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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객경(客卿)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3 17:54:54

"공자가 남궁가에 드세요."

남궁완은 조건을 길게 꾸미지 않았다. "객경(客卿)으로요. 필적을 다 대조할 때까지. 세가의 우산 아래 있어야 재감정도 격이 서고, 실성 문서를 지우는 동안 공자 신변도 삽니다. 그리고 —" 부채 끝이 마당의 공기를 한 번 짚었다. "수장고의 서신들은 별저 밖으로 못 나가요. 조부님의 필적도, 십팔 년 전 세가들 사이에 오간 문서들도 다요. 대조하려면 눈이 종이가 있는 곳으로 와야지요."

"눈이라니." 혈비가 말을 받았다.

"수결을 본 눈이요." 남궁완의 시선이 선우현에게 갔다. "화살이 닿기 전에, 공자는 그 종이를 보고 있었어요. 강안에서 제 눈으로 봤습니다. 물 위의 누구보다 오래, 마지막 장을 들여다보고 있던 걸."

혈비가 방에서 책을 가져오게 했다. 공훈록이 마루 위에 펼쳐졌다. 낯 검은 화살이 뚫고 지나간 자리는 하나였는데, 그 하나가 정확했다. 마지막 장, 명(命)의 끝 — 수결이 앉았던 자리가 엄지 굵기로 뜯겨 나가 있었다. 앞뒤 장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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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95. 식은 차

    간수문은 김이 다 가라앉은 차를 그제야 한 모금 마셨다."앉아라. 서서 듣기에는 긴 이야기다."차 따르는 소리 하나 없는 방이었다. 늙은이는 새 잔에 차를 부어 그녀 앞에 밀어 놓고, 김이 오르는 것을 잠자코 두었다. 마시라는 말도 없었다. 식기를 기다려 마시는 제 법을 손님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다만 잔 하나로 이 자리의 시간을 정해 두는 것이다. 이 차가 식는 동안만 이야기한다는 듯이.운설은 앉았다. 등을 돌렸다는 늙은이의 말을 그녀는 나중에 몇 번이고 뒤집어 보게 된다. 서른둘의 감찰이 등을 돌린 값으로 아이 하나가 살았고, 그 감찰은 마흔 해를 법 안에서 늙어 당주가 되었다. 후회하는 낯도 자랑하는 낯도 없이, 장부에 적어 두고 이자를 세어 온 낯. 지금 그녀 앞의 낯이 그것이었다.등 뒤의 문밖에 한겸이 서 있고, 담 밖에 남궁가의 가마가 서 있다는 것을 늙은이도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그것이 이 자리의 법도였다. 서로의 패를 상 위에 반쯤만 올려놓는 법도."그 밤에 나는 서른둘의 감찰이었다." 간수문이 말했다. 회고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문서를 읽듯 골랐다. "명을 받고 올라갔고, 명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명에 없는 것도 보았지. 불타는 장막 사이에서 네 아비가 강보 하나를 안고 나오는 것을. 나는 등을 돌렸다. 못 본 것으로 하는 값으로, 네 아비와 약조 하나를 맺었다.""어떤 약조입니까.""명을 내린 손을 찾는 것. 찾아서, 법의 이름으로 베는 것." 늙은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법을 맡고, 네 아비는 —" 거기서 말이 접혔다. 접는 솜씨가 하도 익어서, 접힌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뒤는 네 아비의 몫이니 네 아비에게 들어라.""십팔 년이 걸렸군요.""명은 종이에 남고, 종이는 봉인에 숨고, 봉인은 세 당주를 갈아치우며 버텼다." 간수문의 눈이 처음으로 늙은이답게 피로해 보였다. "물 위에서 열두 줄이 읽히던 날 — 그날이 내가 십팔 년을 기다린 날이다. 저들의 붓이 저들을 베는 날. 한데 마지막 장이

  • 설야팔부 (雪夜八部)   94. 절

    감찰이 대문을 나가고 한 식경 만에 되돌아왔을 때, 별저의 저녁은 아직 상도 물리기 전이었다."객의를 뵙겠습니다." 젊은 감찰은 그렇게 청했다. 명부에 성명 미상이라 적어 놓고 나간 입으로.후원 약방에서 마주 선 그는, 운설을 보자 먼저 두 손을 모으고 큰절을 올렸다. 마룻바닥에 이마가 닿는 절이었다. 배운 격식은 어디에도 없고, 몸이 아는 것만 있는. 서툴고, 길었다."재작년 겨울, 청하 의막에서 침 세 대로 누이를 살리셨습니다." 몸을 일으킨 감찰의 낯이 붉었다. "한겸입니다. 누이가 서신마다 적습니다. 그 은인을 다시 뵈면 못다 한 절을 올려 달라고. 그리고 —"그가 소매에서 봉서를 꺼내 약상 위에 놓았다. 두 줄의 해서가 등잔 밑에 드러났다. 재감정의 노고를 치하한다. 돌아오는 길에, 남궁가의 객의를 모셔 오너라."수배 방을 뭉갠 것도, 오늘 명부에 성명 미상이라 적은 것도 접니다." 한겸은 숨기지 않았다. 숨길 수 있는 자리를 이미 다 지나온 사람의 말이었다. "한데 당주 어른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알면서 하필 저를 보내셨고, 알면서 모셔 오라 적으셨습니다. 이 종이를 두고 도망치시면 — 제가 어찌 되는지는 상관없습니다만, 담이 무너집니다. 재감정도, 남궁가도, 객경 어른의 이름도요."운설은 젊은 감찰을 오래 보았다. 침 세 대의 밤을 그녀는 셈에 넣은 적도 없었다. 앓는 아이가 있어 침을 놓았을 뿐인. 그 밤이 이 사람의 안에서 두 해를 자라, 붓을 꺾고 명부를 굽히고 이제 제 관복의 목숨줄까지 걸고 있었다. 갚으라고 준 적 없는 것을 갚겠다고 온 사람 앞에서, 그녀는 빚이라는 말의 무서움을 새로 배웠다.정당으로 자리가 옮겨지고, 봉서가 상 가운데 놓였다. 늙은 당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두고 말들이 오갔다. 물을 세우는 힘이다. 아버지와 맺은 옛 약조다. 대월의 손이 닿기 전에 제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 어느 셈도 종이 두 줄을 다 덮지 못했다."가겠습니다." 운설이 말했다."안 되오." 선우현의 답이 반 박자도 늦지 않았

  • 설야팔부 (雪夜八部)   93. 명부 (한겸)

    한겸은 제 손으로 그린 얼굴이 저잣거리에 붙던 날을 기억했다.키를 반 자 늘였다. 흉터를 오른뺨으로 옮겼다. 눈매를 사납게, 콧대를 낮게. 화공에게 넘길 인상서를 적는 붓이 밤새 떨렸고, 다 적은 뒤에는 뒷간에서 속엣것을 게웠다. 스물여섯 해를 법이 좋아 산 사람의 생애 첫 죄였다. 촌에서 감찰이 났다고 잔치까지 벌였던 어미가 알면 몸져누울 일이고, 알 리 없는 누이는 지난달에도 서신을 보내왔다. 오라버니, 그 은인을 다시 뵈면 절을 올려 줘. 그때 못다 한 절이 아직 내 몫으로 남아 있어.침 세 대에 누이의 열이 내리던 밤, 한겸은 마룻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생각했었다. 이 빚은 평생 못 갚는다. 그 생각이 맞았다. 빚은 갚아지는 대신 자라서, 이제 그의 붓을 쥐고 흔들었다.집법당 안의 공기도 요즘은 낯설었다. 열두 줄이 물 위에서 읽힌 뒤로 늙은 감찰들은 말수가 줄었고, 젊은 축은 둘만 모이면 목소리를 낮췄다. 십팔 년 공훈의 임자들이 하루아침에 도살 장부의 임자가 된 판국에, 당주 어른만이 여느 때와 같았다. 여느 때와 같다는 것이 제일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한겸도 이제는 알 만큼 물이 들어 있었다.남궁가의 별저 대문 앞에서 한겸은 관복을 여몄다. 하루 일찍 온 것은 제 뜻이었다. 가는눈과 함께 오면 눈이 둘이다. 혼자면 하나다. 못 보는 것은 하나인 눈이 더 잘 못 본다."재감정 감찰, 집법당의 한겸입니다."안내를 받아 정당에 들자, 그 사람이 있었다.검신 선우현. 지난겨울 사흘 밤낮을 서툴게 밟다가 눈밭에서 놓친 사람. 물 위의 단에서 열두 줄을 읽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남궁가의 객경 자리에 앉아, 저를 밟던 신참 감찰을 알아보는 눈으로 조용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겸은 절을 올렸다. 여전히 서툰 절이었다. 몸에 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실성 재감정의 문목(問目)입니다." 그는 준비해 온 종이를 폈다. "형식이니 양해하십시오. 하나. 공자는 금년이 무슨 해인지 아십니까.""아오.""둘. 공자가 물 위에서 읽은 것이 무엇인지

  • 설야팔부 (雪夜八部)   92. 진맥

    "의원님, 비밀 하나만요."연지가 약방 문지방에 앉아 목소리를 낮춘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사시 낀 왼눈이 저 혼자 문밖을 살폈다. "아씨가 달포째 통 못 주무세요. 새벽마다 등이 켜져 있어요. 어의를 부르자니 본가에 말이 들어가고, 그냥 두자니 낯이 하루하루 종이 같아지고. 의원님이 몰래 좀 봐 주시면 안 돼요?""아씨가 청하신 겁니까.""아뇨." 연지는 당당했다. "제가 청하는 거예요. 시중드는 사람 눈이 제일 먼저 알아요."운설은 잠깐 망설였다. 어제 수장고에서 이 여인이 미워지지 않게 된 것과, 그저께 마당에서 이 여인이 놓은 가시들은 별개의 장부였다. 한데 의녀의 장부는 그 둘보다 오래된 것이라, 아픈 사람이 있다는 말 앞에서 결국 이겼다. 백로진의 약방에서도 그랬다. 밉든 곱든, 언 손은 언 손이었다.안채의 남궁완은 서안 앞에 앉아 있다가, 시비 뒤로 들어서는 객의를 보고 붓을 놓았다. 연지를 보는 눈이 반쯤은 나무람이었고 반쯤은 체념이었다."쫓겨나는 법을 모르는 아이라." 남궁완이 말했다. "의원까지 끌고 올 줄은 몰랐네요.""진맥만 하겠습니다. 싫으시면 이대로 나가고요."여인은 한참 운설을 보다가, 소매를 걷어 왼 손목을 서안 위에 얹었다. 항복이라기보다 셈이 빠른 것이었다. 실랑이가 길어지면 소문이 나고, 소문은 불면보다 값이 비쌌다.맥은 가늘고 급했다. 심화가 오래 눌러앉은 맥. 몸은 거짓말을 못 한다. 달포가 아니었다. 계절을 넘긴 불면이었다. 진맥하는 손끝 아래, 약지의 가락지 자국이 파인 채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반지를 뺀 자리는 살이 아물어도 자국이 남는다. 오래 낀 것일수록 깊게."언제부터 못 주무십니까.""의원이 맥으로 알아냈을 텐데요.""맥은 겨울이라 합니다."남궁완은 창 쪽으로 잠깐 눈을 돌렸다. "그이가 인수를 눈밭에 버렸다는 말이 세가에 닿은 게 겨울이었어요. 실성했다는 말과 같이 왔죠. 가문은 그날로 파혼 서신을 보냈고요." 목소리는 남의 집 제사 이야기를 하듯 골랐다. "반지는 돌려보내라 했을

  • 설야팔부 (雪夜八部)   91. 대월(待月)

    수장고의 창은 좁고 높아서, 빛이 칼처럼 비껴 들었다.서명 없는 서신 열여섯 장이 긴 탁자 위에 날짜 순으로 벌여졌다. 이른 것은 그 밤보다 반년을 앞섰고, 마지막 것은 보름을 앞섰다. 선우현이 한 장 한 장 획을 짚어 나갔다. 붓을 대는 첫 자리. 꺾는 버릇. 마지막 획이 종이를 누르며 끝나는 모양."같은 손이오." 그가 말했다. "물 위에서 본 수결과. 열여섯 장 전부."운설은 탁자 끝에서 그 종이들을 보았다. 글은 격조 높은 문어였다. 북쪽의 이리가 이빨을 간다. 눈이 녹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한다. 정병이 모이고 있다는 풍문이 있다 — 풍문이라는 말을 쓴 입이, 반년 뒤 그 풍문을 열두 줄의 공훈으로 바꾸었다. 십팔 년 전 온 중원이 믿은 침략설이 이런 담 안, 이런 서안 위로 배달되어 온 광경을, 운설은 벌여진 열여섯 장에서 보았다. 남궁가에 열여섯 장이면 다른 세가에는 몇 장이 갔을까."조부님은 만년에 달을 못 보셨어요." 남궁완이 말했다. 부채는 접힌 채 탁자에 놓여 있었다. "달이 뜨면 방문을 닫으셨죠. 다들 노환이라 했어요. 저는 열다섯에 이 서신들을 찾았고요. 태우라 명하신 걸 몸소 태우지 못하고 수장고 바닥에 감추신 것도, 노환이라면 노환이겠죠.""가문 회의는 이걸 압니까." 운설이 물었다."알면 제가 여기 서 있겠어요?" 여인은 처음으로 웃었는데, 웃음에 온기가 없었다. "회의는 명예를 씻으라고 절 보냈어요. 저는 — 씻어지는지 알고 싶어서 왔고요. 씻어지는 죄인지, 씻는 시늉만 해야 하는 죄인지."빛이 반 뼘을 옮겨 가는 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수장고 바닥에서 가문의 죄를 주워 들고, 십 년을 혼자 품고 산 셈이었다. 명예를 씻으러 온 사람은 부채를 든 영애였고, 지금 탁자 앞에 선 사람은 그 종이를 십 년 진 사람이었다.그 말투에는 부채도 격도 없었다. 운설은 이 여인이 처음으로 미워지지 않는 것이 불편했다. 미워할 수 있는 동안은 셈이 간단했다.대조는 한나절을 갔다. 선우현과 남궁완이 탁자

  • 설야팔부 (雪夜八部)   90. 담 안

    남궁가의 별저는 담부터 달랐다.무두장이 골목의 흙담이 아니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회벽이 물길을 낀 후원까지 둘렀고, 문마다 창을 든 가병이 섰다. 객경은 정당 곁의 상방에 들었다. 객의는 후원 행랑채, 약방 곁의 골방이었다. 짐을 푸는 데는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골방의 창으로는 상방의 처마 끝이 겨우 보였다."의원님은 이쪽이래요." 안내하던 시비가 말했다. 왼눈이 살짝 바깥을 보는, 호기심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이였다. "저는 연지예요. 아씨 시중을 들어요. 저기, 의원님 — 침으로 사람을 재운다는 게 참말이에요?""재우는 게 아니라 아픈 걸 멎게 하는 겁니다.""물 위를 걸었다는 것도요?"운설은 대답 대신 짐을 마저 풀었다. 연지는 쫓겨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아이처럼 문지방에 앉아 한참을 재잘대다 갔다. 담 안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궁금해하는 눈이 사시 낀 시비 하나라는 사실이, 우습고 조금 시렸다.오후에는 별저의 약방을 안내받았다. 남궁가의 객의라는 신분은 종이 한 장이었으나, 약방만은 진짜였다. 마른 약재가 벽을 채우고, 저울과 절구가 손 닿는 자리에 있었다. 낯선 담 안에서 처음으로 숨이 놓이는 자리였다. 운설은 당귀 한 뿌리를 집어 손끝으로 부러뜨렸다. 똑, 하고 마른 것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백로진의 약방에서 눈 오는 밤마다 듣던 소리. 세상이 몇 번을 뒤집혀도 잘 마른 약재는 같은 소리로 울었다.저녁상은 따로 나왔다. 객경의 상은 정당에, 객의의 상은 행랑에. 법도에 흠잡을 데가 없어서 흠을 잡을 수도 없었다.상을 물리고 후원을 지나다, 운설은 정당의 열린 문 안쪽을 보았다. 남궁완이 찻상 앞에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만으로 물 온도를 아는, 자라면서 몸에 밴 손놀림. 맞은편의 선우현이 무어라 짧게 답하자 여인이 웃었다."오라버니는 그때도 우전(雨前)만 드셨지요. 곡우 지난 잎은 입에 대지도 않고.""소저의 기억이 밝소.""제사가 그해 곡우 다음이었으니까요. 백부님이 오라버니더러 검보(劍譜)를 외워 보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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