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61 - Chapter 70

270 Chapters

61. 전서구

남행 사흘째 저녁, 하늘에서 궁의 소식이 내려왔다.남행의 사흘은 세상이 바뀌는 사흘이었다. 눈이 무릎에서 발목으로, 발목에서 길가의 그늘로 물러났다. 언 강들이 낮이면 우는 소리를 냈다. 겨우내 흰 것만 보던 눈에 검은 흙과 마른 풀빛이 들어오는 것이, 운설은 낯설고 어지러웠다. 북으로 도망치던 겨울에는 세상이 얼어붙는 속도로 그녀의 처지가 얼어붙었는데, 남으로 내려가는 지금은 녹는 세상이 마냥 반갑지가 않았다. 덮여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계절이 오고 있었고, 드러나서 좋을 것이 그녀의 길 위에는 많지 않았다.야영지 위를 두 바퀴 돌고 사백의 팔뚝에 내려앉은 전서구는 한 마리였다. 떠날 때 흑요가 한 쌍을 올리겠다 했으니, 한 마리는 오는 길 어딘가에서 매나 화살에 졌다는 뜻이었다. 살아 온 놈도 성하지 못했다. 꽁지깃이 반 넘게 빠지고, 다리에 감긴 서신통은 물에 한 번 잠겼다 마른 자국이 있었다.불가에서 통이 열렸다. 젖었다 마른 종이는 부서질 듯 얇아져 있었고, 먹은 반나마 번져 있었다. 사백이 등불을 바짝 대고 한 자씩 건져 읽었다."마르간의 물목……이다. 창고 대조를 마쳤다고." 사백의 손가락이 번진 자국을 짚어 내려갔다. "화뢰에 든 것들 — 유황 노끈, 부싯깃, 밀랍 종이. 셋 다 궁의 창고 물목과…… 결이 같다. 두 달 전 겨울 물목에서 유황 노끈 두 발과 부싯깃 한 근이 빈다. 장부에는 축난 것으로 적혔으나, 마르간은 제 장부에 축이 없다고."불가가 조용해졌다. 설한협의 눈사태가 서른 기의 머리 위로 되돌아와 앉았다. 눈시렁을 내려앉힌 화뢰가, 맹의 것도 낭인의 것도 아니라 — 궁의 창고에서 나갔다는 말이었다."창고 열쇠는." 혈비가 물었다.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넷이 쥡니다." 사백이 종이의 마지막 줄을 짚었다. "마르간이 적기를 — 흑요 님, 마르간 본인, 타간, 그리고……"손가락이 멎었다. 넷째 이름 위로 물자국이 지나가 있었다. 먹이 번져 획들이 서로 스며든 자리는, 두 자인지 석 자인지조차 가려지지 않았다."그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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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봄비

남행 닷새째, 겨울이 항복했다.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눈 대신 비가 왔다. 겨우내 눈만 맞던 어깨에 빗방울이 듣는 감촉은 낯설고, 낯선 만큼 확실했다. 계절이 넘어간 것이다. 길은 진창이 되었고, 행렬의 속도는 반으로 줄었고, 말들은 발목까지 빠지는 흙길에 예민해졌다.비는 운설의 안에서도 무언가를 건드렸다. 말 위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강물 소리에 귀를 대었다. 물이 들떠 있었다. 넘치려는 들뜸과 달랐다. 겨우내 얼었던 세상의 물들이 일제히 깨어나는 계절에, 몸속의 강도 제 계절을 아는 것처럼 수런거렸다. 해빙. 그 말을 그녀는 혀에 올려 보았다. 얼음이 갈라지는 철. 덮인 것들이 드러나는 철.그리고 감시가 붙었다.북관을 나선 이튿날부터였다. 동쪽 능선에 둘, 서쪽 구릉에 둘. 맹의 경기(輕騎)가 하루 종일 같은 간격으로 따라왔다. 다가오지도 물러나지도 않는, 낯익은 간격이었다. 잡으려는 그물의 간격과 달랐다. 배웅하는 그물이었다. 간수문의 서신이 말한 '험하게 오실 것 없지'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신경 쓰지 마라." 사백이 말했다. "우리가 무한으로 가는 것을 저들이 확인하고, 저들이 확인하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고. 피차 셈이 끝난 동행이다."셈이 끝난 동행은 그러나 목덜미를 무겁게 했다. 진창과 비와 감시에 눌린 행렬의 어깨가 닷새 만에 눈에 띄게 처졌다.저녁 야영지에서, 선우현이 운설을 진창 마당으로 불러냈다."배울 것이 있소.""검입니까.""넘어지는 법이오."운설은 비 듣는 하늘을 한 번 보고 그를 보았다. 그는 진지했다."무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오. 내가 곁에 있을 수 있을지도. 검을 가르치기엔 날이 모자라고, 검은 그대에게 어울리지도 않소. 허나 넘어지는 법은 하루면 배우오." 그는 진창 위에 헌 멍석을 폈다. "칼 든 자들 틈에서 사람이 다치는 것은 벨 때보다 넘어질 때가 많소. 밀려서, 밟혀서, 제 몸에 제가 걸려서. 잘 넘어지는 자는 잘 일어나오."수업은 진창 한가운데서, 우스운 모양으로 시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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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빈 역참

비는 사흘을 왔다.진창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관도를 버리고, 사백은 산자락을 끼고 도는 옛 역로를 택했다. 감시가 사라진 뒤로 사백은 큰길을 믿지 않았다. 큰길이 열려 있다는 것은 큰길 어딘가에 덫이 놓였다는 뜻이라고, 스무 해 사냥꾼의 눈은 그렇게 읽었다.닷새 동안 서른 기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번진 넷째 이름이 야영지마다 따라왔다.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침묵이 오히려 이름을 키웠다. 불침번을 서로 바꿔 주던 손들이 이제 제 몫만 지켰고, 겸상하던 이들이 등을 나눠 앉았다. 혈비는 그 균열을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억지로 봉하면 곪는다는 것을, 사람 다루기도 상처 다루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낯이었다.운설은 그 사이에서 이상한 자리에 놓였다. 붉은 달의 핏줄이면서, 중원에서 온 자였다. 선우가의 정인을 곁에 둔 자였다. 그녀를 향한 눈에도 두 겹이 있었다 — 마님의 아우님을 보는 눈과, 못 미더운 것을 보는 눈. 진눈을 고치고 노파의 허리를 편 손이 그 두 겹을 반쯤 지워 주었으나, 반쯤은 남았다.닷새째 저녁, 비에 젖은 행렬 앞에 역참 하나가 나타났다.버려진 역참이었다. 지붕은 성했으나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고, 마구간은 비어 있었다. 관에서 역을 폐한 지 여러 해 된 자리였다. 그러나 비를 피할 지붕이 있고, 마른 장작이 처마 밑에 쌓여 있었다. 서른 명이 몸을 말리기에 이만한 데가 없었다.너무 이만했다."들지 마십시오." 운설이 말했다.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서른 개의 눈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 자신도 왜 그 말을 했는지 반 박자 늦게 알았다."장작입니다." 그녀가 처마 밑을 가리켰다. "폐한 지 여러 해 된 역참에, 장작만 마른 것으로 새로 쌓여 있습니다. 비가 사흘을 왔는데 젖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최근에, 우리가 이 길로 들 것을 알고 쌓아 둔 겁니다."운설이 처음 그 말을 뱉었을 때, 몇몇의 눈에 스친 것은 경계였다. 중원에서 온 계집이 하필 이 역참에 들지 말라 한다 — 그 자체가 수상하다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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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진창

싸움은 짧았고, 진창이 반을 이겼다.어둠에서 일어선 자들은 스물 남짓이었다. 관병도 무림맹의 흰 무복도 아니었다. 낯을 검게 칠하고 표식 없는 가죽옷을 입은 자들 — 이름도 소속도 지워 낸 손들이었다. 사백이 낮게 뱉었다. "청부다." 값을 받고 사람을 지우는 자들. 붙잡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그래서 부린 자가 가장 안전한 칼.빗속의 싸움에서는 잘 넘어지는 자가 이겼다.진창에 익숙한 것은 닷새를 이 길로 온 서른 기 쪽이었다. 낯 검은 자들은 마른 땅에서 익힌 걸음으로 왔다가 진창에 발이 잡혔다. 사백의 화살이 어둠 속에서 정확히 시위 소리를 좇았고, 기수들은 미끄러지는 적을 등지지 않게 반원을 유지했다. 선우현은 — 검을 받지 못한 채였으나 — 바토가 벼려 준 짧은 칼 하나로 제 몫의 어둠을 지켰다. 뽑기 전에 끝난다던 그 검법이, 짧은 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빗속이라 피가 보이지 않았다. 냄새로 왔다. 쇠 냄새가 빗물에 씻겨 옅어졌다가,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훅 끼쳤다. 의녀의 코는 그 냄새로 마당의 부상자 수를 셌다. 아군 셋, 적은 그보다 많았다. 죽은 자가 있는지는 냄새가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운설은 싸우지 않았다.강은 뒤척였으나, 그녀는 물을 부수는 길로 풀지 않았다. 대신 넘어진 자들 곁으로 갔다. 아군의 것이든 적의 것이든, 진창에 쓰러져 피 흘리는 몸으로. 이것이 언니가 말한 두 길 중 그녀가 고른 길이었다. 세상이 부수는 길만 가르쳐도, 그녀는 고치는 길을 걷기로 했다.싸움이 잦아든 자리에, 낯 검은 자 하나가 옆구리를 붙들고 진창에 주저앉아 있었다. 젊었다. 칼을 놓친 손이 상처를 누르는데, 누르는 법을 몰라 피가 손가락 사이로 샜다. 운설은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손 떼세요. 그렇게 누르면 더 샙니다.""……날 살려서 뭐 하게." 젊은 청부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당신들을 태워 죽이러 왔어.""압니다." 운설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상처를 살폈다. 깊었으나 창자는 상하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 상처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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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이야기판

비가 그치고, 세상이 처음으로 볕에 말랐다.무한까지 이레 길을 앞두고, 행렬은 큰 장이 서는 고을을 지나게 되었다. 서른 기가 통째로 장을 지날 수는 없었다. 사백이 다섯씩 나누어 앞뒤로 흩어졌고, 운설과 선우현은 사백과 함께 늙은 약초 행상 셋으로 꾸며 장에 들었다. 정보를 줍기 위해서였다. 무한이 가까울수록 대회 소식이 짙어질 것이었다.장은 봄을 만난 사람들로 붐볐다. 겨우내 문을 닫았던 좌판들이 다 나와, 마른 나물과 첫 봄나물, 언 강에서 갓 잡은 물고기를 벌여 놓았다. 아이들이 진창을 튀기며 뛰고, 엿장수 가위 소리가 났다. 운설은 그 흔한 소란이 낯설고 사무쳤다. 열여덟 해를 이런 장터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데를 얼굴을 반쯤 숙이고 지나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건 밑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성한 웃음을 훔쳐보았다.장터 한복판, 국밥집 앞에 사람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이야기꾼이었다. 멍석 위에 앉아 부채로 장단을 치며, 요즘 강호에서 제일 뜨거운 이야기를 팔고 있었다. 운설은 그 목소리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았다. 사람 틈으로 다가가 보고, 걸음이 멎었다.왕철이었다. 겨울 산에서 갈비가 부러졌던 사냥꾼 삼 형제의 맏이. 그때 그녀가 감아 준 가슴으로, 이제 사냥 대신 이야기를 지고 사는 모양이었다."— 하여! 삭월의 요녀가 맨손을 들자," 왕철이 부채를 활짝 폈다. "날아오던 화살 열 대가 허공에 딱 멈추었다 이 말입니다. 그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하니 화살들이 도로 돌아가 쏜 놈들 이마에 콱콱!"구경꾼들이 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운설은 제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 것이 이토록 다행일 수 없었다. 화살 한 대를 손으로 받은 것이, 이야기 속에서는 열 대가 되어 되쏘아지고 있었다."그 요녀 얼굴은 봤답디까?" 누가 물었다."봤고말고! 눈에서 시퍼런 불이 나온답니다. 키는 장정 둘 키에, 이빨이 늑대 이빨이라!"선우현이 그녀 곁에서 아주 낮게 말했다. "장정 둘 키라는군.""…….늑대 이빨이랍니다." 운설이 받았다.두 사람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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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미끼

세작을 찾는 법을, 사백은 사냥으로 알았다.무한이 가까워질수록 행렬의 침묵은 두꺼워졌다. 번진 넷째 이름이 야영마다 따라왔고, 이제는 청부의 습격까지 겪은 뒤였다. 서른 기가 서로의 등을 반쯤 의심하는 무리로는 무림맹의 심장에 들 수 없었다. 혈비도 그것을 알았다. 무한에 들기 전에 안의 금을 하나는 지워야 했다. 지우는 유일한 길이 금을 도려내는 것이라면, 도려낼 자리부터 찾아야 했다."덫으로 짐승을 못 잡을 때는," 그날 밤 사백이 혈비에게 아뢰었다. "덫이 있는 자리를 짐승이 아는 겁니다. 그럼 덫을 옮기는 게 아니라, 짐승만 아는 미끼를 놓습니다. 그 미끼에 손대는 놈이 안다는 증겁니다."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놓겠느냐.""거짓 길입니다." 사백이 말했다. "내일 갈림길에서 저는 서른 기를 둘로 나눕니다. 마님과 큰 무리는 관도로, 저와 다섯은 샛길로 — 대회장 뒷문을 미리 살핀다는 명목으로. 한데 이 나눔을 오늘 밤 딱 넷에게만 따로 일러 둡니다. 넷째 열쇠에 손댈 만한 자리에 있던 넷에게, 각기 다른 거짓을 하나씩.""각기 다른 거짓.""우르에게는 샛길이 동쪽이라, 케테에게는 서쪽이라, 진눈의 대타로 온 새 기수에게는 우리가 폐막 하루 전에 든다고, 노새에게는 하루 뒤에 든다고. 넷 중 하나가 새는 자라면, 내일 우리를 치는 손이 그자가 들은 거짓대로 움직입니다. 어느 거짓이 밖으로 나갔는지 보면 — 누구 입에서 나갔는지 알지요."운설은 정자 그늘에서 그 문답을 들으며 마음이 무거웠다. 넷 중 셋은 낯이 있었다. 허풍쟁이 우르, 겁 많은 케테, 양쪽 말을 다 하는 노새. 그리고 새 기수 하나 — 진눈이 몸이 성치 못해 오지 못하자 흑요가 급히 붙여 보낸 자였다. 이름은 갈. 과묵하고, 궁에서도 낯이 익지 않던 자.운설은 갈을 몇 번 눈여겨보았다. 과묵한 것은 죄가 아니었다. 낯이 안 익은 것도. 그는 말수가 적은 대신 손이 부지런했다. 남의 말에 편자를 갈아 주고, 젖은 장작을 골라내고, 불침번을 자청했다. 세작이라기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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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잠꼬대

우르 곁에서 잔 자를 가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야영의 잠자리는 늘 같았다. 불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정해진 순서로. 우르의 왼쪽은 케테, 오른쪽은 늙은 기수 하나였다. 늙은 기수는 귀가 어두웠다. 잠꼬대를 들었을 리 없었다.케테였다."케테." 사백이 불렀다.겁 많은 기수는 부름에 답하지 못했다. 이름이 불린 순간, 그는 이미 답하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낯,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발, 그리고 품으로 가는 손 — 늘 액막이 부적을 쥐던 그 손이, 오늘은 부적 아닌 무언가를 찾는 듯 허둥댔다.사백의 화살이 먼저였다. 케테의 발 앞 흙에 살이 박혔다."움직이지 마라." 사백이 말했다. "너였구나."케테가 무릎을 꺾었다. 꺾은 것이 아니라, 다리가 그를 버린 것이었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겁 많은 자의 울음은 셈이 없었다. 자백이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살려……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케테는 진창에 이마를 박았다. "제 어미가 무한에 잡혀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약초 캐러 나갔다가…… 그자들이 데려갔습니다. 달마다 서찰이 옵니다. 어미의 손톱이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다음엔 손가락이라고."정자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노를 품고 온 눈들이 갈 곳을 잃었다. 배신자를 잡으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잡고 보니 그것은 또 하나의 인질이었다.겁 많은 자가 왜 부적에 매달렸는지, 왜 남들이 다 자는 밤에 홀로 초소를 자청했는지, 왜 눈사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낯이 하얘졌는지 —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케테의 울음 앞에서 한 그림으로 모였다. 이 사람은 세작 노릇을 즐긴 적이 없었다. 매 순간 그 노릇에 잡아먹히며 살았다. 부적은 남을 저주하려 쥔 것이 아니라, 제가 저지른 일이 들킬까 봐, 그리고 제 어미가 죽을까 봐 쥔 것이었다."무엇을 시켰느냐." 혈비가 물었다. 목소리에서 온도를 애써 지운 것이 도리어 티가 났다."길입니다. 우리가 어느 길로 언제 드는지. 야영지가 어디인지. 전서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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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무한

이레째 저녁, 지평선에 무한이 떠올랐다.강 셋이 만나는 자리에 선 큰 성이었다. 겨울 궁이 산을 파고든 굴이라면, 무한은 물 위에 세운 도시였다. 강마다 배가 빼곡했고, 성벽은 노을을 받아 붉었고, 성문마다 대회를 알리는 깃발이 강바람에 나부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문장이 저마다의 색으로 성벽을 수놓았다. 무림맹 총단의 도시가, 십팔 년 만에 다시 영웅첩 대회를 여는 밤이었다.운설은 언덕에서 그 불빛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저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었다. 옥의 어둠 속에서 밤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저 어딘가에 공훈록의 원본이 있었다. 열아홉 금의 답이 적힌. 저 어딘가에 간수문이 있었다. 문을 열어 두고 폐막을 기다리는. 그리고 저 도시 어딘가에, 케테의 어미와 — 얼굴 없는 손이 있었다.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들이 모두 저 불빛 아래 모여 있었다. 그 한복판으로, 서른 기가 내일 든다.입성 채비는 밤새 이루어졌다. 서른 기를 통째로 성문에 들일 수는 없었다. 사백이 셋씩 열 무리로 쪼갰다. 어떤 무리는 약초 행상으로, 어떤 무리는 대회 구경 온 북방 장사치로, 어떤 무리는 순례객으로 꾸몄다. 성안에서 다시 모일 자리와 신호를 정하고, 만일 하나가 잡히면 나머지는 모른 척 흩어지기로 했다. 케테는 사백이 곁에 붙여 두었다. 미끼로 되쓸 손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우현만은 위장이 소용없었다. 저 도시에서 검신의 얼굴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하여 그는 가장 대담한 길을 골랐다.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정문으로, 제 발로 든다. 반역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테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때로 가장 안전하다고, 그는 말했다."두렵나." 곁에 선 혈비가 물었다."두렵습니다." 운설은 숨기지 않았다. "한데 이상합니다. 도망칠 때보다 덜 두렵습니다.""찾아가는 자와 쫓기는 자의 차이지." 혈비가 불빛을 보며 말했다. "쫓길 때는 세상 전부가 등 뒤에 있다. 찾아갈 때는 세상 전부가 눈앞에 있고. 눈앞의 것은 셈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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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물의 도시

무한은 물로 지은 미로였다.성 안을 강 셋이 갈라 놓아, 뭍길보다 물길이 많았다. 사람도 짐도 배로 옮겼고, 골목보다 수로가 촘촘했다. 서른 기가 열 무리로 나뉘어 성문을 든 뒤, 다시 모인 곳은 그 수로의 끝, 낡은 물 창고 이 층이었다. 노새가 잡아 둔 은신처였다."제가 여기서 삼 년을 종노릇했습니다." 노새가 말했다. 중원 출신 포로였다가 붉은 달에 눌러앉은 자. 무한 물길을 손금처럼 아는 것은 그 삼 년의 값이었다. "이 창고 주인은 눈이 멀었고 귀도 어둡습니다. 세는 제가 대신 냅니다. 아무도 안 옵니다."물 창고는 과연 죽은 자리였다. 아래층엔 곰팡이 슨 소금 가마니가 쌓였고, 이 층엔 사람 서른이 겨우 몸을 붙일 마룻바닥과, 수로로 난 작은 창 하나. 그 창으로 무한의 불빛과 물소리가 밤새 들어왔다.성문을 드는 일은 뜻밖에 쉬웠다. 대회를 앞둔 무한은 강호의 온갖 얼굴로 붐볐다. 검을 멘 무사, 약을 파는 행상, 구경 온 시골 사람, 점을 치는 도사. 서른 기가 열로 쪼개져 그 물결에 섞이자, 낯 검은 청부도 흰 무복도 그들을 가려내지 못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 도리어 숨기 좋다는 것을, 겨우내 텅 빈 눈길을 도망치던 운설은 성문 안에서 새삼 깨달았다. 붐빔이 이렇게 고마운 적이 없었다.선우현만은 다른 길로 들었다. 얼굴을 드러내고 정문으로. 오후에 노새가 물어 온 소식으로는, 검신이 제 발로 무한에 들었다는 말이 벌써 저잣거리에 파다하다 했다. 잡으려는 손도, 반기려는 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채, 도시 전체가 그 대담함을 지켜보는 중이라고. 그가 노린 것이 그것이었다. 눈에 너무 잘 띄어서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자리.밤이 깊어 무리들이 잠든 뒤, 운설은 그 창가에 앉아 물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강물이 검게 흐르고, 그 위로 대회를 알리는 등불 실은 배들이 오갔다. 아버지가 저 도시 어느 옥에 있었다. 물의 도시의 옥은 어디에 있을까. 물 위일까, 물 아래일까. 밤마다 딸의 이름을 부른다는 목소리가, 저 물소리 어딘가에 섞여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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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개막

대회는 강 가운데 세운 물 무대에서 열렸다.무한의 세 강이 만나는 넓은 물목에, 배 수백 척을 잇대어 만든 거대한 부교(浮橋)가 떴다. 부교 한복판에 높은 단이 서고, 그 둘레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리가 색색의 차일 아래 벌여졌다. 강안에는 구경 온 무리가 물을 이루었고, 물 위에는 구경 배가 또 물을 이루었다. 십팔 년 만의 영웅첩 대회를 보러, 온 강호가 물의 도시로 모여든 것이다.운설은 강안의 인파 속에 섞여 그 광경을 보았다. 두건을 눌러쓰고, 노새와 우르를 양옆에 두고. 부교 위의 화려함과 강안의 소란 사이에서, 그녀 한 사람만이 저 물 무대에서 무엇이 벌어질지 알고 온 사람 같았다.부교 아래로 물살이 세게 흘렀다. 배 수백 척을 밧줄로 이어 붙였는데도, 세 강이 만나는 물목의 힘은 그 거대한 뜬다리를 이따금 낮게 출렁이게 했다. 화려한 차일도, 색색의 문장도, 그 아래 앉은 강호의 거두들도, 다 물 위에 떠 있었다. 발밑이 물이라는 것을 잊은 채 위엄을 부리는 사람들을, 운설은 강안에서 올려다보았다. 물을 다스리는 강 하나가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저 위의 누구도 모르는 채로.북이 울렸다. 세 강이 다 듣도록 큰 북이었다.단 위로 노인이 올랐다. 지팡이 없이, 꼿꼿하게. 멀어서 낯은 보이지 않았으나, 운설은 그 걸음을 알았다. 성읍의 마당에서 아버지를 겨누던 손가락의 주인. 얼음강 나루에서 쉰을 이끌고 왔다 화살 한 대에 물러가던 늙은 몸. 집법당주 간수문이었다."강호의 벗들!" 간수문의 목소리가 물 위로 퍼졌다. 늙었으나 멀리 갔다. "십팔 년 전, 우리는 이 자리에서 북방의 재앙을 함께 끊었소. 오늘, 그 재앙의 마지막 불씨가 되살아나 다시 이 자리를 빌리게 되었구려."강안이 술렁였다. 재앙, 불씨 — 소문으로만 듣던 말들이 집법당주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가 달랐다."닷새 뒤 폐막일, 우리는 세 가지를 함께 할 것이오. 하나, 십팔 년 전 그 밤의 공훈록을 다시 낭독하여 영웅들의 이름을 기린다. 둘, 재앙의 씨를 강호 공적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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