — 비운 창고

부러진 수문이 선우현을 덮치기 전에 검은 들보가 물살을 가로막았다.연도하가 설로상단 수레에서 떼어 온 받침목이었다. 수레꾼 여섯이 밧줄을 걸고 들보를 당겼다. 그들은 전날 연도하의 깃발을 내린 사람들이었다.“어째서 돌아왔소?”연도하가 묻자 늙은 수레꾼이 진흙을 뱉었다.“연 주인한테 돌아온 게 아닙니다. 우리 소금길이 잠기게 생겨서 왔지.”젊은 수레꾼은 더 매서웠다.“살려 드린 뒤에도 다시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습니다.”“알고 있소.”“모르는 얼굴입니다.”연도하는 허리에 감긴 빈 띠를 내려다보았다. 설로상단 패를 떼어 낸 자리가 빗물보다 검었다. 도움을 받는 손이 용서를 받은 손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변명 없이 받아들였다.그들은 연도하의 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둘은 물속으로 들어가 선우현 겨드랑이에 줄을 걸고, 넷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렸다. 부러진 문이 다시 내려오기 직전 선우현 몸이 진흙 위로 끌려 나왔다.선우현이 물을 토했다. 운설이 젖은 옷깃을 찢어 그의 목을 받쳤고, 늙은 수레꾼은 가라앉은 숨이 다시 올라오는지 가슴께에 귀를 댔다.“검신도 물은 못 베는군.”“검이 있었어도 못 벴소.”선우현은 한 번 더 기침했다.“사람이 끌어내야 하는 물이었으니.”운설이 달려왔지만 곧 멈췄다. 선우현은 기침하며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살아 돌아오라고 부탁한 뒤, 그는 살아 있는 몸으로 먼저 답했다.“이어 하기로 했는데.”피 섞인 웃음에 운설이 그의 뺨을 한 번 움켜쥐었다.“한 번 더 이러면 안 이어 줘요.”“그건 곤란하군.”그녀는 화난 입술로 그의 이마만 세게 누르고 돌아섰다. 아직 세 강이 성 안으로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서문 물을 받으려면 강가 창고 세 채를 비워야 했다. 첫째에는 겨울 열병 약재, 둘째에는 소금과 곡식, 셋째에는 연도하가 북방에서 모은 비단과 은이 쌓여 있었다.“약재부터 옮겨!” 연도하가 외쳤다.수레꾼들이 움직이지 않았다.“어디로 옮길지부터 정해야 합니다.”“높은 언덕이면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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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4화 — 여덟 사람이 낸 길

둘째 관을 연 사람은 연도하가 아니었다.창고지기 연화가 봉함 끈을 잘랐다. 자기 창고 벽 안에 있던 사람이므로 자기가 먼저 보겠다고 했다. 관 속에는 몸이 없었다. 마른 뼈피리 하나가 물살에 흔들려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진눈의 것이 아니었다. 구멍이 하나 더 많았고, 피리 안쪽에 아홉이 새겨져 있었다.고윤의 손이 먼저 떨렸다.“초기의 그릇 기록에는 아홉이 있었다. 하나가 실패한 뒤 여덟로 고쳤지.”한겸이 피리와 그의 사이에 칼집을 눕혔다.“실패했다는 말부터 누가 정했소?”연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관 뚜껑을 닫았다. 새끼줄을 자기 허리에 한 바퀴 감고 나머지를 손목에 묶었다.“오늘 물이 잦기 전에는 누구도 이걸 가져가지 못합니다. 아홉째 비밀보다 지금 숨 쉬는 여덟이 먼저예요.”“여덟 조각이라면서요.” 연화가 물었다.운설은 피리를 집지 않았다.“지금은 여덟 사람 길부터 엽시다.”아홉째 물건은 빈 관에 둔 채 연화가 지켰다. 새 비밀을 쫓느라 눈앞의 몸들을 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여리는 낫이 부러진 뒤 자기 은침을 수로 벽에 꽂았다. 물이 침을 타고 한 방울씩 떨어졌다. 빠르게 쏟지 못했지만 어느 몸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길이었다.진눈의 피리는 사람 숨 대신 수문이 들고 나는 바람을 받았다. 붉은 실은 끊겼고, 피리에서 나오는 음은 세 박자마다 쉬었다. 그 빈 박자마다 북문 물살이 빠져나갔다.타간의 우물 항아리는 깨지지 않았다. 석잔촌의 환자 셋을 알리는 돌이 큰 물레 이를 받쳤다. 물레가 완전히 닫히지 않자 강물 일부가 마을 쪽이 아닌 논의 빈 도랑으로 흘렀다.누리는 바깥 돌담을 허문 뒤 제 손목에서 흐른 피로 새 길을 표시했다. 조각을 내주지는 않았다. 피가 번진 돌만 사람들이 어느 담을 더 허물지 고르는 표가 되었다.마르간은 가장 낮은 물목에 자기 그릇을 놓고 한 식경마다 위치를 옮겼다. 빌려준 것은 그릇 하나뿐이라는 약조를 지키면서, 그 하나로 세 수로의 높이를 차례로 낮췄다.더운돌의 아내와 누이는 젖은 장갑을 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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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5화 — 깨진 그릇의 처방

서련의 손자국은 약재 홈을 따라 걸었다.하얀 물이 마른 당귀를 적시고, 두 번째 홈의 생강은 건드리지 않았다. 세 번째에서 이름 모를 검은 씨앗 세 알을 밀어냈다. 운설은 뒤를 따라가되 손을 대지 않았다.“서련을 다시 부를 수 있습니까?” 고윤이 물었다.명주의 얼굴이 굳었다.“부르지 마세요.”“처방이 끝나기 전에 물이 마르면—”“저분은 갔습니다.”고윤은 월하의 기억을 모으면 목소리 한 자락쯤 되살릴 수 있다고 했다. 명주는 첫째 물그릇의 깨진 조각을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섰다.“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 말로 몇 명을 붙들었습니까?”그의 입이 다물렸다.운설은 서련의 흰 물이 고른 약재만 따로 놓았다. 당귀 반 뿌리, 겨울쑥 한 줌, 검은 씨앗 세 알, 소금 묻은 대추씨 하나였다. 순서를 바꾸자 손자국이 흐려졌다. 다시 원래대로 놓으니 물이 다음 홈으로 흘렀다.고윤은 검은 씨앗을 빼야 한다고 했다. 맥을 느리게 만드는 독이라며 손을 뻗었다. 명주가 먼저 씨앗 하나를 혀끝에 올렸다. 쓰고 찬 즙이 번지자 담우가 놀라 그녀 턱을 붙잡았다.명주는 뱉지 않았다. 잠시 뒤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의 수를 셌다.“가득 찬 맥에는 독이 맞아요. 그런데 제 맥은 너무 비었어요. 세 알이 한꺼번에 뛰려는 것을 늦춰 줄 겁니다.”운설은 남은 두 알을 약재 곁에 돌려놓았다. 살아남는 처방은 늘 강하게 만드는 쪽으로만 가지 않았다.명주가 붓을 들었다.“누구 이름으로 적습니까?” 한겸이 물었다.“서련.”“그대가 순서를 보고 있소.”“저는 베끼는 사람입니다.”한겸이 그 아래에 순서를 물음이라 적고 수결했다. 운설은 손자국을 따름, 담우는 숨을 셈이라고 남겼다. 끝까지 씨앗을 빼려 한 고윤에게도 명주가 붓을 내밀었다.“아버지가 틀린 자리도 있어야 이 처방이 다음 사람을 속이지 않아요.”고윤은 오래 머뭇거리다 검은 씨를 버리려 함이라고 썼다. 붓끝의 먹이 지나치게 번졌으나 아무도 고쳐 주지 않았다.명주는 첫 줄에 서련이 남긴 처방, 고명주가 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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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6화 — 돌아가려는 노칠

흑수촌 세 글자가 물때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관은 북서쪽 수로 벽에 닿은 채 더 돌아가지 못했다. 그 너머 길은 백련제 역류에 잠겨 있었다. 노칠의 그림자가 관 뚜껑 위에 쪼그려 앉았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고향 이름을 한 획씩 긁을 때마다 명주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고윤이 관 옆에 무릎을 꿇었다.“몸으로 돌아가면 걸을 수 있다. 썩은 살은 월하수로 메우고, 뼈는—”“또 고치는군.”노칠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젖은 나무 사이에서 울렸다.“내가 어디로 갈지 묻기도 전에.”고윤의 입술이 멎었다. 명주는 아버지와 관 사이로 들어가 앉았다. 약기운이 아직 퍼지지 않아 손등의 핏줄이 가늘게 떨렸다.“돌아가고 싶은 건 몸입니까, 이름입니까?”“둘 다면 좋겠지.”노칠은 제 시신의 움푹 꺼진 뺨을 내려다보았다.“하지만 이 몸을 억지로 깨우면 노분이가 오라비를 알아보겠느냐. 물 냄새와 약 냄새만 품은 것을 끌고 가서, 또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그는 몸을 태워 재는 흑수촌 우물가에 묻고, 시신에 밴 물은 따로 항아리에 받아 달라고 했다. 이름패에는 병인도, 그릇도 아닌 노분의 오라비 노칠이라고 새겨 달라 했다.명주가 눈을 감았다. 노칠의 맥은 서련이 떠난 뒤 가장 깊은 자리에서 자기 심장을 받치고 있었다. 그것마저 빠지면 가슴이 얼마나 비게 될지 알 수 없었다.담우가 그녀 뒤에 앉아 손목을 받쳤다.“지금 놓으면 네가 쓰러질 수도 있어.”“붙들면 저분이 또 쓰러져 있어.”“이번에는 네가 허락한 뒤에 기다려도 돼.”명주는 노칠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세 번 고르고 물었다.“제가 보내 드리는 동안 제 맥이 멎으면, 돌아오시겠습니까?”노칠의 그림자가 관에서 내려왔다.“그 물음은 비겁하구나.”“압니다.”“그래서 마음에 든다. 네가 살고 싶다는 뜻이니.”그는 명주의 가슴께에 손을 얹지 않고 한 뼘 앞에서 멈췄다.“그래도 돌아오지는 않겠다.”명주가 울면서 웃었다.“그럼 제가 살아 볼게요.”고윤은 두 사람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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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7화 — 남겠다는 정무

명주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싫습니다.”정무의 그림자가 빈 물그릇을 든 채 멈췄다. 남겠다는 사람이 거절당할 줄은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나를 내보내면 네 맥이 버티지 못한다.”“그래서 싫어요. 제 목숨값처럼 남는 거라면.”“나는 빚이 아니다.”“그럼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정무는 곧 대답하지 못했다. 스무 해 전 고윤이 자신의 기억을 명주 몸에 밀어 넣던 순간부터 그는 누구에게도 머무는 까닭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몸이 잠들면 눈을 떴고, 독이 들어오면 먼저 토하게 했으며, 명주가 울 때는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운설이 젖은 장부를 덮었다.“치료 기록에는 적지 않을게요. 두 사람이 서로 정한 말만 적겠습니다.”명주는 담우의 어깨를 짚고 바로 앉았다. 정무와 눈높이를 맞추자 한 몸에서 갈라져 나온 두 그림자가 물 위에 나란히 비쳤다.“얼마 동안 남고 싶습니까?”“네 새 맥이 자리를 찾을 때까지.”“그게 언제인데요?”“다음 봄.”“봄이 늦으면요?”“늦은 봄까지.”명주가 눈썹을 세웠다.“그런 식으로 늘리지 마세요. 첫 매화가 지는 날까지.”정무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좋다.”운설은 종이 위에 날짜부터 적었다. 명주는 몸을 빌려줄 조건을 하나씩 말했다. 잠들었을 때 불이 나거나 물에 빠졌을 때만 정무가 팔다리를 쓸 것. 깨어 있을 때는 먼저 이름을 부를 것. 음식을 먹을 때 쓴 것을 몰래 버리지 말 것. 담우와 둘이 있을 때는 아무리 위급해도 눈을 감고 세 숨을 기다릴 것.담우가 헛기침했다. 정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세 숨 사이에 사람이 죽으면?”“그때는 두 숨.” 담우가 끼어들었다.명주가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정무도 조건을 냈다. 명주가 하루 두 끼를 거르면 몸을 빌려 밥을 먹일 것. 가슴이 아픈데 괜찮다고 세 번 거짓말하면 운설에게 알릴 것. 자신을 귀신이라 부르는 자 앞에서는 명주가 허락해야만 나타날 것. 떠나는 날에는 붙잡지 말 것.마지막 말을 적던 붓이 멈췄다.“떠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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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8화 — 아비의 빈손

담우의 맥을 확인할 틈도 없이 동쪽 제방이 터졌다.바닥이 기울고 셋째 관이 벽으로 미끄러졌다. 명주가 물그릇을 감싸 안은 순간, 고윤이 딸의 허리를 낚아채 높은 돌계단으로 밀었다. 검은 물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한겸이 사람들을 북문으로 빼냈다. 연화와 수레꾼들은 노칠의 관을 밧줄로 묶었다. 운설은 담우를 부축하면서도 방금 뛴 맥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살아 있어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게 몸을 눕혀요.”담우가 명주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제 발로 일어났다. 물 건너편에서 고윤이 무너진 창고 쪽을 보고 있었다. 거짓 벽 안, 두 관이 있던 자리 아래로 낡은 장부함 하나가 드러났다.“아버지!”고윤은 딸부터 보았다. 전에는 장부에 적힌 이름을 먼저 셌을 눈이었다. 그가 물살을 건너와 명주의 어깨를 붙잡았다.“계단 위로 가라.”“같이 가요.”“저것은 내가 가져와야 한다.”“또 저를 두고요?”고윤의 손이 떨렸다. 장부함에는 월하 그릇으로 만든 사람들의 처음 이름과 옮겨진 몸, 죽은 날이 적혀 있었다. 물에 잠기면 죄가 사라지는 대신 사람도 다시 번호가 되었다.그는 명주를 더 높은 계단으로 올렸다. 이번에는 강제로 밀지 않고 그녀 두 발이 돌 위에 놓이는 것을 확인했다.“네가 먼저다.”말을 마친 고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명주도 따라 내려가려 했다. 가슴 안에서 정무가 두 번 두드렸다. 몸을 빌리겠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풀린 밧줄을 허리에 묶고 다른 끝을 물로 던졌다.“아버지! 잡아요!”고윤은 장부함에 닿았으나 무너진 들보가 발목을 눌렀다. 손에 잡힌 것은 함의 쇠고리 하나뿐이었다. 그는 끌어당기다가 잠시 멈췄다. 장부를 놓으면 몸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명주는 밧줄을 제 몸에 한 번 더 감았다. 담우가 기어와 뒤에서 함께 잡았다. 하루 한 번밖에 뛰지 않는 그의 맥이 목까지 거칠게 올라왔다.“놓으라고 해.” 담우가 말했다. “장부든 목숨이든, 이번에는 네가 정해.”명주는 물속 고윤을 향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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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9화 — 흑요가 놓친 목

흑요의 칼은 고윤의 목 한 치 앞에서 멈췄다.제방이 터진 혼란 속에서도 칼날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고윤은 쇠고랑 찬 손을 무릎 위에 놓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호위도 약전도 없는 죄수의 목이었다.“지금이면 아무도 막지 못해.” 고윤이 말했다.“막히길 바라는 얼굴이군.”“끝나길 바라는 얼굴이다.”흑요의 칼끝이 살을 눌렀다. 가는 피 한 줄이 목울대를 타고 흘렀다. 한겸은 뒤늦게 칼을 뽑았으나 운설이 손을 들었다. 말리러 달려들면 흑요의 선택까지 빼앗게 될 터였다.흑요는 고윤 때문에 이름을 잃은 사람들을 세었다. 검은 고리 안에서 죽은 여섯, 조각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강에 든 둘, 살았으나 자기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 그 가운데에는 그녀가 이름조차 묻지 않고 베어 준 사람도 있었다.“네가 죽으면 노칠은 누가 흑수촌까지 옮겼는지 말하지 못한다.”“장부에 있을 것이다.”“장부에는 길이 없다.”흑요가 칼을 더 눌렀다.“열여덟 이름이 어느 몸을 거쳤는지도 네 입에 있다. 그 입을 살려 두면 또 누군가를 속일 테고, 베면 죽은 자를 다시 잃는다.”고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어느 쪽이든 네가 정해라.”그 말에 흑요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을 넘겨 자기 끝을 남의 손에 맡기는 버릇이었다.“내가 왜 네 마지막 의원이 되어야 하지?”칼이 움직였다.목 대신 고윤의 관복 깃이 갈라졌다. 월하 약전의 금패를 묶은 붉은 끈이 잘려 돌바닥에 떨어졌다. 흑요는 칼끝으로 금패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죽을 때까지 기다려라. 이름을 전부 뱉고, 네 발로 그 길을 다시 걷고, 네가 살았다는 것이 벌이 된 뒤에.”고윤의 맨목에서 피가 한 방울 더 흘렀다. 흑요는 소매를 찢어 상처를 누르라 던졌다. 살리기 위한 손길조차 베듯 거칠었다.“오해하지 마라. 피가 모자라 말 못 한다고 핑계 댈까 봐서다.”혈비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왔다. 흑요를 벌하라는 신하들의 눈이 멀리서 따라왔다. 죄수에게 칼을 댄 자를 그대로 두면 왕법이 무너진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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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0화 — 명주의 맥

붉은 열매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운설은 그것을 곧장 약솥에 넣지 않았다. 칼끝으로 껍질을 가르자 속살 대신 가는 흰 실이 나왔다. 한쪽은 서련의 그릇 조각에 붙고, 다른 쪽은 명주의 손목을 향해 흔들렸다.“맥을 만드는 약이군.” 고윤이 멀리서 말했다.명주가 그를 보았다.“또 먼저 이름 붙이셨네요.”고윤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말을 고쳤다.“그렇게 쓰려 했던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성공한 적은 없었다.”운설은 흰 실을 명주 손목에 대지 않고 물그릇에 띄웠다. 실은 새 맥을 만들려 달려들지 않았다. 물 위에서 서련이 남긴 처방 순서대로 당귀, 겨울쑥, 검은 씨앗 곁을 돌아다녔다. 끊어진 자리끼리 꿰매는 길을 보여 주었다.“몸이 먼저 고르게 해야 해요.”명주는 자기 손으로 약재를 하나씩 넣었다. 운설이 불의 세기만 알려 주고, 고윤은 세 걸음 밖에서 기억나는 잘못을 말했다. 너무 달이면 실이 녹았고, 덜 달이면 독이 남았다. 명주는 두 번 약을 버렸다. 세 번째 솥에서만 붉은 열매가 천천히 벌어졌다.담우는 곁에 누워 손목을 내놓았다. 그의 하루 한 번 맥은 이미 지나갔으나 명주가 불안할 때마다 손가락을 얹을 자리가 되어 주었다.“뛰지 않는데 왜 자꾸 만져요?”“안 뛰어도 여기 있잖아.”그가 웃자 명주의 굳은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노칠의 관은 북서 수로 앞에 놓였다. 연화가 고향으로 보낼 수레를 마련했고, 수레꾼들은 누구 명도 받지 않고 물항아리를 새 짚으로 감쌌다. 관이 문턱을 넘을 때 명주의 가슴에서 차가운 맥 하나가 완전히 빠져나갔다.그녀는 관 뒤를 쫓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바닥에 이마를 댔다.“노분의 오라비 노칠.”이름을 세 번 부르자 관 안에서 나무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수레바퀴가 북서쪽 진흙길로 굴러갔다.정무는 약조대로 남았다. 명주가 약을 마시기 전 가슴 안에서 두 번 두드리고, 빌린 맥을 한 치 뒤로 물렸다. 서련이 있던 자리와 노칠이 떠난 자리는 비어 있었다. 누구도 그 빈곳에 새 이름을 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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