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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계산이 끝나지 않은 변수

마차가 마침내 내성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경, 국왕 폐하께서 즉시 알현을 명하셨습니다.”카시안은 피가 굳어 붙은 손가락을 한 번 펴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돌계단 위로 올라선 그의 몸 상태는 아직 온전치 못했으나 다행히 걷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그리고 그를 마주했다.루드비히 6세. 푸른 눈빛은 세월에 바래 있었으나 깊은 곳에는 음습한 계산이 깔려있는 듯했다.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잃어버렸던 손자를 찾은 애틋함 따위는 없었다. 루드비히 6세는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말, 아리엘의 얼굴이 남아 있군.”카시안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는 카시안을 혈육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잘 써먹을 수 있을지를 계산했다.카시안은 절뚝이며 루드비히 앞에 섰다. 제국에서는 유령이었다가 죄인이었고, 엘라엔에게는 배신자였으며, 르세인에게는 제거되지 못한 오류였던 사내는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불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왕세손.혹은, 왕국이 마지막으로 꺼내 든 검은 카드.대전각의 공기는 서늘했다.카르노스 왕국은 에르디엔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천장은 낮았고, 벽은 거친 검은 돌로 쌓여 있었다. 장식이 거의 없었지만 곳곳에 박힌 철제 고리와 오래된 방패들은 이곳이 오랫동안 전쟁과 기근을 버텨온 나라임을 말해주었다. 왕좌 위의 국왕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가까이 오거라.”카시안은 한 발짝 더 다가갔다.왕좌 아래에 선 순간, 루드비히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세밀히 훑었다. 그리고 낮게 웃기 시작했다.“엘레니르 놈들이 꽤 정성을 들였군.”카시안의 몰골을 보았음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죽지 않고 돌아온 걸 보면… 생각보다 질긴 놈이야.”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한쪽에서는 귀족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르노스의 대신들과 장군들, 그리고 왕족의 피를 주장하는 수많은 친척들은 후계 없는 왕좌를 노리고 온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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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그 어떤 보석보다도 차갑고 단단하게

남부 가신들의 피 묻은 자백과 헌납 서약서가 아르젠트 궁 집무실에 쌓인 지 일주일.황궁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반전되었다. 엘라엔이 단 사흘 만에 남부의 횡령금을 수거하고 그들의 충성을 받아냈다는 소식은 황제 헤이브릭을 흡족하게 했고, 르세인에게는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야 할 가장 강력한 명분을 제공했다.“이제 더 이상의 검증은 무의미하다. 국혼 준비를 최우선으로 진행하라.”황제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에르디엔 황궁은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초겨울의 냉기는 늦가을의 잔재를 지워버리며 찬 바람이 대리석 회랑을 훑었다.황궁의 종소리는 수도 카르네티아 전체를 웅장하게 뒤흔들며 제국의 차기 안주인이 탄생했음을 선포했다.대연회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수선화의 꽃잎들이 흩날렸다. 르세인의 질서에 따라 무질서한 것들은 모두 제거돼야 했으나 오늘만큼은 제국 전역에서 실어 온 수만 송이의 수선화가 회랑을 가득 메워 순결한 향기를 내뿜었다.“오, 황태자비. 드디어 제국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군요.”황후 로잘린은 루미에라 궁의 화려한 별채에서 엘라엔의 마지막 옷매무새를 살폈다. 그녀는 결점 하나 없는 순수한 다이아몬드로 세공된 황태자비의 관을 엘라엔의 머리 위에 직접 씌워주었다.“황태자비. 그대는 황태자가 그토록 갈구하던 완벽한 정답입니다.”황후의 편애는 여전히 노골적이었다. 로잘린은 엘라엔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황후 폐하,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벨모어 백작 부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긴장되어 있었다. 엘라엔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혼례복은 가공된 은사와 다이아몬드로 뒤덮여 빛이 닿을 때마다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을 내뿜었다.비단과 보석의 무게만 해도 상당했다.“베일을 내려요.”황후의 명령에 말리트와 클로이는 떨리는 손으로 순백의 베일을 그녀의 얼굴 위로 덮었다.투명한 천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안갯속에 갇힌 듯 흐릿했다. *** 대연회장의 두터운 문이 열리고 차가운 냉기가 엘라엔의 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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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서늘한 기품

르세인이 잠시 황제 헤이브릭과 군사 지휘관들을 접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엘라엔은 연회장 한쪽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한 남자를 마주했다. 이제는 베르제 대공의 작위를 공식적으로 승계한 외삼촌, 시어드 폰 베르제였다.“엘라엔…! 아니, 이제는 황태자비 전하이시죠.”시어드는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조카에 대한 안쓰러움과 경외감이 교차했다. 엘라엔은 미소를 지으며 시어드의 손을 잡았다.“삼촌. 베르제의 깃발이 오늘처럼 든든해 보인 적이 없네요. 전하께서는 베르제의 충성을 제국의 가장 날카로운 검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이제 외삼촌의 지위는 누구도 넘볼 수 없을 거예요.”“이 모든 것이 황태자비 전하의 지략 덕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르제는 언제나 전하의 든든한 방패임을 잊지 마십시오.”시어드가 속삭인 말은 엘라엔에게 그 어떤 축복보다 달콤했다. 짧은 대화를 마친 엘라엔이 몸을 돌리자, 저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며 기회를 엿보던 두 사람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다.라안느 공작 에드먼과, 그의 곁에서 화려한 치장을 했음에도 초라해 보이는 이사벨라였다.엘라엔은 우아한 보폭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라안느 공작, 공작 부인.”엘라엔의 입술에서 나온 호칭에 에드먼의 안색이 굳었다. 아버지라 불릴 자격조차 박탈당한 것 같은 선언이었다.“엘라엔… 아니, 황태자비 전하. 혼례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라안느 가문은 전하의 영광을 위해 언제든…….”“영광이라…. 공작. 그대가 상인들과 주고받은 그 추악한 장부들이… 내 손안에 있습니다.”“그, 그걸 어떻게…!”엘라엔은 에드먼에게 다가가 그의 옷깃을 정돈해 주는 척하며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이걸 전하께 바치면 당신은 반역죄로 처형되겠죠.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겁니다. 라안느 가문이 무너지는 건 나에게도 손해니까. 대신 조건이 있어요.”“……!”“하르만과 루시안의 교육권을 내게 넘기세요. 그리고 앞으로 라안느 공작가의 모든 재정 지출은 내 인장을 거쳐야 할 겁니다. 당신은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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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금사의 결합

연회의 소음이 멀어지고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는 황궁의 밤은 깊었다. 국혼의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친 엘라엔은 라비엔 궁의 침실에 홀로 남겨졌다.내부는 온통 백색의 실크와 은제 장식들로 가득했다.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조차 르세인의 취향을 닮아 소음이 적었고 공기 중에는 그가 유일하게 허락한, 수선화의 꽃향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하아….”엘라엔은 스스로 베일을 걷어냈다. 예복에 박힌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촛불에 반사되어 그녀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깨를 짓누르던 금사의 무게와 하루 종일 유지해야 했던 가식적인 미소는 그녀가 지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하지만 긴장을 풀 여유는 없었다. 곧 그가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다.달칵.정교하게 맞물린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엘라엔은 등 뒤로 쏟아지는 서늘하고도 묵직한 존재감을 느꼈다. 르세인이었다.그는 연회에서 입었던 무거운 예복을 벗고, 얇은 백색 셔츠 차림으로 다가왔다. 단단한 부츠 굽 소리는 카펫에 묻혔다. 아니, 묻힌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았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뒷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드디어 오차가 사라진 밤이군.”르세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탁했다. 그는 어느새 다가와 엘라엔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장갑을 벗은 그의 손가락은 서늘했으나 피부에 닿는 감촉은 뜨겁게 느껴졌다.“연회장에서 가문의 재정권을 뺏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전하께서 원하신 것은 강한 황태자비 아니었나요.”엘라엔의 대답에 르세인은 낮게 웃으며 그녀의 목에 높다란 코를 묻었다. 엘라엔은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곧 그는 엘라엔의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화려한 핀들을 하나둘 뽑아내기 시작했다. 찰랑이며 쏟아지는 와인빛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비단처럼 감고 흘러내렸다.“강한 황태자비라….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내 논리 안에서 숨 쉬며, 나를 위해서만 발톱을 드러내는 거야.”르세인은 단번에 엘라엔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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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사치스러운 감정

로비에는 레일리와 네르사를 필두로 한 대여섯 명의 정부가 화려한 부채를 흔들며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어제의 국혼이 얼마나 화려했는지에 대해 논하면서도 황태자의 밤은 늘 자신들의 부드러움으로 채워졌다는 등의 천박한 말을 흘리며 엘라엔이 어서 나오길 기다렸다.“소란스럽게 정말…. 제국의 아침은 논리와 정연함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전하께서 가르치지 않았나요?”곧 엘라엔이 계단을 내려오자, 그녀들은 마지못해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영애… 아, 이제 황태자비 전하이시죠. 전하, 국혼 첫날밤은 평안하셨는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워낙 거치신 분이라… 걱정되어 발걸음 했답니다.”레일리가 나른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엘라엔은 상석에 앉지도 않은 채 그녀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한 명, 한 명의 눈을 멀거니 응시했다가 의자로 향했다.“어머, 전하. 간밤에 무척이나 고생하신 모양이네요. 안색이 창백해 보이십니다. 저희가 황태자 전하의 밤 시중을 들 때는 워낙 거친 탓에 늘 약을 달고 살았는데…. 전하께서는 어떠셨나요?”또다시 레일리의 상스러운 도발에 시녀 클로이와 말리트가 안색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엘라엔은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레일리를 빤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질투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이상하네.”네르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범한 여인이라면, 아니 르세인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지금쯤 안색이 변하며 불쾌해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엘라엔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그저 평온했다. “네르사 양. 무엇이?”“황태자 전하와 보낸 밤들을 이야기하는데 전하께서는 질투조차 나지 않으시나 봅니다? 전하를 진심으로 연모하신다면 이럴 수는 없지요.”엘라엔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른하게 웃었다.“질투라니. 전하의 밤이 그토록 소란스럽고 천박했다면 그건 전하의 잘못이 아니라 전하의 곁을 지키던 그대들의 수준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겠죠. 전하께서는 내게 질서를 가르치셨어요. 무질서한 유희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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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공포와 희망

“무질서한 소음이 궁의 공기를 더럽혔기에 정화했다….”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에서 바델의 보고를 듣던 르세인의 펜 끝이 멈췄다. 그는 서류 위로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입가에 묘한 웃음을 내걸었다.정부들이 라비엔 궁에서 쫓겨나며 비명을 질렀다는 보고는 르세인에게 그 어떤 승전보보다 달콤하게 들렸다.“황태자비가 직접 그리 명했단 말이지.”“예, 전하. 망설임 없이 기사들을 움직이셨습니다. 정부들의 천박함이 전하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논리 또한 내세우셨죠.”르세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는 이것을 엘라엔의 질투라고 해석하고 싶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녀의 행동은 안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의 행사였으나 르세인의 뒤틀린 마음은 그걸 자신을 향한 소유욕의 발현이라 믿고 싶어 했다.“기꺼이 내버려둬. 그게 그녀가 내게 마음을 여는 방식이라면.”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그는 오늘 밤도 역시 라비엔 궁에 갈 것이고 바델에게 엘라엔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라 명했다.그것은 카르노스 북부 광산에서 채굴된, 아직 세공되지 않은 거대한 원석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조각할 수 있는, 오직 그녀만의 소유물을.*** 엘라엔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정갈하게 정리한 채 거울 앞을 지켰다.르세인은 늘 그렇듯 예고 없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예상대로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을 연 이는 역시나 르세인이었으나 그의 손에는 평소 보지 못한 검은 가죽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르젠트 궁에서 보던 차가운 이성 대신, 기이한 흥분과 유열로 번득였다.“정부들을 쫓아냈다죠, 황태자비.”“정부들을 그리 대해 기분이 나쁘신 건 아닙니까, 전하.”르세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엘라엔의 의자 뒤에 섰다. 그가 엘라엔의 어깨를 짚자 차가운 촉감이 그녀의 여린 살결에 닿았다.르세인은 거울 속에 비친 엘라엔의 안색을 살피며 그녀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질투였습니까? 아니면 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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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제 발로 덫에

엘라엔은 창고로 향했다. 습한 공기와 냉기가 섞인 창고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 시녀 미나의 앞에 엘라엔이 섰다. 그녀는 품위 있는 몸짓으로 상체를 숙여 미나의 턱을 잡아 올렸다.“레일리 양이 무엇을 찾아오라 하던가요?”“자, 잘못했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그저…… 그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거짓말.”“……!”“미나, 그대의 가족들은 라안느 영지에 살고 있지 않나요? 라안느 공작이 내게 넘긴 그 영지 말이야.”미나의 눈동자가 공포로 확장됐다. 엘라엔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레일리에게 가서 말해. 이상한 건 찾지 못했다고. 네가 이 연극을 완벽하게 수행한다면 네 가족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온을 얻겠지만….”“……!”“실패한다면…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네, 네! 황태자비 전하!”“어리석은 것인지, 아둔한 것인지…. 고작 정부 따위에게 붙다니. 정부와 나를 사이에 두고 누구의 편에 서야 옳은지 정녕 모르는 겁니까.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요. 이 황궁에서 오명을 쓴 채 쫓겨나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잘못했습니다, 전하….”“황궁에서 쫓겨난 자가 귀족 사교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만 가봐요.”미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울먹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라엔은 그녀를 풀어준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창고를 나섰다.엘라엔은 피곤한 얼굴로 궁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거울 너머로 르세인이 선물한 원석이 보였다. 그녀는 이제 그 원석을 조각할 준비가 되었다. 그건 르세인과 함께 제국을 제패할, 황태자비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이 될 것이다.그가 말한 완벽한 후사나 제국의 요람 따위는 허상이었다. 르세인은 자신의 논리를 이어나갈 복제본을 원하는 것이고, 엘라엔은 그 논리를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주춧돌이 되어야만 했다.‘후사라…….’엘라엔은 원석의 중심부에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르세인은 자신에게 복종한다고 믿으며 만족해하겠지만,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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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가장 우아하고 고귀한 포식자

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끼웠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연회장은 시린 정적에 잠겼다.그때, 군중 사이에서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셀레네 후작 부인이 남부의 수석 행정관들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에는 독기와 함께 마지막 도박을 거는 자의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황제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무례를 무릅쓰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셀레네는 황후 로잘린의 서늘한 시선을 무시한 채 황제 헤이브릭의 앞에 엎드렸다.“황태자비 전하께서 남부 행정권을 맡으신 이후, 남부 곡창지대의 민심이 흉흉합니다. 전하께서 무리한 세무 조사를 강행하여 농민들의 식량까지 몰수하고 있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셀레네의 신호에 행정관들이 조작된 보고서를 올렸다.연회장은 금세 술렁였다. 이제 막 권력을 쥔 엘라엔이 폭정을 휘둘렀다는 틀은 그녀의 자질을 단숨에 바닥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르세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으나, 엘라엔이 그의 팔을 가볍게 눌러 만류했다. 엘라엔은 강고한 눈빛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후작 부인. 그 보고서에 적힌 몰수된 식량의 행방도 적혀 있습니까.”“그, 그것은 황태자비 전하의 사금고로 흘러 들어갔다는…!”“이상하군요.”엘라엔은 품 안에서 자신이 직접 인장을 찍은 공식 장부를 꺼내 황제 앞에 펼쳤다.“황제 폐하, 제가 남부에서 거두어들인 것은 농민들의 식량이 아니라, 지난 십 년간 셀레네 부인과 행정관들이 빼돌려 은닉했던 장부 외 비자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곡식들은 지금 제 사금고가 아닌 황실 원정군의 예비 식량 창고로 이송 완료되었습니다. 백작 부인, 확인해 주시겠습니까.”벨모어 백작 부인은 즉각 나서며 황제에게 보고했다.“황제 폐하,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오늘 새벽, 남부에서 올라온 곡식 오만 석이 황실 창고에 입고되었습니다. 이는 셀레네 부인의 저택 지하 창고에서 발견된 누락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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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그럴 수가 없다고

“셀레네가 남부의 비축분을 건드릴 만큼 절박해졌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가문이 회생 불능의 오차 범위 안으로 들어왔음을 뜻하죠. 당신은 오늘 그 확신에 인장을 찍었을 뿐이고.”르세인은 장갑을 낀 손으로 엘라엔의 뺨을 아주 느릿하게 그어내렸다. 가죽의 매끄러운 감촉이 그녀의 차가운 살결에 닿았다.“전하께서는 이미 결과를 알고, 피를 묻히는 과정을 즐겁게 감상하고 계셨군요.”엘라엔은 르세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르세인이 자신에게 준 권력의 실상이 가장 위험한 벼랑 끝의 줄타기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방패로 세울수록, 제국의 모든 적의는 르세인이 아닌 자신을 향하게 될 터였으니.“그것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당신의 손에 묻은 피가 제국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잉크가 되는 과정. 그 비논리적인 헌신이 내게는 가장 완벽한 논리로 읽히거든.”르세인은 자신을 소유하려 들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세상을 부술 수 있는 무기를 쥐여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그건 지독한 신뢰임과 동시에 자신이 그를 배신할 경우 가장 처참하게 무너뜨리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그때, 회랑 끝 열린 창문 너머로 초겨울의 시린 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흔들었다.엘라엔은 본능적으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정원은 르세인의 명령대로 모든 생명력이 제거된 채 백색 자갈만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창백한 자갈밭 위로, 아주 찰나의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가로질러 사라졌다.기사들의 순찰 동선과는 명백히 다른, 짐승처럼 낮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엘라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단순한 침입자의 기운이 아니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지독한 그리움과 동시에 목숨을 앗아갈 듯한 사나운 살기가 뒤섞인 기묘한 감각….엘라엔은 머리를 내저으며 속으로 되뇌었다.그럴 수가 없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황태자비.”르세인의 부름에 엘라엔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르세인은 미간을 좁힌 채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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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달칵.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엘라엔은 본능적으로 나뭇조각을 드레스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들어온 이는 당연히 르세인이었다.그는 조금 전의 예복 차림에서 상의만 벗은 채, 백색 셔츠 깃을 거칠게 풀어헤친 모습이었다.그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 짙은 녹색으로 번뜩이고 있었고, 입가에는 기이한 유열이 서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황태자비, 아직 잠들지 않았군요.”르세인은 성큼 다가와 엘라엔의 허리를 한 팔로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서늘한 냉기가 엘라엔의 살결에 닿아 소름을 돋웠다.“전하, 이 늦은 시각에 어찌…….”“궁금해서 말입니다. 당신의 그 결백한 눈동자가, 내가 던져 놓은 미끼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르세인의 손이 엘라엔의 뺨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드레스 주머니 근처에서 멈췄다.엘라엔의 호흡이 멎었다.르세인은 아주 느릿하게, 마치 사냥감의 목줄을 조이는 포식자처럼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단번에 집어넣었다.그가 꺼낸 것은 조금 전 엘라엔이 숨겼던 그 나뭇조각이었다. 르세인은 그것을 조명 아래 비춰보며 피식 웃었다.“투박한 장미라니. 참으로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카르노스의 왕세손이 이런 쓰레기를 보냈을 리 없는데 말이죠.”“……저, 전하….”“맞습니다, 엘라엔. 이건 내가 직접 명령해 깎은 겁니다.”“……!” “당신이 여전히 그 유령의 잔상을 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랄까.”르세인은 나뭇조각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엘라엔을 침대 머리맡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르세인의 셔츠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가슴 근육이 거칠게 오르내렸다.그는 엘라엔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제압해 머리 위로 고정시키고 그녀의 목을 이로 깨물었다.“…하아!”“당신은 이 조각을 보자마자 숨겼어. 공포였습니까, 아니면 그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었습니까.”르세인의 입술이 그녀의 쇄골을 타고 내려와 가슴팍을 지분거렸다. 그의 손길은 지독히 거칠었고 그 안에 담긴 갈망은 설명할 수 없이 깊었다.그는 엘라엔의 눈동자에 오직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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