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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그리움, 살의, 증오

카르노스의 바람은 더욱 날카로웠다. 제국의 황실이 온실 속의 장미처럼 화려한 연회에 취해 있을 때, 카르노스의 왕세손 카시안은 살점이 찢겨 나가는 듯한 혹한 속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그의 탄탄한 등 근육 위로 길게 늘어진 상처들은 제국에서 추방당할 때 새겨진 낙인이자, 그가 살아남아 카르노스의 왕좌를 찬탈하며 얻은 훈장이었다.챙! 챙!카시안의 검이 훈련용 철퇴를 단숨에 토막 냈다. 흩날리는 불꽃 사이로 보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예전의 유순했던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굶주린 늑대를 닮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깊은 복수심의 심연이었다.“전하,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벌써 사흘째 쉬지 않고 연무장에 계시지 않습니까.”카르노스의 충직한 기사 옌스가 망토를 들고 다가왔다. 카시안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검을 꽂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은 북방의 냉기와 만나 몽환적인 안개를 만들어냈다.“쉬면… 그 목소리가 들려, 옌스.”카시안이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말을 내뱉었다.그의 손에는 작고 해진 손수건 한 장이 쥐여 있었다. 엘라엔이 주었던 유일한 온기….이제는 그녀의 향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카시안은 매일 밤 그 천 조각을 쥐며 엘라엔을 그리워했다.그녀의 곁에는 르세인이 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광산과 맞바꾼 그의 품에서 엘라엔은 제국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엘라엔…….”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 끝이 저릿하게 타올랐다. 이 통각은 그리움과 동시에 그녀를 차지한 르세인을 향한 살의였고, 자신을 버린 제국을 향한 증오였다.카시안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르세인을 선택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야망 때문임을.그렇기에 그는 더욱 강해져야 했다. 르세인이 깔아놓은 판을 통째로 뒤엎고, 그녀가 올라탄 그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려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만 했다.“제국 황실의 밀서는 도착했나.”“예, 전하. 황제 헤이브릭이 비밀리에 보낸 서신입니다. 르세인의 폭주를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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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비이성적인, 지극히 본능에 따른

“르세인은 내가 굶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니면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제국의 속령이 되겠노라 구걸하기를 바라거나.”카시안은 화로 위에 놓인 지도를 검 끝으로 그었다.“하지만 그는 모른다. 굶주림은 인간을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장 원초적인 폭력성을 깨우기도 한다는 것을. 내 병사들은 이제 식량이 아니라 제국의 그 비단 같은 살점을 뜯어 먹기 위해 이를 갈고 있지.”카시안은 품 안에서 빛바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묻었다. 엘라엔.그녀는 지금쯤 따뜻한 황궁에서 르세인이 하사한 보석을 두르고 있을까, 아니면… 그 품에서 억지로 신음하고 있을까.그 생각을 할 때마다 카시안의 가슴속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분노가 솟구쳤다.“엘라엔…. 당신이 밟고 있는 그 화려한 대리석 바닥을 피로 적실 때…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제국이 무너질 때… 당신은 결국 누구의 손을 잡게 될까.”카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갑주를 챙겨 입었다.“옌스, 전군에 명하라. 내일 새벽 철혈의 요새를 우회하여 황궁의 지하 수로로 연결되는 길을 연다. 황제가 보낸 밀서는 우리가 국경을 넘을 면죄부가 될 것이다.”카시안은 황제 헤이브릭이 보낸 밀서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제 아들을 막기 위해 버린 자식을 부르는 비겁한 아비의 손짓.카시안은 그 밀서를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황제 폐하, 기대하십시오. 당신이 부른 이 유령이 당신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얼마나 오래 이를 갈았는지 당신은 모르겠죠.”카르노스의 군대는 고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굶주림으로 인해 육체는 쇠약해졌을지 모르나, 그들의 정신력은 오직 약탈과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날카롭게 갈아져 있었다.*** 엘레니르 제국, 에르디엔 황궁의 지하 수로는 제국의 화려함 아래 감춰진 거대하고 습기 찬 무덤이었다. 카시안은 이끼 낀 석조 벽을 타고 흐르는 오수를 소리 없이 지나쳤다.그의 검은 사냥복은 어둠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었고, 굶주림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가벼웠다.카시안의 숨소리는 지하 적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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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카… 카시, 카시안. 내 말을 들어….”“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지. 내 손으로 당신의 숨통을 끊어낼 날을 말이야.”냉기가 가득 서린 얼굴이 뭔가를 곱씹는 듯, 말없이 골몰하고 있는 그가 치켜든 칼날이 촛불을 받아 반짝이며 빛을 냈다.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웃음 짓는 카시안의 표정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당신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아. 죽어서 내 어머니를 뵙거든 꼭 사죄하길 바랍니다.”카시안의 검이 황제의 심장을 가차 없이 꿰뚫었다. 푸욱!“…! 카, 카시…, 하아…!”황제의 몸이 경련했고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와 비단 이불을 적셨다. 황제는 카시안을 응시하며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끝내 감지 못한 눈동자에는 절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카시안은 황제의 시신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 끝에 어린 붉은 피가 촛불 아래에서 기묘하게 빛났다. 그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복수를 완성한 것이다.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르세인이었다.그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듯 검을 든 상태였다. 르세인은 헤이브릭과 카시안을 번갈아 보았다.카시안은 르세인을 향해 검을 겨눴다. 다음은 그의 차례였다.하지만 르세인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헤이브릭의 차게 식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나 또한 황제를 죽이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었지. 아니, 반역을 꾀한 황제라는 칭호를 원하지 않았다는 게 맞을지도. 네놈이 내 고민을 해결해 주다니.”르세인은 검을 내리고 카시안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적의 대신 기이한 동맹의 빛이 서려 있었다.“원하는 걸 말해봐. 카르노스의 온전한 독립 보장? 아, 아. 당장 곡식부터 풀어줘야 하나.”르세인은 이 상황이 진정 우스워 죽겠다는 듯 큰 웃음을 내며 웃기 시작했다.침소 안에 울려 퍼지는 르세인의 웃음소리는 죽은 헤이브릭의 고요함을 비웃듯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카시안은 검을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눈앞의 남자는 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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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의구심과 잔혹함

카시안은 턱을 악다물었다. 그는 피 묻은 검을 거칠게 거두었다.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굴욕이었다. 원수의 자비를 입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이 순간이 그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왔다.“르세인, 잊지 마라. 네가 내게 준 이 치욕이 언젠가 네 제국을 무너뜨리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될 것이니.”르세인은 대답도 없이 눈썹을 들썩이며 우아하게 길을 터주었다. 카시안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르세인은 그가 사라진 빈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침대 위에 널브러진 헤이브릭을 향해 마지막 경멸을 담아 입을 열었다.“잘 가십시오, 폐하. 당신이 망쳐 놓은 제국은 이제 내가 가장 아름답고 잔혹하게 고쳐놓겠습니다.”잠시 뒤, 복도 끝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고요를 깼다.르세인은 바닥에 떨어진 카르노스의 문양이 새겨진 검을 발로 걷어 차, 침대 밑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그리고 천천히 소매에 묻은 헤이브릭의 피를 손가락으로 훑었다.“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금위대장과 함께 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이 마주한 풍경은 지옥의 한 조각이었다. 침대 위에는 제국의 태양이었던 헤이브릭이 숨을 거둔 채 널브러졌고, 그 곁에는 황태자 르세인이 피 묻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늦었군.”르세인의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떨리고 있었다. 슬픔이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억누르는 떨림에 가까웠다.“침입자가… 폐하를 시해했다. 누군가 감히 제국의 태양을 건드렸어.”르세인은 고개를 돌려 바델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이제 막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쥔 자의 서늘한 환희가 서려 있었다.바델은 그 눈빛에 압도되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그때,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엘라엔이 나타났다. 그녀는 르세인의 옷에 묻은 선혈과 침대 위의 처참한 광경을 번갈아 보았다.엘라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르세인이 어젯밤부터 황제의 약재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직접적인 죽음의 현장은 그녀의 계산보다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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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대연회장의 홀은 검은 의복을 입은 귀족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슬픔보다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기대감과 공포감이 뒤엉켜 있었다.르세인은 황제의 옥좌 앞에 서서, 금관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선황께서는 침입한 암살자의 칼날에 서거하셨다. 그 암살자의 배후를 쫓고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오늘부로 황제로서 제국의 국정을 운영함을 선포하노라.”르세인의 외침이 홀을 울렸다. 그는 주저 없이 옥좌에 앉았다. 헤이브릭이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위협적인 존재감이 장내를 압도했다.르세인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권력의 무게는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숨통을 조였다.대연회장 높은 천장 아래로 르세인의 서늘한 시선이 귀족들을 훑고 지나갔다. 금관의 날카로운 끝이 빛을 받아 번뜩일 때마다 그 아래 선 귀족들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잠시 뒤 연회장 뒤편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만으로 장내를 압도하는 여인, 이제는 태후가 된 로잘린이 나타났다.그녀는 죽은 남편에 대해 애도 따위는 이미 수의와 함께 묻어버린 듯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단상 위를 향해 걸어왔다.로잘린은 옥좌 위에 군림한 아들과 그 옆에 황후가 된 엘라엔을 바라보았다.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폐하, 그리고 황후. 제국의 새로운 태양과 달을 보는군요.”로잘린은 우아하게 웃었고 르세인과 엘라엔은 무릎을 굽히며 그녀를 맞이했다.“폐하, 감사합니다. 장례는 조용히 치러질 것입니다. 제국은 앞을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하니까요.”“황제 뜻대로 하십시오. 이제 이 제국에 황제를 가로막을 법도는 존재하지 않으니.”로잘린의 시선이 엘라엔에게 옮겨갔다. 그녀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로잘린은 엘라엔이 르세인의 불지옥 안에서 어떻게 타지 않고 살아남아 제국의 안주인이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았다.“황후, 사파이어 관은 지독하게 무거울 겁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황제는 그대를 지키는 대신 집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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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지독한 동행

같은 시각, 제국 국경 근처의 은신처. 카시안은 제국에서 보낸 첫 번째 곡물 수송대를 마주했다. 자루마다 선명하게 찍힌 엘레니르 제국의 황금 사자 문양은 카시안의 눈에 붉은 피처럼 보였다.“전하, 황태자… 아니, 제국 황제께서 보낸 전갈입니다. 폐하의 시해는 침입자의 소행으로 결론지어졌으며 전하께서는 국경 수비의 공로를 인정받아 카르노스의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으셨습니다.”옌스의 보고에 카시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르세인은 자신을 살려준 것도 모자라 왕좌까지 튼튼하게 닦아주며 자신을 제국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무슨 속셈인 거지, 르세인. 나를 죽이지 않고 가장 화려한 목줄을 채우겠다는 뜻인가.’카시안은 곡물 자루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천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르세인은 영리했다. 그를 죽여 복수의 상징으로 만드는 대신, 살려서 제국의 은혜를 입은 꼭두각시로 전략시켰다.“받아라. 일단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지. 하지만 르세인에게 전해. 이 곡식은 빌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제국 전체를 삼키기 위한 밑천이 될 것이라고.”카시안은 르세인이 보낸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마시기로 했다. 굶주림을 해결한 늑대는 더 무서워지는 법이니까.제국의 황궁과 북방의 설원.두 곳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품은 두 왕의 기묘한 공조가 시작되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을 품에 안은 채 북쪽을 바라보며 웃었고, 카시안은 르세인이 보낸 식량을 씹으며 황궁의 심장부를 다시 겨냥할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그리고 엘라엔은 그 거대한 폭풍의 눈 한가운데 서서, 르세인이 설계한 이 뒤틀린 평화가 언제쯤 피의 파멸로 돌아올지를 계산했다.*** 르세인의 품에서 벗어난 엘라엔은 곧바로 남부 행정관들을 소집했다.르세인이 던져준 과제는 명확했다. 카르노스를 풍족하게 만들되, 그 풍요의 뿌리가 제국에 있음을 각인시키는 것.엘라엔은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장부 위에 황후의 인장을 찍었다.금사의 인장이 붉은 밀랍을 머금고 종이 위에 박힐 때마다 북방으로 향하는 식량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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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필요한 것은 결과뿐

대관식의 마지막 절차인 성소 참배를 앞둔 새벽. 황궁의 도서관 깊은 곳에 르세인은 홀로 서 있었다. 화려한 황제의 예복 대신 검은 가운만을 걸친 그는 먼지 쌓인 서가 구석에서 낡은 기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선황 헤이브릭이 철저히 지워버렸던 카르노스의 여인 아리엘에 관한 기록이었다.르세인의 기억 속 아리엘은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도 늘 은은한 향기가 나던 여인이었다. 어린 르세인이 황제의 폭압 아래 괴물이 되어가던 시절, 유일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간의 눈을 보여주었던 이방의 여인.헤이브릭이 그녀를 버리려 했을 때, 독약을 바꿔치기하고 탈출 경로를 열어준 것은 여덟 살의 르세인이었다. 결론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그날 밤, 르세인은 아리엘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인간성을 함께 떠나보냈다. 그 대가로 그는 헤이브릭의 의심을 샀고, 더욱 완벽한 황태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예법을 견뎌내야 했다.그러나 기억 속 아리엘은 이제 오래된 기록처럼 흐릿했다.감정은 오래전에 분해되었고 남은 것은 단 하나.카르노스 왕국과 제국 사이에 존재했던, 제거되지 않은 변수….그 변수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하나의 형태로 남았다.카시안 폰 루카르디아.그가 그토록 쉽게 수로를 통해 잠입할 수 있었던 건 르세인의 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카시안이 받은 밀서는 헤이브릭이 아닌 르세인이 헤이브릭의 필체를 완벽하게 위조해 보낸 유인책이었으니까.“모든 게 내 설계대로 되었어.”르세인은 아리엘이 자신에게 남겼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저는 사실 카르노스 왕족이 보낸 스파이… 왕녀였습니다. 황자께서 베풀어 주신 그 마음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제 아들 카시안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엘 폰 에카르-]르세인은 아리엘의 편지를 다시 상자에 담고, 자신의 개인 인장으로 봉인한 뒤 상자를 서가 깊숙이 밀어 넣었다.그리고 북쪽으로 향하는 수송대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자비가 아니라 경제적 제거였다.‘카시안, 너는 내게 살아있는 증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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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진정한 통제

성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제국의 새로운 아침을 알렸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꽉 쥔 채, 피비린내 나는 과거의 진실을 뒤로하고 화려한 성소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신 앞에서 서약을 맺는 이곳, 성소의 가장 높은 계단 위에 르세인과 엘라엔이 나란히 섰다.“황후, 이곳에서 맺는 맹약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합니다. 신의 눈을 빌려 당신을 내 영혼에 박제하는 의식이죠.”르세인의 경건한 표정이 엘라엔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그는 신관이 건네는 성수를 받아 엘라엔의 손등에 뿌렸다. 차가운 액체가 살갗 위를 타고 흐를 때 엘라엔은 르세인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안도감을 본 것 같았다.르세인은 지금 제국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계한 성역 안에 그녀를 가두고 자물쇠를 채우는 중이었다.*** 같은 시각, 국경을 넘는 카시안의 마차 행렬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르세인이 보낸 곡물 수송대의 마지막 점검이 이루어졌다.카시안은 옌스가 무언가가 들어 있다며 건네준 곡물 자루 하나를 무심히 열었다. 황금 사자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자루 안에는 최상품의 밀이 가득했다.그런데 그 위로….“…이건….”카시안이 꺼내 든 것은 작은 은제 펜던트였다. 오래되어 빛바랜 그것을 확인한 카시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어린 시절, 자신이 빼앗겨 버렸다며 눈물을 흘렸던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었다.제국 황궁의 지하 감옥에서 헤이브릭에게 몰수당했던 바로 그 물건….‘이게… 이게… 왜! 왜, 여기에… 들어있지…!’카시안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르세인은 단순히 식량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고의로 오직 카시안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 표식을 곡물 자루 속에 숨겨 보냈다.르세인의 생각은 명확했다. 적에게 증오만을 심어주면 죽기 살기로 덤비지만, 증오와 부채감을 동시에 심어주면 적은 혼란에 빠졌다.르세인은 카시안이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려 할 때마다 이 펜던트의 무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가장 완벽한 예속은 공포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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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어디까지 설계된 건지

르세인은 고개를 돌려 엘라엔을 보았다.“그렇지 않습니까, 황후? 카르노스의 카시안이 내 발밑에서 검무를 추는 광경을… 당신도 보고 싶지 않습니까.”엘라엔은 르세인의 손길 아래에서 얕게 떨었다. 르세인은 카시안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는 척하며 칼을 갈고 있는 건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잔혹한 초대장…….엘라엔은 르세인의 집요한 시선을 받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폐하의 안배에 오차가 있을 리 없지요. 다만, 짐승은 궁지에 몰리면 주인을 무는 법이니 경계를 늦추지 않길 바랍니다.”“걱정 마십시오, 황후. 내 사냥개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손등에 깊게 입술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감돌았다.*** 같은 시각, 카르노스의 접경지.카시안은 르세인이 보낸 합동 훈련 통보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르세인은 곡물을 보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놓고 제국의 심장부로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젖혔다. 카시안의 품속에는 아리엘의 은제 펜던트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죽일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감히 덤비지 못할 만큼의 전력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건가.’카시안은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지금 지략을 펼칠 수도 없을 만큼 머릿속이 얽히고설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전하, 이건 필시 함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황궁 근처로 진격했다가 포위당하면 끝장입니다.”옌스의 우려 섞인 조언에 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함정이라 해도 가야 한다. 르세인은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어. 내가 그의 발아래 엎드린 개인지, 아니면 제국을 삼킬 늑대인지를. 그리고 무엇보다… 엘라엔이 그곳에 있어.”카시안은 르세인이 깔아놓은 이 위험천만한 판위로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카르노스의 기사들은 르세인이 보낸 식량으로 몸집을 불려, 르세인의 심장을 겨누기 위해 북방의 설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황궁으로 돌아온 르세인은 밤늦게까지 서고를 배회했다. 그리고 그 상자가 제자리에 잘 있는지 확인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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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마주한 진실

엘라엔은 한스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은 눈매 끝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르세인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대단한 오판이었다.엘라엔의 머릿속은 르세인이 남긴 그 방대한 사육의 정보들로 가득 찼다.그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기 위해 스스로 부품이 된 괴물이었다.엘라엔은 이제야 르세인이 왜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한 논리를 강요했는지 이해했다.자신이 자리를 비우거나 쓰러졌을 때, 이 거대한 제국을 대신 통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르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평원을 향해 진격하던 카시안의 대열이 멈춰 섰다. 베르제 대공저에서 치료를 받던 시절, 한스의 얼굴을 알아 본 카시안은 그가 내민 상자를 주저 없이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안의 서신을 확인한 카시안은 말 위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이,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다 뭐냐고!”카시안의 고성이 시린 하늘에 울려 퍼졌다.르세인의 거칠고도 단호한 필체.그 안에는 카시안이 기억하는 모든 고통의 매 순간마다 르세인이 흘렸던 보이지 않는 피의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평생을 버티게 했던 증오의 근간이 흔들렸다. 말도 안 돼….카시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서신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그의 얼굴은 경련을 일으켰다.그의 눈동자 역시 격렬하게 흔들렸다. 배신감과 슬픔,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 그를 덮쳤다. 그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당신은 나를 동생으로 본 적이 있긴 한 겁니까.”카시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살려진 게 아니라, 계산된 채 남겨졌다는 사실이 역겹게 밀려왔다.하지만 어머니인 아리엘의 서신을 보았을 때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자각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에 얼굴을 가려버렸다.손가락 마디 사이로 끝없이 맑은 액체가 흘러나와 손목을 타고 소매를 적셨다.카시안의 울음소리는 고성을 머금고 한껏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르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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